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서진의 성장 핵심 스킬인 투신공의 근간은 투기 감지다.
생명체가 품고 있는 투기의 농도와 크기에 따라 흡수되는 스텟의 양이 결정된다.
즉 서진은 누구보다. 예민하게 살기를 눈치채는 능력을 갖췄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서진은 눈앞에서 대련을 하고 있는 지원자를 싸늘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나름 기운을 잘 갈무리했지만 서진의 눈에는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헌터에 비해 수십 배나 짙은 살기가 말이다.
물론 저만한 살기를 품는다는 게 불가능한 일은 전혀 아니다.
오랜 기간 전장에서 굴러먹은 용병 헌터라면 가능하니까.
하지만 저 자는 기껏해야 서른 초반.
이력서를 보니 31살로 기재되어있다.
이름은 유하훈.
경력을 봐도 용병 일 하던 헌터는 아니다.
거기다 용병으로서 쌓아온 살기와는 그 기질이 사뭇 다르다.
많지 않은 나이에 저런 살기를 지니려면 답은 사실상 하나뿐이다.
‘청부업.’
서진은 찰나의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이상함을 눈치챌 테니.
하지만 머릿속에 돌아가는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목적이 뭐지?’
아직은 무엇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서진을 그를 뽑는 데에 찬성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떨어트려봤자 다른 방법으로 오기 마련.
그럴 바엔 눈에 닿는 곳에 두는 편이 낫다.
“감사합니다!”
어느새 대련이 끝나고 유하훈은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흑룡대장, 유하훈 헌터는 붙여.”
“역시 서진 님도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어, 한번 지켜보고 싶네.”
**
잠입은 언제나 피를 말리는 일이다.
익숙해지고 싶어도 항시 변하는 환경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내심 즐기고 있기에 이번에도 의뢰를 받아들였다.
뒤따라오는 보수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지만 말이다.
‘지금까진 순조롭다.’
유하훈 아니, 루벤은 지금까지의 행동을 차분히 점검했다.
머릿속에서 복기하면서 실수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루벤이 청부업을 하면서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좋아. 특별히 이상은 없어.’
마지막 대련 심사 때 흑룡검가의 장손이 앉아있던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무난히 지나갔으니.
‘한서진도 소문과 달리 별거 아니었어.’
공략 못 한 던전이 없고, 잠입한 흑마법사도 잡아낸 전적이 있어서 나름 긴장했는데 전혀 눈치를 못 챘으니.
‘역시나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지.’
어쨌든 이제 흑룡대에 들어온 이상, 반쯤은 이미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다.
가디언 길드장의 막내딸, 레이나 블랜차드를 암살하기 위한 조건은 거의 다 갖추어졌으니까.
외부인 신분으론 알아내기 힘들었던 레이나의 주요 동선도 전부 확인했다.
이제 그에 맞는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면 끝.
루벤은 공작에 필수인 산마독(散魔毒)과 수혼제(睡昏劑)를 확인했다.
산마독은 일시적으로 마나를 흩트려서 못 쓰게 만들고, 수혼제는 잠복 시간이 지나면 의식을 잠재우게 한다.
둘 다 만들기도, 구하기도 힘든 물건.
‘그만큼 의뢰주가 레이나를 죽이고 싶다는 거겠지.’
이런 독까지 쥐여주며 의뢰를 넣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이번 일은 조금 편하겠어.’
독을 은밀하게 넣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 있으니까.
루벤은 스산한 눈빛으로 자신의 얼굴 피부를 매만졌다.
유하훈이란 껍질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한 달.
트랜스폼 스킬의 효과가 끝나기 전에 암살을 마치고 흑룡검가를 떠나야 한다.
**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저녁.
쐐애액!
화살 하나가 바람을 타고 날아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천 미터 가까이 되는 거리에 노을빛마저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화살은 길을 잃지 않았다.
활을 쏘는 이의 경지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무언가 불만족스러운지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다시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순간적으로 강한 바람이 불어 금빛 머리칼이 휘날렸지만 그녀의 시선은 과녁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천천히 호흡이 잠시 멎었을 때 화살이 다시 쏘아졌다.
팍!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화살촉은 과녁의 중앙에서 벗어난 곳에 박혀 들어갔다.
화살이 꽂힌 위치를 확인한 레이나는 활을 힘없이 내렸다.
“갈까.”
평소 레이나는 집에 가기 전에 항상 이 연습장에 들려서 활을 쏘는 것이 일과였다.
그런데 오늘 궁술은 자신이 생각해도 형편없는 수준이다.
피곤하긴 해도 저렇게나 빗나가다니.
하지만 가방을 챙기려던 레이나는 고개를 젓고 다시 활을 들었다.
컨디션이 안 좋다고 끝내기엔 오기가 생긴 탓이다.
레이나는 집중력을 되살리며 화살을 집었다.
잡념을 지우며 화살을 얹고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화살을 놓은 순간, 레이나는 강한 살기를 감지했다.
타앙!
그녀는 후방에서 날아온 단검을 다른 화살대로 쳐냈다.
그리고 바로 마나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으윽.”
갑자기 덮쳐온 강한 복통에 레이나는 서 있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누구...야.”
단전에 있는 마나가 멋대로 흩어져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거기다 정신도 흐릿해져서 몸을 제대로 가누는 것조차 힘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에 당한 게 분명했다.
‘도대체 언제?’
레이나는 의문을 접어두고 화살을 움켜쥐었다.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레이나가 도주로를 살피려는 찰나, 다시 단검이 날아들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있는 그녀는 어깨를 틀어서 피해낸 뒤에 화살을 손으로 날렸다.
카앙!
근거리에 화살을 받아친 루벤은 내심 놀랬다.
‘마나를 못 쓰고 있는데도 제법이군. 과연 7레벨의 천재 궁사라는 건가. 하지만 그래봤자.’
가볍게 도약한 루벤은 검을 빼 들어 내리쳤다.
레이나는 뒤로 피하며 도망가려 했지만 루벤이 바로 막아섰다.
루벤은 독 안에 든 쥐를 다루듯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레이나는 화살로 막아보려 했지만 마나가 서린 검을 버티지 못하고 잘려 나갔다.
5레벨에 불과한 루벤이지만 7레벨인 레이나를 압도하고 있다.
레이나가 가문 바깥에서 저녁을 먹을 때 자신도 모르게 삼킨 산마독과 수혼제 덕분이었다.
사각!
고레벨 헌터라도 마나를 못 쓰는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궁사인 그녀로선 접근전이라서 더욱더 불리했다.
“크윽!”
결국 허리춤에 있는 화살도 다 떨어지자 레이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사주한 거지?”
상대는 아마도 살인을 전문으로 하는 청부업자.
하지만 레이나는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암살 청부 대상에 오를 정도로 원한을 쌓은 적은 없었으니까.
“....”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루벤은 침묵을 유지하며 검을 뻗었다.
정확하게 심장을 찔러 들어오는 검.
산마독과 수혼제에 잠식된 레이나는 더 이상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검이 그녀의 심장 위 옷깃에 닿으려는 순간, 한 줄기 벼락이 루벤 위로 내리꽂혔다.
콰릉!
“끄윽...!”
검은 번개는 루벤을 전신을 뒤덮었다.
중추신경계를 관통하는 고통에도 루벤은 필사적으로 의식을 부여잡았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끼어들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루벤은 바로 도망가야 한다는 본능적인 판단으로 손목에 감겨있던 연막탄을 떨어트렸다.
치이익!
짙은 회색 안개가 삽시간에 넓은 범위로 퍼져나간다.
인간의 오감은 물론이고 헌터의 전유물인 기감마저 마비시키는 연막탄이다.
‘이걸로 됐어.’
루벤은 전격을 맞아서 마비된 육체를 힘겹게 움직였다.
체내 마나를 최대로 활성화 시키자 감각이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다.
‘안개가 꺼지기 전에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하지만 루벤의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컥!”
곧바로 서진에게 잡혀서 기절당했기 때문에.
**
“본명은 루벤 워커. 영국 출신입니다. 목적은 레이나 블랜차드의 암살. 한국에서 유하훈을 죽이고 스킬로 외관을 교체한 뒤에 흑룡대에 지원했다고 합니다.”
루벤에게서 정보를 뽑아낸 감찰각주는 서진에게 보고했다.
“의뢰주는 포스터 길드의 지원처장입니다.”
“포스터 길드?”
“영국에서 가디언 길드 다음으로 영향력과 무력이 강한 길드입니다. 그러니 실제 의뢰주는 포스터 길드장이라 보는 편이 맞을 겁니다.”
“그렇겠지.”
산마독과 수혼제는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이 아니다.
거기다 경쟁 길드의 막내딸에 대해 독단으로 암살의뢰를 넣을 리가 없으니.
다만 표면상으로 여차할 때 꼬리 자르기를 위해 그리 한 거겠지만.
“그런데 단순히 경쟁 길드라는 이유만으로 암살하려고 들진 않았을 텐데?”
“예, 알아보니 두 달 전에 포스터 길드장의 딸이 자폭 테러로 사망했는데, 그 테러를 저지른 헌터가 가디언의 길드원이었습니다. 다만 테러를 자행했을 당시에 그 헌터는 보름 전에 가디언 길드에서 축출된 상태였습니다.”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겠네.”
가디언 길드에서 쫓겨난 헌터가 보름 뒤에 포스터 길드의 딸을 테러로 사살.
너무 노골적인 정황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헷갈린다.
정말 죽이려고 했다면 최대한 은밀하게 하였을 텐데.
하다못해 테러의 시기를 늦추기만 했어도 의심을 덜 받게 될 터.
가디언에서 계획한 테러라 하기엔 너무 미숙한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절묘하다.
“당시 가디언 측에선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차에 범죄까지 저질러 길드에서 추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범죄?”
“밤길에 시비가 붙어 지나가던 일반인을 폭행했다고 합니다. 근처에 다른 헌터가 말린 덕분에 심각한 사태까지는 안 갔습니다.”
“정신적인 문제는?”
“일 년 전에 아내가 병으로 죽고, 반년 전에 친한 동료가 던전에서 사망하고 나서부터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멀쩡히 던전에 드나들던 헌터도 생존의 위협이나 동료의 죽음을 겪고 나면 트라우마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특히나 던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겪는 공포에서 비롯된 정신적 외상은 잘 낫지도 않는다.
“가디언 길드 측에선 정말 억울할 수도 있겠는데.”
“그래서인지 여론은 반반입니다. 안타까운 불행으로 인한 우연이라는 주장과 계획된 범죄라는 주장이 서로 팽팽합니다.”
“둘 중에 포스터 길드장은 후자를 믿기로 했나 보군.”
“그런 것 같습니다.”
보고를 끝낸 감찰각주는 줄곧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서진 님, 루벤이 암살자인 건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그냥 보이던데.”
“네?”
그러고선 서진은 각주실을 나갔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분이야.”
감찰각주는 서진이 나간 방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
서진의 집에서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드래곤의 알.
알이 계속 덩치를 키워나간 결과, 어느덧 방 천장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흔들.
누구도 만지지 않고 마나를 불어넣지도 않았는데 미세하게 좌우로 움직인다.
부화가 코앞이라는 의미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실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서진이 데려온 실버울프, 베리크는 집 앞마당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쩌저적!
아무도 봐주고 있는 이가 없는 상황 속에서 한 개의 금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