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이제 슬슬 정할 때 되지 않았나?”
“협회장께서 가문의 소가주까지 신경 쓰고, 공사다망하시군.”
서로의 눈빛이 공중에서 어지러이 얽혔다.
한벽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며 천천히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곧 정할 생각이었네.”
“진심인가?”
협회장은 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지만 여전히 심중을 파악하긴 힘들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농담은 아닐 터.
궁금증이 돋은 협회장은 입을 닫은 한벽호를 재촉했다.
“누구인가?”
“글쎄.”
“자네가 천년만년 살 게 아니라면 소가주를 정해서 힘을 실어줘야 승계가 순조로울 걸세”
“되살아난 이후에 오지랖이 한층 더 넓어졌군. 적어도 헌터협회장보단 가주가 알아서 잘 결정할 테니 신경끄게.”
“허허, 협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쌓은 경험을 무시하면 안 되지. 내가 보기엔 한서진 그 친구가 좋아 보이네만.”
한벽호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아예 대놓고 말하는군.”
“어차피 사연 다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우스운 일 아니겠는가.”
서진 덕분에 의식을 차린 협회장이 두 명의 후계자 중에 누구 손을 들어줄지는 너무 명백했다.
“그리고 한서진만 한 후계자도 없지 않나.”
“영업사원이 따로 없군. 그렇게 오지랖 넓은 양반이 교장직은 왜 고사했나?”
“마침 얘기를 잘 꺼냈네. 며칠 후에 개교식이 열릴 예정인데 자네 손자의 도움이 필요하거든.”
“그거야 그놈이 결정할 일이지. 내가 왈가왈부할 사항은 아니네. 그런데 그 학교란 것이 꼭 필요한가?”
이번에 국내 최초로 설립된 헌터 사관학교.
가문, 길드에 소속되지 않는 헌터들을 모아 가르치는 국가 교육기관이었다.
정부와 헌터협회가 공조한 프로젝트였기에 협회장이 일선에서 나서야만 했다.
한벽호의 심드렁한 어투에 협회장은 나직하게 말했다.
“자네도 인지하고 있을 텐데. 갈수록 던전 난이도와 출현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대로 가다간 던전이 많아도 공략할 헌터가 부족하게 될 걸세.”
헌터 사관학교는 그런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헌터들의 평균 수준을 끌어올려놓지 않으면 날이 갈수록 던전 브레이크가 늘어나게 될 테니.
“알고는 있네. 다만...아니네.”
한벽호는 말을 아꼈다.
그런 헌터들이 조금 강해진다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입 밖에 꺼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
‘나, 여기서 뭐 하는 걸까.’
레이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암살 사건 이후로 그녀는 한치성의 팀에서 탈퇴한 상태였다.
블루게이트 작전이 실패하고 나서 한치성이 찾아오긴 했지만 그땐 이미 마음이 떠난 이후였다.
흑룡대원으로 위장한 암살자에게 죽을뻔해서 그런지 흑룡검가는 온갖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식객으로 지낼 순 없는 노릇.
영국으로 돌아가거나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영국으로 가면 아빠는 엄청 좋아하겠지만.’
그럼에도 흑룡가에 남은 이유는 무엇인가.
레이나의 가슴에 묵직한 압박감이 내리 앉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활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주는 수단이자 보물이다.
가디언이란 대형 길드장의 막내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온실 속의 화초는 아니었다.
편하게 살고 싶었다면 해외 던전을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테니까.
처음으로 과녁의 정중앙에 맞췄던 추억, 던전에 들어갔을 때 둘째 오빠를 구해주었던 기억, 궁술을 이용해 수없이 던전을 클리어했던 경험.
그런 것들이 쌓여 활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감을 축적해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
너무 빠르게 7레벨에 도달한 부작용일까.
거대한 벽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시위를 당길 때 호흡이 갈수록 흐트러져서 이제는 활을 잡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헌터들에게 한 번쯤은 이런 시기가 찾아온다고는 하는데 극복은 오로지 본인의 몫이었다.
해외 던전 공략을 마치고 한치성을 따라 한국에 들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레이나가 삼은 희망은 천궁의 길드장.
지금은 백야라는 도시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과거엔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궁사로 유명했다.
그런데 은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왜 활을 더 이상 안 잡는 건지는 모른다.
그렇기에 레이나는 천궁 길드장과 만나고 싶었다.
얘기를 나눠보면 벽에 대한 실마리가 잡힐 것 같아서.
그래서 한국 땅을 밟은 당일, 바로 길드를 찾아갔지만 시원하게 거절당했다.
이유라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냥 쫓겨났다.
그 뒤로 한치성이 호언장담하길래 약속을 받고 팀원으로 들어갔지만 역시나라고 해야 할지.
천궁 길드장 얼굴 구경도 못 하고 팀을 나오게 되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걸까.
여러 잡념과 함께 찾아온 수마가 레이나의 의식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래.’
하지만 그녀는 눈을 뜨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포기하긴 아까워.’
모종의 결심을 내린 레이나는 방을 나섰다.
**
“무슨 일이신지?”
서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갑자기 찾아온 레이나를 쳐다봤다.
레이나는 잔뜩 긴장했는지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조심스럽게 물꼬를 튼 레이나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사실...”
조금 길었지만 요약하자면 성장 한계가 찾아와서 헤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천궁 길드장을 소개해줬으면 좋겠다?”
“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일견 차갑게 보이는 서진의 눈빛에 레이나는 괜히 초조해졌다.
서진은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가장 원하는 건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겠죠?”
“그건...네, 그렇습니다.”
레이나는 아니라고 하려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부탁하는 입장이니 숨김없이 말하는 게 옳을 터.
“하지만 과한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대화만 나눌 수 있게 해주셔도 충분합니다.”
“그럼 제가 부탁을 들어드린다면 뭘 받아야 할까요. 뭐든지라고 하셨죠?”
레이나는 대가를 고민하는 서진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과 초조함이 뒤섞여 흠칫 몸도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서진은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죠. 대화만 했다면 그냥 넘어가고. 그 이상의 것을 얻었다면 제 팀원이 되는 걸로. 팀원이 될 시에 기간은 소가주가 되거나 혹은 후계자를 박탈당할 때까지.”
서진에겐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거래였다.
천궁 길드장이 거절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혹시 받아들인다면 별다른 힘들이지 않고 7레벨 궁사를 팀원으로 받을 수 있으니.
그리고 레이나 입장에선 고민하는 생각조차 사치인 제안이었다.
“하겠습니다.”
**
흑룡가주와 얘기를 나눈 협회장이 다음으로 찾은 사람은 서진이었다.
“반갑네. 흑룡가에서 보니 또 느낌이 다른 것 같군.”
“그 후로 좀 어떠십니까.”
“변함은 없지만 그만 신경 써도 괜찮네.”
협회장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서진이 물어본 이유는 단순한 안부 인사만은 아니었다.
서진에게 협회장의 마나 상태는 나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보다 호전시킬 수 있다면 용체화의 숙련도가 그만큼 늘었다는 의미이니.
마나 운용력에 대한 일종의 척도인 셈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닌듯하니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십니까?”
“며칠 후에 헌터 사관학교가 개교한다는 건 알고 있나?”
“그랬습니까.”
서진에겐 딱히 관심이 없는 일이었다.
“일단 학교인 만큼, 입학성적에 따라 차등 혜택이 주어지네.”
“그렇겠죠.”
“크흠, 그때 수석 합격자는 지도 대련이란 특혜를 받기로 했는데 말일세.”
“혹시 제게 지도 대련을 맡기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으허허, 눈치가 빠르구먼. 맞췄네.”
“별로 안 끌립니다.”
서진의 즉답에도 협회장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나 선정할 수 없는데 생도들 사이에서 자네의 인기가 엄청나더군. 실력과 인지도 둘 다 넘치도록 충족하는 인물이 자네일세.”
“예...”
“당연히 맨입으로 해달란 소리는 아니네. 듣자 하니 최근에 마력석을 대량으로 매입하고 있다고 하던데.”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석으로 샬롯과의 마나 공유가 늘어난다면 돈이 아깝지 않으니까.
물론 대형 마력석에 비하면 눈곱만큼 축적되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다.
하지만 마력석은 정부에서 거래량을 관리하는 자원인 만큼 매입에 한계치가 명확했다.
돈 많다고 쓸어 담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마관청과 조율은 해봐야겠지만 매입량을 늘려줄 수 있네. 거기다 협회가 가진 마력석도 얹어줌세.”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판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협회장은 미리 준비해놓은 임시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 정도면 어떤가.”
서진은 서류에 적힌 숫자를 토대로 샬롯이 흡수할 마나를 대략 계산해보았다.
‘이것들 다 쓰면 5레벨은 넘겠는데.’
서진은 지도 대련이란 것에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귀찮긴 해도 한 번의 대련으로 이만한 보상이면 훨씬 이득이다.
계약서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약간의 논란이 생길 정도로.
아마 협회장이 힘을 쓴 거겠지.
“좋습니다.”
“허허, 잘 생각했네.”
협회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일어섰다.
“그럼 개교식 때 기다리겠네.”
**
울창한 초목이 우거진 산림.
인간이 살 수 없게 된 과거 북한 지역의 마경에서 홀로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크와아아!
낯선 침입자를 쫓아내려는 듯 오우거 다섯 마리가 동시에 그에게 몰려들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그는 날벌레를 쫓는 것처럼 손을 내저었다.
화르륵!
작은 손짓에 검붉은 화염 기둥이 땅에서 치솟으며 오우거를 집어삼켰다.
쿠웅!
화염 기둥에 휩싸인 오우거들은 내장까지 전소되어 일거에 무너졌다.
다섯 마리를 가뿐하게 죽인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면 되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지만 자연스레 나온 혼잣말.
하지만 게일러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저번 그 좌표보단 못하지만 여기도 나쁘지 않아. 몬스터도 많은 게 마음에 드는군.]
잔뜩 노이즈가 낀 듯한 이질적인 음성.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기묘한 목소리가 익숙한 게일러는 짧게 경고했다.
“마경 바로 아래에는 10레벨의 흑룡가주가 있다. 그래도 괜찮나?”
[클클클, 상관없다.]
무언가 숨겨둔 방책이 있는 듯한 웃음.
게일러는 개의치 않고 마나를 움직였다.
불러내는 것이 목적이지 리치의 소멸 여부는 관심사 밖이었다.
리치의 소환 장소를 최종적으로 특정했으니 결계를 준비해야 한다.
7성주 중에 제일 지성이 높아서 그런지 정말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이번 시도로 마무리됐으면 좋겠군.’
그가 신경 쓸 사안은 리치 소환 말고도 산적해 있었으니까.
**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석 입학생도인 유한서는 서진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젊은 나이에 벌써 7레벨.
몇 주 전에 언론에서 공개된 레벨이다 보니 그의 성장세를 고려한다면 이미 8레벨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레벨만큼이나 대단한 그간의 업적들.
고레벨 헌터를 꿈꾸는 유한서에겐 서진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최초로 설립된 사관학교에서 처음으로 수석을 차지했으니 조금이나마 다가서지 않았을까.
유한서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서진을 마주한 순간, 착각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