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사방이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있는 공간.
미네소타에 나타난 뱀파이어 성의 최상층.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는 창백한 남자를 향해 열댓 명이 달려들고 있었다.
“오너라.”
적들을 앞에 두고도 오만하게 양팔을 펼치는 남자에게 강기가 쇄도했다.
콰과가광!
하지만 창백한 남자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열댓 명이 함께 공격했음에도 옷가지조차 흠집 내지 못한 것이다.
그들 중 리더인 로건은 피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발을 디뎠다.
검자루를 강하게 쥐며 그의 주력 스킬, ‘화격(火挌)’을 발동했다.
가진 마나의 반절 가량을 쏟아부은 화격은 천장을 휩쓸며 창백한 남자를 향해 낙하했다.
“훗.”
필사의 의자로 내보인 스킬이지만 뱀파이어 로드에겐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다.
로드는 팔을 휘저으며 혈기로 받아쳤다.
응집된 피가 불길을 억누르며 화격을 잠재웠다.
혈기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송곳처럼 모이더니 화살처럼 날아가 로건의 오른 다리를 꿰뚫었다.
“크아아악!”
운신이 힘들 정도의 치명상이었지만 로건의 핏발 선 눈에는 살의가 꺼지지 않았다.
이 불길한 성과 저 괴물이 아들과 아내, 친구들과 터전까지 모든 걸 앗아갔다.
성이 나타났을 때 다른 주에 공략 원정을 가지만 않았다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네놈 때문에!”
“...좋군.”
뱀파이어 로드는 인간의 절절한 포효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끈적하고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직면할 때마다 깊은 충족감이 느껴진다.
이계에서 다른 종족이 보이는 감정보다 훨씬 다채롭다.
“진작에 여기로 올 걸 그랬나.”
처음엔 누군가 고의로 이계에 균열을 가속화하는 듯해서 꺼림칙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자, 어서 다시 덤벼 보아라.”
이렇게 맛있는 피가 널려있으니 말이다.
로드는 자신을 죽이러 온 공략대를 향해 너그러이 미소지었다.
쉽게 죽이는 것 대신 최대한 유희를 즐겨볼 생각이었다.
주변에 있는 헌터 시체들의 피에서 뽑혀 나온 혈기가 남아있는 공략대를 향해 쏘아졌다.
**
쿠웅!
목이 잘린 트윈 헤드 오우거가 2차선 도로 위로 쓰러졌다.
“이걸로 끝이라 했지?”
“예.”
서진이 검을 넣으며 묻자 흑룡대원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는 다행히 오래가진 않았지만 여파는 상당히 길게 남았다.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도심에서 날뛰는 몬스터를 처리해야 할 정도로.
원인에 대해선 아직 추측만 무성할 뿐이었다.
서진은 마령전이 의심스러웠으나 확신할 단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앞으로 더 일어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어쨌든 상대적으로 땅이 좁고 고레벨 헌터가 많은 한국은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수도 빼곤 통제력을 상실한 국가도 있고, 정부가 붕괴한 나라도 있었으니.
헌터 강국에 속하는 미국마저 땅이 넓은 탓에 몬스터 소거에 애를 먹는 중이었다.
물론 난이도로 보면 미네소타에 등장한 뱀파이어 로드의 성이 더 큰 걸림돌일 테지만.
아직 클리어했다는 소식이 없으니 진입했다는 공략대는 전멸당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번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 전후로 나타난 성주급 몬스터가 뱀파이어 로드 말고 하나 더 있었다.
레비아탄.
바다를 영역으로 삼는 해룡이 지중해에 등장했다는 소식을 어제 아침에 접했었다.
‘그쪽은 어떻게 됐으려나.’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흑룡검가가 위치한 개성부터 안정화시켜야 했기에 귀만 열어놓은 상태였다.
그때 은월부각주가 다가와 타이밍 좋게 보고했다.
“소가주님, 조금 전, 이탈이아의 라루체 길드장이 레비아탄을 처치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레비아탄이 지중해에서 티레니아해로 올라오는 바람에 이탈리아의 피해가 심각했다고 합니다.”
라루체 길드장이면 서진도 한번 들어본 적이 있다.
유럽을 통틀어 세 명밖에 없는 10레벨 헌터 중 한 명.
“그리고 아직 대외적으로 공개되진 않았지만, 라루체 길드장도 전투 끝에 사망했습니다. 그 외 사망한 고레벨 헌터들도 많다고 합니다.”
레비아탄은 서진에게도 까다로웠던 성주였다.
특유의 껍질로 인해 뇌기도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어차피 바다에만 있었기에 그렇게 부딪힐만한 일은 거의 없었지만.
“당분간 이탈리아는 상당히 혼란스럽겠군.”
이탈리아를 지탱하는 거목이 쓰러졌으니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겠지.
‘그럼 이제 성주는 넷만 남았군.’
나가라자는 리치에게 복속되어 한치성이 없애버렸고, 리치는 서진의 손에 죽었다.
레비아탄은 10레벨 헌터와 동귀어진.
그리고 실버울프는 서진의 가신이 되었으니 사실상 셋만 남은 셈이다.
그중 뱀파이어 로드는 이미 등장했고, 나머지 드래곤 로드와 그림리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추세대로라면 시간문제일 듯하다.
서진이 가문으로 돌아가니 구현수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가주님. 마관청에서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
무슨 일인가 하니, 미국 국토안보부 장관이 마관청을 통해서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서진은 대충 무슨 용건인지 짐작이 갔다.
응접실에 들어가니 장관이 서진을 반기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소가주님. 루카스 워커입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만나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급하게 온 이유는 미네소타에 출현한 성 때문이겠죠?”
“바로 본론을 꺼내주시는군요. 맞습니다. 현재는 미니애폴리스 전역으로 영향력이 확대되는 중이라 매우 심각합니다.”
“그런데 굳이 흑룡검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까? 미국 헌터들도 충분히 강할 텐데.”
서진은 알면서 굳이 질문했다.
상대방 입에서 아쉬운 소리가 직접 나와야 보상으로 내미는 물건의 격도 올라가기 마련이니.
장관도 알고 있기에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 던전 브레이크로 인한 사태를 수습하느라 절대적인 전력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던전에서 튀어나온 몬스터 중에는 S급에 해당하는 대형 종도 있다.
뱀파이어 성은 천천히 도시를 집어삼키는 중이지만 S급 몬스터들은 당장 도시를 파괴하고 대규모 살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연히 그쪽으로 헌터들을 보내는 것이 먼저였다.
“거기다 성 꼭대기 있는 그 괴물이 사용하는 이질적인 기운 때문인지 현재까지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반면 한국은 이미 회색섬에 등장했던 뱀파이어를 처치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보스를 죽인 헌터는 흑룡검가의 한서진.
미국에서 서진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곳에 가달라고 하는 거니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하겠군요.”
“준비는 해왔습니다만 혹시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장관은 서진이 따로 마음에 품고 있는 물건이 있음을 눈치챘다.
서진은 장관이 내민 리스트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이건 다 필요 없고, 해광석(海光石)만 주시죠.”
마력석의 일종으로 던전 바닷속에서 발견된 유일무이한 전설급 아티팩트.
흡수하면 원하는 스텟을 올릴 수 있는 효과를 지녔다.
그리고 정해진 수치가 아닌 퍼센트로 적용되어 스텟이 높을수록 큰 효과를 보게 된다.
그렇기에 해광석은 국가적인 보물이기도 했다.
“그건...”
장관은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해광석은 결정 권한 밖에 있는 아티팩트.
아무리 뱀파이어 성이 시급하다 해도 승인이 나지 않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천천히 결정하시죠.”
서진도 이해한다는 듯이 재촉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큰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서진이 결정을 독촉하지 않아도 뱀파이어 로드가 영역을 확장할수록 저들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도시 하나가 통째로 몬스터에게 넘어가는 일이다.
결코 느긋하게 생각할 수 없다.
역시나 장관은 다급한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잠시 통화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얼마든지.”
십여 분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장관은 서진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장관은 대통령이 직접 승인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만큼 사태가 시급하단 뜻이기도 했다.
서진은 계약 직후에 바로 미네소타 주로 향했다.
“피비린내 때문에 어지러워.”
도시에 도착한 베리크가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귀들이 영역을 빠져나가지 못한 시민들을 물어뜯고 다니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냄새 그만 맡고 들어가자.”
서진은 훤히 열려있는 뱀파이어 성의 입구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시민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아이러니하지만 저들을 뒤로하고 로드를 죽이는 게 제일 빠른 길이었다.
키이이익!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기괴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혈기가 쇄도했다.
설하윤이 나서서 쳐냈으나 중하급 뱀파이어들이 워낙 많아 연이어 공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서진도 흑룡대 1팀을 데려온 참이었다.
설하윤이 공격을 받는 사이, 흑룡대원들이 뱀파이어를 척살하기 시작했다.
서진은 번거로운 사냥은 그들에게 맡기고 위로 올라갔다.
몇 번 와봤던 성이기에 구조는 익숙했다.
거기다 위에서 느껴지는 강한 기운 때문에 못 찾을 수가 없었다.
뱀파이어 로드가 있는 곳에 올라가니 붉은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서진이 앞으로 다섯 걸음 정도 걸었을 때, 장막이 걷히며 그의 모습이 보였다.
사방에 늘어져 있는 시체들과 입가에 묻어있는 피.
그리고 로드의 손에도 시체가 들려있었다.
“식사를 방해하다니, 매너가 안 좋은 걸.”
“너도 자진해서 이곳으로 온 건가.”
“글쎄, 원했다기보단 불가항력이었지. 지금에 와선 대만족이지만.”
“얌전히 지내면 빨리 죽을 일도 없을 텐데 그게 그렇게 힘든 건지.”
서진은 사선으로 검을 늘어트리며 흑뢰를 일으켰다.
“아주 자신감이 넘치네? 그러고 보니 너 피가 되게 맛있어 보인다.”
재밌게도 사령급 뱀파이어였던 릴리에는 서진을 알아봤지만 로드는 서진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서진이 협곡으로 떨어진 그날.
후방에 있던 릴리에는 살았지만 로드는 서진의 검에 죽었기 때문.
릴리에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으니 뒤이어 새롭게 로드는 서진을 모를 수밖에.
‘어찌 보면 릴리에보다 쉬울지도 모르겠군.’
서진이 뇌기를 흩뿌리며 검을 들어 올릴 때 뱀파이어 로드가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혈풍삭(血風削)
그의 손이 내려지며 핏빛 바람이 전방을 뒤덮었다.
바람 아래에 있는 시체는 분쇄기에 들어간 것처럼 무참하게 갈려 나갔다.
범위가 넓은 데다 절삭력도 심상치 않다.
흑룡검술 제2식 천라.
서진은 공간을 덮는 바람에 맞서 흑뢰로 된 막을 펼쳤다.
콰아앙!
서로 다른 속성이 격돌하며 주변에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폭발로 인해 두 기술이 상쇄되고 서진은 뱀파이어 로드의 등 뒤로 점멸했다.
로드가 돌아본 순간, 서진의 뇌격이 떨어져 내렸다.
**
구름으로 가득한 상공, 강풍이 불고 있음에도 흔들림 없이 허공에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이제 대업이 머지않았다.”
마력석도 전부 충족했으니 이제 남아있는 성주 둘만 불러내면 끝이다.
이제 지긋지긋한 봉인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면 줄곧 거슬리던 놈도 직접 없애버리면 되겠지.
“보스.”
그때 뒤에서 중절모를 쓴 남자가 나타났다.
“아발론의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지금이라도 띄울 수 있습니다.”
“늦지 않았군.”
그가 떠있는 하늘 아래, 대지에선 새로운 던전이 등장하듯 공간이 찢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칠흑의 균열 속에서 성주 ‘그림리퍼’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