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마관청 안보국 요원들은 레드체인 길드와 소속 헌터에게서 습격 관련 증거를 찾아냈다.
동시에 그 소식은 RS제약 김창주 회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기관일수록 소위, 빨대를 꽂으려 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럴 능력이 되는 이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거액의 돈만 찔러준다고 해서 마관청 직원을 포섭하기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RS제약 회장은 마관청에 빨대를 꽂을 수 있는 소수의 거물 중 한 명.
비록 굵직한 연줄은 아니더라도 시급할 때 미리 연락받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한서진이란 애송이하고 안보국 놈들이 온다고?”
RS제약의 본사 사옥.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말인가.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실장! 당장 출국 준비해!”
김창주 회장은 아래층에 있는 비서실장에게 전화상으로 소리치며 집무실을 나섰다.
일단 한국을 벗어나야 한다.
뒷수습은 외국에 도착하고 나서 천천히 계획해도 늦지 않으니.
김창주 회장은 마관청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어차피 블랙길드에 의뢰한 사람은 구성휘 사장이니까.
설령 자백을 해도 구 사장을 꼬리 삼아서 넘어갈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흑룡검가의 한서진은 다르다.
힘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난폭한 애송이.
‘최소한의 선은 지킬 줄 알았건만!’
헌터는 일반인, 사기업에 손대지 않는다는 불문율도 모르는 건가?
꼬투리 하나 잡았다고 눈이 뒤집혀서 본사로 오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생각보다 훨씬 막 나가는 놈이었군. 하여간 이래서 백정같이 무식한 놈들은 안돼.’
그러면서 김창주 회장은 괜히 목이 서늘해졌다.
여태까지 한서진의 검에 목이 달아난 인간이 몇 명이었던가.
“회장님, 대기시켜놨습니다. 바로 가시면 됩니다.”
비서실장이 회장의 곁에 따라붙으며 보고했다.
하지만 김창주 회장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어쩌면 잡힐지도 모르니.
마관청은 물론이고 한서진에게 협력하는 가문도 만만치 않으니까.
‘됐어.’
김창주 회장은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누르며 비서실상과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띠링.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직원 여섯 명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김창주 회장의 개인 경호팀이었다.
경호팀장은 6레벨, 나머지는 전원 5레벨이었다.
기업에서 헌터를 고용할 수 없다곤 하지만 경호만큼은 어떻게든 몰래 쓰는 경우가 많았다.
마관청에서도 경호 목적에만 충실하다면 적당히 눈감고 넘어가 주는 편이었다.
김창주 회장은 이들을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실제 서진의 무력에 대한 무지함에서 오는 안도감이었다.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김창주 회장은 서진을 만나더라도 도망갈 시간은 벌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얼른 가지.”
“예!”
경호팀에 둘러싸여 지하주차장에 들어간 김창주 회장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 여성이 그들의 길목을 막고 있었기에.
전장을 수없이 거쳐온 듯한 적색 눈동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에 짧은 바지로 시원하게 드러내고 있는 하얀 다리까지.
그리고 화룡점정은 그녀의 등에 매여있는 대검.
한눈에 봐도 강인한 전사라는 것이 느껴졌다.
“눈 파내기 전에 동공 간수 잘하는 게 좋을 거야.”
살벌한 어투로 내뱉은 그녀, 바네사의 시선은 김창주 회장에게 닿아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훑어보다 욕을 얻어먹은 것.
“최 팀장! 저년 치워버려. 시간이 급한데 지금!”
김창주 회장은 역정을 내며 지시했다.
몸매는 제법 봐줄 만했지만 누군지도 모를 여자와 대화하는 시간도 아까웠다.
“예.”
경호팀장을 비롯한 팀원들이 무기를 꺼내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그녀가 쥐고 있는 대검이 휘둘러졌다.
촤아악!
여섯 명의 허리에서 피가 터져 나오며 경호팀 전원의 상반신이 절단되어 땅에 떨어졌다.
투두둑.
내장이 그대로 노출되는 기괴한 장면에 비서실장은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반면 김창주 회장은 경련이 일어난 손을 꽉 쥐며 그녀를 노려봤다.
믿고 아끼던 경호팀이 일격에 날아갔다.
상대는 항거불능의 괴물.
그러나 자신을 살려둔 이유가 있을 터.
김창주 회장은 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목적이 뭔가.”
“RS제약에서 제법 큰 마력석을 갖고 있다고 들어서 말이야. 그런데 제법 튼튼하게 보관하고 있더라?”
지하 6층 거대 금고에 보관하고 있는 대형 마력석.
A급 순도에 높이 3미터 정도 되는 희귀 마력석을 두 개 보유하고 있다.
지나가는 개도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작계 헌터에게 의뢰해서 특수 금고를 만들어 넣어둔 것이었다.
함부로 탈취하지 못하게끔.
5레벨 이하의 헌터는 흠집도 낼 수 없으며, 6레벨급 이상의 압력이나 마나가 감지되면 마력석은 다른 장소로 사라지게 된다.
그곳이 한적한 주택인지 땅 밑인지는 김창주 회장만 알고 있을 뿐.
금고를 정상적으로 열기 위해선 김창주 회장의 생체 데이터를 담은 전용 카드가 있어야 한다.
만약 죽으면 데이터가 말소되어 아무도 열지 못하는 구조.
그렇기에 마령전에서도 귀찮지만 회장과 협상을 거쳐야만 했다.
“금고를 개방할 카드만 넘기면 보내줄게.”
“그걸 왜 너한테!”
“싫으면 계속 주차장에서 이러고 있던가. 한서진인가 뭔가 오고 있다며? 마력석을 주면 대신해서 잠깐 막아주지.”
타앙!
대검의 끝이 땅을 찍는 소리에 김창주 회장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줘야 하는 건가.
답은 정해져 있지만 물욕이 강한 그에게 포기는 너무 괴로운 선택지였다.
“회장님.”
보다 못한 비서실장은 옆에서 결정을 재촉했다.
한서진에게 잡히기 싫으면 얼른 넘기고 떠나야 할 것 아닌가.
보물도 살아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거지.
“끄응, 알겠네!”
오만 인상을 찌푸린 김창주 회장은 품에 있는 금고 카드 두 장을 꺼내 던졌다.
금고 하나에 마력석이 하나씩 들어있다.
“녹빛이 띠는 카드는 당장 쓸 수 있지만 회색 카드는 일시적으로 잠겨있다. 30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생체 데이터가 활성화될 거다.”
“보험이라는 거야?”
여전히 살기가 가득한 그녀의 눈빛에 김창주 회장은 변명하듯 쏟아냈다.
“그냥 줬다가 자네가 갈 수도 있지 않나. 나도 시간은 벌어야 해. 이 이상은 나도 양보 못 하네. 이해해주게. 어차피 자네 같은 강자라면 거짓말일 때 날 찾아와서 죽일 거 아닌가.”
“아니.”
바네사는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그냥 죽이지 않아. 발가락 끝부터 목까지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맛보게 해준 뒤에 죽일 테니까.”
“난 오래 살고 싶으니 믿어주게.”
바네사는 전송 아이템을 꺼내서 카드를 금고 앞에 있을 마령전 멤버에게 보냈다.
그리고 몇 초 뒤, 문을 개방했다는 말이 수신기를 통해 들려왔다.
“하나는 열렸다고 하네. 이제 가봐.”
바네사는 이제 회장과 비서실장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깐만!”
그때 김창주 회장이 그녀를 부르며 말했다.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열 배를 주겠네. 내 밑에서 일할 생각은 없나?”
여러 가지 욕망이 뒤섞인 회장의 눈빛.
앞으로 걸어가던 바네사는 몸을 반쯤 틀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십 초 내로 안 꺼지면 금고고 뭐고 죽여버린다.”
“미, 미안하네.”
목숨의 위협을 느낀 김창주 회장은 바로 차에 탑승했다.
**
서진은 RS제약 본사로 향하고 있었다.
증거가 확보된 이상, 다른 수작을 부리기 전에 잡아둬야 하니.
하지만 거의 도착했을 때, 일이 틀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정문에서 웬 여자가 대검을 들고 서 있었으니까.
“오랜만이야.”
그녀는 서진 옆에 있는 설하윤을 보며 반가운 듯 인사했다.
“당신...!”
설하윤은 적의를 보이며 검을 빼 들었다.
서진은 초면이지만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엘바야드에서 죽었던 마법사와 같이 왔던 마령전 멤버인가.”
“정답. 릴튼이 너에게 죽었다는 말 듣고 계속 궁금했는데 오늘 풀 수 있겠어.”
콰앙!
바네사는 대검을 강하게 내려치며 전의를 드러냈다.
“막고 있는 이유가 뭐지? 혹시 회장의 숨겨둔 딸인가?”
그러자 바네사는 서진을 향해 살기를 미친 듯이 쏟아냈다.
[민첩이 20 상승합니다]
오죽하면 스텟까지 오를 정도.
단단히 화가 난 것 같다.
서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돌렸다.
“아닌가 보군. 그럼 혹시 이번에도 마력석 때문인가.”
서진도 RS제약 회장이 대형 마력석을 두 개 갖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엘바야드에서 실패했으니 여기에 나타난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지.
“알고 있었으면서 그딴 말을 지껄여?”
바네사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서진은 뒤를 슬쩍 둘러봤다.
마관청 안보국 요원들이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마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라도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
서진은 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차피 막고 있는 사람은 마령전 멤버 한 명.
마관청 요원들까지 저 여자를 상대할 필요는 없다.
서진이 바네사와 싸우고 나머지는 계속 회장을 추격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렇겐 안 되지.”
그때 바네사를 중심으로 나타난 정사각형의 결계가 한순간에 서진 일행까지 삼키며 확장되었다.
마관청 요원들은 즉시 결계를 때렸지만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바네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고작 그딴 힘으로 부술 수 있는 결계가 아니니까 포기하는 게 좋아. 근데 너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물론 시도는 못 하겠지만 말이야.”
바네사의 말처럼 서진이 전력을 가한다면 균열을 만들 수 있을 터.
거기에 설하윤의 검기까지 더한다면 깨질 것이다.
하지만 바네사가 서진을 보고 있는 한, 결계에 신경을 쏟는 건 불가능하다.
한눈파는 찰나 바네사의 검에 마관청 요원들의 목이 날아갈 테니까.
답답하게 막힌 상황이지만 서진은 차분하게 생각했다.
일단 여기에 있는 마관청 요원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저 요원들이 이미 본청에 상황을 전달했으니 헌터협회까지 합세하여 추적하고 있을 터.
그리고 RS제약 회장은 일반인이니 찾기만 하면 끝이다
8레벨인 서진이 굳이 나설 필요는 없는 것이다.
헌터협회와 마관청을 믿는 수밖에.
서진은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마관청 요원들도 결계 파괴를 포기하고 바네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나 혼자 막기엔 인원수가 너무 많네.”
바네사가 묘한 웃음을 띤 순간, 허공에서 균열이 쩍 벌어지더니 세 마리의 몬스터가 낙하하며 등장했다.
콰아앙!
데스나이트, 헬와이번, 미노타우로스.
셋 다 최소 A급 보스 몬스터급이며 내재된 마나는 그 이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소환수를 본 서진은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예전에 뇌옥에 침입했던 흑마법사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거기다 지금 주변을 차단한 결계마법까지.
서진은 바네사를 향해 말했다.
“혹시 게일러도 온 건가.”
“알아챘어? 하긴 그놈이 흔적을 좀 흘리고 다니긴 했지. 그럼 이제 깨달았겠네. 여긴 못 뚫는다는 걸. 그렇다고 힘을 빼지는 마. 재미없어지니까.”
바네사는 대검을 일자로 크게 휘둘렀다.
가벼운 일격이었지만 마관청 요원들을 밀어낼 정도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서진은 뇌검으로 기세를 베어내며 점멸을 발동했다.
흑룡검술 제8식 무영뢰.
단번에 거리를 좁히고 바네사의 목을 향해 소리 없는 번개가 찔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