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이번 공략 여부로 서진이 소가주가 된다고 하니 설하윤으로선 날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서진이 쌓아왔던 업적 덕분에 찾아온 기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던전 보스를 잡을 생각이었다.
설하윤의 얼굴엔 그런 결연한 다짐이 드러나 있었다.
“긴장 좀 풀어도 됩니다.”
여유로운 서진의 태도를 보면 마치 설하윤이 소가주가 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선 일단 마기에 잠식된 마경이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나아가야 했다.
한치성과 흑룡대장의 팀은 다른 방향에서 진입하고 있을 터.
던전에 먼저 진입할수록 던전 공략에 유리하니 최대한 빨리 돌파해야 했다.
**
쿠구구궁!
대지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오크 무리가 돌진해오고 있었다.
얼추 세어봐도 백 마리는 훌쩍 넘어서는 것 같다.
마기에 잠식된 영향인지 피부도 거무스름하고 일반 오크들보다 짙은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근력이 58 상승합니다]
[체력이 52 상승합니다]
“벌써부터 이러니 쉽지 않겠습니다.”
부관으로 따라온 흑룡부대장이 선명한 검기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움츠러든 기색 하나 없이 눈을 빛내며 투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오크 무리가 지적에 도달했을 때 서진보다 먼저 앞서 나가 피륙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다른 흑룡검가의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이 던전 보스인 이상, 서진의 힘은 최대한 온존해야 한다는 설하윤의 판단이었다.
마경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기에 서진의 팀이 넘어야 할 산은 오크만이 아니었다.
오크 다음엔 골렘, 사이크롭스까지.
소규모라곤 하나 웨이브를 세 번이나 거치니 일부 헌터들은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허억, 허억.”
그럴 만했다.
중상급 난이도의 던전을 쉼 없이 연달아 세 번을 공략한 셈이니까.
마경의 중심부로 향할수록 상급 몬스터가 분포되어 있는 데다 던전의 영향으로 마기까지 스며들어 평소보다 광폭화 되어있는 상태였다.
“거의 다 도달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마지막 난관이 하나 남았군.”
서진은 눈앞의 결계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던전에서 나오는 언데드 몬스터와 느껴지는 마기로 볼 때 리치의 성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마령전과 연관이 없을 리가 없다.
놈들은 이전에 천궁 길드와 전쟁까지 벌이며 리치를 소환하려 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추측을 하지 않더라도 마나 봉인 결계만 봐도 명확했다.
이건 게일러라는 흑마법사 말곤 펼칠 수 없으니까.
그런데 던전 주위에 결계를 설치해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최대한 전력을 깎고 공략을 지연시키기 위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서진은 의문을 잠시 눌러뒀다.
이 상황에서 던전까지 향하는 방법은 두 가지.
투기를 써서 뚫고 가거나 아니면 결계를 해제하거나.
용체화의 숙련도가 상승한 덕분에 결계 구조가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차근차근 풀기엔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다.
시간이 중요한 지금 그럴 여유는 없다.
“이대로 돌파한다.”
“예!”
**
던전의 입구가 보이는 마경의 중심부에 도달하자 낙오되는 헌터가 생겨났다.
서진이 선봉에서 투기를 쓰긴 했지만 몬스터의 수가 많아 일부는 흑룡대원이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서진이 마음만 먹으면 전부 감당 가능했다.
다만 여기서 마나를 많이 소모할 순 없었고, 흑룡대원들도 어린애가 아니니 각자 맡아야 할 몫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체력의 한계와 부상이 더해지니 전투가 불가능한 대원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흑룡부대장.”
“예. 말씀하십쇼.”
“부상은 그렇다치고 체력적으로 뒤떨어진 놈들은 체크해놓고 특별히 굴려야 할 것 같은데.”
“저 또한 같은 의견입니다. 공략이 끝나고 돌아가는 즉시 훈련을 추가하겠습니다.”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흑룡대원들의 낯빛이 거뭇해졌다.
“그리고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대원에겐 보너스 지급해주고.”
“알겠습니다.”
흑룡대원 사이에서 희비가 갈렸다.
“마지막까지 따라오는 대원이 있다면 검술 지도와 비고에서 쓸만한 아이템 하나 선물해주지.”
서진의 말에 낙오되지 않은 흑룡대원 전부가 눈을 빛냈다.
확실한 동기부여를 준 서진은 그들을 이끌고 던전으로 진입했다.
**
육각형으로 둘러져 빛을 전부 빨아들일 듯한 칠흑의 성벽.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같은 해자.
온갖 뼈를 갈아 만든 잿빛의 성문.
하늘 높이 치솟은 성벽 안쪽에서 흘러넘치는 막대한 양의 마기까지.
이계에서 봤던 리치의 성이었다.
리치의 성은 독특하게 성문이 세 개로 나뉘어있다.
일반적으로 성문이 방호력이 약하니 쓸데없이 늘리는 건 좋지 않지만 이계에선 얘기가 다르다.
몬스터를 결집해서 공성전을 하려는 미친놈도 없거니와 성벽보다 성문이 더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성 자체가 리치의 취향이 들어간 구조물이다 보니 이해를 하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짓이었다.
세 개의 성문은 북, 서, 동쪽으로 나 있었다.
마치 삼각형의 꼭짓점 방향에 하나씩 있는 모습이었다.
던전 입구에서 제일 먼 성문은 북쪽 방향.
그렇기에 서진은 서문과 동문, 둘 중의 하나를 택해서 가야 했다.
서진은 별다른 고민 없이 동문으로 향했다.
리치가 자주 머무는 연구동이 동문과 그나마 가깝기 때문이다.
“성문 파괴는 제가 할게요.”
레이나는 크로스보우에 볼트를 장전하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성문보다 바로 옆에 있는 성벽을 때리세요. 그쪽이 훨씬 약합니다.”
서진의 조언을 받은 레이나는 방향을 틀어 스킬을 중첩하기 시작했다.
[마나증폭]
[궤적제어]
[회전가속]
장궁이든 크로스보우든 상관없이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우우웅!
강대한 마나가 볼트를 중심으로 맴돌다 거짓말처럼 잠잠해지는 순간, 레이나가 방아쇠를 당겼다.
엄청난 풍압을 일으키며 발사된 볼트는 성문 바로 옆의 벽면으로 날아갔다.
콰아앙!
볼트가 성벽에 꽂히며 폭음과 함께 수많은 파편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사람 서넛이 동시에 드나들 만한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갑시다.”
서진의 팀은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래에 구덩이가 있지만 여기까지 온 이들 중에 해자를 건너지 못할 헌터는 없었다.
쿠웅! 쿠웅!
성벽 너머의 외곽 구역에 진입하니 스켈레톤 부대가 반갑게 맞이했다.
스켈레톤 나이트만으로 구성되었다면 한결 쉬웠겠지만 중간과 후열에 데스나이트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산 넘어 산이구나.”
창을 들고 있는 한 흑룡대원이 작게 한숨 쉬었다.
**
스켈레톤과 데스나이트를 전부 처치하고 나니 전투가 지속 가능한 헌터가 처음 데려온 인원의 반도 되지 않았다.
흑룡대가 어떤 부대인가.
국내에선 최정상이며, 세계를 기준으로 놓고 봐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력 부대다.
그런데 보스를 접하기도 전에 절반 이상이 리타이어되다니.
물론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팀장을 셋으로 나눠 전력이 분산된 점, 그리고 리치의 성이 전대미문의 대형 던전이라는 점.
규모만 따지고 보면 비슷한 크기의 던전은 있지만 출혈하는 몬스터 수준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외곽 구역에서 스켈레톤 수백 마리와 데스나이트 열 마리라니.
흑룡검가가 아닌 국내 다른 부대가 진입했다면 전멸했을 터.
오히려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흑룡대의 강함이 증명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힘이 다한 대원들을 끌고 갈 수 없기에, 줄어든 인원을 데리고 앞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내성에 진입한 서진의 팀은 잔챙이 같은 스펙터, 팬텀엘크 등을 빠르게 해치우며 나아갔다.
모든 길목에 데스나이트 같은 A급 몬스터가 대기하고 있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꿀 같은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검은 갑주를 입은 채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기사가 고고하게 복도를 틀어막고 있었기에.
그 기사 뒤로는 데스나이트 스무 마리가 도열해있었다.
“저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몬스터가 나오자 흑룡대원 한 명이 의문을 표했다.
‘어비스 나이트.’
근거리에 다소 취약한 리치의 곁을 지키는 최상급 기사 몬스터.
자체적으로 데스나이트를 지휘할 수 있으며 무력은 데스나이트 열 마리를 합친 것보다 뛰어나다.
어지간해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어비스 나이트가 나왔다는 것은 거의 리치와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저건 내가 상대하지.”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넘겨서 시간을 잡아먹느니 서진이 처리하는 편이 낫다.
철컥!
서진의 뇌기를 흘리자 어비스 나이트를 비롯한 데스나이트들이 자세를 취하며 마기를 드러냈다.
흑룡검술 제4식 만천뇌우.
수천 개의 번개 바늘이 데스나이트만을 노리며 쏟아졌다.
일시에 데스나이트를 뒤로 밀어내자 어비스 나이트 홀로 떨어져나온 모양새가 되었다.
서진은 어비스 나이트에게 점멸로 접근해서 압축된 뇌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데스나이트는 설하윤과 흑룡대원들이 맡고 레이나가 지원 사격을 개시했다.
원하는 구도를 만들어낸 서진은 마음 놓고 뇌기를 방출했다.
흑룡검술 제6식 연폭뢰.
기세를 몰아붙이며 전류 다발을 때려 박자 어비스 나이트가 주춤하며 반응이 느려진다.
그럼에도 막대한 마기를 기반으로 내려치는 어비스 나이트의 검은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서진은 하나하나 전부 받아쳐 내며 보다 큰 빈틈을 만들어냈다.
철벽같던 가드가 풀린 순간, 서진의 뇌격이 어비스 나이트의 투구 아래 부분에 꽂혀 들어갔다.
콰각!
검을 박아넣은 상태에서 서진은 그대로 검을 아래로 그었다.
균열이 일어난 갑주가 깨져나가면서 어비스 나이트의 붉은 안광이 빛을 잃어갔다.
쿠웅!
이윽고 움직임이 정지된 갑옷 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머지 데스나이트들도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전부 처리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누군가 공중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안녕!”
반짝거리는 눈,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갈색 머리칼, 이제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려는 듯한 얼굴.
언뜻 귀하게 자란 도련님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핏빛 박도 두 자루가 시선을 잡아끌며 긴장감을 증폭시켰다.
서진이 가려던 앞길을 당당히 막아선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한서진이지? 실물이 더 낫네. 반가워. 난 옥영이라 불러주면 돼.”
“처음 듣는데.”
“아핫, 당연하지. 그래서 다행으로 알아야 해. 마스터가 일찍 나왔다면 나도 널 일찍 보러갔을 거고, 그러면 죽었을 테니까?”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군.”
서진은 마스터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길드장을 칭할 때 쓰기도 하지만 다른 조직의 수장을 부를 때도 마스터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만약 길드장을 부른 게 아니라면.
“맞아. 유니온 마스터.”
서진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옥영은 먼저 입을 열어 선선히 인정했다.
“지부를 쓸어버린 뒤로 해충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약발이 다 됐나 보군.”
신랄한 서진의 어투에 옥영은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백날 없애봤자 소용없어. 나 같은 헌터는 절대 못 막으니까.”
“하긴, 플래티넘 급은 특별히 따로 퇴치해야겠지.”
“오, 등급을 맞췄네.”
서진은 옥영을 처음 봤지만 내재된 마나량과 갈무리된 기세를 보면 예전에 싸웠던 휴고 이상이었다.
그리고 플래티넘 위는 마스터뿐이니까.
“그러면 내가 여기 왜 왔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