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최소한 지금 인구의 절반은 죽겠지.”
헌터 약소들은 거의 다 멸망할 것이고 한국처럼 고레벨이 많은 나라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전쟁처럼 군대가 나서서 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형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는 헌터,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할 테니.
하지만 이런 환란 속에서도 흑룡검가만은 몬스터의 침입을 허용치 않을 것이다.
한국 제일 가문에 걸맞은 무력과 서진이 끌어들인 드래곤들이 있기에.
물론 국가의 존폐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마냥 안심할 순 없다.
그렇기에 가문의 안전을 확보한 뒤엔 영역을 확장하며 몬스터들을 처리해 나갈 계획이었다.
“예, 분명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겠죠.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 수많은 몬스터를 전부 감당하는 대신, 다른 방법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방법?”
“일련의 사태는 전부 누군가 인위적으로 균열을 키우며 몬스터를 필요 이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7성주가 전부 이른 시기에 빠져나가진 않았겠죠.”
“짐작 가는 놈이 있긴 한데 찾는 게 쉽지 않아.”
마령전의 보스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작은 흔적조차 없다.
서진 입장에선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당장 가문에 닥친 위기를 타개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일단 저는 나가서 당신의 가문을 돕겠습니다.”
“부탁하지.”
그때 서진의 휴대폰으로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문선영이었다.
첨부파일에 동영상이 붙어있어 열어보니 전 자오길드장과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문자에는 대화를 요약한 정리본이 쓰여있었다.
덕분에 서진은 마령전의 단편적인 목적과 위치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의문이었다.
세계의 해방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이며 그것이 던전 브레이크와 무슨 상관인지.
그냥 허울만 그럴듯한 말이 아닌가?
이 사태를 일으킨 마령전의 진짜 의도는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자 말미에는 국제헌터연합과 함께 에티오피아 고원으로 향하고 있다고 적혀있었다.
서진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마령전의 수작질이 궁금하긴 하지만 서진의 신분은 흑룡검가의 소가주다.
가문이 위치한 개성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었다.
“또 나가려고?”
샬롯은 불안한 눈빛으로 서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응, 그러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도 갈래.”
현재 샬롯이 보유한 마나량을 헌터와 비교한다면 5레벨 정도 된다.
하지만 서진의 눈에는 마나만 많지 싸울 줄 모르는 어린애에 불과하다.
“미안한데 그건...”
그 순간 서진은 집 천장을 짓누르는듯한 거대한 마력을 감지했다.
곧장 샬롯을 안아 든 서진은 점멸을 써서 스킬의 한계치까지 이동했다.
콰아아앙!
바깥에 발을 딛는 찰나에 하늘에서 집채만 한 바위가 떨어졌다.
**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 사태의 원흉으로 예상되는 마령전.
그 조직의 보스가 에티오피아 고원에 있다는 첩보에 국제헌터연맹은 즉각 움직였다.
먼저 인공위성으로 해당 지역을 확인해 봤지만 결계에 가로막혀 정보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헌터들이 직접 고원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맹은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포탈을 발동해서 에티오피아로 이동했다.
정보 제공자인 문선영도 연맹의 헌터부대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전부 6레벨 이상으로 구성된 헌터 부대는 대규모 결계를 찢으며 고원에 접근했다.
우우우웅!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걷히자 헌터들 앞에 거대한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헌터들은 믿기지 않는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봤다.
공중에 떠오르고 있는 섬을 보면 누구나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정신 차려! 아직 늦지 않았다.”
부대장의 말대로 섬은 아직 완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고레벨 마법사들은 반중력을 발동해서 헌터들을 공중에 띄웠다.
하늘을 날 수 있게 된 헌터들은 필사의 결의를 다지며 섬에 다가갔다.
전 세계에 몬스터를 풀어놓고 자기네들은 하늘에서 유유자적하며 지켜보겠다니.
누가 말로 자극하지 않아도 모습만으로 분노를 채우기 충분했다.
콰가광!
수십 명이 날아오자 섬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이 요격을 개시했다.
문선영은 하늘을 수놓는 공중전을 지켜보면서 여기저기 시선을 돌렸다.
‘어디 있는 거지?’
제일 중요한 마령전 보스가 보이지 않았다.
**
서진의 집은 무참하게 짓뭉개졌다.
‘나름 정이 들었던 공간이었는데.’
서진은 머릿속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고개를 들었다.
바위가 낙하한 공중에서 누군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냉담하면서 탁해 보이는 눈, 덥수룩하고 희끗한 머리카락과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는 자글자글한 주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노인의 모습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절대 범상치 않았다.
서진이 봐왔던 어떤 헌터보다도 강대한 기력을 품고 있었다.
노인은 공중에 떠 있는 채로 서진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직접 보니 참 걸출한 놈이구나. 그러니 그놈들이 죽어 나간 거겠지.”
서진은 그 말에서 노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네가 유니온 마스터인가.”
마광병을 치료한 뒤에도 유니온에서 찾아왔던 이유가 저 노인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고개를 슬쩍 젖히며 웃었다.
“허허허, 건방진 놈이로고. 반말을 들은 건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정신병자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존대할 필요는 없지.”
“주제에 맞지 않게 과한 힘을 얻어서 그런지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하나 묻지, 나를 노린 이유가 뭐였지?”
“자네가 마광병을 이겨냈다는 걸 믿지 않았으니까.”
서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이군.”
진짜 이유를 말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의뭉스러운 표정에서 느껴졌다.
노인은 허공에 계단이 있는 것처럼 한 발씩 내디디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 궁금한가?”
말과 함께 사라진 노인은 서진의 지척에서 나타나 손을 뻗었다.
인지할 수 없는 찰나의 시간에 압축된 공간이 손짓 한 번에 팽창했다.
파앙!
정면에서 터진 폭발에 뒤로 날아간 서진은 간신히 두 발로 착지했다.
하지만 피할 틈도 없이 다가온 노인은 서진의 목을 움켜쥐고 땅에 처박았다.
“세상에서 자네만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세.”
변덕이 든 노인은 까마득한 후배를 위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말이 맞네.”
서진은 점멸로 빠져나왔지만 노인은 여전히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라도 방금의 상황을 재현할 수 있다는 듯이.
“모두 거짓이고 허상이지. 결국 나를 위한 거야. 허허허.”
유니온의 창설 목적은 마광병에 걸린 헌터를 제거해서 위협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마령전은 이계의 성주를 불러들여 봉인을 풀기 위해서.
“그런데 하나는 이뤘는데 아직 하나는 성공하지 못했어. 힘을 해방할 때까지 자네가 살아남았으니 말이야.”
미래 보여주었던 그 여자가 남긴 단 하나의 단서.
‘마광병에 걸린 놈이 자신을 죽일 것’이란 예지 때문에 그간 얼마나 불안했던가.
“이젠 그런 근심을 벗을 때가 온 거지.”
노인이 손을 까딱하자 무형의 압력이 서진을 구속했다.
마치 서진이 닿고 있는 공간 전체가 굳어버린 감각.
움직일 수 없는 서진에게 노인의 손날이 창이 되어 찔러 들어왔다.
화르륵!
그때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거대한 화염구가 노인의 공격을 방해했다.
고개를 돌리자 은발의 소녀가 손을 떨면서 노려보고 있었다.
마법의 주인은 샬롯이었다.
“호오, 저놈에게 정신 팔려서 미처 몰랐는데 네놈이 더 맛있어 보이는구나. 특히 심장이 말이야.”
노인은 단번에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무저갱 같은 눈빛을 마주한 샬롯은 딸꾹질하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마나를 발산했다.
노인이 샬롯을 향해 움직이려는 순간, 예고 없이 참격이 덮쳐졌다.
촤악!
도복을 찢어발기고 살갗이 베여 피가 튀었다.
그리 깊지 않은 상처였지만 노인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서진을 쳐다봤다.
“쓸만한 재주가 있구나. 역시 네놈부터 죽이는 게 맞겠지.”
공격을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쾌한 듯, 절제한 감정으로 일관하던 노인은 노골적인 살의를 드러냈다.
파지직!
서진은 여뢰와 마나 전개를 최대치까지 끌어내며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의전검으로 샬롯에게 가는 시선을 돌리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펼친 의전검으로도 옅은 자상에 그쳤으니 다른 공격은 닿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콰강!
그때 굵직한 검은 전류가 노인의 주변에 쏟아져 내렸다.
서진 외에 흑뢰를 다루는 헌터는 한 명뿐.
노인은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잠깐 여유 부렸더니 바로 가주가 왔군.”
그럼에도 노인의 표정에는 한 톨의 위기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흑뢰로 강기를 두른 한벽호는 노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유니온 수장의 정체가 사림무가의 마지막 가주였다니. 이름이 아마 설건이었던가.”
“허허, 나이 좀 먹었다고 나를 알아보는구나.”
한벽호의 유년 시절에 강성한 위명을 자랑했던 사림무가(蛇林武家).
과거 흑룡검가와 던전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하다 전면전까지 했던 가문.
그 전쟁으로 사림무가는 완전히 무너졌다.
아직 헌터 협회나 대한가문회가 만들어지기 전이었기에 두 가문을 중재할만한 기관도 없었던 시기.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도 놀라운데, 목적은 복수인가?”
“그게 최우선 목표는 아니지만 어차피 흑룡검가는 오늘 사라질 테니 겸사겸사라 할 수 있지.”
“당시 사림무가에서 먼저 흑룡검가 무인을 죽이며 전쟁을 시작했지 않나? 복수 운운하는 게 우습군.”
“말했지 않나, 복수는 곁가지에 불과하다고. 자네가 특별히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목숨을 거두진 않겠네.”
한벽호는 설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서진에게 말했다.
“너는 가서 도시를 지켜라.”
서진은 잠깐 설건을 쳐다보다 샬롯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설건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냉정한 판단을 인정해야만 했다.
**
가문 밖의 개성 외곽에서 몬스터 무리를 막아내고 있던 설하윤은 돌연 몸을 돌렸다.
서진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투신의 가호’ 스킬로 전해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는가?”
몬스터를 함께 쓸어내고 있던 드래곤 로드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서진 님이 위험하신 것 같아 가봐야 합니다.”
“그런 거면 같이 가보지.”
드래곤 로드는 설하윤을 데리고 텔레포트로 한 번에 가문으로 이동했다.
운 좋게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시야에 서진이 보였다.
“서진 님!”
“위험하다 들어서 급히 와봤는데 멀쩡해서 다행이군.”
쿠웅.
그 와중에 들려오는 폭음에 설하윤과 드래곤 로드의 시선이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어마어마한 마력이군.”
“서진 님, 저쪽은 대체...?”
콰앙!
서진이 입을 떼려는 순간, 설건과 흑룡가주가 있는 방향에서 터진 충격파가 이곳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가문 내에 새로운 균열이 생겨났다.
처음엔 작았던 틈이 점점 커지더니 가주전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해졌다.
그것을 일반적인 던전 입구와 달리 용암을 연상케 하듯 붉게 물들어있었다.
“아니!”
드래곤 로드는 보자마자 무언갈 알아채고 경악했다.
“저게 무엇입니까?”
설하윤의 질문에 로드는 붉은 균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던전이 내가 살던 세계와 연결되어있다는 건 이제 자네도 알 테지. 그런데 저건 지구에 오고 나서 봐왔던 던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구조를 보이고 있어.”
“그 말씀은?”
“균열이 약해서 넘어올 수 없었던 개체가 지구로 온다는 뜻이지.”
서진은 의문을 드러냈다.
“하지만 드래곤까지 넘어온 마당에 저런 던전이 추가된다고 별 다를 게 없을 텐데.”
“우리보다도 더 거대하고 강한 놈이라면 어떤가.”
“뭐?.”
이계에서 천 년 동안 지냈던 서진은 그런 존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네라도 모를만하지. 나도 이전 로드에게 말만 전해 들었으니까. 하지만 내 짐작이 맞다면 저 균열은 그것을 위해서 만들어진 게 분명해.”
그리고 로드는 한마디 덧붙였다.
“참, 저 정도면 역으로 인간도 넘어갈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서진의 눈빛에 이채가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