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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가문의 천재는 사실 귀환자-120화 (120/141)

120화

사흘 전, 그믐달이 뜬 심야에 현소예가 서진을 몰래 찾아왔다.

그러고선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서진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마도현가에서 내게 볼 일이 있을 줄 몰랐는데.”

“현재 흑룡검가와 마도현가의 사이가 좋지 않긴 하죠. 그래서 더욱 해야 할 말입니다.”

“궁금하군. 말해봐.”

“사실 가주인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가문을 나가신 지 벌써 두 달 가까이 되었습니다.”

마도가주가 가문에 없다는 소문이 정말이었나.

“이유는 복수심 때문이겠죠.”

어떤 복수심인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마도현가 소가주를 죽인 사건 외에 뭐가 있겠는가.

예전에 무력시위를 한 뒤로 조용하다 싶었더니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아빠를 현소예는 계속 지켜봤을 테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현소예는 머뭇거리는 듯 잠깐 말을 멈추다 다시 입을 뗐다.

“조만간 나가의 미궁에 가신다고 하셨죠. 아마 아버지는 그곳에서 한서진 님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근거는?”

복수를 위해 가문을 나갔다는 것을 딸이 인정한 이상, 언젠간 서진을 만나러 올 터.

하지만 나가의 미궁이라고 콕 집어 말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현소예는 세로로 접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일주일 전에 제 집무실 책상에 올라와 있던 편지입니다.”

“마도가주가 두고 간 편지인가?”

“예. 그리고 보셔도 됩니다.”

현소예는 찻잔을 들며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서진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만약 현소예의 말이 맞고, 서진이 그를 죽이게 된다면 유서가 될 텐데 그걸 서슴없이 펴봐도 괜찮은 것일까.

마도현가의 소가주는 죽을만한 짓을 했지만 그를 죽인 지금, 서진은 마도현가에 큰 악감정을 지니고 있진 않았다.

물론 마도현가 측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서진의 입장에선 그렇다는 의미다.

그리고 마도가주가 복수심으로 가문을 뛰쳐나가든 말든 서진은 그에 대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복귀한다면 서진은 잊고 지낼 수 있을 만큼.

아버지가 딸에게 남긴 유서 비슷한 성질을 지닌 편지를 보는 것에 멈칫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니 오버하는 것도 웃긴 일이겠지.

서진은 천천히 편지를 읽어나갔다.

‘과연.’

가문 일이나 사적인 내용은 없었다.

끝 문장이 잘린 걸 보면 뒷장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현소예가 공개한 편지에서 서진에 대한 절절한 복수심이 느껴졌으니까.

물론 서진은 마도현가의 필적이 어떤지 모르지만 현소예가 이런 걸 조작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를 믿는 건 아니다.

단지 조작을 해봤자 현소예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서진이 이걸 믿는다 한들 마도가주를 조심만 하게 될 뿐이지 그 이상의 행동을 유도할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현소예가 왜 아버지의 계획을 미리 발설하고 있는가이다.

“그런데 이걸 왜 내게 알려주는 거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한서진 님이 이길 확률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무런 언질 없이 미궁에서 갑자기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현소예는 손에 들고 있는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한서진 님이 아버지를 쓰러트리고 던전을 공략하고 난 뒤엔 마도현가로 칼날이 향하게 되겠지요. 아버지 없이 가문을 이끌어 가고 있는 저로선 그 상황을 피해야만 합니다.”

“하나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군.”

“뭔가요?”

“8레벨의 마도가주는 마법사로서 한국에서 제일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지.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이길 거라 판단한 거지?”

그 물음에 현소예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한서진 님은 전 세계 헌터들의 스킬과 특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군.”

서진은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머리가 좋은 놈들이 발에 채는 마도현가에서 천재로 불릴 정도면 그에 걸맞은 스킬이나 통찰력이 있을 테니.

아니면 둘 다 일 수도 있고.

“그러면 두 번째는?”

“온전한 아버지의 시신을 받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마나를 못 쓰게 되시더라도 살아계셨으면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요.”

서진의 뒤에 서서 듣고 있던 설하윤은 일순 몸에 한기가 돌았다.

마도현가에서 특출난 천재라더니 무언가 결여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선택만 놓고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하면서 효율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저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딸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현소예를 제외하면 있기나 할까?

그런 설하윤의 생각은 서진의 목소리에 금방 묻혔다.

“만약 가주 대리 말처럼 미궁에서 마도가주를 만나게 된다면 마도현가와는 완전히 별개의 행동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이러면 됐나?”

“네.”

“그리고 혹여나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마도가주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굳이 나도 손을 댈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

“앞서 말했듯,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는 직접 찾아와 경고해준 가주 대리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었다.

소기의 목적을 약속받은 현소예는 두 손을 가지런히 한 채 일어났다.

“나가의 미궁 공략을 성공적으로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현소예는 큰 모자로 얼굴을 가리며 수행원과 함께 조용하게 빠져나갔다.

“서진 님.”

설하윤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현소예 가주 대리의 말이 맞다면 미궁에서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마도가주가 가문까지 나온 이상 피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예상할 수 있는 전장에서 싸우는 편이 낫습니다.”

**

“별로 놀라지 않는군. 소예가 말해주었나?”

마도가주는 담담한 서진을 보며 웃음기 섞인 말을 꺼냈다.

“알고 있었나?”

“내가 편지를 남겼으니 소예 성격상 그럴 거라 예상했지.”

“알면서도 그랬다고?”

“상관없었네. 결국 자네는 이곳에 오지 않았나.”

마도가주는 고작 경고 정도로 피할 서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딸 걱정 그만 시키고 돌아가는 건 어때. 지금이라면 무를 수 있다.”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군. 아들에게도 그런 관용을 베풀어주지 그랬나. 난 말일세, 장기를 둘 때 무르는 걸 제일 싫어한다네.”

“이미 죽은 아들 때문에 딸도 등질 셈인가.”

“소예라면 잘 해낼 테지.”

어둠 속에서 비친 마도가주의 눈빛엔 아집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마법사로서의 냉정함과 현명함은 상실한 듯 보였다.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할 업이겠지.’

소가주가 어떤 잘못으로 죽었든 간에 마도가주는 납득하지 못했다.

그 묵은 감정은 이런 식으로 푸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마도가주는 미궁의 심처에 어떻게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서진이 지나온 통로는 아직 공개 안 된 지름길이다.

직접 알아낸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구에게 들었을까.

서진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읽어낸 마도가주가 입을 열었다.

“궁금하면 한번 맞춰보게.”

콰르르!

그때 동공이 흔들리며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흘러내렸다.

파스슥.

그 여파 때문인지 나가 석상에 균열이 일며 표면이 벗겨지는 순간.

파앗!

석상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찰나에 백광이 사라지고 동공에 남아있는 사람은 서진과 마도가주, 단 둘 뿐이었다.

설하윤과 석상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서진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겪어봤기에 알 수 있다.

설하윤과 베리크는 미궁의 다른 장소로 이동한 것뿐이다.

그곳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나가 석상들과 싸워야 되긴 하겠지만.

미궁에 들어온 존재는 석상에서 터진 빛과 함께 강제로 이동하게 만드는 힘인 ‘공간 전이’에 저항할 수 없다.

미궁이란 독특한 지형에서 석상이 되었던 고대 나가들이 축적된 에너지에 의해 발현되는 현상.

저건 무한하게 쓸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고대 나가의 석상이 있어야 하는데 석상은 한정적이다.

세월이 흐르고 사용할수록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공간 전이는 미궁의 주인에게 허락된 힘인데 절묘하게 나와 마도가주만 남겼다는 것은.’

나가엘리와 마도가주 사이에 연결점이 있다는 의미.

안드레이가 리치의 힘을 빌린 것처럼 마도가주도 마찬가지인가.

전모를 파악한 서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령전에 들어갔나.”

마도가주는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이 현상을 보자마자 거기까지 알아챈 건가. 눈치가 제법이야.”

“갈 데까지 갔군.”

“자네를 죽여 아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네.”

그리고 마도가주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령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진 모르지만, 마령전은 인류를 위한 조직이라 봐도 무방하네.”

“복수심이야 그렇다 쳐도 사이비까지 빠진 건가.”

“처음엔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마도가주는 안타깝다는 듯이 서진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던전, 마나는 왜 지구에 나타났으며, 어째서 우리 앞에 시스템 창이 보이는 건지, 알고 있나?”

“마령전은 알고 있다는 개소리를 하려는 건가.”

“마령전이란 존재는 종속된 세계를 위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네.”

서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네. 아니 오히려 다행이군. 조금이나마 받아들이려 했다면 죽이기 망설여졌을 테니 말이야.”

마도가주는 지팡이를 강하게 찍으며 마나를 발산했다.

풍편(風鞭)

손목 굵기의 바람 한 가닥이 채찍이 되어 서진에게 휘몰아쳤다.

일반 채찍도 소닉붐을 일으킬 정도인데 바람 마법인 풍편은 눈으로 보고 피하는 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콰앙!

서진은 본능적인 반사신경으로 뇌검을 들어 튕겨냈다.

[마나 전개]

전신에 마나를 세밀하게 퍼트려 육체를 강화하며, 피부까지 마나로 얇은 보호막을 생성하고.

[여뢰]

뇌기 속성을 덧대어 감각까지 증폭시킨다.

두 개의 강화술이 중첩된 서진의 육체가 인지를 뛰어넘는 속도로 달려 나갔다.

찰나에 마도가주의 후방을 점하고 검이 내리그어졌다.

하지만 8레벨 마법사답게 블링크로 쉽게 피해버린다.

검은 허공을 갈랐지만 서진은 침착하게 멀리 떨어진 마도가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점멸.’

한순간에 거리를 좁힌 서진은 흑뢰가 서린 검으로 목을 노렸다.

후욱!

그런데 이번에도 마도가주는 순간 이동으로 공격을 피해냈다.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블링크 연속 사용에 서진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블링크는 분명한 재사용 대기 시간이 존재하는 마법이다.

시도 때도 없이 쓸 수 있다면 전장에서 마법사를 죽일 수 있는 헌터는 없을 터.

“놀랐는가.”

마도가주는 쉽게 가르쳐주지 않을 듯한 우월감 가득한 얼굴로 보고 있지만 서진은 이유를 알아냈다.

“다른 영혼을 덧씌웠군. 복수를 위해 몬스터의 힘까지 빌려 쓰는 건가.”

오랜 기간 힘을 쌓아 강해진 나가는 자신이 죽인 생명체의 기억과 능력을 흡수할 수 있다.

물론 만능은 아니기에 단 하나의 존재의 능력만 고정해서 발휘할 수 있다.

마도가주는 최소 나가엘리 이상의 존재에게 힘을 빌렸으니 그도 같은 능력을 갖추게 됐을 터.

다른 마법사를 죽여서 흡수했다면 자신의 블링크에서 한번 더 발동할 수 있게 된 것이겠지.

나가와 이만큼이나 밀접한 관계라면 마도가주가 이곳에서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도 뻔하다.

서진이 어느 통로로 진입하든 동공으로 보낼 생각이었을 거다.

나가엘리의 정신이 미궁과 연결되어 있으니 구조를 잠깐 변경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

그렇게 서진이 혼자서 궁금증을 풀어냈을 때, 마도가주는 안색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나가엘리의 능력을 어찌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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