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서진은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은 선택지, 이계를 떠올렸다.
아직 이계엔 넘어오지 않은 몬스터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이계에서 천년을 보낸 후에 지구로 돌아왔을 땐 고작 5년이 지나있었으니 두 세계의 시간축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계에서의 200일은 지구에선 고작 하루에 불과하다.
지구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환경에서 훨씬 많은 투기를 얻을 수 있는 곳.
9레벨의 경지로는 부족함을 느낀 서진의 시선은 거대한 균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꺼림칙한 점이라면 저 균열은 저쪽에서 발생한 충격파 직후에 생겨났다는 점이네.”
드래곤 로드는 설건과 흑룡가주가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일련의 사태도 그렇고 저 균열까지. 아마 흑룡가주가 상대하고 있는 자가 만들어냈을 거야.”
“그렇겠지.”
서진의 생각도 같았다.
마령전에서 획책한 일이니 마령전 보스이자 유니온 마스터인 그가 관련 스킬이나 특성을 보유하고 있는 게 분명하겠지.
아까 전투 시에 보였던 기술을 떠올리면 공간계 능력이지 않을까 예상된다.
“어쩌면 저 자를 죽이면 이 사태도 해결될지도 모르네.”
“네, 어차피 저대로 둘 순 없습니다.”
서진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설하윤은 경각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설건의 목적이 서진인 이상, 마냥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계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서진 님!”
서진의 충격 발언에 설하윤은 놀랐으며 드래곤 로드는 턱을 쓸어내리며 눈매를 좁혔다.
“그렇게 말할 것 같았네.”
이계에서 서진, 아니 투신의 강함을 기억하고 있던 드래곤 로드다.
지구에서 상대하기 힘든 존재가 있다면 이계에서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터.
“하지만 저 균열은 내 예상이 맞다면 저기 폭음을 일으키고 있는 마령전의 수장이 만들어낸 것이야. 저걸 통하는 건 위험할 수도 있네.”
“하지만 필요하다면 이용해야지.”
“내 말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뜻이었네.”
드래곤 로드는 마나를 끌어올리더니 작게 읊조리며 손을 뻗었다.
화아악.
허공에 2미터 남짓 되는 크기의 균열이 생겨났다.
힘이 제약되었다 해도 드래곤 로드의 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마나와 관련된 현상을 해석하고 구조를 파악하는 용안(龍眼)은 제약된 힘과 별개였다.
그리고 지금은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이계와 지구가 지극히 불안해진 상태.
가진 마나를 전부 쏟아부어 통로를 하나 더 만드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차라리 이 균열이 더 안전할 걸세.”
설하윤은 불안한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계로 넘어간 뒤에 닫힐 위험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같이 갈 테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네.”
“나도 갈래!”
그때 설하윤의 품에 있던 샬롯은 손을 번쩍 들며 나섰다.
서진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맡길 곳도 여의치 않은 데다 설하윤과 드래곤 로드와 같이 있는 편이 더 안전할 테니.
결정을 내린 서진은 지체하지 않고 균열에 발을 내디뎠다.
**
근 일 년 만에 서진이 다시 마주한 이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끝없이 펼쳐졌던 드넓은 대지는 지진이 난 듯 갈라졌고 땅 밑에선 마그마가 솟구쳤다.
늘 우중충했던 잿빛 하늘은 어둠에 삼켜진 듯 색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칠흑의 하늘에선 운석이 떨어져 내리고 몬스터들은 광기에 물든 듯 괴성을 지르며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서진은 처참한 풍광을 내려다보며 설하윤에게 말했다.
“그간의 대화로 이미 알고 있겠지만 여기가 제가 살았던 세곕니다.”
초중반엔 서진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고, 최근 들어선 터놓고 말해줄 시간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진의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다 보니 설하윤도 의심과 짐작을 넘어 확신의 단계에 도달한 지 오래였다.
몬스터가 존재하는 세계가 있고 그곳이 서진과 연관점이 깊다는 것을.
설하윤은 주변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얼마나 계셨던 건가요?”
“대략 천 년 정도?”
“천 년...”
너무나 아득한 세월에 설하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세월 동안 서진이 느꼈을 감정들을 설하윤은 감히 짐작조차 못 할 것 같았다.
“뭐, 자세한 얘기는 돌아가서 천천히 해줄게요.”
“네, 기대하겠습니다.”
설하윤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정돈하며 옅게 미소지었다.
-콰아아아!
그때 지평선 너머에서 고막을 찢어발기는 괴음과 함께 섬찟한 살기가 전해졌다.
동시에 드래곤 로드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베히모스인가.”
“네?”
설하윤의 반문에 로드는 말을 이었다.
“예전 로드께서 말하셨네. 7성주가 사라지게 된다면 땅 밑에 봉인해두었던 신화급 괴물이 나오게 된다고.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미증유의 거력이 느껴지는군.”
“그런가, 하지만 지금 당장 갈 생각은 없어.”
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사실 온갖 몬스터가 가득한 이계에서 뭐가 나오던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드래곤 로드는 구전설화가 진짜라는 점에서 허를 찔린 모양이긴 했지만 그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니.
서진은 피어가 들려온 방향의 반대편을 바라봤다.
어느 쪽이든 몬스터는 질릴 정도로 득실거리는 상태였다.
“10레벨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군.”
지금 서진을 향해 달려오는 몬스터 무리는 한 마리당 거의 100에 달하는 스텟을 주고 있었다.
본능에서 우러나온 살의와 짙은 마나 농도가 합쳐진 결과였다.
파직!
서진은 뇌기를 방출하며 학살의 신호를 올렸다.
**
이계로 넘어온 날부터 서진은 오로지 사냥만 이어갔다.
불가피하게 육체의 에너지를 보충하려면 식사와 수면을 빼놓을 수 없었지만 그 외의 시간은 전부 사냥에만 몰두했다.
서진이 정한 목표는 대륙 너머에 있는 베히모스를 죽이고 설건보다 강해지는 것.
그를 위해선 어떤 고찰을 가져야만 했다.
마령전 보스이자 유니온 마스터인 그의 경지는 어느 정도 일지.
생각보다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10레벨은 되겠지만 11레벨까진 아닐 게 분명하다.
고레벨일수록 1레벨의 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물론 서진은 그동안 레벨 차이가 헌터와의 전투를 몇 번이고 이겨왔다.
하지만 천 년의 경험과 유일무이한 특성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결코 보편적인 결과는 아니다.
어쨌든 그런 이치를 고려한다면 11레벨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2레벨이나 차이가 났다면 서진과 샬롯은 흑룡가주가 오기 전에 죽었을 테니.
다만 흑룡가주의 낯빛에 떠오른 긴장과 대비되는 설건의 여유를 생각했을 때, 동급의 10레벨은 아닐 것이다.
1레벨의 격차가 상당하듯 10레벨에서도 경지의 차이는 존재하기에.
서진은 11레벨이라는 목표만 뇌리에 박아넣고 검을 휘둘렀고,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났을 즈음.
[Lv.10이 되었습니다]
[마나가 전부 회복되었습니다]
[‘용체화’가 에이션트급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용체화’ 효과에 혈기가 추가됩니다]
[‘마나 간섭’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투신전의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상승 속도였다.
근간이 되는 투신공은 투신이 되고 나서 제대로 완성시킨 기술이라 이계에서 이런 폭발적인 성장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서진 님!”
옆에서 있던 설하윤은 경탄의 눈빛을 보내면서도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서진의 곁에 있기 위해서는 너무 뒤떨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대단하군. 그러면 이제 저쪽으로 갈 건가?”
“그래야지.”
한 달여간 서진이 반대편에서 사냥하고 있는 와중에도 베히모스는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내 왔다.
거슬리는 괴음 청취를 이젠 끊어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파앗!
서진은 한 번의 도약으로 땅을 접는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
-우우웅!
가까이서 접한 베히모스의 위용은 가히 압도될 정도였다.
마치 코뿔소를 연상케 하는 괴물은 가히 산과 비견될 정도로 거대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듯이 높게 솟은 뿔과 검강마저 박히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단단한 표피.
거목 수십 그루를 붙여놓은 듯이 거체를 지탱하고 있는 네 개의 다리까지.
살아있는 난공불락의 성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저 괴물이 들어가려는 균열이 흑룡검가 내에 있으니 만약 소환된다면 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
지금도 베히모스는 붉은 균열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균열에 들어가기 전에 막아야 한다.
“로드, 베히모스의 약점이라던가 특징에 대해 들은 거 없나?”
“미안하지만 약점에 대해선 들은 적이 없네. 단지 신의 파편으로 만들어졌고, 아주 고대부터 묻혀 있었다는 말 밖에.”
“그닥 쓸모 있는 정보는 아니군.”
기대를 접은 서진은 베히모스를 천천히 살폈다.
몬스터 사냥 경험만 놓고 보면 서진이 드래곤 로드를 한참 넘어선다.
거기에 에이션트급으로 상승한 용체화까지 더해지니 베히모스의 공략 지점이 눈에 보였다.
“필요하다면 돕겠네.”
그동안 서진은 온전한 투기 흡수를 위해 혼자서만 사냥했다.
드래곤 로드는 투신공에 대해선 잘 몰라도 그의 강함과 연관이 있다고 짐작했기에 혹시나 싶어 의사를 표현했다.
“아니, 저놈은 나 혼자 잡는다.”
저만한 괴물이 내뿜는 투기를 분산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조심하게, 신의 파편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진짜라면 거대한 덩치 말고도 다른 위험 요소가 있을지 모르니.”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땅을 박찼다.
구오오오-!
베히모스의 앞을 막아서자 분노한 듯 포효를 터트린다.
[근력이 310 상승합니다]
[민첩이 307 상승합니다]
투신공이 10성에 도달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당한 스텟 상승이었다.
신화격에다 이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몬스터라 그런지 투기의 밀도가 다른 몬스터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서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뇌기를 일으켰다.
흑룡검술 제1식 섬아.
10레벨이 되어 이전보다 훨씬 두꺼워진 전류 다발이 검을 타고 베히모스에게 낙하했다.
콰가광!
전격이 떨어진 베히모스의 등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다.
단지 아까보다 더 화가 났다는 걸 알려주듯 서진에게 보다 많은 스텟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면서 입을 쩍 벌린 베히모스는 목구멍에서 백색의 화염을 불러와 서진에게 방사했다.
화르르륵!
부채꼴 모양으로 퍼진 화염은 시야에 닿는 대지를 다 덮을 정도로 넓게 퍼져나갔다.
땅을 파고들며 태우는 모습을 보니 역시 닿는 것조차 조심해야 되는 화염이 분명했다.
서진은 높게 뛰어올라 베히모스의 등에 올라타며 화염을 피했다.
베히모스에게 뚜렷한 약점은 없다.
하지만 ‘마나 간섭’의 한계가 사라진 서진에게 마나를 사용하는 생명체는 움직이는 샌드백일 뿐.
그리고 서진이 서 있는 곳은 외부에서 베히모스의 체내 마나와 제일 근접한 부위였다.
파지직!
서진의 검에 흑색의 전류가 모여들고 잿빛 구름 사이로 천둥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인 위험을 느낀 베히모스는 위에 올라탄 서진을 떨치기 위해 등에서도 백염을 터트렸다.
그러나 빙결 속성을 더해 만든 일곱 겹의 실드가 몸을 보호하고 있다.
서진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 실드가 녹아내리기 전에 검을 휘둘렀다.
흑룡검술 제10식 뇌룡(雷龍)
콰르르릉!
하늘에서 현현한 칠흑의 뇌격이 동양의 용으로 형상화되어 서진의 검을 따라 낙하했다.
베히모스의 등에 내리꽂힌 뇌룡은 주변의 모든 화염을 일거에 꺼트리며 등 껍데기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리고 서진의 의지대로 전류는 체내에 들어가 베히모스의 마나를 헤집었다.
크아아!
산만큼이나 무거운 거체가 비명을 지르지만 마나 간섭을 담은 흑뢰는 자비가 없었다.
쿠우웅-!
마나라는 거대한 동력을 상실한 베히모스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
서진은 끝을 내기 위해 다시 뇌룡을 불러들이기 위해 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베히모스의 몸속에서 검은빛이 터져 나왔다.
서진은 움직이려했지만 베히모스의 등에 닿은 발이 떼어지지 않아 그대로 빛에 삼켜졌다.
**
또륵.
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서진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느낌상 그리 오래 기절해있진 않은 것 같았다.
주변은 온통 적막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벽 모서리에서 나오는 은은한 불빛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던전 같기도 하고.”
일어서서 걷던 서진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시선을 떨어트려 몸을 쳐다본 순간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