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관심 없어.”
서진은 나사가 하나 빠져있는 듯한 저런 놈과 대화를 해봤자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을 비킬 생각이 없다는 죽이면 되고,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되면 묻지도 않은 정보를 토해내게 될 테니까.
“너무하네. 그렇게 딱 잘라 거부하다니. 이래 봬도 내 한마디에 네 생사가 걸려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는걸.”
“개 같은 집단의 수장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진 모르겠지만 신경 끄라고 전해.”
“후후.”
옥영의 미소는 차갑게 굳어지며 싸늘하게 변해갔다.
“키우는 개 앞에서 주인을 욕하니 화가 난 건가. 당장이라도 물 기세군.”
서진은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며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언제까지나 녀석과 대화만 나눌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숨은 놈들도 나와서 같이 나를 물어보지 그래.”
서진은 옥영의 뒤에서 은신 중인 헌터들을 향해 말했다.
“눈치챘었어?”
옥영은 스산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림자에 숨어있던 다섯 명의 헌터가 튀어나왔다.
“사실 여기까지 왔을 때쯤이면 공략 팀원이 얼마 남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네. 우리 쪽이 수가 부족하게 됐어.”
하지만 옥영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마스터가 점찍은 네가 대적자가 맞는지 확인해 볼까? 여력이 되면 죽일 테니까 너무 섭섭해하진 말고.”
옥영은 즐거운 듯 박도를 허공에 회전시키는 묘기를 선보이며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양손에 들린 박도에 검강이 씌워졌을 때.
쿠웅-
멀지 않은 곳에서 고막을 흔드는 충돌음과 진동이 전해졌다.
옥영은 자신의 등 뒤로 눈길을 잠깐 흘리더니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저쪽은 이미 보스랑 만났나 본데? 이거 장손 후계자께서 여기서 막혔으니 어쩌나.”
그 순간, 서진의 뒤편에서 폭음이 울리더니 앞으로 흐릿한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잔상의 주인은 약을 올리던 옥영에게 격돌했다.
“크윽.”
찰나에 들어온 검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옥영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서진 님, 이 자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설하윤은 옥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흑룡부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저희가 저 여섯 명을 맡으면 되니까 도련님은 먼저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서진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수긍했다.
“그러지.”
“어딜 멋대로!”
옥영이 서진을 막기 위해 몸을 틀었지만 설하윤이 앞길을 막으며 박도를 쳐냈다.
“하, 참나.”
결국 서진을 놓쳐버린 옥영은 입매를 비틀며 설하윤을 응시했다.
“누나도 어지간히 죽고 싶은가 봐?”
“그딴 호칭으로 부르지 마시죠. 내면은 썩지 않았습니까?”
설하윤은 그와 검을 몇 번 맞대면서 그다지 중요치 않은 사실을 눈치챘다.
옥영이 외견에 비해 상당히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여자의 감이란 건가?”
어린 나이에 재능에서 비롯된 검술과 경험까지 축적된 검술은 다르다.
설하윤은 옥영에게서 후자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조금 전 급습했을 때, 육체 한 군데는 뚫을 작정으로 찔러 들어갔음에도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익숙하게 공격을 흘리며 힘을 빼는 완숙한 대처는 어린애의 재능으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었다.
옥영은 실체가 까발려졌음에도 뻔뻔하게 웃었다.
“이거, 민망하니까 너를 빨리 죽이고 한서진을 만나러 가야겠네.”
팔명검법(捌冥劍法) 광혼태세(光魂態勢)
두 자루의 박도에 직시하기 힘들 정도의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순간에 접근해서 내려치는 옥영의 검격.
설하윤은 청각에 의존해서 검을 위로 들어막았다.
하지만 박도가 날아온 방향은 우측 허리였다.
쐐액!
그때 레이나가 발사한 볼트가 박도를 쳐내며 공격을 끊어냈다.
설하윤은 숨을 고르며 뒤로 물러났다.
‘도대체 방금 공격은?’
박도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긴 했지만 검의 방향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기 위해 검을 들자 궤적이 바뀌며 다른 방향에서 들어왔다.
‘환각인가?’
설하윤은 얼얼한 팔뚝의 통증을 느끼며 감각을 최대한 확장했다.
“생각해보니 한서진이야 다음 기회에 만나면 되고. 오늘은 너희 둘만으로 만족할까?”
옥영은 박도를 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끼던 부하가 죽으면 한서진도 냉정한 척 못 하겠지? 아니면 죽이지 말고 보듬어주며 보관하고 있으면 더 화내려나.”
설하윤은 같잖은 도발을 흘려들으며 투신의 가호를 발동했다.
옥영의 부하 여섯 명과 팀원들의 전투는 빨리 끝날 것 같지 않다.
일단 레이나와 같이 옥영을 처치하는 것에 전력을 다하는 수밖에.
“호오, 스텟을 펌핑한 거야? 갑자기 기세가 달라졌는데.”
재밌다는 듯이 웃던 옥영은 땅을 박차고 날아와 설하윤의 목을 향해 박도를 휘둘렀다.
설하윤은 우측으로 몸을 틀며 검을 내리그었다.
그것을 상체를 숙여 피한 옥영.
동시에 오른손이 쥐고 있는 박도가 설하윤의 다리를 향해 쇄도했다.
일체 방어라곤 없는 회피와 공격의 연속.
레이나도 옥영의 빈틈을 노리고 볼트를 발사했다.
카앙!
하지만 옥영이 들고 있는 검은 두 자루.
왼손에 들린 박도가 볼트를 가뿐하게 쳐냈다.
관통력에 치중한 공격이었지만 옥영은 검강은 그보다 단단했기에.
하지만 덕분에 설하윤은 다리를 살짝 베이기만 하고 끝났다.
지원 사격이 없었다면 운신에 불편할 정도로 다쳤겠지.
“이 정도론 안 된다는 거네.”
살짝 답답해진 옥영은 서슬 퍼런 안광을 번뜩이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팔명검법 광폭태세(狂暴態勢)
옥영의 일렁거리는 검강이 폭발하듯 설하윤을 밀쳐냈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설하윤에게 박도의 연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월검류의 검기로 흘리거나 막아내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막대한 마나를 응축한 검강은 그녀의 검기를 누르며 하나둘씩 자상을 누적시켰다.
레이나의 사격도 옥영의 공세를 끊어낼 순 없었다.
카아앙!
투신의 가호로 스텟과 마나를 올렸음에도 힘과 속도, 모든 면에서 밀렸다.
그리고 위태로운 설하윤의 방어는 금방 한계를 맞이했다.
더욱 짙은 검강을 씌운 박도가 세로로 내리그어지고, 궤적에서 터져 나온 검강의 파편들이 설하윤을 덮쳤다.
투둑.
설하윤은 바닥에 웅덩이가 생길 정도의 피를 흘리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옥영의 박도를 받아냈다.
“근성이 제법이야. 하지만 두 번째도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네.”
마나가 거의 바닥난 설하윤에게 아까보다 거대해진 검강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때, 설하윤의 전신에서 발산된 붉은 빛무리가 검강을 자연스럽게 밀어냈다.
“뭐?”
옥영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고, 설하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현상을 설명해주려는 듯 그녀의 눈앞에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
설하윤과 흑룡대를 뒤로한 서진은 전투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위치는 5층의 메인 홀인가.’
키에에엑!
보스가 있는 곳에 거의 도착한 서진은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리치가 내는 소리는 절대 아니며, 어비스 나이트도 아니다.
전투가 벌어지는 메인 홀에 발을 디디니 괴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가라자?’
3미터는 될 법한 크기, 굵직한 꼬리로 된 하반신과 두 팔과 머리가 달린 상반신.
나가들의 왕, 나가라자가 맞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서진이 기억하고 있던 나가라자와 엄청난 차이점이 있었다.
뱀 같은 표피와 근육은 온데간데없이 전부 뼈로 이루어져 있었다.
형태는 나가라자가 맞지만 뼈만 남았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저 모습에 이름을 붙인다면 ‘스컬 나가라자’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보스몬스터로 착각하기 충분했다.
키에엑!!
피어만으로 마나 흐름을 일순간 헝클어트리는 위용을 떨치는 나가라자를 보며 누가 일반 몬스터라 생각하겠는가.
‘그래서 저리 필사적인 거군.’
서진은 뼈만 남은 나가라자와 열심히 싸우고 있는 한치성 팀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치성도 메인 홀에 들어온 서진을 발견했다.
“한서진!”
안색을 굳힌 한치성이 주위의 헌터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그러자 두 명의 헌터가 씨익 웃으며 서진을 향해 도약하며 날아들었다.
서진은 저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알 것 같았다.
헌터 두 명이 한서진을 막고 그사이에 보스를 끝낸다는 내용이었겠지.
조금 의외인 점이라면 지금 다가오는 두 놈이 흑룡검가의 헌터가 아니라는 것.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서진이 잠깐 고민하는 사이 거구의 헌터가 할버드를 내려쳤다.
카각!
서진은 사선으로 검을 올려 치며 할버드를 빗겨냈다.
그리고 동시에 마법사가 어스스피어를 만들어 심장을 향해 쏘아 보냈다.
서진은 점멸로 피하며 뒤로 이동했다.
그러자 마법사가 기다렸다는 듯 어스퀘이크를 발동했다.
콰가광!
서진이 딛고 있던 땅이 무너지며 아래층으로 떨어졌다.
어떻게든 보스와 멀리 떨어트려 놓으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뭐, 나야 좋지만.’
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조바심이 나는 척 표정을 꾸몄다.
나가라자는 페이크 보스고, 현재 리치는 다른 곳에 숨어있다.
서진은 나가라자가 저런 꼴이 된 이유가 리치에게 당했기 때문이라 확신하고 있다.
7성주라는 말로 묶어서 지칭하지만 서로의 관계는 제각각이다.
사이가 좋은 경우도 있는가 하면 적대하기도 한다.
그러니 리치가 나가라자를 죽여도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왜 나가라자를 가짜로 내세웠는지도 알 것 같군.’
헌터들은 나가라자를 쓰러트리면 보스를 죽였다고 판단할 터.
방심하고 있을 때 나타나서 역공하거나 혹은 아예 도주해서 숨어버릴 생각일 터.
보통 보스몬스터는 던전 브레이크가 완전하게 일어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이 던전은 마령전에서 인위적으로 불러온 리치의 성.
어쩌면 던전의 제어권이 리치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가라자를 죽인 시점에 성을 붕괴시켜버리고 도망가면 리치라는 존재가 있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서진의 추측에 불과하다.
‘리치를 찾으면 알 수 있겠지.’
일단 서진에게 따라붙은 저 두 명의 헌터부터 처리해야 하겠지만.
“으하하! 당장 보스를 쳐야 되는데 우리가 막고 있어서 짜증 난 듯한 얼굴이구나.”
할버드를 어깨에 걸친 헌터는 옆의 마법사와 함께 이죽거렸다.
‘이제 생각났다.’
프리헌터로 활동하는 고레벨 형제 용병이 있다는 얘기는 얼핏 들은 적이 있다.
마법사는 흔한 인상이지만 대머리에 할버드를 독특한 조합이라 떠올릴 수 있었다.
서진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것일까.
거구의 헌터는 대포알처럼 날아와 할버드를 휘둘렀다.
그리고 보조하듯이 바닥에서 튀어나온 대지의 속박 마법이 서진을 압박했다.
서진은 다급한 안색으로 굵은 뿌리를 단번에 베어내고 할버드를 피하며 메인홀로 내달렸다.
누가 봐도 보스에 가까이 가려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일 터.
당연히 두 사람은 속아 넘어갔다.
어떻게든 막기 위해 서진을 쫓으려 몸을 튼 찰나, 서진의 낙뢰가 두 사람에게 내리꽂혔다.
콰릉!
서진이 보스 쪽으로 갈 거라 예상했기에 보였던 잠깐의 빈틈.
연기로 착각을 유도한 뒤에 생겨난 방심을 서진이 정확히 노린 것이다.
“끄으윽!”
전격을 맞은 형제는 고통을 견디며 맞대응하려 했지만 아무런 공격도 할 수 없었다.
용체화 상태에서 내보낸 전격이라 마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해버렸기 때문에.
서걱!
일검에 두 명의 목을 벤 서진은 가만히 서서 기감을 확장했다.
8레벨인 지금, 성 하나 정도는 작정하면 전부 감지의 영역 아래에 둘 수 있었다.
‘성 지하에 있군.’
나름 마기를 감추고 있지만 서진에겐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서진은 리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