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어디로 가시려는 건가요?”
명확한 목적지를 지각한 듯한 설하윤의 눈빛에 레이나가 급하게 질문했다.
“서진 님이 있는 곳으로 가려합니다.”
“네? 어딘지 아세요?”
“예, 알 것 같습니다.”
“그럼 팀원들하고 같이 가시죠. 그 편이 서진 씨에게도 좋을 거예요. 어차피 같이 나가야 하니까.”
“그럼...”
설하윤은 흑룡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옥영의 여섯 부하는 이미 주검이 되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육체에 볼트가 몇 개 박혀있는 것이 보였다.
레이나가 두 전장을 동시에 살피며 지원 사격을 했다는 의미였다.
볼트가 박힌 부위를 보니 레이나가 아니었다면 사망자가 나왔을 게 분명하다.
물론 분산된 사격 때문에 자신이 옥영에게 죽을 뻔하긴 했지만.
설하윤은 고갯짓 한 번으로 잡념을 털어냈다.
애초에 지원에 기대어 목숨을 맡겨선 안 된다.
잠깐이나마 나약한 생각을 한 것 같아 설하윤은 눈꺼풀을 내리며 반성했다.
“레이나 씨의 의견이 타당하군요.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지친 몸을 달래고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맞는 말이야.”
흑룡부대장은 동의하며 설하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
서진이 ‘스컬 나가라자’라고 이름 붙인 뼈만 남은 나가들의 왕.
비록 페이크보스긴 하지만 성주급 위용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한치성과 그 팀은 스컬 나가라자를 쓰러트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치성의 마법, 윈드 헬릭스가 나가라자의 상반신을 분쇄하며 전투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됐어!”
한치성의 부하 헌터들은 안색을 피며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이걸로 한서진의 소가주 임명은 무산되었습니다!”
“다들 수고했다.”
하지만 한치성의 환희와 기쁨도 잠시.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는 건 한번 공략하면 소멸되는 일회성 던전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 던전은 은월각주가 보고한 대로 빠르게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상태였다.
즉, 보스를 죽였으니 던전이 붕괴될 조짐이 보여야 한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면서 던전 출구가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지금은 매우 고요하다.
불안해진 한치성은 보스의 사체를 검으로 뒤적거렸다.
‘없어.’
보스들은 대개 작지 않은 마력석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무너지지 않는 던전과 마력석의 부재.
한치성은 절대 인정하기 싫은 가정을 떠올리게 되었다.
‘설마 이놈이 보스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짓은?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나올 정도로 주먹을 쥐던 한치성은 갑자기 든 생각에 고개를 홱 들었다.
‘한서진!’
그러고 보니 녀석을 막으러 갔던 용병 형제들이 보이지 않는다.
“당장 찾아!”
한치성은 언성을 높이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용병 형제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뇌기에 당했습니다.”
“나도 알아.”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한치성은 주변을 둘러봤다.
용병을 죽이고 그대로 사라진 이유는 자신이 상대하던 몬스터가 보스가 아니란 건 알았기 때문이겠지.
“당장 한서진을 찾아.”
한치성은 잘근잘근 씹듯이 말하며 서진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
서진의 레벨이 오르며 기세가 변하자 리치의 경계심은 한껏 올라갔다.
“뭐냐! 방금 뭔 짓을 한 거지? 생각해 보니 그때도 그랬지.”
십만의 군세를 상대하면서도 강해지던 놈이지 않았던가.
‘어서 도망쳐야 돼.’
포탈 마법의 캐스팅 준비는 거의 완료되어 간다.
잠깐만 투신을 막으면 된다.
다행히 투신도 이전에 비해 약해진 듯하니 그리 어렵진 않을 터.
리치는 서른 기의 어비스 나이트로 충분할 것 같다고 계산했다.
하지만 가만히 두고 볼 서진이 아니었다.
“네 속셈은 뻔하지.”
서진은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흑뢰를 발산하며 검을 가슴께로 올렸다.
흑룡검술 제9식 의전검(意電劍)
서진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영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
그것들 중에 리치만을 특정하자 심상 속에서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고 서진과 리치만이 남았다.
오롯이 정신을 집중한 서진은 천천히 검을 그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진 검의 궤적은 정확히 리치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상 속에서 이루어진 검격은 현실에서도 똑같이 현현되었다.
파지직!
한줄기의 흑뢰가 리치의 정수리를 타고 내리꽂혔다.
“크아악!”
갑자기 전신에 작렬한 뇌격에 리치의 정신은 혼미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리치가 본 거라곤, 서진이 허공에 검을 휘두른 것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전격이 덮쳐오다니.
대응할 찰나의 시간조차 없었다.
서진을 막기 위해 소환한 어비스 나이트는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다.
“후우.”
의전검을 성공적으로 꺼내어 휘두른 서진은 차분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진이 익히는 것 중에 제일 까다로운 기술이 흑룡검술의 9식이다.
리치의 대군을 쓸어버릴 때도 의전검만은 뜻대로 다루지 못했다.
심상이 안정되어야 제대로 쓸 수 있는데 당시 서진은 투기에 반쯤 미쳐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구에서 깨어난 뒤로 정신이 새롭게 구축되면서 투신 때와는 다른 심상을 만들게 되었다.
광폭함과 냉정함만이 있는 것이 아닌 수많은 요소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의전검을 새로운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진은 9레벨에 들어서자마자 차이를 직감하고 검을 들었고, 결국 성공해냈다.
위력만 놓고 보면 10식이 훨씬 강하지만 잠재력은 9식이 더 높다.
흑룡검술의 순서를 왜 이렇게 배치한 건지 전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의전검을 접하고 심신을 안정화하라는 의도.
그렇다고 초중반에 집어넣으면 아예 이해조차 못할 테니 타협을 한 지점이 아홉 번째였겠지.
이계에서도 잘 써먹지 않았던 기술인 만큼 리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파직!
물론 흑뢰가 강하다고 하나 성주급인 리치를 빈사 상태로 만들긴 한참 부족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리치는 공포와 당혹감에 빠져있었다.
“아니, 도대체!”
공격을 맞았으니 대응을 해야 하는데 마기가 움직여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기는 다시 물 흐르듯 움직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극도의 혼란과 무력감을 느꼈다.
리치는 이 현상의 범인인 서진을 노려봤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도망 못 가게 막은 것뿐이야.”
용체화 효과에 마기가 추가되었으니 그것을 이용해 리치의 발을 묶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망할 놈.”
마기가 잠깐 끊기는 바람에 포탈 캐스팅은 취소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가만 놔둘 리가 없으니 결국 투신을 죽여야 살아나갈 수 있다.
“저놈을 죽여.”
리치는 어비스 나이트를 방패 삼아 앞세우며 흑마법을 발동했다.
“다크스틸 에리어”
리치의 손에서 검은 마기가 공간을 점유하며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여갔다.
생명체의 모든 감각을 앗아가며, 적에게 강탈한 마나로 영역을 유지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전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지는 흑마법.
그리고 리치는 장기전이 특기 중의 특기였다.
콰릉!
서진은 낙뢰로 어비스 나이트 하나를 날리며 침착하게 생각했다.
전투에서 중요한 시각, 청각, 촉각이 무너졌지만, 서진의 검은 비교적 정확하게 어비스 나이트들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문제다.
숱한 경험으로 버티고 있지만 리치의 최상위 영역 마법을 정신력 하나만으로 이겨낸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리치의 검은 영역이 마나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하지만 다크스틸 에리어는 딱히 마땅한 대처법이 없다.
마나를 뺏기는 걸 막을 수도 없고 감각을 되찾으려면 영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전투가 길어지게 되겠지.
바로 리치가 원하는 장기전이 돼버리는 것이다.
이계에선 마나를 쏟아부은 흑룡검술 10식으로 영역 자체를 찢어발겼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서진은 가진 기술과 조합을 전부 계산하며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역시 그게 제일 낫나.’
다른 방도가 여럿 있긴 하나, 제대로 된 의전검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다크스틸 에리어에서 어비스 나이트의 공세를 받아내야 하는 상황.
무턱대고 9식을 발동할 순 없었다.
리치도 한번 당했으니 대놓고 시도하면 방비를 할 테고.
‘그렇다면.’
서진은 두꺼운 물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어비스 나이트의 공격을 차단함과 동시에 의전검을 펼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
서진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의전검을 발동했다.
잠시 흔들리던 심상이 안정되자 아까와 같은 장면이 나타났다.
확신을 품은 서진의 검은 세차게 허공을 베었다.
그리고 검격의 결과는 현실에서 나타났다.
콰가가각!
리치가 두르고 있던 열 겹의 실드가 무색하게 그 안에서 갑자기 등장한 뇌격.
내부에서 터져나간 검은 번개는 실드가 깨트리며 리치를 직격했다.
흑룡검술 제5식 전광검.
서진은 남은 힘을 끌어내 뇌격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리치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콰아앙!
어지간한 영웅급 방어구보다 단단한 내구도를 지닌 리치의 뼈가 뇌검에 비해 균열이 일어났다.
쩌적!
서진이 가한 힘에 따라 뼈가 부서지며 사람 형태를 이루고 있던 해골이 무너졌다.
리치를 파괴한 서진은 바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몸을 부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작업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계에서야 라이프 베슬을 숨길 곳이 많았겠지만 지금은 다르지.”
던전이 나타난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낯선 환경에서 자신의 목숨을 던전 밖으로 빼돌리진 못했을 터.
라이프 베슬은 아직 성안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서진은 기감을 촘촘하게 퍼트리며 티끌만 한 마기의 흔적까지 수색하기 시작했다.
“불안하긴 했나 보군.”
입꼬리를 올린 서진은 검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멀리서 갈 필요 없이 바닥 아래 숨겨진 공간에 라이프 베슬을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안..돼!”
서진은 간절히 외치는 리치를 무시하며 구슬을 깔끔하게 절단했다.
마음 같아선 산산조각 내고 싶지만 던전 보스를 공략했다는 증거는 남겨야 좋을 테니까.
“끄아아악!”
라이프 베슬이 파괴되자 리치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부서진 몸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무의미한 저항에 불과했다.
리치의 뼈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점차 사라지며 이윽고 뼛조각까지 전부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라이프 베슬에도 아무런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완전히 끝났군.”
그리고 보스가 죽었다는 걸 알리듯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워낙 규모가 큰 구조물이라 금방 무너지진 않겠지만.
서진은 리치의 사체와 두 동강 난 라이프 베슬을 가방에 담았다.
“이제 가볼까.”
옥영을 설하윤에게 맡기고 왔으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서진 님!”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설하윤을 필두로 레이나와 흑룡대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반대편에선 한치성이 분기를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