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사령을 다루는 그림리퍼는 당연히 주위에 시체가 많을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당연하게도 영체의 무력은 생전에 지녔던 힘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현재 미니애폴리스에는 상당히 많은 헌터가 시체가 되어 잠들어있다.
뱀파이어 로드가 남기고 간 죽음의 땅.
그것을 그림리퍼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낫을 아래로 휘두르자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끼이이이-!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려 퍼지며 차가운 주검에서 흐릿한 영체가 솟아올랐다.
수천, 수만 구의 시체에서 뽑아낸 영체들은 점차 선명한 형체를 갖추며 윤곽을 드러냈다.
각자 다른 영혼들이었지만 합쳐진 모습은 전부 동일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수백 개의 그림리퍼가 만들어진 것이다.
서진의 시선은 진작에 수 킬로미터 너머의 그림리퍼에게 닿고 있었다.
그림리퍼는 투신의 그것과 비슷한 감각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놈 말대로 이 낯선 세계에 한서진이란 인간은 이계의 투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투신의 뒤쪽으로 강한 기세를 내비치는 놈들이 여럿 있지만 상관없다.
저런 놈들쯤이야 자신의 분신들이 처리해줄 테니까.
그림리퍼는 수백 개의 분신들을 앞세우며 서진을 향해 나아갔다.
**
해일처럼 밀려드는 그림리퍼에 제일 당황한 사람은 루카스 장관이었다.
서진에게 해광석을 건네주기 위해 왔다가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기분일 터.
급하게 국토안보부에 연락은 넣었지만 당장 몰려오는 몬스터를 어찌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뒤로 물러나 계세요.”
서진은 장관을 흑룡대 뒤편으로 보냈다.
영체로 만든 그림리퍼는 본체를 처치하면 사라지는 분신에 불과하다.
“최대한 죽이면서 버텨.”
서진은 흑룡대에 간단하면서 어려운 명령을 툭 던지고 땅을 박찼다.
섬아로 파도 같은 그림리퍼 무리를 반으로 가르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진짜 그림리퍼를 향해 내달렸다.
쐐애액!
그림리퍼는 서진이 접근하는 속도를 늦추려는 듯 마기를 다섯 갈래로 쏘아 보냈다.
그리고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일부 분신들이 서진의 후방에서 낫을 휘둘러왔다.
흑룡검술 제4식 만천뇌우.
서진은 한 바퀴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뇌격을 흩뿌렸다.
그러자 전류에 잠시 움직임이 정지된 분신들.
서진은 일검에 반토막을 내버리고 방향을 틀어 본체를 향해 번개를 떨어트렸다.
거대한 낫은 흑뢰를 무리 없이 막아냈다.
그리고 절단된 분신에게서 영체를 뽑아내어 낫에 담았다.
사령이 가득 담긴 낫은 진동을 일으키며 더욱더 짙은 마기를 발산했다.
그림리퍼는 낫을 치켜들며 서진에게 달려들었다.
카앙!
뇌검이 낫을 조금 밀어냈지만 그림리퍼는 히죽 웃어 보였다.
낫에 담겼던 사령이 불쑥 나오면서 서진에게 쏘아졌다.
마력과 지력이 높은 서진은 그것들을 전부 튕겨냈다.
하지만 안심하면 안 된다.
사령들과 접촉하는 것 자체만으로 마력과 지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무방비하게 계속 깎이다 보면 육체를 사령에게 빼앗기게 된다.
서진은 뇌기를 방출하며 낫을 밀어내고 거리를 벌렸다.
그림리퍼는 아직 한 번도 죽여본 적이 없었다.
이계에서 목이나 심장을 찔러봤지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으니.
무기인 낫을 파괴하면 무력화되긴 했지만 소멸시킬 순 없었다.
서진이 그때 소멸의 협곡까지 물러나게 만든 원흉 중에 그림리퍼가 상당한 몫을 차지했다.
7성주 사이에 섞여서 사령을 끊임없이 보내니 제아무리 투신이라도 버티기 힘들었던 것.
그런데 그때보다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의전검이라면 통할지도 모르지.’
키에에엑!
하지만 정신을 교란하는 사령은 의전검을 시도조차 못하게 할 정도로 방해했다.
그림리퍼는 본능적인 위험을 느꼈는지 끊임없이 서진에게 달라붙어 낫을 휘둘렀다.
그때 익숙한 검기가 날아와 그림리퍼의 공세를 끊어냈다.
분신을 어느 정도 줄였다고 판단한 설하윤이 서진을 돕기 위해 다가왔다.
그림리퍼는 둘을 떼놓기 위해 분신을 새로 만들어 설하윤에게 보냈다.
콰앙!
하지만 멀리서 날아온 다섯 개의 화살이 분신을 꿰뚫었다.
레이나의 지원 사격이었다.
서진은 숨을 돌리며 검자루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림리퍼가 다시 서진에게 가려했지만 설하윤이 중간에 막아섰다.
“네놈이 사령을 버틸 수 있을까.”
마기를 머금은 사령들이 설하윤에게 날아들었다.
그녀도 지력이 낮진 않았기에 바로 삼켜지진 않았지만 서진처럼 전부 튕겨내진 못했다.
카앙.
굳건하던 검도 흔들리며 낫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뒤에서 사격하는 레이나 덕분에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사령에게서 자유로워진 서진은 검은 가슴께까지 들었다.
흑룡검술 제9식 의전검.
검이 아래로 휘둘러지고 섬전과 함께 그림리퍼의 몸과 낫에 일직선이 그어졌다.
파악!
낫이 깨져나가고 그림리퍼도 깔끔하게 양단되어 좌우로 갈렸다.
“끄어어억.”
정신까지 사멸되는 감각에 괴성을 질러보지만 심상 속의 서진의 검은 그림리퍼의 마지막 발악조차 절단해냈다.
파스스.
그림리퍼는 수백 개의 분신과 함께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괜찮아요?”
레이나는 사령에 노출되었던 설하윤을 걱정했다.
설하윤은 땅에 검을 찍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네, 이제 괜찮습니다.”
“그런데 레이나 님은 계속 가문에 계시는 겁니까? 구두계약은 이미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설하윤은 흑룡대쪽으로 걸어가는 서진을 힐긋 보며 질문했다.
문선영과 연결해주는 대신 소가주가 되기 전까지만 팀원으로 활동하는 조건이었으니.
레이나는 활을 뒤에 매며 싱그럽게 대답했다.
“약속 내용은 그랬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리 소가주에 오르셔서 그냥 나가기가 내키지 않아서요. 도움을 받았으니 보답은 하고 가야죠.”
“그렇군요. 그러면 서진 님께는 말씀드렸습니까?”
“아직이에요. 어쩌다 보니 말할 겨를이 없어서.”
설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최근 전투가 쏟아지듯 이어졌으니 그럴만했다.
“하윤 씨는 제가 방해되는 건 아니시죠?”
“네? 그럴 리가요. 궁사가 있어서 안심되는 면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흐음, 꼭 그런 의미만은 아니었는데.”
“예?”
눈이 동그래진 설하윤의 반문에 레이나는 금발을 살랑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새삼스럽지만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
사람이 살지 않는 까마득한 높이를 자랑하는 로키 산맥 속의 협곡.
그곳에서 거대한 균열이 길게 찢어졌다.
대게 균열의 크기가 출현 몬스터의 등급과 비슷하다는 걸 고려한다면 무조건 S급이라 봐도 무방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중하급 헌터들도 이 광경을 봤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정도의 크기.
하지만 벌어진 균열 속에서 나타난 존재는 이성을 상실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이곳인가.”
주변을 둘러보며 내뱉은 장중한 목소리.
그에 화답하듯 다른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이계를 지키고 있던 마지막 성주, 드래곤 로드가 동족을 이끌고 넘어온 것이었다.
수호자를 자처하던 그들에게 이런 상황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무너지는 세계와 함께 죽을 것이 아니라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수밖에.
그리고 마냥 도망치기 위한 목적으로만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그 아이는 꼭 찾아야 한다. 아마 이 세계에 있을 거다.”
개체 수가 극히 적은 드래곤에게 해츨링이 태어나게 될 알은 굉장히 소중하다.
심지어 그것이 로드의 격을 지녔다면 더더욱.
뒤늦게 차원 균열을 통해 사라졌다는 걸 알았지만 쫓아갈 수는 없었다.
그때는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붕괴가 가속화되며 균열이 계속 커져 나가자 비로소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 어렵진 않을 것 같습니다. 벌써 깨어난 모양입니다.”
마나라고 다 같은 마나가 아니다.
드래곤들은 서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마나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차원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감응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
드래곤 로드는 아득히 먼 거리에서 마나만으로 찾아갈 만큼 힘이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차원 이동의 여파를 적게 입은 드래곤이 있었다.
에스카네는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며 대략적인 위치를 짐작했다.
“희미하긴 합니다만 알 것 같습니다.”
에스카네는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작은 반도를 향해 나아갔다.
**
“마침내...!”
북아메리카에서 미증유의 마나를 감지한 유니온마스터는 안광을 번뜩였다.
이 기운은 드래곤이 분명했다.
“참으로 오래 걸렸구나.”
그는 지나온 과거를 반추하듯 눈을 감고 파르르 떨었다.
이젠 기억도 희미할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 당시 드래곤 로드가 창조한 저주마법으로 인해 모든 힘이 봉인 당했었다.
7성주가 이계에서 존재하는 한 영원히 해주할 수 없을 거라는 고룡의 비아냥 섞인 말은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마나를 포함해 모든 기운을 못 쓰게 되었으니.
짙은 절망감에 빠진 채 죽음을 맞이하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욕망은 예상치 못했던 미래를 만들어냈다.
소멸의 협곡에 몸을 던지고 눈을 뜨니 지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기쁨도 잠시, 고룡의 저주마법은 여전히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것조차 운명이었을 터.’
7성주가 차례로 지구로 오게 되는 미래를 엿보여준 덕분에 길을 헤매지 않고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때 ‘미래 예지’ 스킬을 가진 여자와 만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필연.
자신이 이계에 넘어갔을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살아남았군.”
그림리퍼가 소멸한 걸 확인한 그는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손에 박힌 가시가 빠지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거슬리는 감각이 남아있다.
이 또한 그 여자가 했던 말 때문이겠지.
결국 누군가에게 죽게 될 것이라는 미래.
그녀가 말해주었던 단서는 ‘마광병’ 하나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숨겼던 정보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이미 죽은 그녀에게 알아낼 길은 없었다.
어찌 됐든 이제 와선 의미가 없는 생각이었다.
그 누군가는 한서진일 거라 확신하고 있으니까.
탁.
그때 작은 발소리가 유니온 마스터의 회상을 끊었다.
“마지막 성주인, 드래곤 로드를 비롯해 총 여섯 마리의 드래곤을 확인했습니다. 현재 태평양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발론을 띄워라.”
“예!”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천공섬은 도원향이 되어줄 것이다.
**
“쿨럭.”
자오 길드장이었던 예종하는 피를 울컥 쏟아냈다.
“이거 아깝게 됐어. 누구 덕분에 곧 죽게 될 테니.”
어떻게든 생포하려던 계획을 실패하게 만든 그는 피를 흘리며 웃었다.
그래서인지 문선영은 고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전투에선 이겼지만 정작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그래도 뭐, 어차피 죽을 테니 조언 하나 해주지. 그 알량한 길드 위세를 유지하고 싶다면 에피오피아 고원으로 가봐. 혹시 알아, 마령전에서 자네를 받아줄지.”
“얼마 전에 일어났던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도 마령전 짓이죠?”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 뭘 묻나, 그리고 그건 예고편일 뿐이야.”
“마령전의 목적이 무엇이죠?”
“세계를 해방시키는 것이지.”
“그게 무슨...”
불가해한 말에 문선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예종하는 냉소적인 웃음을 보냈다.
“애초에 이 웃기지도 않은 시스템 창 자체가 잘못되었단 생각, 해본 적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