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철혈백가.”
“그렇다면 적호검가 측에서 어떻게든 안 넘기려 하겠네.”
백화연이었다면 아쉬워하면서도 깔끔하게 공략권을 이양했겠지만 적호검가는 안 그럴 테니까.
“이미 용봉산 던전에 평소보다 헌터를 추가 배치하고 있을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정선도 한마디 보탰다.
“철혈백가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일 거다.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뭐. 틀린 말도 아니죠. 적호검가도 그런 시선까지 감수하면서 이중던전을 사수하려 하는 거고.”
서진은 한 가지 의문을 드러냈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우긴다고 될 일은 아닐 텐데. 적호검가의 행위는 명백한 계약 위반 아닌가?”
정보건은 반찬을 집으며 설명했다.
“계약서에 관련 조항이 없대. 20년 전쯤엔 이중던전이란 개념도 희박할 때였으니까. 게다가 지속형 던전에서 나타난 사례는 더 드물었고. 누가 예상했겠어, 그렇게 오래된 던전에서 2차 던전이 나타나게 될 줄은.”
그리고 정선이 아들의 말을 이어받았다.
“명시되지 않은 예외 상황이라는 빌미로 용봉산 던전을 내주지 않으려 하는 거지. 괘씸해 보일 순 있어도 명분이 아예 없진 않은 셈이지.”
정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진에게 말했다.
“어쨌든 그 던전 먹으면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개발에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그렇죠 아버지?”
“당연하지. 철혈가주와 사이가 좋으니 그쪽을 도와서 일부 공략권을 얻어내는 게 어떻겠냐. 우리 가문 입장에서도 철혈백가와 연계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은데. 물론 결정은 네가 하는 것이다만.”
서진은 두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일어섰다.
“예, 이미 어느 정도 결정은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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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루에 두 번이나 우리 가문에 찾아온 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
다시 철혈백가에 온 서진에게 백화연은 신기해하며 말했다.
“실수로 놓고 간 물건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고.”
옆에 서 있던 민나희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서진을 은인 보듯 했다.
서진은 눈짓으로 인사를 받고 고개를 돌렸다.
“뭐야, 둘이 눈빛을 주고받아?”
백화연의 농담을 가볍게 웃어넘긴 서진은 본론을 꺼냈다.
“최근에 용봉산의 이중던전 때문에 골치 아프다며.”
“아, 그거.”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지 백화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민나희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철혈단으로 밀어버리시면 될 텐데.”
“...언니.”
“그냥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걸 알아두셨으면 해서.”
그에 서진도 한마디 거들었다.
“혹시 생각이 있으면 나도 협조해줄게.”
“너까지 왜 그래?”
백화연은 옅게 웃으며 안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중던전의 이익 때문에 무력을 행사했다간 철혈백가가 쌓아온 반듯한 이미지에 금이 가겠지.
물론 백화연은 그런 계산과 상관없이 그냥 내키지 않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힘을 쓰지 않고 말로 평화롭게 해결할 상황도 아니었다.
철혈백가가 호구도 아니고 적호검가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물러날 수는 없으니까.
서진은 철혈백가로 오면서 생각한 결론을 말했다.
“그게 싫다면 사실상 방법은 하나뿐이야.”
“뭔데?”
“대한가문회.”
가문 간 분쟁이 일어났을 때 최대한 피를 보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길이었다.
중재 신청을 넣으면 각 가문의 가주들이 참석한 회의가 열리게 된다.
결정 방식은 다수결.
“내가 도와줄게.”
물론 회의에는 서진이 아닌 흑룡가주가 참석한다.
하지만 조부가 철혈백가의 손을 들게 만들 방도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흑룡가주와 기갑가주의 표는 확실하게 네게 가도록 만들어줄게.”
“대신 이중던전에서 나오는 마나를 원하는 거겠지?”
“응.”
백화연은 짧은 침묵을 가진 후에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런데 현재로선 2차 던전에서 어떤 형태로 마나가 흘러나오는지 모르니까 점유 비율에 관한 사항은 나중에 협의해야 할 거야.”
“알아. 어쨌든 지금은 이중던전 가져오는 일에만 집중하면 돼.”
**
서진은 백화연에게 호언장담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 흑룡가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무슨 일이냐.”
한벽호는 언제나 그랬듯이 냉담한 표정으로 서진을 쳐다봤다.
“조만간 대한가문회에서 이중던전 건으로 중재 회의가 열릴 겁니다.”
서진은 서론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흑룡가주라면 대략적인 상황은 다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
“혹시 회의에서 철혈백가의 편을 들어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 것이냐.”
한벽호는 서진의 목적까지 단번에 눈치챘다.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있는지 말해 보거라.”
“부탁이 아닙니다. 거래죠.”
당돌하게 들린 서진의 발언에 한벽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거래라 함은 주고받아야 하는 것인데 너는 뭘 줄 수 있느냐.”
“이미 드렸습니다. 선유초로 인해 가문의 전체적인 전력이 증가했는데. 가주에게 이만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아직 후계자에 불과한 서진보다 누가 봐도 가주가 수혜자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스텟 상승의 효과를 체험한 헌터들은 서진에게 감사함을 품고 있지만, 어찌 됐든 그들을 통솔하는 가주는 한벽호였으니.
“흐, 하하하하!”
한벽호는 오래간만에 소리 내 크게 웃어버렸다.
새파랗게 어린 손자가 이런 식으로 거래를 끌어낼 줄 상상도 못 했으니까.
“계산에 철저한 놈이 웬일로 그냥 넘어가나 했더니, 기어코 값을 치르게 하는구나.”
한벽호는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중재 회의에서 철혈백가를 지지하도록 하지.”
**
적호검가의 가주실.
차분한 정적이 흐르고 있던 공간에 급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왔다.
“가주님!”
“총관, 소란스럽게 무슨 일이야.”
다혈질이라고 알려진 적호가주였지만 자신의 공간만큼은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총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목소리를 낮출 수 없었다.
“철혈백가에서 대한가문회에 중재 회의를 신청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전해야 할 시급한 이슈였기에.
“뭐라!”
콰앙!
적호가주는 책상을 거칠게 내려치며 눈을 번뜩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쉽게 던전을 가져가겠다는 말이구만.”
“그리고 흑룡검가의 후계자인 한서진이 철혈백가를 오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회의 건으로 얘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영악한 년. 벌써부터 손을 쓰고 있었구나.”
“하지만 회의는 가주급만 참석 가능하니 확신하기엔 이릅니다.”
적호가주는 실소하며 형형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총관아. 나를 안심시키려 일부러 좋은 말을 한 거냐,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냐.”
“죄송합니다.”
“조심해라. 어쨌든, 그년이 회의를 신청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야. 흑룡검가는 물론이고 평소 긴밀하게 지내는 기갑성가까지 넘어갔다고 봐야 돼.”
“대신 마도현가나 열화권가는 분위기가 다를 겁니다.”
소가주를 잃은 마도현가는 말할 필요도 없고, 열화권가의 후계자도 몇 달 전에 서진과 마찰이 있었으니.
‘소회합에서 덤볐다가 무참하게 졌었지.’
저번에 서진이 최초로 참석했던 소회합은 여러모로 파급력이 컸었기에 기억에 오래 남아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중립 가문이 문제야. 그 표를 가져와야 이길 수 있을 텐데.”
“그쪽은 아직 철혈백가도 뚫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한번 연락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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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적호검가의 차남인 박연우는 새로운 손님을 들이고 있었다.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 모르는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철혈백가와의 분쟁에 도움이 될 거라고 장담하니 속는 셈 치고 만나기로 한 것.
용봉산의 이중던전은 아버지가 관리를 맡긴 던전이다.
그렇기에 이번 분쟁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있었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자신의 가문 내 입지는 형님을 앞서게 될 터.
드디어 역전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박연우는 손짓으로 상대를 앉히며 입을 열었다.
“금사 길드라고 했던가? 어쨌든 길드장이 내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이 영상을 봐주시겠습니까.”
금사 길드장은 태블릿을 꺼내 블루게이트의 시험 장면이 담긴 영상을 틀었다.
“아니 무슨...”
시원찮게 대꾸하던 박연우는 영상 속 아이템의 진면목을 접하고 눈을 크게 떴다.
“마광병 탐지기? 어느새 이런 물건을 개발했다니.”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박연우는 금사 길드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크흠, 그래서 이 영상을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뭔데? 우리 가문을 통해서 판매를 하고 싶다는 거야?”
“죄송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이번 이중던전 분쟁에서 철혈가주와 흑룡검가의 한서진이 모종의 동맹을 맺은 건 알고 계실 겁니다.”
박연우는 턱을 괴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정황을 보면 당연하지. 용건을 빨리 말해.”
그의 재촉에도 금사 길드장은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철혈가주는 빈틈을 잘 보이지 않아 흔들기가 쉽지 않죠. 그렇다면 한서진을 건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박연우는 조금 흥미가 생겼다.
예일 공방 사건 때 공들여 작업하던 드레이크의 가죽을 서진에게 뺏겼으니까.
“어떻게 건드린다는 말이지? 흑룡검가와 전쟁할 생각이 아니라면 과격한 방법은 못 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뒤에서 여론을 만들어야지요.”
“무슨 여론?”
“2차던전에서 순도 높은 마나가 다량 검출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광병의 특징이 뭡니까?”
“마나에 많이 노출되거나 축적될수록 좋지 않지. 그리고 갈수록 더 많은 마나를 탐하게 되기도 하고.”
금사 길드장은 히죽 웃으며 눈을 빛냈다.
“바로 그겁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아하, 한서진에게 용봉산의 이중던전은 위험하다는 여론을 만들어내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한서진의 마광병 상태는 심각해서 용봉산 던전까지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한서진은 부정할 겁니다.”
이제야 어떤 계획인지 확실하게 파악한 박연우는 영상 속의 블루게이트를 쳐다봤다.
“그때 저걸로 검증하자고 하면 되겠군.”
“예. 그럼 여태까지 숨겼던 한서진의 마광병 진행 상태가 드러날 겁니다. 사람들에게 위험도가 명확하게 인식되면서 여론은 반전될 겁니다.”
박연우는 상상만 했는데도 벌써 재밌게 느껴졌다.
“그렇게 되면 중립 가문은 무조건 적호검가 쪽으로 돌아서게 되겠지요. 아니면 한서진에게 쏠리는 부정적 여론 때문에 백화연이 이중던전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긴 그럴지도 몰라. 철혈백가의 좋은 이미지에도 타격이 갈 테니까.”
금사 길드장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전체적인 계획은 이렇습니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기가 막힐 정도로 아주 좋아. 그런데 금사 길드의 목적은 뭐지? 이중던전에서 나오는 마나인가?”
“그렇습니다. 되겠습니까?”
“그럼, 당연히 가능하지.”
박연우는 일이 매우 잘 풀려가는 느낌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