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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가문의 천재는 사실 귀환자-104화 (104/141)

104화

릴리에의 혈기가 공간을 채워나가며 따가운 열기가 함께 밀려 나온다.

체내의 기운에 속성을  축적하여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묻어 나오는 경지.

“이렇게 보니 투신이 귀엽게 느껴지네요.”

릴리에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손을 휘저었다.

무작위로 피어나던 혈기가 송곳 같은 형태를 갖추며 서진에게 날아간다.

카앙.

검을 들어 튕겨낸 서진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같은 신세인데 마치 남 말하듯 얘기하네. 본래라면 그 투창을 내가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낼 수는 없었을 거다.”

지구에서 제약을 받고 있는 현재 릴리에의 무력은 9레벨 정도.

그마저도 온전한 상태로 보이진 않았다.

마치 커다란 그릇에 물을 채워 넣고 있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 이런 차원 이동의 부작용 때문에 리치가 적합한 장소를 까다롭게 고집하는 것이겠지.

릴리에는 입술을 내밀며 투정했다.

“정말 그런 건 모른 척해주면 좋을 텐데. 여전히 당신은 배려심이 부족하네요.”

그녀의 등에서 혈기가 나비의 날개처럼 퍼져나가면서 서진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혈황접(血晃蝶)

생명체의 오감을 한순간에 앗아가며 상대의 육신에 혈기를 노출시키는 혈마법.

“그게 통할 거라 생각해서 펼친 건가.”

모든 감각이 차단된 채로 수없이 전투를 벌였던 서진에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릴리에도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저 공격의 의도는 뒤에 나올 기술을 위한 발판.’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마친 서진은 후속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냈다.

동시에 어느덧 공간을 가득 채운 혈기가 한꺼번에 터져나갔다.

혈황접이 퍼트린 수백 개의 불씨가 폭탄이 되어 전장을 일방적으로 점유해간다.

분명 폭발의 여파에 휘말려 피가 조금이라도 묻는다면 그 혈흔을 매개체로 삼은 혈마법이 이어지겠지.

서진에게도 위협적인 연계 공격이기에 일말의 빈틈조차 내주지 말아야 했다.

발밑에서 올라온 아쿠아 마법은 서진의 전방위를 둘러싸며 폭발을 막아냈다.

이제는 약간의 예상 시간만 있다면 9레벨과의 전투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서진의 마법 실력은 상승해 있었다.

핏빛의 연쇄 폭발에서 푸른 장막이 고고하게 유지되자 릴리에의 하얀 미간이 좁혀졌다.

“검으로 막아내거나 피할 줄 알았는데. 언제 마법을 익힌 거야?”

“최근에.”

“마법을 쓸 수 있게 됐으니 피가 더 맛있으려나? 그래도 거슬리는 방어는 치우고 싶은걸.”

척혈화(拓血華)

릴리에의 좌우로 솟구친 피 분수에서 피어난 수십 송이의 꽃에서 붉은 광선이 투사되었다.

[지력이 37 상승합니다]

흡수되는 투기양만 봐도 심상치 않은 위력이라는 것이 짐작된다.

서진은 아쿠아 베리어를 해제하고 강대한 뇌기를 검에 담았다.

마나 운용이 높다곤 해도 고위급 혈마법을 연달아 버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마법 레벨을 올려야 해소 가능한 문제였다.

서진은 4레벨 마법의 한계치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에 다른 대응 방법을 꺼내 들었다.

흑룡검술 제6식 연폭뢰.

무차별적으로 난사되는 광선들의 경로를 눈으로 계산하고, 스치거나 닿을만한 것들은 낙뢰를 내리쳐 상쇄시킨다.

서진 같은 반사신경과 통찰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이적.

한 번이라도 엇나가면 중상일 텐데 완벽하게 쳐내며 상처 하나 허용하지 않는다.

릴리에는 감탄을 넘어서 질린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괴물 같은 전투 방식은 여전하네.”

척혈화를 퍼붓는 자신조차 저렇게 막아낼 순 없었다.

이윽고 붉은 포격이 멈추고 서진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받아냈으니 이제 내 차례군.”

천장과 바닥에서 파도가 일어나며 릴리에를 향해 세차게 밀려들었다.

언뜻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파도였지만 서진의 흑뢰가 퍼져나간 순간, 전방위적인 전격 마법으로 탈바꿈되었다.

물을 싫어하는 릴리에는 웃음기를 거두고 손을 뻗었다.

열염혈진(熱炎血鎭)

파도 속에 있는 전격은 강하지만 결국 공격의 바탕은 물.

화염과 함께 뜨겁게 끓어오르는 진득한 피가 파도와 부딪히며 자욱한 수증기를 만들어내었다.

치이익!

“아주 본격적으로 마법을 쓰네. 나 싫어하는 거 보려고 일부러 수 속성 마법을 익힌 거야?”

“그거 자의식 과잉이야.”

그렇게 최상층에 가득 채워진 수증기는 공기 중에 미세하게 퍼져있던 화염계 혈기까지 없애버렸다.

서진의 진짜 노림수는 이쪽이었다.

혈황접 이후에 여전히 남아있던 혈기를 전부 날려버리는 것.

이걸 계속 놔두면 체내까지 혈기에 자주 노출되어 마나 운용력이 크게 떨어지니까.

“나름 은밀하게 퍼트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감이 좋네. 이계가 아니어도 역시 당신은 쉽지 않다는 거구나.”

“그런데 사령급인 네가 왜 굳이 제약을 감수하면서 여기로 건너온 거지?”

“어머. 아직 몰라? 하늘이 무너지려 하고 있거든. 하긴 몰라도 이상하진 않네.”

결국 그렇게 된 건가.

서진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고향인 지구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보냈던 곳이 아니던가.

그리움과 아쉬움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원인은?”

예전에 7성주는 서진의 존재를 이유로 꼽았지만 그게 정말이라면 무너지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들은 어쨌든 투신을 협곡 아래로 떨어트리는 것에 성공했으니까.

“나도 몰라. 근데 드래곤 걔들은 뭔가 알고 있을지도.”

“그렇게 애를 쓰며 나를 없앴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이번엔 뭐라 핑계를 댈지 궁금하군.”

“쫓아내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애초에 웃기는 말이지.”

세계의 존망이 고작 한 사람의 영향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그러면서 이제는 지구로 와서 질서를 어지럽히려 하는 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당신이 협곡에 추락하기 전까지 저항했던 것처럼.”

그게 과연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을까.

하기야 큰 틀에서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서진은 작은 실소를 흘리며 잡념을 떠나보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

옳고 그름을 따진다 한들 힘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생존 앞에선 어떠한 주장도 의미가 없다.

힘으로 굴복시켜 원하는 바를 관철하는 수밖에.

“그럼 나도 그때처럼 너희들을 몰아내면 되겠지.”

차갑게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양측의 기세가 격돌하며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릴리에의 손가락 끝에서 발산된 혈기가 몸집을 키우며 거대한 혈염이 되어 서진에게 쇄도했다.

전방을 뒤덮는 폭열 속에서 서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화염의 구조를 파헤치고 있었다.

뱀파이어만의 독자적인 기운이라 해도 마법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상, 절대적인 마법의 구성 원칙을 벗어날 순 없다.

‘여기를 끊어내면 되겠군.’

서진의 검이 혈화를 갈라내자 불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장애물을 없애버린 서진은 그대로 가속해 릴리에의 코앞에 도달했다.

뇌검이 매끈한 미간을 노리며 찔러 들어가는 순간, 창대가 청아한 소리를 내며 튕겨냈다.

카앙!

“역시 원거리에서 당신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무리였네.”

릴리에가 창을 빼 들었다는 건 본신의 무력을 전부 드러내겠다는 일종의 선포였다.

창을 든 릴리에는 혈기의 운용 방식마저 달리했다.

심장에 모여있던 혈기를 전신에 퍼트리며 육체를 일깨우자 흐릿한 핏빛 소용돌이가 그녀의 주위에 휘몰아친다.

“최대한 상처 없이 제압하고 싶었는데 그건 포기했어. 팔다리 다 잘라내고 목숨만 붙어있으면 내 피를 써서 회복시켜줄게.”

“사양하지.”

사령급 뱀파이어의 인형이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으니.

서진도 여뢰를 통해 몸을 각성시키며 증폭된 감각으로 릴리에를 냉철하게 관찰했다.

밖으로 끄집어낸 혈기의 막대한 질량을 보면 전투를 오래 끌 생각은 없어 보인다.

‘여전하군.’

원거리뿐만 아니라 근거리에서의 전투 능력도 빼어난 그녀였지만 접근전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으니.

그리고 서진은 그 점을 이용할 생각도 품고 있었다.

어차피 2레벨의 격차가 나는 릴리에를 단시간에 죽이긴 쉽지 않다.

끈질기게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지원을 기다린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터.

물론 그리되면 내기에서 승리하는 건 포기해야지만.

‘역시 그건 내키지 않네.’

화아악!

“날 두고 딴생각하는 거야?”

창날을 감싼 혈기가 나선을 그리며 서진의 심장을 파고들고 있었다.

[민첩이 36 상승합니다]

생각하는 와중에도 릴리에를 주시하고 있던 서진은 점멸로 피하며 바닥에 물을 터트렸다.

전장을 유리한 환경으로 바꾸려는 한 수.

“내가 그걸 가만히 놔둘 것 같아?”

릴리에는 눈동자를 붉게 빛내며 창을 휘둘렀다.

혈안만역(萬血眼域)

혈기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서진이 만들어낸 물을 밀어내며 사방을 핏빛으로 덧칠해간다.

먹혀버린 천장과 벽면에는 갖가지 기괴한 눈이 생겨나더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서진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8레벨이 마나 전개를 통해 자기 자신을 개방하는 경지라면 9레벨에선 주변의 공간까지 확장시켜 지배하에 두는 영역을 만들어낸다.

안드레이가 펼쳤던 쉐도우 필드처럼 릴리에의 혈안만역도 같은 선상에 있는 기술인 것이다.

서진은 릴리에와 이 정도까지 접전을 벌였던 적이 없었기에 처음 겪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공기 중에 혈기 농도를 짙게 만들어서 체내 투입량을 늘리고, 저 눈들은 전부 너의 시야가 되어주는 것이겠지.”

이전보다 상대를 더 강하게 억제하고 사방에 박혀있는 눈으로 움직임을 파악함으로써, 근접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가려는 목적이 다분히 느껴진다.

“정답. 기념으로 선물을 줄게.”

상쾌한 미소로 인정한 릴리에는 창을 앞으로 내지르며 땅을 박찼다.

팔방절극(八方絶戟)

서진을 향해 동시에 여덟 방향에서 창날이 짓쳐들어온다.

창격 하나하나가 전부 일격필살의 위력을 담고 있어 섬찟한 느낌까지 선사해주고 있었다.

[근력이 40 상승합니다]

[체력이 36 상승합니다]

덕분에 서진은 다량의 스텟을 흡수하고 점멸로 사지에서 벗어났다.

‘물론 고작 한번 이동했다고 허무하게 사라질 기술은 아니겠지만.’

예상대로 여덟 개의 창은 목표물을 잃지 않고 급선회하였다.

대응하기 어렵게끔 간격을 넓게 두며 미세한 시간차로 서진에게 쏘아졌다.

창에서 느껴지는 관통력은 어지간한 방어마법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그렇다면.’

서진은 전광검을 펼치며 팔극에 몸을 내던졌다.

느려진 흐름 속에서 날아오는 창의 간격과 각도를 계산하고 뇌격의 궤적을 짜 맞춘다.

공중에 부유하는 다수의 무기를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막대한 정신력 소모를 동반한다.

9레벨이라 한들 그 여파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

창을 전부 쳐낸 직후에 찰나의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콰앙!

흐름이 원래 속도를 되찾고 흑뢰로 이루어진 검강들이 정확하게 여덟 개의 창을 타격한다.

하지만 릴리에도 이계에서 서진이 썼던 기술을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정신에 가해지는 부하를 견디며 창이 밀려나는 순간에 신속하게 혈마법을 전개했다.

혈창폭열(血槍爆熱)

콰가가광!

서진으로 인해 제 기능을 상실한 창들이 화염을 일으키며 터져나간다.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은 붉은 폭풍 속에서 릴리에의 창은 정확히 서진을 노리고 있었다.

‘절대 놓칠 수 없어.’

릴리에의 피에 대한 집착이 서진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마력이 39 상승합니다]

[지력이 40 상승합니다]

그녀의 강한 열망에서 비롯된 투기는 다시 스텟을 올려주었고.

[Lv.8이 되었습니다]

서진을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주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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