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레이나!”
영국에서 한국으로 바로 날아온 가디언 길드장, 프레드릭은 가장 먼저 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빠.”
“어디 안 좋은데는 없어?”
전화상으로 이미 들었음에도 직접 눈으로 다시 확인하는 건 아빠로서 당연한 행동이었다.
“괜찮아. 7레벨이잖아. 쉽게 안 다쳐.”
그런데 5레벨 암살자에게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프레드릭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
괜히 딸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본인도 아마 이번에 느끼는 점이 많을 테니.
“다행이구나.”
“그런데 아빠.”
“응?”
“두 달 전에 레스터 광장에서 일어났던 자폭 테러, 우연인 거 맞지...?”
서진에게 암살 배경을 전해 들은 레이나의 질문이 직구처럼 들어갔다.
온전히 믿는 것인지 아니면 믿으려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프레드릭은 딸의 눈빛을 외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길드 운영을 하면서 우리 딸에게 부끄러울 만한 일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것만큼은 약속할 수 있어.”
길드 차원에서 헌터 관리를 세심하게 케어하지 못한 건 잘못이긴 하지만 계획 범죄는 결코 아니었다.
세간의 오해는 짊어져야 할 몫이지만 딸이 불필요한 걱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응.”
프레드릭의 진심이 통했는지 레이나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딸 구해준 사람을 보러 가야겠구나. 한서진이라고 했었지.”
**
❴한서진❵
【레벨】8
【특성】투신전, 독 내성(Lv.8), 화염 내성(Lv.7)
【스텟】근력905 체력887 민첩890
마력999 지력956
【스킬】흑룡검술(8성) 투신공(8성) 점멸(8성) 용체화(웜) 뇌영환보, 마나전개, 공용마법(Lv.5) 원소마법(Lv.5)
【연결】샬롯(해츨링)
9레벨 조건은 3개의 스텟이 3000을 넘어서야 한다.
투신공이 아니라면 까마득하게 느껴졌겠지.
일반적으로 몇십 년의 시간을 쌓아야 도달할 수 있는 레벨이다.
아니면 안드레이처럼 힘을 빌려오거나.
스킬을 훑어본 서진은 제일 밑에 새로 생긴 항목을 눌렀다.
[마나 공유 : 5%]
역시라고 해야 할까.
아직은 전체 마나가 아닌 5%만 가능했다.
“점진적으로 올려 나가야 하겠네.”
가져올 수 있는 마나가 늘어난다면 대규모 마법을 사용할 때도 부담이 훨씬 덜하겠지.
그런데 비율은 어떻게 올리지?
계속 같이 지내면 자연히 올라가는 건가.
서진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가디언 길드장이었다.
그는 성큼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먼저 레이나를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서진의 아버지뻘 나이에 영국에서 제일 강한 길드를 이끌고 있는 수장임에도 스스럼없이 존댓말을 쓰는 그였다.
“아닙니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가문 내에서 일어난 일이니까요.”
프레드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국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한 오해가 한국까지 여파를 미쳤으니.
그리고 이제 포스터 길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지원처장이 의뢰했다지만 실제 의뢰주는 길드장일 터.
아직 대외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순간, 두 길드 간의 전쟁이 시작되겠지.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는 없지요.”
딸이 구명 받은 이상, 프레드릭은 어떤 것이든 내놓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말씀드리죠.”
가디언과 포스터가 전쟁하든 말든 서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나가의 미궁 공략 권한.
“가디언 길드가 갖고 있는 던전에 들어가려 합니다.”
“어떤...?”
“나가의 미궁 던전, 공략 권한을 주시죠.”
그러자 은혜에 대해 보상을 하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프레드릭은 즉답하지 못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탁이기에.
“최근 그 던전의 환경이 격변한 건 알고 있습니까?”
“알고 드리는 요청입니다.”
“흐음.”
확고한 서진의 눈빛에 프레드릭은 침음을 내뱉었다.
이건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가의 미궁은 가디언 길드가 소유한 던전 중에서 제일 많은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던전 구조가 변한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뚝 끊겼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다.
꾸준하게 탐사하다 보면 예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지도를 만들어낼 테니까.
몬스터가 더 강해진 만큼 사체 가치와 마력석의 등급도 올라갔다.
지형만 파악되면 이전보다 훨씬 많은 수익이 보장될 터.
하지만 이 모든 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가설일 뿐이다.
던전 환경이 한번 공략하면 사라지는 일회성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까.
아직 미궁 끝까지 가보지 못했으니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지금 미래 예상 수익이 아깝다는 이유만으로 머뭇거리는 건 아니었다.
현재 나가의 미궁은 헌터를 집어삼키는 마경이나 마찬가지다.
은인을 보냈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곤혹스러운 일이 있을까.
“혹시 나가의 미궁에 들어가고 싶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개인적인 호기심입니다.”
프레드릭은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다는 서진의 뜻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계속 평생선 같은 대화를 이어갈 순 없으니 프레드릭은 본심을 털어놓았다.
“부탁을 들어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나가의 미궁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자살하러 가는 건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계에서 나가의 미궁은 수없이 드나들었다.
나가엘리가 만들어낸 미궁구조 또한 서진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솔직히 말리고 싶지만 확고하다면 어쩔 수 없겠죠.”
프레드릭은 서진의 의지에 백기를 들었다.
은인이 저렇게나 원한다는데 멋대로 안된다고 뻗대는 것도 내키지 않았기에.
**
“제정신이야?”
서진이 나가의 미궁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정보건은 일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 안 하는 건데 괜히 내가 그 얘기를 꺼내서...!”
“무슨 소리야. 덕분에 좋은 정보 알았는데.”
정보건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타이밍 좋게 가디언 길드장에게 조건을 얘기하지 못했겠지.
“거기 진짜 위험하다니까?”
“괜찮으니까 그냥 믿고 있어. 형.”
“후우, 하기야 네가 그동안 해온 일을 생각하면 죄다 믿기지 않는 것뿐이지만.”
정보건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서진 옆에 있는 설하윤에게 말했다.
“이 녀석 말릴 생각은 없습니까?”
“전 따라갈 뿐입니다.”
“괜히 물어봤군요. 그런데 서진아, 저 늑대는 어디서 주워온 거야?”
정보건은 마당에 있는 베리크를 가리켰다.
“산에서.”
“되게 크네.”
베리크는 단순한 늑대가 아니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서진의 명령 때문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베리크를 정보건이 묘하게 쳐다봤다.
“왠지 저 늑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기분 탓이야.”
**
일주일 후, 서진은 나가의 미궁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나오세요.”
프레드릭은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가디언 길드 측 헌터를 붙여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거절당했다.
던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서진으로선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프레드릭은 모르니 불안할 뿐이었다.
그나마 진입하고 나서 입구가 닫히는 건 아니기에 바로 빠져나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실 길만 잃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시 나올 수 있다.
문제는 그게 상당히 어려워서 죽어나간 헌터들이 많다는 것.
미궁 초입이라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그래서 현재 지도도 입구 부분만 그려진 상태였다.
프레드릭은 진작에 그 공략 지도를 서진에게 건네주었다.
확인된 지형에서만 돌아다니길 바라면서.
‘지도를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지.’
무조건 끝까지 들어갈 것처럼 느껴졌다.
그 때문에 프레드릭은 딸의 눈치까지 봐야만 했다.
구해준 사람을 사지에 보내는 격이니.
물론 몰아넣은 게 아니라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말한 거지만.
“그런데 그 늑대도 던전에 데려가는 겁니까?”
매끄러운 은빛 털이 프레드릭의 눈길을 끌었다.
설하윤의 미려한 외모에 비등할 정도로 시선을 모으고 있는 베리크였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던전 진입 준비를 마쳤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던전에 진입하니 제일 먼저 축축한 공기가 코를 타고 들어온다.
들었던 대로 바닥과 벽, 천장이 온통 보라색을 띠고 있다.
전방에는 폭이 넓은 복도가 다섯 갈래로 펼쳐져 있다.
“어디로 가면 되는 거야?”
이족보행 하는 실버울프로 돌아온 베리크가 두리번거렸다.
서진은 정중앙 통로를 가리켰다.
“그대로 걸어가면 돼. 대신 마나를 움직이지는 마.”
이 구간에서 괜히 경계한답시고 마나를 끌어내면 미궁에서 선사하는 환각을 보게 된다.
그리고 환각에 빠지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서진도 딱히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경험으로 각인된 정보였다.
키이익!
복도를 걷는 도중에 나가 세 마리가 존재를 알리며 다가왔다.
이 길을 아무나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나가를 상대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내는 순간 환각에 빠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
그래서 프레드릭이 건네준 지도에는 정중앙 통로가 아니라 제일 우측 통로가 답이라 적혀있었다.
잘못된 길은 아니지만 상당히 돌아가야 하는 코스다.
당연히 그 길로 갈 생각이 없었다.
서진은 투기를 일으켜 붉은 반월을 쏘아 보냈다.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한 나가들은 반으로 갈려나갔다.
“저건..”
설하윤은 나가의 사체에 다가가 떨어진 무기를 주워들었다.
나가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었다.
“서진 님. 이 무기 혹시?”
“네, 미궁 던전에서 죽은 헌터의 것이겠죠.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무기별로 어떤 효과를 낼지 모르니까.”
이계와 달리 다양한 무기를 지닌 나가를 처치하기가 더 까다로울지도 모른다.
나가의 미궁도 이전보다 진화했으니 깊숙이 들어갈수록 힘들긴 하겠지.
하지만 미궁 끝에 있을 나가엘리를 죽였을 때 나오는 아이템을 생각하면 별것 아니다.
막대한 마나에 날렵함과 교활함을 겸비하고 있는 ‘나가라자’를 죽이는 데 도움이 되는 물건을 얻을 수 있으니.
전투 과정에서 쌓일 스텟은 덤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마나를 쓰면 안 되는 거야?”
베리크가 답답한지 불평을 늘어놓는다.
“조금만 참아. 조만간이니까.”
“크릉.”
이계에서도 뱀 득실거리는 곳이 싫어서 미궁에 얼씬도 안 했던 베리크는 얼른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서진은 그 뒤로 계속 튀어나오는 나가를 죽이며 일직선으로 이어진 통로를 걸어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단조로운 길의 끝에 도달했다.
“이건 또 뭐야?”
통로를 나오자 칠흑 같은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칠흑 같은 돌풍은 어둠을 걷어내고 통로 끝의 정경을 훤하게 드러냈다.
시야가 탁 트이는 거대한 동공, 불규칙적으로 놓인 나가의 석상들이 기묘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일반 나가의 열 배쯤은 돼 보이는 석상들은 동공의 끝을 등진 채 서진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서진의 시선은 석상을 보고 있지 않았다.
동공의 중앙에서 9레벨에 준하는 마나를 흘리며 서 있는 사내.
그는 후드를 천천히 벗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라 기억할지 모르겠군.”
서진은 그의 정체를 바로 알아봤다.
“마도가주.”
동시에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한서진 후계자님. 마도현가 가주대리 현소예라고 합니다.’
서진이 나가의 미궁에 도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 그의 딸이 찾아왔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