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새어 나오는 마나를 최대한 억제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서진의 기감을 속일 수는 없었다.
도시 외곽에선 아주 희미하게 느껴졌지만 전예선과 대화를 하기 위해 시가지에 들어갔을 때 확신했다.
엘바야드에 상당한 크기의 마력석이 있다는 것을.
몬스터나 던전에서 발견되는 마력석은 재가공이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 클수록 희귀하기에 가치가 높은 편이었다.
느껴지는 마나량으로 볼 때 적어도 작은 원룸을 가득 채울 정도의 부피.
그 정도 크기라면 설하윤도 진작에 눈치챘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전예선 때문이겠지.
8레벨 인챈터의 능력이라면 능히 숨길 수 있을 테니.
물론 용체화가 된 서진에게 들키지 않은 건 무리였지만 말이다.
“그 정도의 마력석이 있다는 말입니까?”
서진의 얘길 들은 설하윤은 눈을 크게 뜨며 도시 전경을 내려봤다.
하지만 그녀의 기감으론 여전히 잡아낼 수 없었다.
그만큼 전예선이 심혈을 기울여 마력석을 은폐시켰다는 의미.
그럴 만도 한 것이 저런 마력석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피를 봐서라도 강탈할 수 있는 단체가 한두 곳이 아니기 때문.
서진도 비슷한 크기의 마력석을 이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기에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 알고 있었다.
만지는 것만으로 마나가 회복되며 매일 극소량이지만 마력 스텟까지 상승시켜 준다.
이러니 어떤 헌터 집단이든 탐낼만한 귀물임은 분명했다.
다만 의아한 점은 왜 숨겨둔 채 보관하고 있는 것인지.
‘하긴.’
서진은 의문을 쉽게 풀어냈다.
저만한 물건은 판매 의사를 내비치는 것조차 위험할 테니.
자칫하면 제값도 못 받고 뺏겨버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아니면 팔 생각 없이 다른 용도로 쓸 계획을 품고 있을지도.
“서진 님, 만약 마력석을 언급했다면 의뢰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비밀 유지를 대가로 인챈트를 요구한다면 거절하기 힘들었을 터.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리되면 협박이나 다름없다.
전예선이 서진에게 피해를 줬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데 압박을 넣는 일은 내키지 않았기에.
서진은 떠나기 전, 엘바야드의 풍경을 눈에 담고 등을 돌렸다.
**
아틀라스산맥은 북서부에 있는 세 개의 나라에 걸쳐서 뻗어 있기에, 사실 산맥이란 힌트만으론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서진이 나선 이유는 휴고에게 들었던 얘기를 토대로 지형을 특정해서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
물론 그마저도 범위가 넓어서 설하윤과 같이 산을 헤집어야 했다.
“서진 님.”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 멈췄을 때, 설하윤은 서진의 맞은편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입을 열었다.
“혹시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실버울프를 왜 찾으시려는지...”
“역시 산행이 좀 힘들고 짜증 나긴 하죠.”
서진이야 명확한 목적이 있지만 설하윤은 따라온 것뿐이니까.
가볍게 던진 서진의 말에 설하윤은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다.
“네? 아니요. 그건...!”
“농담입니다.”
서진은 오랜만에 설하윤이 당황하는 귀한 표정을 눈에 담았다.
“...”
그리고 그녀의 눈매가 샐쭉해지기 전에 얼른 본론을 꺼내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최근에 던전 난이도가 올라가고 한 번도 못 보던 몬스터가 등장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건 하윤 씨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네.”
“회색 섬에 등장했던 뱀파이어, 지금 찾는 실버울프도 그런 현상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서진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계의 존재들을 찾아다니는 이유.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일련의 현상에 대해 불씨를 제공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서진이 지구에서 깨어난 시기를 기점으로 변화가 가속화된 건 사실이었으니.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저 마음 한구석에 작은 의구심을 품고 있을 뿐.
그리고 두 번째는 보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였다.
만약 다른 일에 간섭하지 않고 던전만 나돌았으면 이렇게 단기간에 8레벨까지 도달 가능했을까.
돌이켜보면 서진은 본능적으로 투기를 제일 많이 흡수할 수 있는 전장을 찾아서 성장해왔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거기다 빨리 강해져야 나중에 이계에서 건너올 도마뱀 놈들에게 복수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마지막으론 이계의 결말을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서진이 태어난 지구보다도 훨씬 오래 살았던 세계인만큼 종착지의 모습이 어떤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이걸 전부 설하윤에게 말할 순 없으니 서진은 말을 조금 돌렸다.
“대충 그런 현상과 관련이 있는 일입니다. 지금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예요.”
비록 자세한 사실을 알려준 대답은 아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설하윤도 어렴풋이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쉬었으니 다시 찾...을 필요가 없겠네요.”
서진은 위쪽에 나타난 웨어울프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영역 근처에 가까이 왔나 봅니다.”
서진은 바로 검강을 날려서 녀석의 팔 한 짝을 잘라냈다.
아우우우!
그러자 바로 하울링을 하며 동족들을 불러들이는 웨어울프.
“이제 열심히 사냥하기만 하면 됩니다.”
늑대형 몬스터는 동족 의식이 강하기에 죽이다 보면 실버울프가 튀어나오게 되어있다.
**
그렇게 서진과 설하윤이 사냥을 시작한 지 10여 분, 서진의 예상은 좋은 쪽으로 빗나갔다.
얼마 죽이지도 않았는데 실버울프가 나타났기에.
“거 학살 좀 그만하지?”
달빛을 받아 휘광하는 은색 갈기에 황금빛 눈동자, 그리고 일반 웨어울프와 차원을 달리하는 마나량까지.
서진이 찾던 7성주 중의 하나인 실버울프였다.
“학살이라니, 일종의 봉사 활동인데. 웨어울프 때문에 피해를 본 알제리 사람들이 꽤나 많은 건 모르나 봐.”
“그래서 순수한 마음으로 개체 수를 줄이러 왔다는 말은 아닐 거 아냐?”
“이번 실버울프도 말문이 잘 트였네.”
실버울프도 뱀파이어 로드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
수많은 웨어울프 중에 실버울프가 되는 존재는 하나뿐이며, 죽으면 새로운 실버울프가 탄생한다.
전대의 실버울프는 협곡 전투 당시에 죽였으니 눈앞의 실버울프와는 첫 대면이었다.
그래서인지 서진이 투신과 동일 인물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실버울프는 아직 살아있는 웨어울프를 물리며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적당히 죽였으면 이만 돌아가라.”
“네가 몇 가지 질문에 대답만 해준다면.”
“나보다 약한 놈에게 해줄 말은 없어.”
“역시나 그렇게 나오는군.”
강자존의 법칙을 따르는 실버울프는 서열이 정해지지 않은 상대에게 숙이고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다면 힘으로 눌러야 한다는 의미.
“하윤 씨는 잠시 뒤에 계세요.”
쓸데없는 자존심도 엄청 강해서 일대일로 패배하는 게 아니라면 상대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진이 8레벨 돼서야 찾아온 것이었다.
“자신감 하나는 마음에 들어. 어디 한번 내게 힘을 보여봐.”
실버울프는 위에서 서진을 내려다보다 도약했다.
치이잉!
칼날처럼 솟아난 실버울프의 거대한 손톱이 기묘한 공명음을 일으키며 서진의 안면에 쇄도했다.
언뜻 가볍게 보였던 언동에 비해 공격에 담겨진 마나는 상당히 중후했다.
서진은 검을 수평으로 들어 손톱을 막아냈다.
서로의 힘을 가늠해보기 위한 가벼운 공방.
크릉!
실버울프는 본능적으로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검신을 꽉 쥐고 미들킥을 쳐올렸다.
무기가 붙들린 상태에서 들어온 일격.
서진은 미련 없이 검을 버리고 점멸로 실버울프의 등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새로운 검을 꺼내며 흑뢰를 담아 내려쳤다.
콰아앙!
반사신경 하나만큼은 7성주에서 수위에 드는 실버울프는 잡고 있던 검을 내던져 흑뢰를 상쇄시키고 뒤로 피했다.
실버울프는 산산이 조각나버려 바닥에 떨어진 검의 파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무기를 버리다니 수치심도 없는 거냐.”
“내 손에 들려있는 다른 검 보면 몰라? 버려도 상관없는 거야.”
서진이 흑룡검술을 오랫동안 써왔지만 스스로를 검사라는 카테고리에 옭아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기기 위해선 무기도 바꿔가며 뭔들 못 쓰겠는가.
애초에 그런 생각이었으면 마법도 배우지 않았을 테니.
“짐승 주제에 많이 감성적이군.”
“입을 멋대로 나불거리는 것도 오늘까지일걸.”
파앙!
실버울프는 살기등등한 기세를 내뿜으며 초고속으로 서진에게 돌진했다.
가히 순간 이동으로 보일 정도의 가속.
대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강맹한 마나가 씌워진 손톱이 서진을 향해 찔러 들어간다.
탓!
서진은 다리에 힘을 주며 뒤로 물러났다.
속도는 빠를지언정, 어떻게 움직일지 훤히 보였기에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
물론 단순하기만 하다면 7성주 중의 1좌를 차지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실버울프의 진정한 힘은 괴물 같은 육체로 예상을 뛰어넘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에 있다.
지금처럼.
콰아!
서진이 뒤로 피하면서 공격이 닿지 않자, 발이 지면에 뜬 상태에서 한 번 더 도약해 접근해온다.
다른 헌터라면 여기서 일격을 허용했겠지만 서진은 이마저도 계산 범위 안에 넣고 있었다.
[마나 전개]
[여뢰]
두 가지의 각성 기술을 동시에 발현해 실버울프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갑자기 빨라졌어.”
움직임에는 누구보다 예민한 실버울프는 강한 경계심을 드러내면서도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한쪽 발을 땅에 디딘 채로 체중을 실은 회전차기가 강하게 들어온다.
비교적 큰 기술임에도 타고난 속도로 빈틈을 없애고 파괴력은 끌어올린 각격.
카앙!
서진은 검을 비스듬하게 세워 발차기를 받아내며 이번에도 뒤로 빠져나갔다.
연이은 서진의 후퇴에 실버울프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차갑게 내뱉었다.
“한심하게 계속 도망칠 생각이냐.”
“도망친다기보단 네가 나를 못 때리는 게 아닐까.”
“이제 보니 입만 산 것 같은데. 좋아. 다음엔 절대 못 피하게 해줄게.”
실버울프가 황금빛 안광을 번뜩이자 무형의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여파에 흙먼지와 초목이 휩쓸리는 순간, 실버울프는 존재를 감추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극랑(亟狼)이군.’
전방위적인 강풍을 일으키며 인지가 불가능한 움직임을 보이는 실버울프만의 기술.
서진도 보고 피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
‘하지만.’
이번이 몇 번째 겪는 극랑이었던가.
굳이 보지 않더라도 주변에 일어난 기류의 변화만으로 어디에서 공격이 들어오는지 알 수 있다.
‘전방 우측.’
쿠우웅!
서진은 천라를 펼쳐 실버울프의 권격에 담긴 힘을 감쇄시키며 물러났다.
“이것마저 막아낼 줄은 몰랐는데.”
실버울프는 진정으로 감탄한 눈빛으로 서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피하거나 막는 걸 잘해봤자 공격을 못 하면 소용이 없지.”
“아쉬워할 필요 없어. 이제부터 실컷 맛보게 해줄 테니까.”
“뭐?”
어느새 서진과 실버울프 주변엔 밀도 높은 수분을 머금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었고.
파지지직!
검은빛 뇌광이 안개를 집어삼키며 실버울프를 향해 뻗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