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카각!
뱀파이어 로드는 날이 서린 서진의 뇌격을 손으로 잡아서 막아냈다.
‘괴물은 괴물이란 건가.’
서진은 로드가 번개를 파고들어 검까지 쥐기 전에 회수했다.
물러나는 서진의 정면으로 혈기가 네 갈래로 나뉘어 꿰뚫듯이 날아들었다.
흑룡검술 제5식 전광검.
혈기가 가까이 오기 전에 흐름을 멈춘 서진은 로드의 측면으로 달렸다.
하지만 번개가 아직 닿기 전임에도 로드의 시선이 서진을 따라 조금씩 이동했다.
주변에 퍼져있는 혈흔을 통해 서진의 위치를 귀신같이 알아챈 것.
역시 성주급 정도 되니 만만치 않다.
서진은 무리하게 근접해서 공격하는 대신 중거리에서 뇌격을 날려 보냈다.
당연히 로드는 손을 휘둘러 받아치고 핏덩이를 뭉치며 공중에 떠올렸다.
둥그스름한 핏덩이는 일순간에 십여 개로 불어났다.
혈옥산(血玉散)
핏덩이가 꾸물거리는가 싶더니 물풍선 터지듯 비산했다.
영리하게 공간을 점유한 십여 개의 핏덩이가 폭발하니 몸을 숨길만 한 곳이 없었다.
서진은 천라를 펼치며 피 분수를 막아냈다.
[마력이 62 상승합니다]
치익!
흑뢰로 펼친 번개 방어막인데도 아슬아슬하게 뚫리려 한다.
자색 전류였다면 천라를 넘어 몸에 닿았을 게 분명했다.
이계에서 로드의 기술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위험했겠지.
‘릴리에보다 편하려나 했더니 착각이었군.’
서진의 전투 데이터를 알지 못해도 로드는 로드였다.
한층 강화된 혈기술은 쉬이 여길만한 게 아니었다.
서진은 혈옥산이 거의 끝나갈 때쯤, 파도를 일으켰다.
피와 정반대의 청명한 빛깔을 뽐내는 물이 시체들을 전부 쓸어냈다.
촤아악!
바닥을 메우며 차오르는 푸른 물에 로드는 흥미 있는 눈길을 보냈다.
“마법에도 조예가 있는 건가. 그래서 피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거였나. 헌데 물을 이용해 뇌 속성의 위력을 키우려는 속셈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군. 내가 당해줄 것 같은가?”
“글쎄.”
찰팍.
서진은 피식 웃으며 대답하고 로드에게 가속해 접근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물에 검을 살짝 담그며 뇌기를 일으키자 전류가 사납게 방출되었다.
흑룡검술 제6식 연폭뢰.
아직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음에도 서진의 검을 타고 소규모 낙뢰가 로드를 향해 떨어졌다.
로드는 소꿉장난 같은 작은 번개를 보며 조소했다.
하지만 피를 그러모아 낙뢰를 막아내려는 순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뭣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던 주변의 피가 움직이지 탓이다.
그리고 순간의 빈틈을 비집고 번개가 내리꽂혔다.
콰아앙!
“크윽.”
급한 대로 본신의 피를 써서 막아냈지만 구겨진 로드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연폭뢰라는 이름답게 번개는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서진은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로드의 허점을 노리고 계속해서 번개를 쏟아부었다.
콰릉!
연폭뢰의 무서운 점은 어찌 방어해도 미약한 전류가 상대의 육체에 침투된다는 것이다.
한두 번은 별것 아니지만 계속해서 쌓인다면 무시하지 못할 변수를 만들어낸다.
로드도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체내 혈액을 방출해 서진과 번개를 동시에 밀어냈다.
파아앙!
로드는 갑자기 주변의 피가 움직이지 않은 이유를 되짚었다.
서진이 파도를 통해 최상층에 고여있던 피를 일부 씻어낸 것 정도야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주급인 로드가 신경 써서 사용하던 혈액이었다.
마법 한 번으로 전부 쓸려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주변엔 피가 남아있었고 로드의 권한 아래에 있던 것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의문스런 로드의 시선을 받은 서진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드가 주변의 피를 활용 못 한 이유.
투기를 써서 발동한 파도였기 때문이다.
낯선 기운인 투기가 물을 타고 혈액과 섞이니 더 이상 로드가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시체의 산을 쌓아놓고 농락하듯 상대할 속셈이었나 본데, 그렇게 둘 순 없지.”
“네 놈.”
로드는 입매를 비틀며 혈기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본신의 혈기를 체험하고 싶다면 소원을 이뤄주지.”
삼혈금수(三血禽獸)
크르릉!
로드의 손에서 적광이 번쩍이더니 붉은 덩치가 튀어나왔다.
혈기로 이루어진 매, 늑대, 이무기가 각자의 움직임으로 서진에게 달려들었다.
저마다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어 무작정 검만 휘두른다고 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서진은 흑뢰를 눈부실 정도로 방출하며 정면으로 부딪쳤다.
매가 서진의 머리를 향해 급강하하고, 뱀이 서진의 발과 다리를 향해 도약하며, 늑대가 전신을 덮치듯이 뛰어들었다.
그렇게 삼혈금수가 서진을 물어뜯은 순간, 섬광탄을 방불케 할 빛이 터져 나왔다.
뇌영환보로 만들어진 분신이었다.
서진은 공간을 가득 메운 빛 아래에서 사령은신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하지만 로드의 지근거리에 접근하는 대신 중거리에서 검을 겨누고 가만히 서 있었다.
바로 의전검을 발동하기 위해서였다.
목숨이 보장된 전장에서 의전검의 숙련도를 최대한 높일 필요가 있었기에.
뱀파이어 로드가 강하긴 하지만 서진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진 않았다.
비등한 형국이지만 시간을 끌면 흑룡대가 올라올 테니까.
그렇기에 더욱 위험을 감수하며 의전검을 사용할 타이밍이다.
나중에 목숨이 오가는 전투를 할 때 확률에 베팅하듯이 의전검을 쓸 순 없는 노릇이니.
서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심상을 안정화시켰다.
로드에게 검을 겨누며 의전검을 발동하기까지 1초 남짓한 시간이 지나갔을 뿐이다.
눈을 감은 서진은 현실에서 검자루를 쥐고 있는 감촉을 잊고 심상 속 검에 정신은 오롯이 집중했다.
암전이 된 정신의 세계 속에서 서진의 검이 세로로 천천히 그어졌다.
푸우욱!
피륙을 가르는 감각과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서진의 정신은 다시금 현실과 동기화되었다.
“끄아아악!”
머리부터 허리까지 정확하게 양단될뻔할 정도의 깊은 검흔.
저만한 상처를 입었는데도 죽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로드의 생명력이 질기다는 증거.
서진은 괴물 같은 회복력이 힘을 발휘하기 전에 나선뇌격포를 발사했다.
콰앙!
섬전 같은 포격이 로드의 머리를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목이 없는 시체는 죽었다는 듯 힘없이 넘어졌다.
하지만 서진은 저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점멸로 접근한 뒤 검을 심장에 박아넣었다.
그리고 크게 헤집으며 손으로 심장을 뽑아냈다.
로드는 심장까지 확실하게 파괴해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
파지직!
흑뢰를 일으켜 조각조각 분쇄하며 태워버렸다.
의전검이 제대로 발동된 덕분에 영역이나 귀찮은 기술이 더 나오기 전에 끝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제 남은 성주는 둘 뿐인가.”
서진이 로드를 죽이고 성이 사라지자 미니애폴리스를 덮은 핏빛 안개와 대지도 서서히 옅어져 갔다.
“해광석입니다.”
도시가 정상화되는 걸 보고 있을 때 국토안보부 장관이 다가와 보상을 내밀었다.
서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맨손으로 집어 들었다.
[해광석]
-등급 : 전설.
-효과 : 제일 높은 3개의 스텟을 개별 수치의 20%만큼 상승시킨다.
“흐읍.”
루카스 장관은 왠지 무언가 아까운 마음에 숨을 삼켰다.
서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해광석을 흡수했다.
[근력이 258 상승합니다]
[마력이 266 상승합니다]
[지력이 260 상승합니다]
퍼센트로 올라가니 상당한 양이다.
물론 이 정도론 10레벨에 도달하기엔 한참 부족하지만 큰 도움이 된 건 확실하다.
“이런 거 몇 개만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아주 살짝 도둑놈처럼 들렸지만 루카스 장관은 굳이 입을 열진 않았다.
**
전 세계적인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부터 천궁의 문선영은 위험신호를 감지했었다.
대규모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전조 현상이 나타나듯이 던전 브레이크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시간이 남은 던전이 갑자기 터지는 빈도가 늘어나며 공기 중의 마나 밀도도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기에.
문선영은 단순히 백야라는 도시에 울타리를 친다고 피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라 해야 할지 천궁은 그와 관련된 정보를 이미 축적해놓은 상태였다.
자오 길드에서 천궁을 점령하기 위해 일으켰던 전면전.
문선영이 판단하기에 일련의 사건들은 자오 길드와 연관이 있어 보였다.
정확히는 자오 길드장과 그 배후.
서진 덕분에 확보했던 자료에 언급된 마령전.
자오 길드장이 자취를 감춘 것도 마령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부터 문선영은 길드 차원에서 자오길드장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불가피하게 인원을 백야 밖으로 돌려야 했지만 큰 부담은 없었다.
자오 길드가 무너지고 흑각 길드는 내분으로 힘이 빠진 상태.
이미 백야 전체가 천궁의 영역 아래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그렇게 천궁의 첩보원들은 몇 주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마침내 자오 길드장의 그림자를 밟는 데 성공했다.
“이런 곳에 숨어있었네요? 전 자오길드장인 예종하씨.”
남해 방향으로 탁 트인 테라스에 문선영이 사뿐하게 착지했다.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진 3층짜리 가옥.
예종하는 3층 주방에서 편하게 앉아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아직 한국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거 주거침입인데 말이야.”
아지트가 들켰음에도 자오 길드장은 태연하게 식탁에서 식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 모르나?”
“남의 길드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으면서, 여전히 낯짝이 두껍네요.”
“용건은 마령전 때문이겠지.”
“그럼 그냥 같이 가실래요?”
피식 웃은 예종하는 바닥에 의자를 끌며 일어섰다.
“다가오는 일을 알아내려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 당신 같은 이들은 그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것밖에 못할 테니까.”
“글쎄. 그건 한번 해봐야 알지 않을까요.”
문선영은 길이가 짧은 화살을 빼 들며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이 내보이는 무형의 기세가 허공에서 격돌하기 시작했다.
**
심해처럼 깊고 검은 안광과 길게 찢어진 입, 2미터에 가까운 장신과 맞먹는 커다란 낫.
이는 그림리퍼(Grim Reaper)를 수식하는 표현들이었다.
7성주 중에서 리치와 마찬가지로 마기를 사용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다만 세력이 있는 여타 성주들과 달리 그림리퍼는 홀로 움직인다.
그러나 일반 몬스터는 물론이고 어느 성주들도 그를 쉽게 대하지 못했다.
구천을 떠도는 대부분의 사령들은 그림리퍼의 지배하에 움직였으니까.
육체의 강함에 상관없이 정신 면역이 약해서 그림리퍼의 낫에 목이 떨어진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계의 사신이라 불리던 그림리퍼도 지금은 한 인간의 꼭두각시 신세.
영체(靈體)에 가까운 그림리퍼가 온전하게 지구로 건너올 수 있던 이유는 유니온 마스터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렇다 해도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움직이는 건 그림리퍼에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그의 명령이 자신의 욕망과 일치했기에 참을만하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
‘한서진을 죽일 것.’
그의 말대로 흑룡검가의 한서진이란 인간이 이계의 투신과 같은 놈이길 바랬다.
투신에게 당했던 수모를 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단기적인 속박이기에 한서진만 죽이면 유니온 마스터와의 호혜관계는 종료된다.
“저기 있군.”
미니애폴리스에 발을 들인 그림리퍼는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서진을 보며 입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