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알고 있는 곳이요?”
“정확히는 네가 복용했던 항마제를 생산하는 기업들. 내가 생각하기엔 이번 습격은 그쪽에서 작업이 들어온 것 같아. 목적이 너무 노골적으로 느껴지지 않니?”
“마광병 신약 개발 때문인가요?”
“그렇지.”
최이린은 조금 더운지 가운을 벗으며 말했다.
“우리가 성공한다면 자기네들이 만드는 항마제는 똥값이 될 테니까. 그리고 타이밍도 참 절묘하잖아. 네가 마광병 신약 개발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알려진 다음이고.”
블루게이트 사건이 마무리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시기가 묘하긴 하다.
“항마제를 생산하는 기업이 총 몇 곳이나 있죠?”
“RS제약하고 네이선, 국내 항마제 시장에서 두 기업의 점유율이 90%가 넘어.”
서진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창 항마제를 먹었을 때도 기업엔 관심이 없었던 터다.
“상당하군요.”
“후발주자가 끼어들기 힘든 판이니까.”
약제원과 약화련도 리펠 길드가 만들어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시작한 것이지 바탕이 없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네이선은 미국기업이지만 RS제약은 한국기업이야 그런데 조사하기 쉬울 거라 말하긴 힘들어.”
“왜 그렇습니까?”
“점유율에서 느꼈겠지만 국내 제약계에서는 영향력이 큰 기업이야. 섣불리 접근했다간 반발이 만만치 않을걸. 거기다 사기업이잖아?”
“그렇군요.”
길드나 가문이야 같은 헌터 조직인만큼 흑룡검가의 위명으로 누를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은 다르다.
멋대로 쳐들어가서 무력을 행사하는 순간,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명백한 범죄자가 돼버린다.
헌터가 일반인을 무분별하게 건들면 엄청난 사회 혼란이 야기된다.
사회가 무너져버리면 헌터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기에 약속을 한 것이다.
헌터 간의 힘의 질서를 일반인에게 적용하지 않기로.
물론 군단급 부대까지 쌈 싸먹는 고레벨 헌터가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면 답이 없긴 하다.
그럴 땐 국내의 다른 고레벨 헌터가 나서게 된다.
만약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다른 국가에 도움을 요청한다.
경우에 따라선 전부 꺾어버리고 일국의 독재자와 비슷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
하지만 그때부턴 정상적인 생활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지금 서진이 고를 선택지는 아니었다.
“일단 마관청 직원을 불러서 현장 분석부터 시작할 겁니다. 흔적을 조사하다 보면 윤곽이 드러나겠죠.”
사기업을 어떻게 압박할 것인지에 대해선 당장 생각할 필요는 없으니.
최이린은 다소 놀란 눈빛을 보였다.
“마관청을?”
정부 기관이 백야에 들어오지 않는 건 불문율 아니었던가.
서진은 오해하지 말라는 듯 덧붙였다.
“개인적으로 부르는 거예요.”
사이코메트리 스킬을 지닌 이현지 과장의 이용권은 아직 남아있었으니까.
**
“전투 현장을 비롯해서 도중에 끊긴 도주로까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어요.”
나흘이 지났지만 조사는 생각보다 난항을 겪고 있었다.
“백야에서 도망쳐 나온 뒤에 산속으로 들어가서 중간에 모습이 사라지더라고요. 스킬이나 아이템을 쓴 거겠죠. 그래서 반대로 백야에 진입할 때의 경로를 역추적해보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모습을 숨긴 채로 갑자기 나타나더군요. 아스팔트 위라 발자국도 남지 않았어요.”
마관청의 수사과장이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가 이런 일에 능숙하단 의미였다.
“만약 RS제약이나 네이선에서 했다면 블랙길드를 쓴 거겠죠.”
이현지 과장은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조건만 맞으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는 음지의 용병조직.
“기업은 헌터를 고용할 수 없기 때문에 뒷거래로 써먹는 경우가 은근히 많아요.”
3명 이상의 헌터를 고용하게 되면 기업이 아니라 길드가 된다.
그리되면 ‘일반 사기업’이란 방패가 사라지고 헌터들의 세계에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마력석이 핵심 에너지원이 된 현시대에서 헌터 없이 조직을 이끌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터들이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는 분명한 이점이 있기에 기업을 유지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RS제약과 네이선도 마찬가지였다.
“계약을 이용해서 길드를 유용하는 기업도 있지만요.”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 길드와 계약을 맺고 돈을 주며 기업의 조직처럼 부리는 경우가 있다.
마치 길드가 기업에 종속된 무력 집단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짓은 마관청 기조국에서 잡아내지만 말이다.
“어쨌든 현재로선 제대로 된 증거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8년 전에 있었어요. 그때는 삼화 길드란 곳이 습격당했죠.”
무언가 노골적으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범인은?”
“RS제약의 전략기획실장이었어요. 그 사람과 밑에 부하 한 명이 감옥 가는 걸로 정리되었죠.”
이현지 과장은 심증으로 RS제약을 의심하고 있는 듯했다.
“생각보다 경미하게 끝났군요.”
“RS제약의 덩치에 비해 길드가 너무 작았어요. 거기다 당시 회장이 대통령과 연줄이 있기도 했구요.”
“그럼 그 기업을 친 이유는 뭐였습니까.”
“삼화 길드에서 만든 마력석 추출 방법이 획기적이었다고 들었어요. 재밌는 건 그때 감옥에 갔던 전략기획실장이 지금은 사장이 됐다는 거죠.”
서진의 눈빛이 목표물을 확인한 맹수처럼 빛났다.
“그렇군요.”
**
“그 건, 실패했다지.”
RS제약의 회장실에서 구성휘 사장은 긴장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구 사장이 요즘 살만한가 봐. 일 처리를 그딴식으로 하는 걸 보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 건가? 그러게 쓸만한 애들을 보냈어야지. 어중간하니 그리된 거 아니야.”
구성휘 사장은 표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었다.
개인 비자금을 쓰게 만들었으면서 돈을 더 써야 했다고 말하는 걸 들어야 하다니.
무언가 울컥 올라왔지만 참아냈다.
감정을 표출하는 순간, 회장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이번엔 제대로 된 놈들로 보내.”
“예?”
평소 반문을 거의 하지 않는 구성휘 사장이었지만 방금은 불가항력이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
“허허, 정정해 보이는 구 사장이 벌써 귀가 먹었나? 다시 보내.”
“회장님, 한 번이라면 몰라도 두 번 연속되면 꼬리가 잡힐 위험이 큽니다. 시간을 두고 진행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다 신약 개발이 끝나면? 회사 매출 바닥 치면 네가 책임질래? 그리고 들켜봤자 제깟 놈들이 어쩔 거야. 게다가 흑룡검가 차원의 연구도 아니고 고작 후계자 신분인 한서진이 진행하는 거야. 검만 휘두르는 놈이 뭘 알겠어!”
서릿발 같은 회장의 호통에 구성휘 사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 다른 방도를 찾아볼 테니 블랙길드 건은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잘못 틀어지면 회장은 살겠지만 자신은 죽을지도 모른다.
사기업의 임원이라 해도 고레벨 헌터를 두 번 건들면 눈이 뒤집혀서 찾아올 터.
지금은 몸을 사릴 때였다.
“허, 그래. 우리 구 사장이 그리 자신 있어하니 한번 믿어보지. 나가 봐.”
회창의 축객령에 구성휘 사장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왔다.
나이가 들어서 치매가 온 건지 가끔 저렇게 막무가내로 변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후우. 미치겠군.”
하지만 서진이 벌써 움직이고 있을 거라곤 그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헌터가문이 기업에 직접적으로 손을 댈 수 없다지만 세상일에 절대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사기업이란 방패의 성능을 굉장히 신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흑룡검가와 같은 대가문이 가만히 있었던 건 배려이지 의무감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다.
RS제약은 그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지했어야 했다.
“으읍!”
한 중년의 남상이 의자에 결박당한 채 앉아있다.
“도련님 말씀대로 털어보니 먼지가 많아서 데려왔습니다.”
RS제약의 구성휘 사장.
흑룡검가에 납치된 남자의 이름.
기업 임원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끌고 오는 것쯤이야 은월각의 헌터들에겐 쉬운 일이었다.
“입은 풀어봐.”
서진의 지시를 받은 헌터가 막아놨던 입을 풀자 곧바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니들 제정신이야! 이거 당장 풀어! 깡패 새끼들 아니랄까 봐 분간을 못하나 본데 지금이라도 풀지 않으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구성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감당할 수 없는 살기가 그를 덮쳤기 때문에.
“시끄러우니 조용히 좀 하지?”
“...흐억!”
구성휘는 고작 3초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냉수를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린 그는 위기감을 절실하게 체감하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감찰각주, 시작해.”
“알겠습니다.”
두려움에 절여진 구성휘의 눈빛이 점차 몽롱하게 변해갔다.
스킬 사용 준비가 완료되고 감찰각주가 질문을 던졌다.
“며칠 전에 벌어졌던 약화련 습격 사건, RS제약에서 사주한 일 맞나.”
“...예.”
“목적은?”
“마광병 신약 연구자료입니다...”
“의뢰한 블랙길드의 이름은?”
“레드체인입니다.”
“지시한 사람은 RS제약 회장인가?”
“그렇습니다.”
예상이 맞았음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 뒤로는 사내 기밀 정보에 대한 물음이 줄을 이었다.
당장 쓸 일은 없겠지만 기회가 있을 때 확보해놓으면 좋을 테니.
그리고 스킬 시간이 끝나갈 때쯤 서진은 일어서며 말했다.
“감찰각주는 저놈 오늘 기억 흐릿하게 만들고 원래 있던 곳에 돌려보네.”
“예.”
마나가 자리 잡은 헌터에겐 그런 강한 효과까진 통하지 않지만 구성휘는 일반인이었으니.
**
자백은 받았지만 불법적으로 얻었기에 이것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구성휘에게 빼낸 정보는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다리일 뿐.
RS제약를 압박하기 위해선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저기가 레드체인 길드 건물이에요.”
서진의 옆에는 수사국의 이현지 과장과 마관청 안보국 요원이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 정보를 얻었든 간에 레드체인이 습격한 사실이 드러났으니 마력관리청에서 나서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범죄 길드는 마관청의 축출 대상이니까.
“해외 길드면 조금 골치 아팠을 텐데 국내 길드라 다행이네요.”
길드는 명분만 있으면 마관청에서 이런 식으로 쳐들어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만큼 위험하긴 하지만.
어쨌든 레드체인이란 길드 이름을 알아낸 이상,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들어가겠습니다.”
안보국 요원의 말이 신호가 되어 신속하게 건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그러자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후문으로 몇몇 인영이 튀어 나갔다.
각자 산개해서 도망가려는 것이겠지.
그걸 대비해서 마관청 안보국 요원이 사방에 배치된 상태였다.
하지만 꼭 포위를 뚫고 도망치는 놈이 있기 마련.
그런 인간은 서진의 몫이었다.
콰릉!
흑뢰 한 줄기가 레드체인 길드장을 향해 떨어졌다.
그는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계속 내달렸다.
나름 회피에는 일가견이 있는 모양.
하지만 연폭뢰가 서진의 검에서 펼쳐진 순간, 도주극은 끝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사업을 방해했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끄악!”
서진은 검을 그의 발목에 꽂으며 차갑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