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서진이 별다른 기세를 내보이지 않았음에도 유한서는 괜히 위축되었다.
고작 두세 살 밖에 차이 안 나는데도 왜 이리 떨리는 것인지.
그의 주위로 광채가 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유한서는 어깨와 허리를 곧게 폈다.
자신이 수석으로 입학했기 때문에 이런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거기다 마주 볼 기회도 거의 없을 상대를 두고 위축된 채로 있는 건 자신에게 손해였다.
“편하게 오세요.”
서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유한서의 긴장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
대련 시작 신호가 울리고, 유한서는 애검을 꺼내 들고 땅을 박찼다.
‘초신속.’
유한서의 움직임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헌터를 시작하게 만들고 입학시험에서도 수석을 차지할 수 있게 해준 스킬.
다른 생도들의 눈으론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스피드를 과시하며 서진에게 내달렸다.
아직 서진은 검을 뽑지 않았다.
봐주는 것일까.
아니면 생도라고 해서 조금 쉽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방심하고 있다면 한 방 먹일 절호의 기회다.
유한서는 원래 대련장에 올라서기 전까지 그에게 검이 닿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왕 대련하는 거 옷깃이라도 베어야 좋지 않겠는가.
아마 서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이는 빈틈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공격에 최대한 힘을 실어야겠지.
‘제한 해제.’
한 번에 출력 가능한 마나의 크기는 헌터마다 다르다.
물총 수준으로 쏠 수 있는 헌터가 있는가 하면 대포처럼 쏟아부을 수 있는 헌터도 있다.
유한서의 ‘제한 해제’ 스킬은 출력의 한계를 벗어던지고 마나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우우웅!
4레벨치고 강대한 마나가 검에 모여들어 소음을 토해낸다.
그리고 서진이 뒤늦게 유한서가 접근하는 방향으로 목을 틀었다.
‘늦었습니다.’
그는 회심의 일격을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타앙!
유한서는 서진의 우측에서 세로 베기를 했다.
그렇다면 피가 튀진 않더라도 적어도 옷자락이 베이는 감각은 느껴졌어야 한다.
하지만 유한서의 귀에 들려온 건 검이 부딪치는 충돌음.
“어..?”
언제 뽑아 들었는지도 모를 서진의 검이 유한서의 검을 막고 있었다.
심지어 서진의 검은 마나도 씌워지지 않은 상태.
그런 그에게 들려오는 서진의 지적.
“공격에 자신감이 담긴 건 좋은데, 예상과 틀어지면 빈틈이 너무 많아지네.”
서진은 자신의 검을 유려하게 흘러내며 가슴팍 갑옷 부위를 얕게 잘라냈다.
실전이었다면 바로 사망이다.
유한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검을 고쳐잡았다.
그 뒤론 일방적인 검술 지도의 연속이었다.
유한서는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르면서 눈빛을 꺼트리지 않고 서진의 조언을 뇌리에 박아넣었다.
한국 제일 가문의 후계자이자 7레벨 검사의 정성 어린 지적을 받을 기회가 앞으로 있기나 할까.
그렇기에 힘이 빠져나가도 계속해서 일어났다.
쓰러지는 순간 대련은 중지되니까.
하지만 20여 분이 지났을 때쯤, 유한서의 의지를 끊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
‘마기?’
마력석을 벌기 위해 지도 대련을 하던 서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북쪽에서 내려온 짙은 마기가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짐작하건대 고작 흑마법사 열댓 명 모인 수준이 아니다.
‘대규모의 흑마법사 집단 혹은 리치의 성.’
공기 중에 이만한 마기를 흘려보내려면 못해도 수백 명의 흑마법사가 필요하다.
아니면 고레벨 흑마법사들만 수십 명이 결집해있던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서진의 촉은 리치를 향하고 있었다.
나라엘리의 미궁도 등장한 판국에 리치라고 못 나올 이유가 없으니.
개교식을 주관하던 협회장도 마기를 감지하고 대련을 즉시 종료시켰다.
안색을 굳힌 서진은 바로 흑룡검가로 향했다.
**
급히 소집된 흑령검가의 가주회의.
바로 위쪽 지역에 전대미문의 마기를 흘리는 던전이 나타났으니 가문에 비상이 걸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직위명에 ‘주’나 ‘장’이 붙은 이들은 물론이고 서진과 한치성도 자리해있었다.
은월각주는 짧은 시간에 수집한 정보를 보고했다.
“현재 던전은 마경의 중심부에 나타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은 마기에 잠식된 모습이 관측되었습니다. 최소 S급 던전으로 판단되며 던전 브레이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벌써?”
내원당주는 믿기지 않아 반문했다.
은월각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만 일반적인 던전 브레이크와는 조금 다릅니다. 마치 정찰대를 보내듯이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그건 이상하군.”
“어쨌든 가만히 지켜볼 여유가 없다는 거겠죠.”
흑룡대장은 여기에 앉아있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래도 최소한의 절차는 거쳐야 체계적으로 던전을 막을 수 있기에 빠르게 결론이 나길 바랄 뿐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던전에서 유출된 몬스터는 전부 언데드 계열입니다. 스켈레톤 나이트, 아처, 메이지. 그리고 구울, 스펙터, 팬텀엘크.”
“그리 위협적인 몬스터들은 아니구만.”
내원당주는 안심한 기색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은월각주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회의실에 들어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확인한 몬스터는 듀라한이었습니다.”
분류표에서 최상위 A급에 속하는 몬스터.
개체 수는 극히 적지만 워낙 강해서 고레벨 헌터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듀라한이 벌써 나왔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던전에서 대부분의 몬스터가 빠져나왔다는 뜻이거나 던전의 크기가 예상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
좌중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보고를 마친 은월각주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 가문의 전력만으론 힘들지 않겠습니까. 일단 계속 지켜보면서 다른 가문, 길드와 같이 공략대를 결성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일견 합리적으로 들리는 외무각주의 발언에 흑룡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남하하고 있는 몬스터는 가문에서 나서야 합니다. 시간 끌었다간 마경과 인접한 도시들은 쑥대밭이 될 겁니다.”
“흑룡대장 말이 맞아.”
시급한 사안이었기에 한벽호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한서진, 한치성. 그리고 흑룡대장까지, 세 개의 부대를 편성해서 마경에 진입한다.”
뒤에 서 있던 김형석 비서는 혀를 내둘렀다.
이럴 때도 후계 경쟁을 밀어붙이시다니.
이쯤하면 되지 않았나 싶은데도 끊임없이 검증을 이어간다.
“이번 던전 보스를 한서진이 잡는다면 소가주로 정하겠다.”
툭 던지듯 내뱉은 흑룡가주의 한마디.
하지만 그 파급력은 회의장을 뒤집을 정도였다.
“예?”
“소가주라니!”
“진심이십니까?”
저마다 경악 어린 눈길로 흑룡가주를 쳐다봤다.
줄곧 침묵을 지키던 한정후도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귀 안 먹었으니 그냥 말하거라.”
“소가주 결정을 그리 갑작스럽게 하시면.”
한벽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아들의 말을 끊었다.
“그러면? 내가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허락을 구해야 한단 말이냐?”
“그것이 아니라 집법회가 있지 않습니까.”
소가주 임명은 전적으로 가주의 권한이다.
하지만 선정 방법을 공표하기 전에 집법회에 연락하고 필요하다면 논의까지 거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흑룡가주는 그걸 건너뛰고 통보해버린 것이다.
물론 관례일 뿐이기에 가주의 힘이 강하다면 문제 삼기 힘들었다.
그리고 현재 흑룡가주는 천외천이라 불리는 10레벨의 괴물.
절차 따위 무시해도 상관없었다.
“그럼 늦었지만 집법회엔 네가 알려주거라.”
이미 마음을 굳힌 아버지의 태도에 한정후는 입술을 깨물었다.
“뭐해? 당장 몬스터 내려오는데 안 막고!”
“예...예!”
흑룡가주의 호통에 가신들은 썰물 빠지듯 전부 나갔다.
거기에 손자와 아들까지 회의장을 벗어나고 나서 김형석 비서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주님. 이제 한서진 도련님으로 결정하신 겁니까?”
“언제?”
김형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가주님은 던전 보스를 공략하면 소가주로 결정한다고 했지 당장 임명한다는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아직 한치성에게도 기회가 남아있다는 의미였다.
굳이 한치성이 보스를 잡지 않아도 한서진을 방해하기만 해도 된다.
‘그렇지만 우선권은 한서진 도련님에게 있어.’
마음이 장손에게 기울 게 된 것이다.
“형석아, 네가 보기엔 어떠냐.”
“가주님의 결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한서진이 병상에서 일어난 이후의 자취를 쭉 살펴보면 기적의 연속이었으니.
그리고 이번 던전 공략으로 검증에 마침표를 찍을 생각이신 듯하다.
과연 한서진 도련님이 한치성의 방해를 이겨내고 보스의 수급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실패한다면 임명은 다시 한참 뒤로 밀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형석 비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가 되었다.
**
“젠장!”
한치성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아무 말 없다가 그런 식으로 통보할 줄이야.
할아버지는 한번 뱉은 말은 절대 바꾸지 않으니 한서진을 막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데려가야 하는 헌터가 있다.
7레벨 궁사가 있다면 공략 방해에 상당한 도움이 될 터.
한치성은 레이나의 숙소로 무작정 찾아갔다.
“레이나, 마경에 출현한 던전 공략에 네가 필요하다. 같이 가자.”
“뭐?”
레이나는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한치성은 할 말을 계속했다.
“언제까지 쉬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이제 그만 팀에 돌아와.”
“싫은데.”
레이나의 얼음장 같은 싸늘한 어조에 한치성은 일순 당황했다.
“돌아갈 생각 없으니까 이제 안 찾아왔으면 좋겠어.”
“그러면 왜 우리 가문에서 계속 머물고 있는 거지?”
레이나는 짧게 웃음을 흘리며 휴대폰의 연락처 화면을 보여주었다.
“문선영이면... 천궁 길드장?”
“네가 내팽개친 약속. 다른 사람이 지켜주기로 했어.”
“뭐?”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그전부터 이미 팀에 돌아갈 생각 없었으니까 오해하진 마. 그럼 안녕.”
탕.
레이나의 돌아선 마음처럼 문이 굳게 닫혔다.
**
흑룡검가가 위치한 개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경 초입 길목.
서진이 차출한 흑룡검가의 헌터들과 설하윤, 베리크, 레이나까지 집결해있었다.
“괜찮겠습니까.”
서진은 레이나에게 우려를 품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활을 쏘기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괜히 데려갔다가 짐이 될 바엔 두고 가는 게 훨씬 낫다.
레이나도 서진의 눈길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굳은 결의를 보였다.
“절대 방해되진 않을 겁니다.”
짧은 기간 동안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인상도 저번보다 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비상 무기도 챙겼으니 괜찮습니다.”
레이나는 평소에 들고 다니는 장궁 외에 크로스 보우를 꺼내 보였다.
사거리는 떨어져도 오발의 가능성은 현저히 낮은 무기.
스킬은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하니 서진은 믿어보기로 했다.
이번 던전 내부에는 몬스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7레벨 궁사를 포기하기엔 아깝다.
“서진 님.”
그때 설하윤이 평소와 다른 얼굴빛을 띠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