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完
“다시 어려진 건가?”
손에 박힌 굳은살과 팔다리에 남은 흉터와 근육을 확인해보니 몸이 달라져 있었다.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있었던 십대 중반쯤에 이런 상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상태창을 불러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설마 예전으로 돌아간 건 아니겠지.”
이계로 갔다가 귀환도 모자라서 회귀까지?
눈을 찌푸리던 서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귀환 직후,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와 지금의 감각은 사뭇 다르다.
명확하게 모든 사물이 인지되었던 당시와 달리, 현재는 이 몸이 자신의 몸 같지가 않았으니.
꿈인가 싶은 기분마저 든다.
서진은 이렇게 되기 전 상황을 차분히 되짚었다.
베히모스의 마나 체계를 무너트리고 숨통을 끊으려는 찰나에 검은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기억이 끊긴 뒤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에서 눈을 떴다.
“아.”
드래곤 로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의 파편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이 현상은 그 때문인가?
그런데 신의 파편이라 해봤자 와닿지 않아서 개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머나먼 고대의 이야기를 알 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
“하아.”
서진은 짧게 한숨 쉬고 허리춤을 더듬었다.
다행히 묵령검은 무사히 매여져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으니 일단 검을 뽑아 들었다.
쿠웅!
그리고 발검하자마자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갑자기 검이 미친 듯이 무거워진 탓이었다.
“으음?”
당황해하던 서진은 곧 문제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육체가 십대 시절로 돌아갔다는 말은 근력도 그때와 같다는 것이다.
즉, 지금 서진은 최악의 무재(無才)라 일컬어졌던 시기의 처참한 스텟을 지니고 있다는 뜻.
묵령검은 흑뢰를 견디기 위해서 특수한 광석이 들어갔기에 상당히 무겁다.
스텟 대부분이 3을 넘지 못할 시기의 서진은 절대 들고 휘두를 수 없다.
“허.”
서진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내뱉다가 다시 힘겹게 납검했다.
어쩐지 허리춤이 무겁더라니 검이 메여있어서 그런 것이었나.
서진은 검집의 허리띠를 풀어 등에 둘렀다.
한쪽 허리에 무거운 검을 매달고 있는 것보단 등에 지고 있는 편이 나으니.
이 방은 삼면이 벽으로 막혀있고 나머지 한쪽에 유일한 통로가 나 있다.
그렇기에 나아갈 곳은 명확했다.
발걸음을 뗀 서진은 일직선으로 뻗은 통로를 걸어 나갔다.
케륵.
통로 끝에는 새로운 방이 나타났고 그곳에 고블린 한 마리가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고블린은 서진을 보자마자 덤벼들었다.
어깨를 틀어서 피하려 했으나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퍼억!
그 때문에 고블린이 들고 있는 단검이 복부를 찌를뻔했지만 검집을 휘둘러 막아냈다.
원래 손짓만으로 죽일 수 있었던 몬스터였지만 지금의 서진은 받아치는 것도 힘들었다.
스텟만 그때로 돌아간 게 아니라 반사신경, 검술 등 모든 게 초기화된 것 같았다.
분명 경험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뇌의 지시를 육체가 받지 않는 느낌.
고블린은 다시 단검을 휘둘렀고, 서진은 굼뜨게 몸을 틀어 회피했다.
케륵.
고블린은 서진을 만만한 놈이라 판단한 건지 방어는 도외시한 채 검을 찔러 들어온다.
이번에 단검이 향하는 곳은 심장.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죽을 순 없어.’
서진은 이를 꽉 깨물며 맨손으로 단검을 잡아챘다.
검날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를 흘리게 되었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출혈은 정신을 고양시켜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꽈득.
검을 쥐고 있는 고블린의 손목을 아래로 꺾어서 단검을 놓치게 만들었다.
단검을 낚아챈 서진은 고블린의 품에 파고들어 심장을 찔렀다.
조악한 단검이기에 두세 번 연달아 찍어 내렸다.
“하아.”
마침내 고블린의 숨을 끊은 서진은 지친 한숨을 내뱉었다.
뇌의 신호를 육체가 거부한다 한들 경험은 서진을 생존케 했다.
체력의 한계로 잠시 바닥에 드러누운 서진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고작 고블린 하나 잡고 이 꼴이라니.
어쨌든 실제적인 전투로 감이 잡혔다.
지금은 회귀한 것도 아니고 꿈속도 아니다.
이곳은 던전이며 능력이 극도로 제한된 이유도 던전의 특성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다만 던전에서 아무리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다지만 여기는 조금 특별했다.
정신에 간섭한 것인지 십대 즈음의 신체 스펙을 고스란히 재현해놓았으니.
덕분에 좋지 않은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미 재가 되어 날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이 또한 던전의 영향인 걸까.
하지만 동시에 부모님에 대한 추억도 선명하게 떠올랐으니 오히려 좋은 면도 있었다.
서진은 추억을 적당히 밀어두고 다시 일어섰다.
던전에 언제까지고 있을 순 없으니까.
**
또다시 검은 통로를 지나친 서진은 다음 방에 도착했다.
고블린 다음은 오크였다.
하지만 체감상 난이도는 비슷했다.
우선 서진이 쓸 수 있는 무기가 있었고 빌어먹을 몸뚱이를 움직이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오크의 근력은 고블린과 비교가 되지 않아서 위험한 고비를 두 번 넘기고서야 죽일 수 있었다.
“허억.”
그야말로 생사를 오가는 사투에 서진은 다시 드러누웠다.
옆에 오크 시체가 비릿한 피를 쏟아내며 쓰러져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새삼 다시 체감해보니 정말 못 써먹을 수준의 육체였다.
만약 이계로 건너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뭐 하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인생에 만약이라는 건 없다지만 과거의 육체를 마주하니 온갖 상념이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다음 방엔 뭐가 있을까.
갈수록 강한 놈이 나오는 구조 같은데.
“퉷.”
서진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 오크의 손에 들린 검을 들었다.
검신의 두께는 얇고 길이도 그리 길지 않다.
현재의 서진도 어떻게든 휘두를 수 있을 정도.
검자루를 강하게 쥔 서진은 다음 방으로 향했다.
**
“마지막이군.”
서진은 눈앞에 서 있는 적을 보며 확신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존재는 몬스터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었으니.
3단계의 구조로 된 던전에서 마지막에 배치된 인간.
보기에도 그럴듯하지 않은가.
솔직히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서진은 열심히 행복회로를 굴렸다.
내심 지쳤으니 이제 끝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서진은 검을 늘어트리고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는 안면 부분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검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그것도 잠시, 어둠으로 칠해진 안면이 울긋불긋하더니 사람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서진이 익히 알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한재열.”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서진이 여태까지 죽여왔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름이 기억나는 인물도 있고 아닌 놈도 있었다.
누가 됐던 서진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처음엔 제일 약했던 몸으로 되돌려서 과거 회상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죽였던 놈들 떠올리게 하는 건가.
“좀 식상한데.”
과거는 가끔 생각할 뿐이지 거기에 매몰될 일은 없다.
신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베히모스에서 나온 던전이니 신의 취향이 들어간 걸까.
서진이 하품하려는 찰나에 얼굴은 한 사람으로 고정되었다.
자신의 얼굴로.
어설프게 잡고 있는 검술 자세도 어린 시절과 소름 돋게 똑같았다.
“그나마 재밌네. 서로의 신체 스펙은 같다는 건가.”
서진은 검을 들며 슬쩍 웃었다.
“어디까지 복제한 건진 모르겠지만.”
땅을 밀치며 앞으로 도약했다.
가짜 서진이 내지르는 검을 강하게 내리쳤다.
서로 근력은 같기에 둘 다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검을 손에서 놓쳤다.
그리고 서진은 망설임 없이 놈의 두 눈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크악!”
“내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니까 기분이 좀 이상한데.”
서진은 발밑에 떨어진 검을 주워서 시야를 상실한 가짜 서진의 목을 찔렀다.
그 당시의 서진은 절대로 하지 못할 전투 방식.
그런데 목이 관통당한 놈에게선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검은 안개를 흘리더니 사람의 형체를 상실하고 사방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끝인가?”
서진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난 느낌에 의아했다.
사실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정신 간섭에 대해선 누구보다 강한 면역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서진이었다.
신의 파편의 힘으로, 베히모스에 내재되어 있던 던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 이상의 간섭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 관문이 상대적으로 쉬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서진은 베히모스의 본체라 할 수 있는 던전을 클리어했기에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베히모스를 처치하였습니다]
[신의 파편을 흡수했습니다]
[‘신격’이 체내에 흡수되어 레벨이 상승합니다]
[Lv.11이 되었습니다]
[신격의 그릇에 맞게 체질이 변화됩니다]
[특성 <재생> <무형막> <회수>가 추가되었습니다]
[용체화(에이션트)의 숙련도가 100%로 상승합니다]
[용체화 효과에 ‘공백’이 추가됩니다]
시스템 창이 좌르륵 나타나면서 던전이 무너졌다.
동시에 서진의 시야도 암전되었다.
**
다시 눈을 뜨니 눈앞에 흑발과 은발이 찰랑이고 있었다.
설하윤과 샬롯이었다.
“서진!”
“서진 님, 괜찮으십니까?”
설하윤의 걱정스런 눈빛이 서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베히모스는?””
서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일어섰다.
“서진 님이 흑룡으로 공격한 직후에 검은빛으로 변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서진 님도 함께 사라졌다가 조금 전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군요.”
“무슨 일은 없었어?”
샬롯은 잠깐 울었는지 눈가가 발개져 있었다.
서진은 그냥 모른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던전에 끌려가긴 했는데 위험하진 않았어.”
“그런데 자네, 그새 또 강해졌군.”
드래곤 로드는 서진의 레벨이 오른 걸 눈치챘다.
“운이 좋았어.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이제 지구로 넘어가야겠지.”
“알겠네.”
드래곤 로드는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냈다.
“가자.”
“응!”
샬롯은 얼른 서진의 손가락을 붙잡고 함께 균열에 들어갔다.
이계에 머문 지 대략 한 달.
지구에선 3시간 정도 흐른 상태였다.
**
흑룡검가의 주거 지역, 서진의 집이 있던 자리.
그곳엔 상처 없이 오롯이 서 있는 노인과 허리를 굽히고 있는 남자가 대비되는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닥에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이는 놀랍게도 흑룡가주였다.
반면 어깨가 한 번 베였을 뿐인 설건은 흑룡가주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질기군. 이렇게 오래 끌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흑룡가주의 주변에는 흑룡대장과 대원을 비롯해서 드래곤들까지 있었다.
서진의 지시에 따라 개성에서 몬스터를 어느 정도 몰아낸 드래곤들은 원흉인 설건을 죽이기 위해 합세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있는 신세였다.
합공을 했음에도 설건 한 명을 꺾지 못한 것이다.
이렇다 할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고작 목숨이 끊어지는 시간을 미루는 게 전부였다.
이젠 그것마저 한계에 도달했지만 말이다.
몬스터를 상대하다 힘을 빼고 온 탓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설건의 경지가 드래곤보다 한 차원 더 높기 때문이었다.
“지겨우니까 이제 끝내도록 하지.”
설건의 손을 휘저어 십여 개의 진공검을 만들어냈다.
흑룡가주를 비롯한 이들은 이제 움직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급소에 박아넣기만 하면 끝이었다.
설건은 진공검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그가 기대한 피륙음은 들리지 않았다.
소리 없이 퍼져나간 칠흑의 전류가 진공검을 붙들고 있었기에.
터벅 터벅.
무거운 정적이 짙게 깔린 폐허 속에서 한 사람의 발소리만 유독 크게 울리고 있었다.
서진은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쓰러진 이들의 면면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흑룡가주에게 시선이 닿았을 때 발걸음이 멈췄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양반이 피를 흘린 채 쓰러진 모습을 보니 기분이 오묘했다.
아직 그의 생명 반응은 꺼지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대로 계속 방치하게 된다면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될 터.
“기껏 손자를 도망치게 만들어줬는데 제 발로 다시 오다니. 어리석구나. 하기야 어차피 죽을 테니 상관없나.”
서진은 설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상황을 그렸다.
처음엔 가주 혼자서 막다가 흑룡대장과 드래곤이 합류해서 맞섰겠지.
그러다 전부 이 꼴이 난 거고.
아마 드래곤들이 없었다면 진작에 전멸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가주가 저리된 모습을 보니 화가 나는 것이냐.”
계속 입을 열지 않는 서진을 보며 멋대로 착각한 설건은 기분 좋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몇십 년 산 놈이 나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지. 그래도 드래곤은 간만에 보니 재밌었다.”
짐작했지만 역시나 저 노인도 이계에서 살아남았던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저 강함도 이계에서 쌓은 것이겠지.
다만 서진과 반대로 설건은 육체가 리셋되지 않고 봉인된 채로 지구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계에서 7성주를 끄집어내서 기어코 힘을 해방시켰고.
서진은 작은 궁금증을 꺼냈다.
“그렇게 해서라도 힘을 얻고 싶었나?”
“자네가 그런 질문을 할지는 몰랐군. 무능력의 상실감은 자네도 기억하고 있을 텐데.”
공감하지 못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이만한 피를 흘려야 했다면 당신처럼 실행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걸 어떻게 장담하나?”
“뭐?”
“같은 사건을 겪긴 했지만 서로가 처한 환경은 명백히 달랐지. 자네는 아늑한 가문에서 성장만 하면 되었고, 노부는 모든 힘이 묶인 채 홀로 내던져졌네. 만약 자네라면 운명을 받아들이고 개처럼 기며 평생을 살아갔을 텐가?”
서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확실히, 어쩌면 나도 당신처럼 움직였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뿐이야. 어차피 가정은 의미가 없으니까. 방금 한 말처럼 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니까.”
“듣기엔 퍽 그럴듯하구나.”
비꼬는 설건의 말을 흘려넘긴 서진은 다른 궁금증을 꺼냈다.
사실 이쪽이 본론이었다.
“그런데 당신, 이 사태 감당할 수 있나? 아니면 목적이 인류 절멸이라도 되나?”
“이곳에서 죽을 자네가 하기엔 쓸데없는 걱정이군.”
하지만 유일하게 같은 종류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후배에게 설건은 변덕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 이후론 서진도 수많은 시체 중의 하나가 될 테니까.
“내가 살 곳인데 완전히 무너트려서야 되겠는가. 적당히 꺼트릴 테니 자네는 안심하고 죽으면 된다네.”
“그렇군.”
문제 해결의 키가 설건에게 있음을 확인한 서진은 갈무리했던 마나를 일깨웠다.
설건은 서진이 마나를 발현하기 전에 그가 위치한 공간 자체를 꺾어버렸다.
마나 전개로 항시 몸을 보호하고 있는 고레벨 헌터라 해도 내상을 피할 수 없는 공격.
“허.”
하지만 서진은 너무나 멀쩡했다.
설건은 심유한 눈빛으로 서진의 마나를 들여다봤다.
그렇지만 이전과 달리 한눈에 알아볼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단지 도망치다 온 게 아니었나 보군.”
“당신 덕분에 힌트를 얻었거든. 참고로 베히모스는 사라졌으니까 기다리진 말고.”
“뭣이?”
처음으로 설건의 표정이 제대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서진은 이제 그의 분노에 긴장하지 않는다.
11레벨이 되어보니 설건의 경지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예상대로 10레벨의 최상격에 위치했으나 아직 11레벨이 되지 못한 상태.
숫자로 나타내자면 10.9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흑룡가주는 이제 절반 가까이 와있었다.
얼핏 보기에 미세한 차이일지 몰라도 설건은 이 자리의 모든 이를 압도했었다.
그만큼 같은 10레벨이라도 경지에 따라 격차가 심하다는 의미.
거기다 공간 조작계열은 독보적으로 까다로운 능력에 속한다.
그런 만큼 무기를 통해 극의에 도달한 헌터보다 동 레벨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결국 설건도 11레벨이 되진 못한 것이다.
서진은 기세를 철저히 감추고 있었기에 설건은 오판할 수밖에 없었다.
“제법 강해진 모양이다만 그 검이 내 심장에 닿을 일은 없을 거야.”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서진은 설건이 운용하는 기운을 확인했다.
‘과연.’
서진이 투기라는 독자적인 기운을 쓰는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기운인데, 이름이 뭐지?”
“에테르라는 것이네. 자연에 떠다니지만 마나와는 다른 성질이지.”
말이 끝난 순간에 서진의 정면에서 압축된 공간이 폭발했다.
하지만 특성 ‘무형막’은 육체를 완벽하게 보호했다.
서진은 용체화 효과에 추가되었던 ‘공백’에 에테르를 넣었다.
그리고 점멸로 설건의 지척에 나타나 검을 내리그었다.
설건은 공간계 능력자답게 어느 곳도 베이지 않고 회피했다.
그러나 서진의 의념이 담긴 실낱같은 전류가 닿는 걸 피할 순 없었다.
소매 안으로 들어간 전류는 팔로 스며들었다.
“음?”
설건은 곧바로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체내에 들어간 전류는 증폭하며 마나는 물론이고 에테르까지 마비시켰다.
“커헉!”
애초에 11레벨인 서진은 10레벨 설건을 다른 방식으로도 꺾을 수 있다.
하지만 공간계 스킬을 지닌 그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일부러 그의 특기인 에테르를 못 쓰게 만든 것.
각혈하는 설건을 향해 서진은 새로 얻은 스킬 ‘회수’를 발동했다.
딱 하나의 스킬만 가져올 수 있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공간 조작(Lv.10)을 가져왔습니다]
죽을 위기에서 스킬을 강탈당한 설건은 핏발 선 눈으로 노성을 터트렸다.
“이노오옴!”
서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엄청 복잡하네. 나중에 읽어야겠어.”
길게 쓰여진 공간 조작 스킬의 설명창을 보다가 중간에 꺼버렸다.
그리고 검을 들어 설건의 심장에 깊숙히 박아넣었다.
“끄어억!”
서진은 그의 생명이 꺼져가기 직전에 뇌격으로 육체를 조각냈다.
결국 세계를 혼란에 몰아넣었던 설건은 시체는 처참하게 바닥에 흩뿌려졌다.
**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지금, 세계는 천천히 복구되는 중이었다.
당시, 공간 조작을 얻은 서진은 능력을 파악하자마자 제어 던전을 찾아갔다.
설건은 세계 곳곳에서 브레이크되는 던전들을 일일이 관리하지 않았다.
당연히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핵심 던전이 따로 있었다.
댐의 수문이 던전이라면 댐이 막고 있는 물은 몬스터라 할 수 있다.
서진은 제어 던전을 통해 수문을 닫고 미친 듯이 흘러들어오는 몬스터를 차단했다.
이렇듯 빠르게 대처한 덕분에 피해를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유니온은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마령전은 일부 도주에 성공한 인원을 제외하고 게일러를 포함해 대부분 처형당했다.
도주한 멤버에겐 막대한 현상금과 국제헌터연합의 수배령이 내려져 추적은 이어지고 있었다.
다만 3시간의 던전 브레이크를 버티지 못해 붕괴된 약소국들도 있었기에 여파는 적지 않았다.
한편, 오늘 한국의 개성에선 기념비적인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서진! 이제 저거 먹어도 돼?”
샬롯은 서진의 소매를 당기며 원형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들을 가리켰다.
“어, 다 먹어도 돼.”
엄숙했던 가주 취임식 내내 군침을 삼키고 있던 샬롯은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설하윤이 샬롯의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성주원이 말했다.
“처음 봤을 땐 네 애인 줄 알고 깜짝 놀랐었는데 말이야.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어.”
“왜?”
“저렇게 귀여운 애가 너의 그 삭막한 얼굴에서 나올 리 없으니까.”
“안녕하세요 오빠, 가주 되신 거 정말 축하드려요. 우리 오빠 개소리는 흘려들으세요.”
성가을은 생긋 웃으며 인사해왔다.
서진도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응. 안 그래도 그러려고.”
그때 백화연이 미소를 띤 채로 다가왔다.
“이렇게 보니까 또 반갑네.”
“그러게. 최근에 편하게 대화를 나눌만한 자리는 없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언니.”
“응, 가을이도 오랜만.”
성주원은 취임식 회장을 둘러보며 감탄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뭐 하고 다녔길래 참석한 면면이 전부 화려하네. 마탑주와 부마탑주, 미 국토부 장관에 가디언 길드장. 대형 제약길드가 된 클리어 길드장에다 메이너드 총장까지, 국내 인사야 말할 것도 없고.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하다.”
서진이 그동안 거쳐왔던 길을 떠올리게 해주는 사람들의 모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부럽다면 네가 가주되면 내가 가서 앉아있어 줄게. 그럼 충분할걸.”
“고맙긴 한데 뭔가 약간 재수 없게 느껴지는 대답인데.”
성주원의 떨떠름한 표정에 백화연과 성가을이 웃었다.
그런 실없는 대화를 이어가던 중 협회장이 찾아왔다.
“한국 가문을 이끌어갈 분들이 전부 모여계시는군요. 허허.”
“안녕하십니까, 협회장님.”
“인사만 하고 눈치 있게 갈 테니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않아도 되네. 어쨌든 흑룡가주, 새로운 취임을 축하하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
“감사합니다.”
“...전 가주께선 여전하신가?”
“예, 아마 잘 지내고 계실 겁니다.”
그날, 설건과 전투를 벌였던 흑룡가주는 치명상을 입었다.
왼팔은 포기해야 했고, 오른쪽 다리는 회복 불가능 판정의 경계에 걸렸을 정도로 부서진 상태였다.
한벽호는 가주직을 더 이상 해나갈 수 없다고 결정하고 소가주인 서진에게 위임했다.
그러다 한 달이 지나 운신이 자유로워질 정도로 회복하자 예고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서진에게 ‘세계를 돌아보겠다’는 말만 남긴 채.
“그 양반이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협회장은 은근한 기색으로 운을 뗐다.
“혹시 결혼할 생각은 없나?”
“예?”
서진은 살짝 당황해서 협회장을 쳐다봤다.
“흠흠, 아닐세. 다음에 얘기하지.”
양측에서 묘한 시선의 압박을 느낀 협회장은 허허 웃으며 물러났다.
성주원은 재밌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질문을 받은 서진은 웃음으로 흘리고 창문 밖을 쳐다봤다.
너무나 청명한 하늘이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념이 싹 걷어질 만큼.
앞으로도 서진이 해나가야 할 일은 산적해 있지만 가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 서진은 원하던 목표를 이뤄낸 순간에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서진아. 창문 밖에 뭐 있어?”
백화연은 서진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렸다.
“아니, 그냥 고마워서.”
“어?”
일순 당황해하는 백화연의 표정을 보며 서진은 편하게 웃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