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마나를 각성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게 되는 상태창.
초창기의 혼란을 거치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스템 창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려는 학자들은 있었지만 전부 실패했다.
애초에 마나부터 비과학의 산물이었으니.
어떠한 시도조차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니 분석하려는 사람들도 점차 줄어가는 건 당연했다.
아직 포기 않고 악착같이 연구하는 이들도 마땅한 결과물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었다.
마나를 이용한 공학을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밑바탕은 여전히 암흑지대인 것이다.
문선영도 궁금증을 품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위치는 백야의 한 축을 이끄는 천궁의 길드장.
끝을 알 수 없는 학문에 눈을 돌릴 여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알고 지냈던 자오 길드장이 그 얘길 꺼내니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이 타이밍에 시스템 창에 대해 꺼낸 이유가 있을 터.
“그게 무슨 말이죠?”
“순서를 생각해봐. 처음엔 던전이었어. 그리고 몬스터가 나왔지.”
몽골 사막에 첫 번째로 의문의 균열이 나오고 사람들이 호기심과 혼란에 젖어들 때쯤,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몬스터라는 존재를 인류가 처음 알게 된 사건.
그리고 일주일간 던전이 끊임없이 생성되며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렸다.
문선영도 익히 알고 있는 ‘블랙 임팩트’라 불리는 과거.
“전부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각성자가 나왔죠.”
“그래, 각성자들이 몬스터들을 몰아내며 겨우 터전을 되찾아갈 때, 비로소 상태창이 등장했지.”
“그래서요?”
“이상함을 못 느끼겠어? 순서가 묘하지 않아? 왜 상태창이 제일 나중에 나왔을까.”
“설마.”
문선영은 힘이 탁 풀렸다.
“고작 음모론을 얘기하고 있는 건가요?”
던전의 등장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많았다.
그중에서 그럴듯하다며 지지를 받고 있는 설 중의 하나가 ‘차원선택론’이다.
전능한 신이 지구를 대상으로 모종의 실험을 하고 있다는 주장.
던전, 마나, 몬스터까지야 자연 발생이라고 어떻게든 우긴다고 해도 시스템 창은 너무나 이질적이었으니.
“천궁 길드장.”
예종하는 피를 한 움큼 뱉으며 쿨럭거렸다.
“내가 죽기 직전에 농담하고 싶은 거로 보이나? 그리고 무슨 음모론을 떠올린 건진 몰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시스템 창의 등장 자체가 실수의 증거라는 거야.”
“실수?”
“애초에 지구는 던전과 마나를 접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어. 하지만 한번 생긴 연결 통로는 절대 좁힐 수 없었던 거지.”
문선영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던전의 등장은 우연이지만 시스템 창은 그 때문에 일어난 피해를 막기 위한 장치라는 건가요?”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상태창이 뒤늦게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던전 발생은 예기치 못한 사고라는 의미지.”
“그럴 수도 있지만 근거 없는 음모론에 불과한 건 마찬가지예요.”
“명확한 증거를 보고 싶다면 보스를 찾아가면 돼.”
한숨 쉰 문선영은 뾰족한 목소리로 의문을 표했다.
“좋아요. 그런데 그거랑 마령전이 하는 짓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미안하지만 나도 아는 건 여기까지야. 말했듯이 나머지는 보스에게 듣길 바라지.”
예종하는 점차 눈이 감기고 있었다.
“당신이 마령전에 협조한 이유는 혹시 아내분 때문이었나요.”
마령전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마나의 부작용으로 인해 생겨난 마광병도 애초에 없어야 하는 불치병이다.
마광병을 앓았던 부인을 옆에서 지켜보던 그로선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랬지, 이제 와선 소용없어졌지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예종하는 눈을 감으며 숨을 거두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문선영은 손에 쥐고 있던 화살을 다시 넣으며 몸을 돌렸다.
**
폴리모프로 인간이 된 드래곤, 에스카네는 흑룡검가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드래곤의 모습으로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기에.
다른 드래곤들을 두고 혼자 온 것도 비슷한 종류의 직감 때문이었다.
덕분에 몬스터로 취급받지는 않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강제로 제압하는 건 가능하지만 섣불리 힘을 쓰려 하진 않았다.
이계에서 수호자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왔던 드래곤들은 대체로 온건한 편이다.
그렇지만 필요하다 싶으면 무력을 행사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에스카네는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이들을 꺾고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원만하게 해결해야 할까.
흑룡검가 정문을 지키고 있는 헌터들은 기세를 흘리며 에스카네를 차단했다.
그때 안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드래곤의 마나를 느낀 서진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당신은?!”
에스카네는 척추가 쭈뼛 서게 될 정도로 경악했다.
“오랜만이군.”
협곡에 추락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 드래곤, 에스카네임을 눈치챈 서진은 실소를 흘렸다.
“다른 성주들도 다 왔으니 드래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 직접 만나러 올 줄은 몰랐지만.”
“살아있었, 습니까...”
바로 앞에서 떨어졌던 걸 봤던 에스카네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까. 왜? 살아있으니 여기서도 죽일 셈인가?”
서진은 적의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드래곤이라 해도 힘이 제약된 지금, 일대일로 붙으면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싸우러 온 것 아닙니다. 그리고 그때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드래곤들은 세계가 무너지는 원인이 투신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당시엔 부정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구로 건너오고 나서 확신했다.
이계의 붕괴는 지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사람 죽이고 나서 사과하면 받아줄 거라 생각하나?”
“물론 용서를 바라진 아닙니다. 그저 늦게나마 사죄를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럼 이제 물러가면 되겠네.”
서진은 에스카네가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온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반응을 살필 겸 축객령을 내렸다.
“죄송하지만 이곳에 해츨링이 있지 않습니까?”
그냥 물러날 수 없던 에스카네는 본론을 꺼냈다.
“있다면?”
“한번 보고 싶습니다.”
피식 웃은 서진이 대답을 고르려는 순간, 공간의 기류가 일변했다.
마나의 밀도가 갑자기 높아지는 이 현상.
던전 브레이크의 전조였다.
서진은 고개를 돌려 예상되는 지점을 바라봤다.
그리고 십 초도 지나지 않아서 그곳에 균열이 생겨나고 오크가 튀어나왔다.
서진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헌터만으로 충분하니까.
문제는 저 던전 하나가 아니다.
일전에 전 세계적으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던 때와 같다.
서진이 감지 가능한 영역 내에서만 두 개의 던전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이번엔 상황이 오래갈 수도 있다.
서진은 에스카네를 바라봤다.
이런 때에 드래곤 전력은 가문에 큰 도움이 될 터.
결정을 내린 서진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주자면 해츨링 데리고 있는 거 맞아.”
“역시 그렇군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샬롯이 저들에게 중요한 해츨링인지 에스카네의 목소리는 다급하면서 진지한 어조였다.
“드래곤들이 나를 죽이려 했는데 내가 걔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 것 같아?”
서진은 차가운 낯빛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에스카네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서진을 노려봤다.
“그 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 않습니까!”
“그건 니네 생각이고 나한텐 다 같은 도마뱀일 뿐이야.”
분노가 치민 에스카네는 마나를 끌어올렸다.
피가 끓는 감각에 이성적인 판단은 뒤로 밀리게 되었다.
“확실히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군요. 이렇게 된 이상 강제로 데려가겠습니다.”
눈이 돌아간 에스카네가 마법을 쓰기 직전, 서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지금 마나를 꺼내는 순간 해츨링을 죽일 거다.”
“뭐라고요?”
“내가 신호만 주면 당장 죽일 수 있게 해놨거든.”
까득.
노골적인 협박에 에스카네는 이를 갈며 마법을 취소했다.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라면 얼마나 험하게 다루고 있을지.
에스카네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해츨링이 겪었을 수모가 스쳐 지나갔다.
“제가...어떻게 하면 그 아이를 풀어주시겠습니까.”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서진은 내심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한가지 맹약을 해줬으면 하는데.”
어떤 종족보다 특별한 마나를 지니고 있는 드래곤은 별다른 아티팩트가 없어도 구속력이 있는 약속을 맺을 수 있다.
드래곤의 심장을 걸고 하는 맹약.
마나를 소멸시키고 싶지 않다면 무조건 지켜야한다.
“뭡니까.”
에스카네는 굳은 표정으로 결의를 드러냈다.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흑룡검가를 지키면서 가문을 중심으로 몬스터를 없애나갈 것.”
“...그게 전부입니까?”
생각보다 정상적인 요구에 에스카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에스카네 뒤로 던졌다.
“너뿐만 아니라 다른 드래곤들까지 포함이다. 멀리서 듣고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같이 약속하도록.”
“우리는 맹약을 하니 지키겠지만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내가 이계에서 허언을 하거나 기망했던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난 아쉬울 거 없어. 응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그랬듯이 해츨링을 맘대로 다루는 수밖에.”
“당신...! 후우, 좋습니다. 약속하죠.”
에스카네의 말을 신호로 드래곤들이 텔레포트를 통해 인간 모습으로 나타났다.
**
여섯 마리의 드래곤에게 전부 맹약을 받아낸 서진은 만족해 하며 미소지었다.
그러니 이제 서진이 약속을 지킬 차례.
서진은 에스카네를 샬롯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입니까?”
에스카네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 있는 건물은 바로 서진의 집이었다.
상당히 낙후된 시설을 상상했던 에스카네는 의아해하며 발을 내디뎠다.
“서진! 어디 갔었어!”
현관문이 열리자 샬롯은 기다렸다는 듯 서진에게 안겼다.
그간 숱한 설득 끝에 아빠라는 호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력석도 많이 흡수한 덕분에 말도 늘고, 폴리모프도 가능해진 상태였다.
옅게 빛나는 은발의 소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서진의 바지를 부여잡았다.
“설마 그 아이가 제가 말했던 해츨링인 겁니까.”
에스카네는 당황해하며 서진과 샬롯을 번갈아 쳐다봤다.
서진은 태연하게 샬롯을 쓰다듬었다.
“보면 알잖아?”
“하아. 저를 속이셨군요.”
하지만 에스카네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서진에게 저리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그만큼 그가 잘 대해줬다는 증거나 마찬가지.
아까는 맹약을 받아내기 위해 일부러 거짓으로 도발했던 게 분명하다.
“잘 지내는 거 확인했으면 이제 나가서 몬스터 처치하는 게 어때.”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이 사태가 언제 끝날 거라 생각하십니까?”
“혹시 쉽게 안 끝날 거라 말하려는 건가?”
에스카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가 아닐 겁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이곳에 나타는 몬스터는 원래 이계에 살고 있던 것들이죠. 그리고 몬스터는 아직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것들이 전부 지구로 넘어온다면 어찌 될 것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