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고작 다섯 걸음.
서진과 한치성이 마주 보고 서 있는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어느 쪽이라도 검을 뽑으면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올 정도로.
한치성의 팀원들처럼 설하윤과 레이나도 언제든 발검할 준비와 볼트를 장전하며 대기했다.
보스는 이미 서진의 손에 떨어진 상황.
한치성 입장에선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일 테니 당장 무력행사로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의외로 한치성은 검을 잡지 않고 입부터 열었다.
“하나만 묻자. 내가 뱀 같은 해골 잡고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냐.”
“어.”
지켜보는 사람이 왠지 불안해질 만큼 차분함을 유지하는 한치성.
그는 주먹만 꽉 쥐고 있을 뿐 별다른 행동에 나서진 않았다.
“소가주된 거, 미리 축하해줄게.”
심지어 축하 인사까지 건네며 지나쳐 간다.
서진의 뒤에 서 있던 흑룡부대장은 침음을 삼키며 눈매를 좁혔다.
예전부터 봐왔던 한치성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이대로 쉽게 물러날 리가 없었으니까.
‘무슨 꿍꿍이인 건지.’
**
[옥영이 죽었다고.]
국제 헌터 연맹장도 찾지 못한 유니온의 본부.
유니온 마스터가 기거하는 심처에서 두 명의 멤버가 흐릿한 장막 앞에서 부복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장막 너머에 있을 마스터의 목소리가 그들의 머릿속으로 전달되었다.
어깨까지 머리를 기른 장발의 남자가 고개를 더 숙이며 대답했다.
“흑룡검가의 설하윤 헌터입니다. 한서진 후계자의 호위를 맡고 있습니다.”
[한서진도 아니고 그 아랫것에게 죽었다라...]
“마스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한서진은 마광병을 완전히 치유했습니다. 그런데 마스터께서 눈길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유니온 마스터의 총애를 받고 있는 그였기에 할 수 있는 대담한 질문.
[아미르, 네가 생각하기엔 어떻지?]
질문이 돌아오자 그는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아꼈다.
“저로서는 마스터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아직 알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괜한 질문을 드려 송구합니다.”
[되었다, 그보다 네가 보기엔 어떻더냐.]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절대 만만치 않은 자입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여태까지 한서진과 적대한 인물이나 단체는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상승세도 굉장히 가팔라서 사실상 지금 손대기엔 늦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미르는 고개를 살짝 들며 한서진을 보며 느낀 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옥영에게 지시한 마스터의 실책을 꼬집는 듯한 말까지.
그럼에도 마스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미르 곁에 부복 중인 멤버만이 흠칫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렇단 말인가.]
의미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마스터는 느릿하게 고개를 틀었다.
아미르는 목을 숙이고 있음에도 마스터의 시선이 느껴졌다.
등이 따가워서 자칫하면 화상 입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짙은 정적 속에 다시 마스터의 음성이 들렸다.
[그렇다면 아미르, 네가 한서진과 싸운다면 이길 자신이 있느냐.]
마스터답지 않은, 노골적인 의도가 느껴지는 부추김이었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벨 상승세가 제법이긴 하나, 아직 저에겐 못 미칩니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고레벨 헌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며 잘난 척하는 꼴을 보기가 싫었으니까.
대답을 유도하기 위한 마스터의 덫이지만 아미르에겐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이었다.
[허면, 능히 한서진을 처리할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애초부터 마스터는 이 자리에서 한서진을 자신에게 맡길 생각이었다는 것을, 아미르는 깨달았다.
[기대하지.]
그리고선 장막 너머의 실루엣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아미르와 옆에 있던 멤버는 동시에 무릎을 피며 일어섰다.
“쉐르코, 한치성에게 접촉해서 자리를 만들어.”
“알겠습니다.”
아미르를 형님으로 모시는 그는 진중하게 눈을 빛냈다.
무작정 가서 부딪치는 건 어리석은 짓거리다.
한서진의 경쟁자를 이용한다면 전력도 빌릴 수 있고, 후폭풍도 그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다.
“그런데 형님, 마스터께선 정말 왜 한서진을 죽이려 하는 겁니까.”
마스터 앞에서 이미 모른다고 답한 아미르였지만 너무나 궁금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다.”
“마스터께서 나서면 진작에 끝났을 텐데 덕분에 우리만 귀찮아졌네요.”
“쉐르코, 입 조심해라.”
“죄송합니다.”
플래티넘급 중에서도 최측근 멤버만 알고 있는 사실.
현재 유니온 마스터는 힘이 봉인당한 상태다.
정확히 어떤 연유로 마스터가 힘을 드러내지 못하는지는 아미르도 모른다.
다만 몇 달 전부터 힘을 해방하기 위해 칩거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케린이 죽었을 때쯤에 들어갔다가 얼마 전에 나오셨으니 그리 오래걸리진 않은 셈이지만.’
그리고 예전엔 흑룡가주를 신경 썼지만 이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만큼 급하다는 의미일까.
‘이번 일 끝내고 나면 한번 여쭤봐야겠군.’
아미르는 상념을 털어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
마경에서 전대미문의 대형 던전이 등장했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다.
그곳에 사는 몬스터들을 자극해서 대규모 웨이브가 일어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리되면 지역은 폐허가 되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었다.
마경과 인접한 지역에선 남쪽으로 피신하는 사람들마저 나타났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움직이니 행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흑룡검가의 핵심 전력이 곧바로 던전으로 향했다는 소식에 대중들의 불안감은 옅어지기 시작했다.
한국 제일 가문.
압도적으로 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가문의 부대가 나선다고 하니, 불안에 불 지피는 이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물론 흑룡검가의 출정 소식만으로 혼란을 완전히 잠식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헌터협회와 대한가문회에서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연합 공략대를 구성했다.
그중에 철혈백가와 기갑성가는 독자적으로 신속하게 출진해서 흑룡검가를, 정확히는 한서진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흑룡가주의 강한 제지를 받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원군이 늘어나면 사상자도 적을 테고 나쁠 게 하등 없는데 왜 말린단 말인가.
하지만 뒤이은 흑룡가주의 말에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려 흑룡검가의 소가주 임명이 걸린 공략.
그 얘기는 백화연과 성주원을 더욱 안달나게 했다.
그런 중요한 공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니.
소수 정예 부대를 편성해서 진입각을 살폈지만 흑룡가주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사실 타 가문의 소가주 결정에 개입하는 건 썩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서진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진입을 포기하고 서진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속보, 흑룡검가 한서진 보스 공략 성공.]
[마경에 출현한 던전 완전 소멸.]
[흑룡검가 소가주는 이제 한서진?]
관련 기사와 반응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이게 그 보스의...”
널찍한 가주전(家主殿) 탁상 위에 서진이 처치한 리치의 뼈와 조각난 라이프 베슬이 놓여져있었다.
“대단하군.”
일신의 무력이 중급 헌터를 넘어서는 사람들은 감탄을 흘렸다.
이미 죽은 몬스터라고 해도 잔여 기운과 흔적을 통해 어느 정도로 강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기에.
하물며 성주급이라 더 명확하게 체감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깨달았다.
“얼마나 강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
마치 사람이 아득한 바다의 깊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물론 흑룡가주는 예외였지만.
“수고했다.”
가주가 드물게 치하하는 말을 꺼낼 만큼 대단하단 의미였다.
각주들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으며, 서진은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네.”
“이제 이 시간부로 너는 소가주다. 임명식은 이주 뒤에 거행하는 것으로 집법회에서 정했다. 이견 있느냐.”
사실상 차기 가주가 정해지는 순간이다.
당주와 각주들은 숨을 들이마시며 서진을 쳐다봤다.
“없습니다.”
14일 뒤면 흑룡검가가 처음 세워진 날이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식이라도 늦춰보려는 의도가 느껴지는 건 괜한 생각일까.
정말 쓸데없는 발버둥이다.
어차피 임명식과 별개로 이미 소가주가 되었으니까.
**
“결국 서진 도련님이 되는구나.”
소가주가 결정되고 나서 외무각 직원들은 예상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감찰각주는 신났겠네.”
“그래봤자 거기서 더 올라갈 데도 없잖아.”
“없기는, 차기 가주 핵심 라인이니까 각주 물러나도 장로는 확정인데.”
“아니면 은월각하고 감찰각을 통합한 자리에 갈 수도 있고.”
“뭔소리야?”
“그런 소문이 있던데.”
“난 또 진짠 줄 알았네. 찌라시 치워.”
“그나저나 내원당주랑 은월각주, 약제원주는 이제 시한부 됐네. 집법회도 물갈이 확정이고.”
그 말에 다른 직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은월각주는 분위기 묘하던데? 어쩌면 살 수도 있어.”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출세한 사람은 정보건 그 양반이야. 한정후 집법당주에게 밉보여서 한직으로 쫓겨났다가 팀장되고 이제는 실장, 그리고 별 탈 없으면 내원당주까지 가겠지.”
“한치성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게 썩은 줄인지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식물인간이었던 도련님이 둘째를 제치고 소가주가 될지.”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잖아. 예전엔 아무도 예상 못했지. 단지 적극적으로 줄을 잡은 사람들은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고.”
직원들이 떠드는 얘기는 어디든 나돌기 마련이다.
입을 여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 비슷한 내용은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고 있었다.
당연히 던전기획실장인 정보건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정보건은 오래간만에 서진과 점심을 먹으면서 운을 슬쩍 띄웠다.
“서진아. 감찰각 있잖아.”
“어.”
“너 가주되면 은월각이랑 통합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뭔 소리야?”
처음 들어봤다는 서진의 태도에 정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누가 중요한 자리에 올라가면 밑에선 그와 관련한 뜬소문들이 나돌기 마련이거든.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지. 역시 아니구나.”
그런 소문에 낚이냐는 서진의 시선에 정보건은 헛기침하며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의외로 한치성이 조용하던데, 그쪽에서 너보고 뭐라고 하진 않았어?”
“별로? 던전에서 축하한다는 말 외엔 없었어”
“그럼 다행이고.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라. 소가주 됐으니까 이참에서 호위를 늘리는 게 어때? 네가 엄청 강한 건 알지만 상황에 따라 손이 부족한 일도 생길지 몰라.”
“생각해 볼게.”
서진도 정보건의 걱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쫓아야 할 때 여러 명이 사방으로 흩어지면 혼자서 전부 추적하긴 어려울 테니까.
“생각만 하려는 건 아니지? 차라리 내가 쓸만한 헌터 리스트를 뽑아줄까?”
“됐어.”
서진은 태평하게 피식 웃어넘겼다.
한치성이 무엇을 획책하든 상관없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으니까.
수 속성 계열의 감시 마법인 미러 아이즈를 한치성에게 붙여놓았다.
물론 일반적인 마법이었다면 한치성에게 들켰을 것이다.
중급 정도의 마법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녀석이니까.
그러나 한치성의 모습을 담고 있는 미러 아이즈는 투기로 만들어진 변형 마법.
9레벨이 되면서 투신전 능력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서진은 습관처럼 미러 아이즈가 보여주는 화면에 다시 눈길을 돌렸다.
**
“나를 보자고 한 용건이 뭐지?”
“듣던 대로 말이 짧군.”
주변에 아무도 없이 한치성과 아미르가 단둘이 만나는 모습을 미러아이즈를 통해 서진이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