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한서진.”
천궁에서 가문으로 돌아오니 한치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웬일이지.”
드래곤의 알을 어떻게 가져올까 생각을 이어가던 중에 장본인이 찾아오다니.
평소 눈길조차 주기 싫어한다는 걸 고려한다면 그만큼 초조해졌다는 증거.
“너와 거래를 하러 왔다.”
“혹시 천궁의 길드장과 연관된 제안인가?”
서진의 말에 한치성의 눈썹이 비틀린다.
“맞췄나 보군.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거래를 하러 온 건데?”
사실 서진도 드래곤의 알을 얻기 위해선 한치성과의 접촉이 불가피하지만 상대가 먼저 다가온 이상, 속내를 내비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딱히 네게 원하는 게 없는데.”
차가운 서진의 대꾸에도 한치성은 할 말을 꺼냈다.
“네가 천궁 길드장과 밀접한 관계이며 천궁에 대한 깊은 교섭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진이 천궁에 안겨다 준 이익이 막대한 만큼 요청에 따라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궁 길드장에 대한 일회성 교섭권을 원한다.”
즉, 서진의 힘을 빌려서 한치성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겠다는 의미.
“대신 너는 뭘 줄 수 있지?”
한치성은 축소 마법이 걸린 케이스를 확장시켜 안에서 무언갈 꺼내놓았다.
“너도 들었겠지만 얼마 전에 A급 던전에서 얻은 아티팩트다.”
껍질을 감싸고 있는 용족의 마나와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색깔.
사진으로 예상했지만 직접 마주하니 확신할 수 있다.
틀림없이 드래곤의 알이었다.
시스템 창에선 영웅급이라 기재되어 있지만 아티팩트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기에 등급이 낮게 나온 것이겠지.
현재 제일 높은 아티팩트의 등급은 전설.
아마 드래곤의 알은 그보다 더 높을 거라 예상된다.
한치성은 알이 담긴 케이스를 내밀며 말했다.
“이걸 넘겨주지. 누구도 가치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니 대가로는 충분할 거다.”
“장난해? 말은 바로 해야지. 짐작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알아내지 못한 거잖아. 전혀 충분하지 않아.”
아티팩트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입장은 정반대가 되겠지만 현재로선 겉보기엔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
아직 한치성에게 더 빼낼 수 있는 구석이 있다.
서진은 탐탁지 않은 척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세 가지. 정체불명의 아티팩트와 교섭권한을 요구하는 이유, 그리고 귀혼검을 내놔.”
서진이 평소 아쉽게 여겼던 은밀한 움직임을 귀혼검(鬼混劍)으로 대체할 생각이었다.
평상시엔 이전처럼 천검을 사용하면서.
한치성에게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아이템이 있긴 하지만 너무 크게 지르면 도리어 제안을 무르려 할 테니 이 정도가 적당했다.
“후우.”
얼굴을 일그러트린 한치성은 서진의 예상대로 한숨 쉬며 조건을 받아들였다.
“좋아. 대신 교섭권을 원하는 목적에 대해선 자세히 말해줄 순 없다. 내 팀원인 레이나 헌터가 요청했다는 것 정도만 말하지. 그 이상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라서.”
한치성이 팀원 때문에 이런 상황을 흔쾌히 감수할 성격은 아니다.
그렇다면 아마 해외에선 팀장이었던 레이나가 팀원이 돼버린 뒷사정과 연관이 있겠지.
전후 사정을 짐작한 서진은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줄게.”
어차피 드래곤의 알과 귀혼검이 메인이지 이유 따위는 궁금증에서 비롯된 흥미 수준이었으니까.
서로의 조건이 정리된 그때, 전화기가 동시에 울렸다.
**
“안녕하십니까, 서진 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전화가 왔던 이유는 마관청의 홍세인 과장이 가져온 사건 때문이었다.
브리핑룸에 와있는 사람은 서진과 한치성뿐만 아니라 각 부대장과 각주들도 착석해 있었다.
핵심 인사가 모인 것을 확인한 홍세인 과장은 앞으로 나서서 인사했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시급한 사건이니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체 뭔가?”
흑룡대장의 질문에 홍세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엠바고가 풀리게 되겠지만, 현재 제2 각성자 교도소가 있는 회색 섬과 연락이 두절된 상황입니다.”
“뭐? 그곳이? 허면 직접 가봤나?”
“예. 마관청에서 헬기와 배를 동원해서 가봤으나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홍세인은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바다가 상당히 거칠고 수면 아래에 해양 몬스터가 있긴 했지만 그건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고, 섬을 둘러싸고 있는 검붉은 기운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건 도대체...?”
의문을 표하는 백랑대장에게 홍세인이 덧붙였다.
“현장 요원이 말하길, 마나도 마기도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서진은 사진을 본 순간 뱀파이어의 혈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사령급 이상의 뱀파이어가 영역을 구축하면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했다.
‘벌써 꽤 많이 진행됐군.’
앞으로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자신만의 영역을 완성하게 되겠지.
영역이 공고해질수록 뱀파이어는 본신의 무력을 넘어서는 힘을 축적하게 된다.
기왕이면 하루빨리 처치하는 편이 낫다.
“언제부터 회색 섬과 연락이 끊어졌지?”
“지금으로부터 이주 전이며 마관청에서 실태를 확인한 시기는 열흘 전입니다. 그 뒤로 특수 헌터부대를 보내서 검붉은 안개의 정체를 밝혀보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흑룡대장은 한탄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단 말인가? 베테랑들이?”
“확인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5레벨 이하의 헌터가 들어가게 되면 정신력이 흐트러집니다. 아마 장기간 노출될 시엔 전투 불능 상태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다음 작전 시엔 6레벨 이상으로만 구성해야 되겠군.”
서진은 사진을 쳐다보며 영역의 규모를 짐작했다.
‘뱀파이어 로드일 가능성은 낮아.’
로드라면 진작에 이보다 거대한 크기의 영역을 구축했을 테니까.
그래도 마냥 안심할 수 없는 이유는 군집을 이룰수록 훨씬 강해지는 뱀파이어의 특성 때문.
이 정도면 이미 교도소 내부는 하급 뱀파이어와 시귀들로 넘쳐나고 있겠지.
서진이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홍세인이 말했다.
“그리고 제가 시급하다는 말씀을 드린 이유는 아직 회색 섬에 생존자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뭐라?”
“그게 정말인가?”
홍세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특수헌터 부대가 진입했을 때 섬 바깥에서 두 명의 생존자를 구해냈습니다. 생존자가 진술하길, 아직 교도소 내부에도 있다고 합니다.”
서진은 그들이 왜 아직 살아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전부 죽이거나 시귀로 만들어버리면 신선한 피를 얻지 못할 테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지, 어쨌거나 희소식임과 동시에 서둘러야 하는 이유였다.
“그래서 마관청의 요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도움을 청합니다.”
“그렇군. 심각한 일이야.”
그때 한치성이 민감한 질문을 꺼내 들었다.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데 마관청에선 흑룡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불편해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긴 했다.
자원봉사가 아닌 이상 무상으로 들어가서 목숨 내놓고 싸울 순 없는 노릇.
그에 홍세인은 침음을 흘렸다.
마관청의 예산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흑룡검가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 길드와도 접촉해야 하는 이상, 돈으로 때우기엔 너무나 부족했으니.
“제2 각성자 교도소를 비롯한 회색 섬 전역에 대한 조사 및 점유권을 드리겠습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보상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흑룡가 입장에선 흔쾌히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
“그 말은 작전에 실패했을 시엔 아무런 보상이 없다는 건데.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리고 작전에 다른 가문들도 참여할 테니 나눠가질 수밖에 없을 테고.”
그때 서진은 사일런스 마법을 펼쳐 한치성에게만 목소리를 전달했다.
-한치성, 아까 하려다 말았던 거래를 내기로 바꿔서 진행하는 건 어때?
-뭐?
-사진 속의 검붉은 안개를 만든 놈을 먼저 죽이는 쪽이 그냥 다 갖는 것으로.
거래 없이 승자가 독식하는 방식.
한치성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감이 아주 넘치나 보군. 좋아. 해보자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영웅급 아티팩트를 거래 물품으로 걸긴 했지만 상당히 아까웠던 참이었다.
다만 레이나를 팀원으로 두는 게 장기적으로 확실한 이득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내놓았을 뿐.
그러니 아티팩트와 귀혼검을 주지 않아도 되는 내기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
어차피 낯선 환경이라는 조건은 동일하니 한서진에 비해 유사한 경험이 많은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터.
‘전에 한 번 넘겼던 던전을 공략했다고 자만심에 차 있나 본데 그 환상을 깨트려주지.’
한치성이 받아들이자 서진은 사일런스를 풀고 입을 열었다.
“홍세인 과장.”
“예.”
“나하고 한치성은 참여하기로 했어.”
“정말입니까?”
부족한 작전 보상은 나중에 따로 받아내면 되는 일이다.
흑룡검가가 그만한 힘이 없는 집단도 아니니.
다만 내원당주와 각주들은 확실한 보상을 약속받는 걸 우선시했을 뿐.
서로 간 입장이 다른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실 점유권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이익도 서진은 알고 있었다.
사령급의 뱀파이어가 영역을 구축하면 땅에 선유초(鮮油草)가 피어오르는데, 그것을 이용하면 혈기에 대한 저항력과 스텟을 올릴 수 있다.
가문의 전력을 전체적으로 끌어올릴 기회인 셈.
“서진 도련님. 괜찮겠습니까?”
흑룡대장이 우려를 표했지만 서진은 담담하게 답했다.
“펠시어의 염주가 있으니까요.”
일이 잘못되어도 빠져나올 아이템은 항시 준비 중이었다.
그렇게 서진의 주도하에 흑룡가의 작전 참여가 결정되었다.
**
시대가 발전할수록 정보의 통제는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각성자마다 다양한 스킬을 갖게 된 이후로는 정부 차원의 정보 통제가 제대로 먹힐 리가 없었다.
교도소가 있는 회색 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은 가문들이 작전 참여를 결정하고 나서 금세 퍼져나갔다.
그리고 헌터 커뮤니티에서 제일 먼저 말이 나오고 있었다.
[회색 섬 먹혔다는데 진짜냐?]
-마관청에서 갔는데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나왔다고 들음.
-미친, 거기 죄다 범죄 저지른 각성자 모여있잖아.
-설마 반란 일으킨 거 아님?
[이미 지금 여러 가문에서 나섰다고 함]
-어떤 가문들인데 그걸 말해줘야지.
-우선 흑룡검가에서 제일 먼저 작전 의사를 밝혔다는데.
-재밌는 건, 처음엔 흑룡검가도 머뭇거렸는데 한서진이 동생까지 끌어들여서 참여를 결정했다고 함.
-오 대박.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한서진은 이런 일 있으면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듯.
-진짜 쉬운 일이 아닌데 대단하긴 해.
-한서진 코인이 답이다.
**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 차가운 바람이 부는 서해의 항구에는 흑룡가 헌터들이 결집해 있었다.
제2 각성자 교도소가 있는 회색 섬, 지역 명칭은 운무도.
평소에는 헬기를 이용했지만 검붉은 안개가 감싼 이후, 불안해진 기류 탓에 근처만 다가가도 비행이 불가능한 상황.
배를 타고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진아.”
이번 작전에 참여한 가문 중의 하나인 철혈백가의 백화연이 서진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