100화
하늘의 이마라고도 불리는 히말라야산맥의 봉우리, 에베레스트산.
영하의 기온에서 칼바람이 나부끼는 이곳에도 예외 없이 던전이 생성된다.
주거는커녕 잠시 머무는 것조차 힘든 이 설산은 던전의 등장 이후, 몬스터가 지배하고 있는 땅이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산맥의 주요 접경 국가인 네팔과 티베트는 주기적으로 밀려 내려오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내야 했다.
다행히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마력석 덕분에 국토가 유린당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자국의 무력이 부족해도 마력석을 원하는 기업, 가문, 길드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국토가 유린당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네팔 정부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웨이브 주기가 짧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에베레스트 초입에 A급 던전이 나타났기 때문.
B급만 해도 충분히 벅찬데 A급의 던전 브레이크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재빠르게 타국의 공략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국 두 번의 실패.
이제 브레이크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기간.
여기서 흑룡검가에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하며 요청을 넣었다.
그리고 지금, 네팔 정부의 관료들이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는 공략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났다.
쿠우우웅!
얼음 껍질을 뒤집어쓴 곰 같이 생긴 몬스터, 블리베어가 생명 반응을 잃고 쓰러졌다.
던전 속 마지막 몬스터를 처치함으로써 공략을 끝낸 것이었다.
한치성은 검을 늘어트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바깥처럼 던전 내부도 비슷한 환경이었기에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수고했어.”
마지막 블리베어에게 화살을 꽂아 넣었던 레이나가 활을 내리며 다가왔다.
“앞에 두 팀이 실패했다더니 그럴만한 난이도였어. 아무래도 보상을 더 받아야겠는데.”
“그래야지.”
한치성도 해외를 나돌며 쌓은 공략 경험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테니.
“응?”
그때 눈썰미가 좋은 레이나는 던전 벽면에서 미세한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눈치챘다.
“여길 봐.”
한치성은 레이나가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고 검기를 일으켜 벽을 부쉈다.
그러자 나타난 또 다른 동공 한가운데에 타원형의 물체가 보였다.
“이건 뭐야?”
[???]
-등급 : 영웅
-설명 : 알 수 없음
한치성이 집어 들어서 시스템 창을 확인해봤지만 의문만 추가될 뿐.
“어떤 아티팩트라도 보통 이름 정도는 나오지 않아?”
레이나의 말처럼 범상치 않은 물건임은 분명했다.
“가문으로 돌아가서 한번 알아봐야겠어.”
**
서진이 익숙한 기운이라고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경험에 근거한 감상에 불과했다.
흑마법사의 마기나 뱀파이어의 혈기처럼 실체가 있는 기운은 아니란 얘기.
마야라는 여성이 보이는 눈웃음과 미소, 코끝을 자극하는 향수까지.
서진의 기억 속에 있던 서큐버스라는 종족을 잠시나마 떠올리게끔 해주었다.
물론 마기에서 비롯된 환혹술과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옅은 느낌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기감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녀는 무언가 목적을 품고 접근했다는 의미.
순간, 어제 봤던 스칼렛이라는 부길드장이 생각난 건 왜일까.
서진은 장단을 맞춰줄 심산으로 대꾸했다.
“저에겐 무슨 일로?”
왼쪽에 앉았던 설하윤이 지그시 마야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흑룡검가와 연계한 사업이 많아질 것 같아서 얼굴도장을 찍으려구요. 게다가 저는 강한 헌터에 대해서도 상당히 흥미가 많거든요.”
“그런가요.”
“네. 꽤 멋지기도 하구요, 유니온의 헌터와 싸우시는 모습을 봤는데 마법도 배우신 건가요? 앗, 혹시 이런 질문은 실례일까요?”
“비밀도 아니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운 건 맞는데 감탄할 수준은 아닙니다.”
“으음? 그렇게 보이진 않던걸요.”
마야는 비어있는 서진의 술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쓰셔서 눈이 호강했어요. 게다가 다른 헌터들이 그렇게 쩔쩔매던 유니온 헌터를 단시간에 쓰러트리시다니.”
그녀는 정말 경탄하듯이 눈을 빛냈다.
“그런데 후계자라고 하셨으니 혹시 약혼이나 장래를 약속한 여성분이 있을까요?”
“그걸 마케팅 팀장님이 궁금해할 사항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개인적인 질문이었는데 실례했다면 죄송해요.”
시간이 흐르며 서진의 취기가 깊어갈수록 마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반적으로 고레벨 헌터는 마나를 움직여 취기를 몰아낼 수 있지만 스킬이 섞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남자도 마찬가지네.’
마야는 익숙하게 서진과 함께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이는 장면.
스킬에 당한 헌터를 끌고 나간 경험이 많았기에 이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
아까부터 은근한 압박이 담긴 눈빛을 보내던 여자 호위헌터가 있었지만 별다른 제지는 없다.
‘서로 좋아서 나가는 걸로 보일 텐데 자기가 무슨 수로 막겠어?’
마야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호텔로 데려갔다.
의식을 잃을 서진을 침대에 눕힌 그녀는 짧게 숨을 돌렸다.
“다 좋은데 데리고 오는 게 힘들단 말이지. 그래도 이제 얻을 걸 생각하면 얼마든지 감수할만하지만.”
마야는 서진이 입고 있는 코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케일러스의 열매를 몸에 지니고 있다는 건 여러 정황으로 이미 확인한 사항.
날이 밝으면 서진이 도둑맞은 사실을 알게 될 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갈 길드에서 열매 챙기고 가면 엄청 남는 장사니까.’
신분을 바꾸고 살아가는 생활은 익숙하다.
처음엔 부길드장이 지시한 일이라 흥미가 생겼지만 누구 좋으라고 홀라당 바친단 말인가.
세계를 통틀어 이제 열 개도 채 남지 않은 희귀 아티팩트인데.
최소 4레벨 이상에, 신체나이가 젊을수록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조건이 있긴 해도 원하는 사람은 차고 넘친다.
그냥 혼자 챙기고 길드를 뜨면 되는 일.
그렇게 마야의 손가락이 코트의 주머니에 닿는 순간, 서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탁!
“지금 뭐 하는 거지.”
차갑게 가라앉은 서진의 눈빛.
마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안 취했었나요?”
“너무 뻔히 보이는 수작이라서.”
상대의 마나 흐름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서진에겐 애초에 통할 리가 없는 작업이었다.
“그래도 스킬은 독특하더군. 이성에게는 효과가 더 증폭되는 것 같던데. 맞나?”
“그것까지 알아챘나요?”
서큐버스의 능력 중에 하나를 단편적으로 스킬화 시켜서 사용하는 느낌이었기에.
이제 와서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목적은 케일러스의 열매인가?”
마야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힘이 빠진 듯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전부 알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취미가 안 좋은 남자였네.”
“거슬리는 게 있으면 직접 확인해야 풀리는 성격이라서.”
그래서 서진의 눈짓을 받은 설하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었다.
“상황 파악했으면 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말해.”
“부길드장인 스칼렛이 지시했어요. 빼내라고. 솔직히 말하면 도중에 생각이 바뀌어서 들고 튀려고 하다가 실패했고.”
“그렇군.”
서진은 그녀를 기절시키고 호텔을 나왔다.
살기가 느껴지진 않았기에 죽일 생각은 없었다.
물론 아티팩트 절도 미수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겠지만.
**
다음날, 브랜던은 사색이 된 얼굴로 서진에게 사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길드원 때문에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드리다니. 그 두 명은 반드시 교도소에 처넣겠습니다.”
“그렇게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추가로 보상을 받으면 되니까요.”
“윽.”
브랜던은 잠깐 당황하다 이내 한숨을 삼키며 서진을 비고로 안내했다.
서진은 별다른 고민 없이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 하나를 골랐다.
클리어 길드에서 조제한 최상급 포션인 ‘치유 샘물’.
어지간한 외상은 들이붓는 순간에 치료가 되는 즉발성 아이템.
“이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끝난 거... 맞죠?”
“네.”
혹시나 더 뜯길까 걱정하던 브랜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반면, 서진은 매우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가문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기 전, 서진은 설하윤을 불러세웠다.
“하윤 씨. 이거 받으세요.”
서진이 내민 물건은 케일러스의 열매.
“네?”
설하윤은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했지만 서진의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새카만 머리칼을 찰랑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이건 서진 님이 받은 보상인데...”
“제가 이걸 갖고 있어봤자 쓸데도 없는데 필요한 사람이 가지는 편이 좋죠. 팔 아픈데 안 받을 건가요?”
그녀는 마스크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숙이며 열매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설하윤은 서진이 떠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열매를 내려다봤다.
**
“반가워요. 후계자님.”
문선영은 언제나 그렇듯 은은한 미소를 띠며 서진을 맞이했다.
안드레이가 죽은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자오 길드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언제부턴가 자생력을 잃고 안드레이에 의존하여 유지되던 집단이 지원이 끊기면 그 결말은 뻔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면 자오 길드장은 어찌 됐습니까.”
9레벨 헌터라 문선영에게도 쉽지 않은 상대였을 텐데.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길드가 무너지는데 혼자 도망갈 헌터로 보진 않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군요.”
“전에 얘기했던 흑각 길드장과는 얘길 나누셨습니까.”
전쟁을 벌이는 중에도 침묵했던 백야의 삼대 길드 중 하나.
문선영은 다소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내부적인 분열이 있었더군요. 현재는 길드장이 교체된 상황이에요.”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천궁 길드장이 알고 지냈던 이전 길드장이 사망한 모양이다.
문선영은 말을 돌리려는 듯 다른 주제를 꺼냈다.
“참. 흑룡검가의 한치성 후계자가 며칠 전에 천궁에 다녀갔어요.”
서진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하지만 정작 본론을 꺼내지 않아서 영양가 없는 대화만 나누다 끝났지만요. 뭔가 제게 원하는 것이 있는 듯했는데, 혹시 짚이는 게 있으신가요?”
“글쎄요.”
“에베레스트 던전에서 얻었다는 미확인 아티팩트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구요.”
“천궁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군요.”
“그럼요, 흑룡검가의 한치성이 아티팩트 감정사를 알아본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으니까요. 사진 있는데 보시겠어요?”
“사진이요?”
“대화 나누던 중간에 잠깐 얘기가 나와서 볼 수 있었거든요. 그때 확보해놓은 사진이죠.”
한치성이 획득한 정체불명의 구체형 아티팩트.
서진도 아직 직접 보지 못했기에 어떤 물건인지 궁금했다.
“이거예요.”
사진에 담긴 아티팩트를 본 순간, 서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드래곤의 알?’
서진도 천 년 동안 고작 몇 번 본 게 전부지만 생김새는 기억하고 있었다.
알에 새겨진 문양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는데 사진 속의 알도 같은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왜 던전에 있었을까.
하기야 성주인 실버울프까지 나타난 마당에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서진은 곧이어 알을 가져오기 위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걸 이용하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