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시작은 입은 은혜에 대한 보답과 약간의 호기심이었다.
처음엔 유약하다고 들은 후계자가 심한 무시를 받지 않도록 보호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서진에 대한 성급한 선입견은 첫 외출부터 깨져나갔다.
대뜸 매복을 감지해내고 자신보다 훨씬 강한 헌터를 쓰러트리는 걸 보고 나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으니.
그 뒤로 서진의 행보는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기 힘든 일뿐이었다.
다시 떠올려도 놀람이 가시지 않으니 말 다한 게 아닐까.
그렇게 생사의 경계를 몇 번이고 함께 뛰어넘은 결과, 설하윤에게 서진은 가족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이제는 처음의 동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냥 곁에서 끝까지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한데.’
설하윤은 탁자에 놓여있는 케일러스의 열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얼마나 귀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전 세계 통틀어 10개도 남아있지 않은 희귀 아티팩트.
만약 블랙마켓 같은 곳에 경매 물품으로 나온다면 평생을 일해 번 돈을 쏟아부어도 사는 건 불가능할 정도.
그래서 던전 공략 중에 입은 화상을 치료하는 건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으면 좋을까.
이미 목숨을 내놓을 각오야 진작에 마쳤는데 여기서 더 무엇을 하면 될지.
문득 임유나가 생각난 설하윤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별다를 바 없네.’
협회장 자택에서 손녀인 임유나가 건넸던 질문과 같은 내용을 고민하고 있다니.
동시에 그녀의 심정이 깊게 이해되기도 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설하윤은 열매를 쓰다듬으며 근심을 가볍게 보내버렸다.
누구보다 서진의 곁을 지켜봐 왔기에 알 수 있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지금처럼 하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서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주저 없이 내던지기만 하면 된다.
간단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결심을 품은 설하윤은 케일러스의 열매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
“안녕하십니까, 서진 님.”
“어...음.”
서진은 굉장히 드물게 말을 더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스크를 벗은 설하윤이 서 있었기에.
케일러스의 열매를 주었으니 치료할 거라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맨얼굴의 위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서진이 말이 없자 설하윤은 머리칼을 사락 흘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제 얼굴이 그렇게 충격적으로 흉한 겁니까?”
“네? 아니요.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농담이었습니다.”
당연히 설하윤도 자신의 모습이 대체로 어떻게 비춰질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마스크로 감춰오다 치유되고 나서 처음으로 보여주는 만큼 약간의 불안감이 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진의 반응을 보니 괜한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된 설하윤은 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감사드릴 게 있습니다. 이제 7레벨이 되었습니다.”
“제가 감사를 받기엔 하윤 씨의 능력이죠.”
서진은 설하윤이 그리 늦지 않은 시일 안에 레벨이 오를거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담백하게 축하를 전했다.
“그런데 서진 님, 품에 안겨있는 그건...?”
“한치성에게 받은 알입니다.”
작전을 마치고 가문으로 돌아오고 나서 서진은 바로 보상을 받아냈다.
다만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으니.
귀혼검이 무영뢰와 궁합이 잘 맞는 효과를 지녔긴 하지만, 전장에서 두 자루의 검을 번갈아 가며 쓰는 건 매우 귀찮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겉멋이야 나겠지만 그딴 건 전혀 필요 없었으니.
결국 두 검을 하나로 통합해야 하는데 마침 항상 쓰고 있는 천검도 내구도가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
애초에 자색 전류에 맞춰 제작된 검이라 흑뢰를 버티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결국 무기를 새로 하나 장만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전문가를 찾아가 봐야겠지.
서진은 검 두 자루를 들고 가문의 공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이구만, 검 내놔 보게.”
강주표 야장은 보자마자 검을 받아들며 혀를 찼다.
“쯧쯧, 완전히 망가졌어. 빨리 바꿔야겠는데. 이건 검의 문제가 아니라 자네의 성장이 너무 비정상적으로 빨라서 발생한 문제야.”
“이번엔 흑뢰를 버틸 수 있는 검으로 제작 가능합니까?”
“날 뭐로 보고, 당연히 할 수 있지. 참나, 이제 서른도 안 된 후계자에게 흑뢰를 위한 검을 만들게 될 줄이야.”
반면, 강주표의 제자인 이태현은 눈을 빛내며 기대하고 있었다.
“저로선 너무 영광입니다. 가주님이 쓰시는 검을 제작할 땐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오다니요. 그런데 서진 님의 손에 들린 회색 빛깔의 검은 뭔가요?”
서진은 귀혼검을 내밀며 말했다.
“이 검의 효과를 새로 만들 검에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귀혼검]
-등급 : 영웅
-내구도 : 1100/1500
-마나 전달율 : 180%
-효과 : 하루에 한 번, 사령을 덮어써서 사용자의 기척을 흐리게 하며 타인에게 닿기 전까지 지속된다.
강주표는 침음을 흘리며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알고 있을진 모르지만 흑뢰를 견딜 수 있는 검을 만들려면 뇌정석 말고도 묵련철(墨漣鐵)이라는 별도로 가공된 금속이 필요하네. 물론 그건 가문의 비고에 있으니 구해오란 얘기는 아냐.”
가만히 귀를 열고 있는 서진에게 강주표는 계속 말을 이었다.
“문제는 묵련철이 들어가 버리면 다른 검의 효과를 인챈트 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워진다는 것이지. 나도 인챈트에 조예가 있긴 하지만 자네가 가져온 건 영웅급 귀혼검이지.”
부여 계통 스킬을 통칭하는 ‘인챈트’.
주로 제작 기술자들이 보유한 종류의 스킬이지만 높은 등급의 인챈트 능력자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부여 스킬 하나로만 먹고사는 기술자가 많을 정도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적었다.
이미 대장장이로서 일가를 이룬 강주표가 조금이나마 인챈트까지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다.
다만 서진이 요구하는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을 뿐.
“다루기 힘든 묵련철에 영웅급 효과를 부여하려면 전문 인챈터를 불러와야 해. 돈만 주면 오는 놈들로는 택도 안 될 거다.”
이태현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강한 뇌기를 최대한 잘 버티고 방출시키는 검에 존재를 은밀히 감추는 효과를 인챈트 하는 거라 훨씬 난이도가 높아요.”
제작에 대해 잘 모르는 서진도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사실상 상반된 성질을 검 하나에 욱여넣는 셈이니.
“그러고 보니.”
강주표는 문득 떠오른 듯이 눈을 반쯤 떴다.
“전예선이라고,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인챈터였는데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진 모르겠군.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서진도 얼핏 들어본 이름이었다.
“아! 여기 나와 있네요.”
그새 검색을 해본 이태현은 기사를 보여주며 말했다.
“아프리카 등지에서 봉사활동 하고 있다네요. 구체적인 장소는 나와 있지 않지만요. 주기적으로 옮겨 다니나 봐요.”
“아프리카?”
서진은 휴고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실버 울프를 봤다고 했던 아프리카 북서부에 위치한 아틀라스산맥.
“한번 알아봐야겠군요.”
**
운무도 탈환 작전은 끝났지만 일부 흑룡가 헌터들은 여전히 섬에 체류 중이었다.
바로 서진이 말했던 선유초를 채집하기 위해서.
나중에 다시 뱀파이어를 상대할 때를 대비해서 혈기에 대한 저항력을 올려놓아야 했으니.
하지만 여러 가문이 참여한 만큼 흑룡검가몫의 운무도 점유권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시간 지나면 사그라들어버릴 다른 선유초를 포기하는 것도 아까운 일.
그래서 사용처를 알려주는 대신 그들이 점유한 땅에 있는 선유초를 일정 비율로 받아 챙겼다.
거기다 선유초 덕분에 스텟이 조금이나마 상승한 흑룡가 헌터들도 있었으니 서진의 인기는 더욱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서진 도련님. 정말 고맙습니다. 벽에 막혀있었는데 어제 5레벨이 되었습니다.”
손님을 만나러 응접실에 가는 동안에도 인사를 받을 만큼.
서진은 적당히 들어주고 나서 문을 열어젖혔다.
“오는 길에 저도 얘기를 들었습니다. 선유초 활용법은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홍세인은 서진이 들어오자 인사를 하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
“그냥 어쩌다 보니.”
이계에서 얻었던 정보인 만큼 상세하게 알려줄 순 없었지만.
홍세인도 깊게 캐물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아쉬움을 삼키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구하셨던 전예선 인챈터의 위치 정보를 파악했습니다.”
강주표가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제작자라면 정부 차원에서 눈여겨보고 있을 터.
그렇기에 서진은 마관청에 얘기를 했고, 예상대로 홍세인이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알제리 북부에 있는 엘바야드라는 도시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가실 생각입니까?”
“어. 마침 다른 볼일도 있고.”
원래는 실버 울프를 찾아가기엔 7레벨은 부족하다고 느껴서 미뤘지만 이제는 8레벨이 되었으니 움직일 때가 되었다.
“알제리 쪽엔 별다른 위험 이슈가 없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한국과 거리가 멀다 보니 파악하지 못한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짤막하게 대답하는 서진의 얼굴을 본 홍세인은 살짝 주저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왠지 평소보다 좀 피곤해 보이시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그에 서진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아, 그럴 일이 있긴 한데. 별일은 아니야.”
**
츠으으.
서진의 손을 타고 나온 마나가 드래곤의 알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홍세인이 보기에 서진이 피곤해 보였던 원인이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가진 마나를 알에 쏟아붓고 있으니 아무리 서진이라도 해도 기력이 평소보다 약해 보일 수밖에.
그렇다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서진도 딱히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알의 원활한 부화를 돕기 위한 행위일 뿐.
그리고 나중에 알에서 나온 해츨링의 마나 구조를 파악하면 용체화의 숙련도가 분명 올라갈 터.
용체화가 웜급이 되고 나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협회장 마나 주입에 성공했던 것처럼, 에이션트가 된다면 또 어떤 가능성이 열릴지.
서진에게도 미지의 영역이기에 기대를 품고 있었다.
거기다 갈수록 이계의 종족이 넘어오는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는 만큼, 대비를 할 필요가 있다.
7성주 중의 하나인 드래곤 로드를 포함해 휘하의 도마뱀들까지 건너오게 된다면 이 녀석을 이용해 행동에 제약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선 희망이 전부 빗나간다고 하여도 드래곤의 가죽과 심장이 남는다.
어찌 됐든 서진에겐 이득인 셈.
다만 작은 문제가 있었으니.
서진과 설하윤이 아프리카로 향하면 집을 비워야 하는데 알을 둘 곳이 마땅치 않다.
생명체라서 아공간 가방에 들어가지도 않는데, 그렇다고 농구공보다 큰 알을 내내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
그리고 종종 순도 높은 마나를 넣어줘야 하니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편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나보고 이걸 보관하고 있으라고?”
백화연은 떨떠름하게 알을 내려다봤다.
서진의 부탁을 군소리 없이 들어줄 수 있으며 신용이 보장된 상대.
마나의 수준도 뛰어나니 아주 적임이라 할 수 있었다.
“가끔씩 마나도 넣어주고.”
“하긴 하겠는데 생각지도 못해서 살짝 당황스럽네.”
“그럼 부탁할게.”
서진은 그녀에게 알을 맡기고 알제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