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가문의 천재는 사실 귀환자-113화 (113/141)

113화

금사 길드장의 계획이 마음에 든 박연우는 실행을 위해 밑에서부터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이중던전 분쟁, 철혈백가에서 대한가문회를 통해서 처리하기로 했나 보네.

-적호검가의 억지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철혈가주가 대단하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속사정이 있더라.

└그게 뭔데?

-용봉산 던전을 철혈백가하고 흑룡검가 한서진이 나눠 갖기로 했는데 2차 던전에서 나오는 마나가 한서진에게 되게 위험하대.

└백화연하고 한서진이면 아주 좋은 조합인데 뭐가 위험해?

└한서진 마광병 있잖아.

-그런데 지금까진 딱히 이상 징후라던가 보인 적 없잖아.

└그게 더 무서운 거야. 언제 터질지 모르니까.

-그래도 한서진이 여태까지 해온 일들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건 조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당장 7레벨인 서진이 마인이 된다고 생각해봐. 나중에 가서 가족 잃고 후회해도 그땐 이미 늦음.

-어쩌다 보니 은근슬쩍 묻혔었지만 지금이라도 공론화를 시켜야 한다고 본다.

-마광병 환자인데 저런 마나가 넘쳐흐르는 던전은 왜 탐내는 거야?

적호검가에서 작업을 시작하자 반응이 슬며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서진의 호감도가 높아서 그간 쉬쉬해왔던 문제였기에 여론을 부추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정, 위험해 보이니 막아야 할 것 같음.

-여기서 백날 떠들어 봤자 대한가문회에서 다수결로 처리한다던데.

-이건 마관청에서 개입해서 적호검가가 이중던전 가지도록 만들어야 함.

-철혈백가도 위험성 인지했으면 차라리 포기하지.

└한서진만 쳐내면 되는데 철혈백가는 왜 끌어들이냐?

└이 새끼들 전부 다 적호검가 댓글 알바인 듯.

당연히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논란이 된 것 자체가 쾌거였다.

마침 협회장도 식물인간 상태라 마광병 헌터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나돌고 있는 상황.

덕분에 인터넷에서 시작된 불씨는 규모를 키워 현실까지 옮겨붙었다.

[한서진은 헌터를 그만둬라!]

[국회는 마광병 헌터 금지법을 제정하라!]

[철혈백가는 용봉산 던전을 포기해라!]

폭주한 마인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피해자 모임과 적호검가에서 투입한 선동꾼이 뒤섞여 시위하기에 이르렀다.

“크하하하하!”

그 모습을 티비로 보게 된 한치성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쯤 한서진은 엄청 당황하고 있겠지.”

적호검가 차남에게 금사 길드장을 통해 뒤에서 계획을 전달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한치성이었다.

적호검가와 직접 접촉하기보단 금사 길드장을 대리로 내세운 것.

결과적으로 한치성의 판단은 옳았다.

현재 흑룡검가는 철혈백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적호검가의 차남을 만났다는 게 알려지면 의구심 어린 시선을 받게 될 터.

“금사 길드장을 보내길 잘했군.”

달칵.

그때 한치성의 방에 레이나가 들어왔다.

“저거 네가 한 짓이었어?”

그녀는 티비에 비치는 시위대를 보며 말했다.

일반 헌터들보다 특히나 귀가 밝은 그녀는 짧은 혼잣말로 전후 상황을 파악해버렸다.

“살짝 등만 밀어줬지. 이제 한서진은 소가주는커녕 후계자 자리도 위험할 거다.”

레이나는 살짝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물밑에서 벌이는 협잡질은 달갑지 않았기에.

그녀는 해외 던전을 공략하고 다닐 땐 한치성에게 이런 면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면 한서진이란 남자가 유달리 그를 자극시키는 점이 있는 걸까.

‘저번에 던전을 떠넘겼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여튼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가문의 일을 자신이 무어라 간섭할 순 없는 노릇.

레이나는 찝찝함을 누르고 그를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내 부탁은 언제쯤 들어주는 거야? 기한이 한 달도 안 남은 건 알고 있지?”

레이나가 한치성의 팀에 들어가는 대신 내건 조건.

그건 천궁 길드장에게 궁술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한치성이 가능하다고 말해서 팀에 들어왔는데 성사되는 기미조차 보이질 않으니.

“적당히 재촉하지?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귀찮음을 눌러 담은 게 여실히 느껴지는 대답.

사실 한치성은 이미 레이나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에 시들해진 상태였다.

전에 한 번 시도하다가 한서진에게 아티팩트와 검까지 뺏기는 치욕을 당하며 김이 새기도 했고, 이젠 레이나는 없어도 크게 상관없었기에.

이제 한서진은 자신이 놓은 덫에 걸려 허우적거릴 일만 남았으니까.

“아, 그래.”

그런 한치성의 내심은 레이나도 은근히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싸늘한 눈초리를 흘리며 문을 닫고 나갔다.

‘조금은 신경 쓰는 척을 할 걸 그랬나.’

하지만 후회도 잠시, 이내 한치성은 관심을 끊었다.

애초에 이뤄주기 힘든 부탁이었다.

천궁의 길드장이 밑천을 선뜻 전수할 리가 있겠는가.

레이나는 자신의 사람이 될 것 같지 않으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이제 소가주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

한서진을 향한 격화된 여론과 시위대를 보며 웃고 있는 사람은 한치성뿐만이 아니었다.

“이걸로 철혈백가는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겠지.”

적호가주는 만족스러운 듯 수염을 씰룩였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가문회 내부에서 중재 회의 자체를 취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어요.”

적호검가의 차남, 박연우는 작전이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기에 당당한 자세로 아버지 앞에 서 있었다.

“그럼 이쯤에서 터트려야 하지 않겠느냐.”

“블루게이트 말이에요?”

“그래, 이 상황에서 마광병 테스트를 거절한다면 한서진에 대한 여론은 더욱더 곤두박질치게 될 거다.”

“그렇다고 테스트받는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완전히 진퇴양난에 빠진 거지. 연우 네가 고생했다. 이번 일 끝나면 수성구 청계사 던전도 네가 맡거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적호검가에서 보유한 던전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곳이다.

원래 형님이 관리하던 던전을 빼서 준다는 건 그만큼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

박연우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

“네가 보기엔 한서진 그놈, 마광병 수치가 얼마나 나올 것 같으냐.”

“적어도 60% 이상 되진 않을까요. 단기간에 레벨을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올렸으니 그만큼 마광병에 많이 잠식됐겠죠.”

“그런데 그놈은 어떻게 티를 안 내고 있을까. 그게 좀 수상하군.”

“어쩌면 흑마법 같은 거에 손댔을지도 모르죠. 그래봤자 이제는 강제로 까발려지겠지만요.”

적호가주는 주먹에 힘을 주며 안광을 번뜩였다.

“이번에 철혈백가의 기세가 꺾이면 조금씩 영역을 침범하며 반응을 살펴볼 생각이다. 언제까지 지방에 머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준비하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

며칠 뒤, 금사 길드가 개발한 블루게이트가 공개되고 서진을 규탄하는 시위대는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한서진은 블루게이트 테스트를 받아라!]

마광병 검사기가 나오자 일부 관망하던 사람들도 반응을 달리했다.

-한 번 정도는 확인해볼 필요는 있어.

-궁금하긴 하네.

-한서진이 어떻게 대처할지 그게 제일 기대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누구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결심했어.”

서진을 만난 백화연은 잔뜩 굳은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용봉산 던전 포기하려고.”

백화연은 아무 말 없는 서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사태가 너무 커져버렸어. 적호검가에게 이중던전의 모든 권한을 넘겨줄 생각이야. 그러면 차차 사그라들겠지. 아무래도 이번 사건, 그놈들이 고의로 키운 면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러면 철혈백가 손해가 막심할 텐데.”

금전적인 손실뿐만이 아니다.

한국의 양대 가문 중 하나인 철혈백가가 적호검가에게 굴복하게 되면 자존심에 상당한 스크래치가 남을 테니.

사실 철혈백가는 지금이라도 서진을 배제하면 쉽게 끝나는 일이다.

서진의 마광병과 엮여서 문제가 된 것이지 철혈백가는 원래 용봉산 던전의 주인이었으니까.

물론 백화연과 한서진이 친분이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그것조차 문제라고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주 일부일 뿐.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만 철혈가주인 백화연이 배제라는 쉬운 길을 선택하려 하지 않을 뿐.

“괜찮아. 손실은 회복하면 되니까.”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모습.

대놓고 편한 선택지가 있는데 미련하게 힘든 길로 가려고 하다니.

그녀답다는 생각에 서진은 작게 웃었다.

그러자 백화연은 짐짓 화난 척 눈썹을 올렸다.

“심각한 얘기하고 있는데 지금 웃음이 나와?”

서진은 이쯤에서 숨겼던 사실을 공개하기로 했다.

더 늦었다간 백화연의 분노를 감당하기 힘들 테니.

“던전 포기 안 해도 괜찮아.”

“응?”

“나 마광병 치료했거든.”

“으응? 무슨 소리야?”

백화연은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편이 빠르겠지.”

서진은 상태창을 열어서 백화연에게 보여주었다.

8레벨이 되면서 추가된 투신전 기능 중의 하나였다.

당연히 가신에게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타인의 상태창을 처음 본 백화연은 어깨를 흠칫 올리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정말이네?”

백화연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서진을 노려봤다.

“왜 이제 말했어!”

툭.

서진의 가슴팍에 그녀의 주먹이 힘없이 닿으며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괜히 걱정했잖아.”

“미안.”

주먹을 타고 백화연의 심정이 느껴지는 탓에 서진은 사과를 안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마음을 추스른 백화연은 살짝 붉어진 눈매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쟤네 지금 죄다 헛짓하고 있다는 거네?”

“그렇지.”

“던전 포기하겠다고 말한 거 취소. 적호검가에 그대로 갚아줘야겠어.”

“우선 나는 블루게이트 검사받겠다고 말해놓을게. 자기네들이 검증해준다는데 감사히 이용해야지.”

이건 애초부터 서진이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

일주일 후, 대한가문회의 서울지부.

컨벤션 홀의 단상 위에는 2미터 높이의 블루게이트가 보란 듯이 놓여있었다.

단상을 마주 보고 있는 수백 개의 좌석에는 사람들이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제일 앞줄에 앉은 적호가주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새어 나오는 비웃음을 참고 있었다.

“한서진도 이런 식으로 치부가 공개될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적호검가와 금사 길드가 특별히 신경 써서 마련한 자리였다.

이제 한서진의 마광병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이 직접 보게 될 것이다.

박연우도 빳빳하게 목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철혈백가는 끝끝내 한서진을 포기하지 않았던데. 멍청한 선택이죠. 무의미한 의리 때문에 가문에 손해를 감수하다니.”

“그래도 도망치지 않고 응한 걸 보면 일말의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말이다.”

팟!

그때 주변이 어두워지고 천장의 조명이 일시에 블루게이트를 비추었다.

그리고 금사 길드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흑룡검가 한서진 후계자님의 블루게이트 시연식을 거행하겠습니다.”

탁.

서진이 단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서진은 망설임 없이 블루게이트로 다가갔다.

“왜 웃고 있지?”

서진의 얼굴을 본 박연우는 갑자기 불안감이 강하게 들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