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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가문의 천재는 사실 귀환자-115화 (115/141)

115화

차가운 눈빛으로 좌중을 쓸어내린 서진은 블루게이트로 발걸음을 돌렸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 작게 안도하는 사람들을 뒤로하며 한 번 더 테스트를 거쳤다.

[0%]

역시나 마찬가지의 결과.

박연우의 근거 없는 추측은 단지 억지였던 것이다.

“이제 됐습니까?”

나직한 서진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몇몇이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적호검가의 차남을 일검에 박살 내버린 서진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색다른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것은 현장에 있는 이들은 물론이고 화면 너머의 시청자까지 전달되기에 충분했다.

-한서진 저런 모습은 처음 보네.

-뭔가 무서운데 간지남.

-마광병인줄 알고 개지랄 쳤는데 알고 보니 아니라서 쫄리는 인간이 한둘이 아닐 듯.

-한서진 많이 빡친 것 같은데 그러게 적당히 건드렸어야지.

-근데 솔직히 완치한 줄 예상한 사람 있냐? 난 상상도 못 함.

마찬가지로 한치성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블루게이트로 인해 마광병이 증폭됐어야 했는데.

증상이 악화되기는커녕 아예 완치된 상태였을 줄이야.

박연우가 악을 쓰며 내지른 주장에 일말의 희망을 기대었지만 소용없었다.

일검에 박연우를 쓰러트렸다 한들 순간 검에 담겼던 힘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럼에도 흐트러짐 없는 기세와 여전한 검사 결과.

부정하고 싶어도 한치성의 냉철한 이성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말로 치료했다는 건가?

세계의 어느 병보다 난해하다고 평가받는 마광병을?

솔직히 이해되진 않지만 언제까지나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한치성은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강하게 짓눌렀다.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판이 사실은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었다니.

이보다 끔찍한 악몽이 있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어쩐지 마광병의 부작용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했더니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서진은 지금까지 일부러 방관했다는 얘기다.

극적인 상황 반전을 위해서.

처음부터 한서진에게 놀아난 셈.

한치성은 뒤늦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다음 계획을 전면 파기했다.

판이 뒤집혔으니 그에 맞는 행동 방식을 새로 정립해야 했다.

**

“도련님!”

적호검가의 헌터는 박연우에게 뛰어가 몸 상태를 살폈다.

“어떻지?”

목소리가 갈라진 듯한 적호가주의 질문에서 폭풍전야의 격노가 느껴진다.

적호검가의 헌터는 마른침을 삼키며 침통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지는 곳곳이 골절되었고 마나 경로도 심하게 손상됐습니다. 당장 치료를 받으셔야 됩니다.”

적호가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박연우는 들것에 실려 컨벤션 홀을 벗어났다.

아들의 처참한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은 적호가주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서진.”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당장이라도 뽑을 기세의 흉흉한 눈빛.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대꾸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제가 잘못한 줄 알겠습니다. 그쪽 아드님이 먼저 대결을 신청했다는 걸 잊지 마시길.”

까득.

명분은 완벽하게 서진에게 있었다.

허나 이성과 감성은 별개의 영역인 법.

눈앞에서 아들이 곤죽이 됐는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적호가주는 검 손잡이조차 움켜잡지 않았다.

가주로서의 책임감이 초월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게 하였기에.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쥔 적호가주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자리를 떴다.

“적호가주.”

백화연이 그를 불렀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열릴 중재 회의에 불참 의사를 내비친 것이었다.

참석해봤자 의미가 없을 정도로 상황은 기울어버렸으니까.

**

중재 회의 표결 결과는 당연히 철혈백가의 승리였다.

이로써 용봉산 던전은 무사히 철혈백가가 공략권을 이양받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호검가는 패배의 대가로 용봉산 던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서진을 향한 여론의 칼날이 적호검가를 향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죗값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처음 시작은 적호검가가 부추겨서 만들어냈지만 어느새 비대해진 여론은 적호검가의 손을 떠나있었다.

적호검가는 애초에 작전이 실패할 경우를 상정하지 않았기에 후폭풍은 훨씬 치명적으로 다가갔다.

“인터넷에서 여론몰이한 증거와 시위대 동원해서 선동한 인간들도 전부 잡혔어.”

백화연은 집무실에서 민나희가 건네주는 서류를 받으며 입을 뗐다.

“얌전히 중재 회의만 기다렸으면 가문이 추해지진 않았을 텐데.”

칼자루를 쥔 철혈백가는 적호검가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용봉산 던전뿐 아니라 다른 수익성 좋은 던전까지 넘겨받기로 약속받은 것이다.

물론 서진 덕분에 가능했던 일인만큼 철혈백가보다 흑룡검가가 가져가는 비율이 더 높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가문의 수익이 급감한다는 것은 전력의 약화를 의미했다.

거기다 대한가문회를 통해서 적호검가 무력부대의 헌터 수 제한까지 걸어버렸으니 이는 호랑이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과 같다.

하지만 적호검가는 군말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명분을 확보한 철혈백가에서 철혈단을 앞세우며 전면전의 의사를 드러냈기에.

적호검가가 중견 가문 중에서 강하다고 해도 아직 철혈백가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거기다 서진까지 건드렸으니 여차하면 자호대나 흑룡대가지 상대해야 할 판.

여론까지 등 돌린 상황에서 적호검가가 전쟁을 불사하기엔 너무나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조금 과했나?”

민나희는 다른 검토 보고서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가문의 헌터들은 가주님의 결정에 반색하는 분위기입니다.”

“밖에는?”

“당할 만하다, 속 시원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입니다.”

“...흐음.”

미묘한 간극으로 흘러나온 백화연의 반응.

민나희는 총명예지한 어린 가주님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갔다.

“일부는 무시하세요. 가주님은 바른 판단을 하신 겁니다.”

“네 생각은 어때?”

백화연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넓은 책상 건너편 소파에 앉아있는 인물에게 질문을 돌렸다.

“조금 아쉽지. 이참에 없애버릴까 했는데.”

훨씬 막 나가는 서진의 대답에 백화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서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인기 많아졌다고 급발진하기야?”

적호검가의 잘못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서진이 왜 이중던전을 원했는지 또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완치했음에도 마광병 신약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서진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후계자 한서진이 용봉산 던전을 탐냈던 이유]

[사람들은 한서진을 욕했지만 진실은...]

[진정한 리더의 모습, 한서진]

이런 기사들이 줄지어 나오며 서진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작 서진은 그다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백화연은 농담에 반응조차 안 하는 서진을 흘겨보며 주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이번 중재 회의에서 좀 특이한 점이 있었어.”

“뭔데?”

“마도현가에서 가주의 딸이 대리자로 나왔더라구. 소문이 정말인가 싶네.”

“소문?”

“못 들었어? 최근에 마도가주가 대외적으로 전혀 모습을 안 드러내고 있잖아. 그래서 건강이 위독한 거 아니냐는 얘기가 많거든.”

“그럼 그 딸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나?”

“민감한 얘기일지도 모르는데 대놓고 하기엔 좀 그렇지. 그래도 슬쩍 떠보긴 했는데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포기했지.”

“그래?”

마도현가의 소가주를 죽였던 서진에겐 가볍게 흘려들을 순 없는 정보였다.

“가주의 딸이 지금 몇 살이지?”

“현소예, 올해로 딱 스물이야. 그런데 벌써 5레벨이라고 하니 재능은 타고났지.”

그렇다고 해도 가주직을 넘겨주기엔 너무 어린 나이이며 성취도 충분치 않다.

아니면 그만큼 불가피한 상황이란 것일까.

생각에 잠기던 서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 한 통을 받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서진 님, 검이 완성되었습니다]

새로운 검을 받으러 가야 했기에.

**

깊이를 알기 힘들 정도의 탁한 호수.

호수 중앙에는 섬처럼 동떨어져 있는 언덕이 불쑥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동산과 같은 언덕 위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성이 고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누구든 바로 카메라를 꺼낼 정도로 훌륭한 풍광이나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연적으로 숨겨진 것이 아닌 인위적인 결계가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아아악!

능선이 바라보일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고성의 첨탑 꼭대기에서 세찬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자욱이 깔린 먼지가 나부끼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늦었군. 게일러.”

이미 첨탑의 원탁에 앉아있던 선객 중 한 명은 뒤늦게 온 흑마법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하네. 내가 사는 곳과 거리가 멀어서.”

“걸어서 오는 것도 아니면서 핑계는.”

그때 중절모를 눌러쓰고 회색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대화를 끊었다.

“자, 잡담은 그쯤하고 본 주제를 꺼내도록 하지.”

“릴튼이 죽은 일 때문에 그래?”

등에 대검을 메고 포니테일로 시원하게 목을 드러내고 있는 여성은 시큰둥하게 질문했다.

그에 중절모 남자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릴튼 뿐만이 아니네. 리치 소환 계획을 저지하고 안드레이, 알렉세이까지 죽인 인물이 전부 동일인이라는 것이지. 흑룡검가의 한서진. 실버울프도 놈이 가져간 걸로 파악되네.”

“그야말로 사사건건 방해하는 수준이군.”

“우리한테 원한이 있는 거 아닐까? 아핫.”

“그래서 어쩔 셈이지?”

원탁의 인물들이 각자 의견을 표출하자 중절모 남자의 눈동자는 어느 한 곳을 향했다.

완연한 봄이 지나고 있는 계절임에도 두꺼운 검은 코트를 두르고 있는 남자.

지금까지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채 가만히 앉아있던 사내였다.

“한서진의 처리는 저 남자가 맡기로 했네.”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지만 원탁에 앉은 이들은 전부 일신의 경지를 이룩한 존재.

처음 참석한 남자였지만 그들은 진작에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잘난 가주 양반이 왜 여기에 무게 잡고 앉아있었는지 이제야 알겠군.”

“....”

잠시 정적이 지나가고 중절모 남자는 다른 주제를 꺼냈다.

“게일러, 소환 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백야는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물색해서 후보지를 좁혀놨다. 리스크는 올라가겠지만 언제까지나 미루는 것도 능사가 아니니까.”

게일러는 안드레이가 사망한 후, 그가 진행하던 일을 이어받아서 하고 있었다.

중절모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릴튼이 죽긴 했지만 마력석 공급에 차질이 생겨선 안 되네.”

“알고 있어.”

**

좋은 소식은 이따금 갑작스레 찾아오기도 한다.

그것이 한때 자신이 뿌렸던 씨앗 때문이라면 반가움은 더 크기 마련이다.

-서진 씨!

잔뜩 상기됐으면서도 울먹거림이 느껴지는 목소리.

“네.”

서진은 임유나가 무슨 말을 전할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잠깐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스피커 너머 들려오더니 이윽고 전화를 걸어온 이유를 토해낸다.

-할아버지가 깨어나셨어요!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건조하게 대답한 서진이지만 미세하게 담겨있는 감정의 종류가 무엇인지, 옆에 있는 설하윤은 알 수 있었다.

-저기, 할아버지가 서진 씨를 찾으시는데 혹시 오실 수 있으신가요?

“지금 가도록 하죠.”

마나를 주입했던 당사자로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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