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1: 예상된 손님. (47/49)

Part1: 예상된 손님.

아우레스력 1876년, 안스란력 436년 10월 1일.

이켈라인 상회의 업무량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났다.

아이리펜 각지에서 벌어진 갑작스러운 크고 작은 분쟁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대륙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 안에서 격렬하게 소비되는 여러 물품과 순환하는 금전은 상상을 초월할 양이었다.

물건과 돈, 사람을 모두 취급하는 이켈라인 상회에서는 어느 한 세력에도 들어가지 않고 철저한 상도덕의 논리에 따라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도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는 주지의 사실인지라 주로 올라오는 보고들은 그런 뒷거래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요 몇달간, 나미아와 오디는 바쁘게도 그런 것들을 처리하면서 대륙의 정세를 앉은자리에서 살펴볼 수가 있었다.

신사이 왕국의 왕위찬탈전은 절정에 달해있었다. 이왕자와 삼왕자간의 혈투는 이미 조정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어 어느 한쪽이 파멸하지 않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토타카 연합의 지역간 다툼은 계속되어 연합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될 정도까지 접어들었다. 세 지방을 물류와 정보의 교환을 아예 삼가는 등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흑색비방을 벌이고 있었다.

제국과 사이에그롭은 수천 년 전의 영토분쟁을 다시금 시작하고 있었다. 사이에그롭의 부족전사들은 옛 영토를 되찾자는 말에 사막의 모래알 같은 숫자가 모여들어서는 북진하고 있었고, 제국 전역에는 비상경계령이 내려져서 대부분의 군사력이 남쪽에서 사막전사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레리첸트 왕국에서는 때 아닌 전염병이 돌아 상당수의 사람들이 감염되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사람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에디킨츠는 신사이의 내란에 관여하기 직전에 친 신사이파의 귀족들이 왕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는 바람에 그 뒷수습을 하느라 국외 사정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였다.

데베스 공국에서는 해군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정권을 장악하고 군국주의 국가로 가는 위험한 시도를 벌이다가 육군 특수부대와 레지스탕스에 의해 지리절멸하는 과정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워낙 해군력이 막강한 데베스 공국의 상황이 그렇게 나아진다고 보긴 어려웠다.

렌디너스 왕국 또한 곳곳에 산재한 국립 교도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직에 의해 파괴되어 대다수의 죄수들이 집단으로 탈주하여 치안공황상태에 들어가 있게 되었다.

툰드라 공화국의 상황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다. 때 아닌 한파와 폭설이 매섭게 몰아닥친 툰드라는 한 나라가 몽땅 얼어붙어버리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많은 재산과 인명피해가 발생하였지만, 강인한 늑대들이 있기에 심각한 피해로 발전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은 경중을 따질 수 없는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것을 알게 되면서 대체 이것이 무슨 재앙인가 경악했지만, 경악할 틈마저 그들에겐 사치나 다름 없었다.

시시각각 들려오는 전쟁의 소리, 싸움의 소리, 죽음의 소리는 사람들을 공포와 혼란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하는 일 뿐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닌 유일한 희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존 자체가 힘든 시대가 된 것이다.

“10월이 되었어. 이제 슬슬 ‘저 쪽’에서 사람이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야.”

“메신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손님. 진짜 손님.”

“그렇군요. 이제 와서 메신저를 보낸다는 것도 우스우니까요.”

오디는 나미아의 잔에 차를 따랐다. 티 포트를 내려놓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거리가 말도 되지 않게 침울하게 죽어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생긴 변화였다.

수만 명의 범죄자가 일제히 도망쳤다는 말에 사람들은 집 밖 출입을 삼가고 외지인을 경계하며 살아야 했다. 이곳 여관 WISH에도 탈옥수로 보이는 강도와 도둑들이 여러 번 들어온 적이 있었다.

세계는 그녀들이 계획한 대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일이 간단하기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어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오늘을 살며, 또 다시 오늘과 다를 내일을 두려워해야 했다.

그렇게 10월이 되었다. 성족들이 예건한 날짜였다. 10월에 시작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녀들은 이미 모든 일을 시작한 뒤였다. 보이지 않는 잉여 카르마는 이미 남고도 남을 것이며, 그것을 모두 카르마 스톤으로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일찍 시작해도 되려나요?”

“뭐가 어때서. 오디가 부추겼잖아. 성족들이 좀 당황하겠지만 알아서 대처 하겠지. 우리가 멋대로 나서서 잉여 카르마 만든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니?”

“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평소와 같이 손님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우리로 하여금 이 여관을 열게 만든 손님이지. 기다리고 기다렸던 진짜 손님을 맞이하면 되는 거야.”

나미아는 한가로운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생긋 웃었다. 얼핏 보자면 티타임을 즐기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성족들로부터 별다른 말을 듣지 않은 걸로 봐서는 그녀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지금부터 또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가지의 예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올 진짜 손님에 대한 예상이었다. 그녀의 생각이 미치는 범위에서 이곳에 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고, 그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도 성족들을 더욱 저주해야 할 것이었다.

손님을 데려오는 역할은 브란디에고가 하기로 했다. 만능 일꾼으로 쓰이는 그는 여관의 카운터를 지킴과 동시에 특별손님을 준비하는 배려인 것이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4층에서 5층을 연결하는 문이 열리면서 계단을 통해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미아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소파에서 일어나 계단의 앞까지 다가갔다. 오디도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 계단 앞에서 올라오는 진짜 손님을 기다리기로 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브란디에고의 금발이었다. 그의 뒤로 하얀 옷을 입을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용모는 브란디에고에게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를 밀치면서 손님을 확인했을 나미아였지만, 조금만 더 자신의 평정심을 얻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먼저 브란디에고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 이야?”

“예. 특별 손님입니다. 오너.”

브란디에고는 손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몸을 돌렸고, 나미아는 그의 몸이 돌려지는 짧은 시간 동안 비명을 지를 것 같다고 느꼈다. 브란디에고의 어깨가 사라지고, 흰색의 옷이 더욱 두드러지는 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나는 그 짧은 시간까지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인츠 오빠.”

“안녕. 나미아, 오디.”

제이중립신 안스란 메이의 최고 신관인 하인츠 실베언이, 나미아의 예상대로 진짜 손님으로서 환상여관 WISH의 5층에 올라오게 되었다.

나미아가 자리를 안내하고, 오디가 차를 끓여올 무렵, 소파에 앉은 이들은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못하고 있었다. 브란디에고 역시 나미아의 딱딱한 표정이나 하인츠의 멋쩍은 미소를 번갈아보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안스란 교단을 만든 최고 공로자이며, 최초의 신관임과 동시에 늙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알려진 현 시대의 전설이나 다름없는 하인츠 실베언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할 이야기는 없다는 듯 그저 입가에 한 줄기 미소만을 띄우고 있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디가 차를 끓여 모두에게 대접할 때까지, 나미아는 딱딱한 표정으로 하인츠의 미소에 시선을 못박아두고 있었다.

유일한 예상이었지만, 절대 맞지 않길 바랐던 예상이었다. 성족들은 모아둔 카르마로 신을 죽인다고 하였고, 그것이 꼭 안스란일 필요는 없다고 했었다. 궁색한 변명이다. 안스란이 끼어듦으로 해서 세상이 어지럽게 되었다면 죽일 신이 안스란 말고 또 누가 있는가?

중립신은 헤르키엘만 있으면 되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예전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천천히 발전하고, 천천히 나아가며 신앙을 돈독히 하는 인간들과 함께 세계를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안스란을 죽인다.

지독한 이기주의로, 자기들이 필요해서 만든 주제에 위험해지니 죽이려고 한다. 이럴 바에는 그냥 아예 인간으로서 죽게 내버려 둘 것이지, 어째서 신으로 만들었던가. 그렇게 인간의 목숨이 우습게 보였던가.

나미아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수많은 상념의 소용돌이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의문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안스란의 일에 제일 가슴 아파하고 제일 힘들어했던 하인츠가 눈앞에서 웃고 있다는 점이다.

왜? 어째서 웃을 수 있지?

그런 나미아의 생각을 비집고 오디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미아 님.”

“으, 응. 오디.”

“이야기를 시작해야죠.”

“아… 그렇…지. 그래…. 그래야지….”

나미아는 당황을 감추지 않고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그녀는 조금씩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려서는 입술에 가져다 대었고, 잠시 후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내려놓았다.

차 한 모금을 마신 나미아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하인츠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웃고 계세요?”

“자세한 사정을 듣지는 못한 모양이구나.”

“그걸 알면… 저도 웃을 수 있나요?”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해.”

하인츠는 고개를 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려 멋들어진 태도로 한 모금을 마셨다. 나미아는 그 태도마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가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단 말인가?

찻잔을 내려놓은 하인츠는 가늘게 떨고 있는 나미아를 보며 생긋 웃고는 말했다.

“자, 일단 나의 의뢰 내용을 들어주겠어?”

“…그럴게요. 말씀하세요.”

나미아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리듯 말했고, 하인츠는 최대한 성실한 태도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신들의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은 이렇다. 대량의 카르마가 응집된 카르마 스톤으로 열여섯 번째의 신인 안스란을 죽인다는 것이다.

지금 안스란은 그 전 신들의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에 따라 새로운 차원을 만드는 중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는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이들이 직접 물질화가 되어 살 수 있는 곳으로,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차원이라고 한다.

안스란의 주도 아래 행해지고 있는 그 작업은, 이제 내부를 만드는 일만이 남았다고 한다. 안스란은 그 안에 들어가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새로운 차원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사실 그 차원은 안스란을 물리적으로 죽이기 위한 장소이다.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개체가 물질화되는 그곳은 신이라고 해도 그 물질화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 차원이 거의 완성될 때 쯤, 카르마 스톤을 사용해 안스란을 죽이고 그 차원 전체를 붕괴시키는 것으로 신의 숫자를 열다섯으로 재조정한다는 계획이다.

물론 안스란을 그냥 소멸시키는 것은 아니다. 안스란은 애초에 인간으로서 신이 된 경우이니, 그녀에게서 신성만을 죽여 없애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이 된 안스란은 다시 인간세상에서 살며 정해진 수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하인츠는 안스란을 죽이는 일에 지명된 사람이었다. 안스란의 신성을 죽여 인간으로 되돌리는 일은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바랐던 일이었다. 왜곡된 진실의 여신인 안스란은 신도들의 보내오는 왜곡된 신앙에 괴로워하고 있었고, 하인츠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인간으로 되돌린다. 그는 그 일을 할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가 안스란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의 목표는 안스란이 만든 차원으로 들어가 안스란을 죽이고는 차원이 붕괴되기 전에 그녀의 인간성을 가지고 차원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차원에는 이미 안스란이 만든 주민들이 있었다. 안스란이 여신이 될 수 있었던 초석이며 오직 안스란만을 따르는 영혼들이 있었다.

안스란의 인도로 승천할 수 있었던 육백만의 죽은 영들이 바로 그들이다. 안스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육백만의 영을 뚫고 가야 한다. 대량의 카르마 스톤이 필요한 이유는 그 육백만의 카르마와 맞먹는 카르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무리인 일이지만, 그것을 도와 줄 사람이 있었다. 카르마를 모으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나미아와 오디가 바로 그들이었다. 또한 그녀들이 있어야 안스란이 만든 차원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하인츠는 자신의 여신을 죽이기로 했다.

“정말이지… 신들의 행패에는… 질색이에요.”

“나미아 님.”

“이게 뭐야…. 결국에는 이렇게 되잖아요. 괴롭힐 거 다 괴롭히고, 필요 없으니까 버리고…. 그리고는 인심 쓴다는 듯 인간으로 되돌린다고요? 그럼 아예 애초에 불러들이지를 말든가! 아빠를… 아빠를 이 세계에 받아들이지 말던가! 수많은 슬픔을 만들고는 다시 또 만들고… 그게 신들이 할 짓이에요?!”

나미아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절한 슬픔만을 느꼈다. 안스란이 너무나 불쌍했고, 하인츠도 너무나 불쌍했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가, 다시 버려진다는 건 너무했다. 그 끝이 설령 좋게 끝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안스란과 하인츠를 괴롭히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하인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 라이니시스 아저씨가 있었기 때문에 나와 안스란은 멈췄던 시간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죽었었던 그녀가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것만으로 고마운 일이지.”

“그렇지만… 신을 죽인다는 것이 말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잘못하면 하인츠 오빠가…!”

“알아. 그녀의 신성을 죽이는 순간, 나도 같이 죽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녀가 순순히 죽어줄 리가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어. 어쩌면 그녀를 죽인다는 일에 실패할 수도 있어. 그렇지만… 이건 이 세계를 위한 일이고, 그녀를 위한 일이야. 그렇게 이해해 주렴. 그리고 날 도와주렴.”

하인츠는 간곡하게 말했고, 나미아는 그걸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인츠의 마음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직접 가야 한다고?!”

“그래야 한대요. 아웃사이더인 저는 차원의 사이를 비집고 다닐 수 있대요. 그렇게 해서 안스란 언니가 만든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하인츠 오빠를 도와서 안스란에게 접근하는 길을 열어야만 해요.”

“그렇게 둘 수는 없다! 가지 마라! 이건 아버지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나미아는 고개를 번쩍 들며 당황한 눈으로 라이니시스를 보았다. 라이니시스는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나미아와 마찬가지로 당황해하고 있는 미리안과 에실루나는 조심스레 그를 말렸다.

“여보… 그렇게 화를 내기보다는….”

“왜 그러세요?”

라이니시스는 이를 부득 갈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는 말했다.

“이름조차 없는 차원에 들어가서, 어떻게 돌아올 생각이냐? 게다가 육백만의 신의 하수인이라고? 죽고 싶은 것이냐? 그곳에서 네가 어떤 능력을 쓸 수 있을지 안다고 가겠다는 것이냐!”

“능력이라뇨… 제가 가진….”

“하! 넌 정녕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있어! 빌어먹을! 그곳은 안스란이 만든 곳이다. 모든 상황은 안스란이 만들고, 모든 법칙은 안스란이 정한 대로 흘러가는 곳이야! 물리적 구현? 그것 또한 안스란의 패러다임대로 만들어진다! 그곳에 있는 고작 1세제곱인치의 공간인지라도 모든 것이 안스란의 것이란 말이다! 그곳에서 안스란을 죽인다고?! 안스란이 널 죽인다는 생각만 해도 넌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될 수 있다는 거야!”

미리안과 에실루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들은 그제야 왜 라이니시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가 있었다. 나미아는 맨몸으로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나미아는 불같이 화를 내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왠지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던 하인츠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는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표정이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카르마 스톤이 그곳에서 저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했어요. 안스란의 뜻에 구애받지 않고요.”

“웃기는 군. 고작해야 방도라는 것이 배터리 몇 개 짊어지고 지속적으로 교환해서 간다는 건가? 대체 그 카르마 스톤이 너희를 얼마나 버틸 수 있게 만든다고 하더냐? 고작해야 시한부 인생에서 조금 늘어난 것 밖에 되지 않느냐!”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계가 위험해요.”

“이 세계 따윈 잊어버려. 다른 차원으로 가서 살아라. 이 아버지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다른 차원의 삶도 적응하면 고향이다.”

나미아는 진심어린 아버지의 말에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빠 클론 하나만 만들어 주면 갈게요.”

“까짓것 못 만들어줄 것도 없지.”

“…진심이세요?”

“왜 이 세계의 일에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냐? 말도 안 되는 윗대가리들이 정해둔 규칙에 따라서? 이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지켜야 할 세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이니시스는 단호했다. 이 세계의 신들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는 그가 겪어봐서 알고 있다. 다른 세계의 인간이었던 그는 수십만 번을 환생한 연인 덕분에 이 세계에 환생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환생하게 된 대가로 그의 연인은 신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많은 일을 저지르다 끝내 버림받아 짧은 생을 마쳐야 했다. 그 보상인지 신들은 그의 여섯째로 그녀를 환생시켜 주었지만, 그 제멋대로인 행패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딸마저도 그들이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죽을 지도 모르는 일에 목을 내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마음 여린 딸의 약점을 붙잡고는 그것을 빌미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양녀일지라도 온갖 고생과 즐거움을 함께 하며 키운 딸이었다. 친자식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한 사랑을 준적은 없었다.

나미아는 그런 마음만으로도 고마웠다. 친딸이었더라도 이런 사랑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빠. 그렇게 절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렇지만 전 나머지 가족들을 희생해서까지 다른 세계로 도피하고 싶지 않아요. 아빠는 진짜 행복을 찾으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우리 꼬맹이들은 아직 다 크지도 않았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로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요. 아빠를 만난 덕분에 저도 행복할 수 있었어요. 제가 꼭 그렇게 죽을 거라고 단정 짓지는 마세요. 아빠도 아시잖아요? 아빠 딸이 얼마나 악착같은지.”

“미안하구나. 되레 짐이 되고….”

라이니시스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자신이 딸의 짐이 된다는 걸 깨닫자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미워졌다. 막말로 자신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해도, 그의 아내와 여섯 자식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그는 나미아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만약… 네가 죽기라도 한다면 나는 절대 신들을 용서치 않겠다. 내 모든 걸 걸고서라도 너의 목숨 값을 받아내고야 말겠다. 살아서 돌아오너라.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살아서만 돌아와라.”

“아빠도 참. 걱정 마세요. 신들이 죽은 사람 부활도 못시키겠어요? 뭐, 아웃사이더라서 어렵다고는 해도, 열다섯이나 되는 숫자인데 사람 하나 부활시키지 못하면 이름표 떼야죠. 걱정 마세요. 죽을 일도 없을 뿐더러,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올 테니까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대규모 전투를 치르러 가야 해요. 무기고 좀 비워주세요.”

나미아는 이제야 본론의 목적을 털어놓을 수가 있었다. 라이니시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털어가라. 뭐든지 주마.”

“야호! 통 큰 아빠 만세! 사랑해요!”

나미아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무기고로 달려갔고, 라이니시스는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부모를 불안하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기특하지만, 저 작은 어깨에 걸쳐진 짐이 너무나 무거워 보였다.

그는 양쪽에 앉은 두 아내를 번갈아 보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우리가… 자식농사는 잘 지었어. 그렇지? 미리안, 에실루나.”

“그러게요.”

“힘내야 할 텐데요.”

무기 창고로 달려가던 나미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엄마, 아빠, 엄마. 모두 사랑해요.’

그것은 마치 작별인사 같았다.

“이거, 얼마쯤 하는 물건이지?”

“아마 10만 펜은 넘을 거예요.”

“그렇겠지?”

오디는 갑자기 장신구 정리를 시작하는 나미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물어보는 말에는 근사치로 대답을 해주었다. 나미아가 들어 올린 물건은 드워프 최고급 기술로 세공을 한 목걸이로,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이기도 할 뿐더러, 라이니시스가 직접 선물한 물건이기도 하다.

“좋아. 이걸로 결정!”

“뭘요?”

오디는 설마 나미아가 차원을 이동하는데 한껏 치장을 하고 갈 생각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나미아는 오디를 보며 방긋방긋 웃을 뿐이었고, 오디는 더욱 더 의문이 깊어졌다.

‘대체 왜 저러시지?’

오디의 의문을 풀 실마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나미아는 목소리를 높여 방 밖에까지 들리도록 했다.

“디에고-! 잠깐 들어와 봐!”

“예에!”

역시 차원 간 이동을 하는 것 답지 않게 바닥청소를 하고 있던 브란디에고가 나미아의 방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앞치마에 머릿수건까지 한 모습은 꽤나 본격적인 청소용 장비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오너?”

“이거 가져.”

“예?”

브란디에고는 대뜸 나미아가 내미는 목걸이를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그 무게를 느낄 세도 없이 나미아가 가로채가는 것에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미아는 그런 그의 멍한 표정을 보고는 생긋 웃으며 산뜻하게 말했다.

“좋아. 이걸로 넌 해고야.”

“예에?!”

브란디에고가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못하고서 경악한 표정만을 지을 때 나미아는 표정을 굳히고는 빠르게 말했다.

“나에게 빚진 돈이 10만 펜이지? 이거 10만 펜 넘는 물건이야. 내가 준 거니까 넌 10만 펜이 생겼지. 그리고 난 이걸 도로 가져오는 것으로 네가 빚진 거 받았어. 그러니 넌 더 이상 여기서 일할 필요가 없어. 그래서 해고야. 당장 나가.”

“오, 오너! 이제 무슨 장난입니까!”

“장난으로 보여? 똑똑히 말해줄까? 넌 더 이상 필요가 없어. 그러니 나가란 거야. 오디, 내보내.”

오디마저도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서 멍한 표정으로 나미아를 바라 볼 뿐이었다. 나미아는 혀를 차고서는 오디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

“예, 예?”

“못 들었어? 저 녀석 내쫓으라고. 돈 다 갚았으니까.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거 귀찮으니 얼른 치워버려.”

“오너! 아니, 나미아!”

“나미아? 하긴, 이젠 이름 막 불러도 상관없지. 이번엔 내가 말 낮춰줄까? 브란디에고 루 세스칸추. 골드 드래곤의 신예. 정의, 선, 옮음의 추구자. 당신과의 정리는 이걸로 끝입니다. 더 이상 제 주변에 있는 것이 불쾌하오니 사라져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안녕히. 오디!”

나미아는 오디를 부르고서는 브란디에고로 부터 등을 돌렸다. 오디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나미아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녀는 브란디에고의 팔을 잡아서는 문으로 이끌었고, 힘없이 끌려가면서도 브란디에고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젠장! 날 여기까지 끌어들여 놓고 이제 와서 발 빼라고요?! 멋대로 끌어들여 놓고서는 멋대로 내치다니! 나미아 이켈라인! 고개 돌려요! 절 보라고요! 당신 진심을 말해요!”

“그만하세요.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너무하지 않습니까?! 네?!”

달칵.

나미아는 문이 닫히면서 브란디에고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쉬움과 후회가 잔뜩 깃들어 있었다.

‘미안. 브란디에고. 너는 너무 착해. 앞으로의 일들을 감당하지 못할 거야. 지금까지 고마웠어. 하지만… 이걸로 충분해.’

브란디에고는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하진 않았다. 나미아가 왜 이러는지 그 역시 알고 있기에,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는 문 밖에서, 그녀가 충분히 들릴 수 있게 소리를 질렀다.

“나미아 이켈라인! 기억해요! 절대 당신을 놓지 않을 겁니다! 영원이 끝날 때까지! 살아서 돌아와요! 살아서! 기다릴 겁니다!”

“…바보.”

나미아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저런 바보 같고 순수한 면이 좋아 보였다. 그래도 이렇게 끝내는 건 아쉽기도 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중에 취직자리 없으면 찾아와!”

“그 말, 잊지 않겠습니다!”

브란디에고의 발소리가 멀어졌고, 오디가 문을 열며 들어왔다. 오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미아에게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주변정리.”

“살아서 돌아오실 생각 아니세요?”

“만약이란 건 있는 법이지.”

“글쎄요. 그 만약에서 확율을 올리려면 브란디에고 씨의 힘이 필요한데요.”

“됐어. 그 애한테까지 짐을 지워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시원스레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전력인 브란디에고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도를 올리는 일이 되지만, 나미아는 차라리 그 짐을 짊어지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미아와 오디, 하인츠만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만큼이 딱 적당하고, 활동시간도 훨씬 늘어나게 된다.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브란디에고는 데려가 봤자 고생만 하게 될 것이다.

“출발은 내일 아침에 하자고. 일단 먼저 성족들의 회의장에 들렀다 가야 한다고 했었지?”

“예. 그랬어요. 거기서 개략적인 설명을 듣고 움직인다고 하더군요.”

“성지일까? 아니면 우리가 직접 올라가야 하는 거야?”

“아마도 직접 올라가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나미아는 저 위쪽의 사람들이 꽤나 급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개 아웃사이더를 순순히 그런 회의장에 들여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 아침에 하인츠가 도착하는 대로 그들은 성족의 회의장으로 이동한다. 안스란을 죽이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물질계든 신계든 혼란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위와 아래가 일치하는 모습을 보였던 적은 아마 유사 이래로 몇 없는 사태였을 것이다.

자신이 벌인 일로 인해서 성족들이 많이 바쁘다고 생각하니 나미아는 고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면서 벌이는 일이었다. 실패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다른 사람을 가슴 아프게 만든 만큼, 그 분을 짊어지고서도 자신은 성공해야만 했다. 그것이 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의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은… 마지막 휴식이 되겠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오디는 애써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했지만, 현실의 무게에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오디는 포기하고는 조용히 오늘 하루를 정리하기로 했다.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요 며칠사이 가라앉아있던 분위기 때문에 티나세르는 나미아와 오디에게 제대로 말도 건네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나미아가 억지로 시켜서 보낸 학교에 편입하면서 재미를 붙이는 중이었기에 이야기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그녀들의 일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후회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말도 안돼요!”

“그렇지만 아가씨. 이것은 회장님의 명령이십니다.”

“저에겐… 제겐 아무런 말도 없었어요! 거짓말! 믿지 않아요!”

“어쩔 수 없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이제 이켈라인 상회의 실질적 회장이 되셨습니다. 부디 전대 회장이셨던 나미아 님의 유지를 받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나미아와 오디가 처리하지 않은 대부분의 실무를 처리하고 있던 ‘유레인 바실렌’은 금방이라도 슬픔에 무너질 것 같은 소녀를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런 일에는 재능이 없음을 한탄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유지? 유지라뇨! 누가 죽었어요?! 죽기라도 했어요?! 그 언니들이, 쉽게 죽을 사람으로 보여요?!”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나미아 님은 그것을 유언이라 생각하고 집행하라 하셨습니다. 부디 고정하시고….”

“흐윽! 나쁜 언니!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렇게 떠나는 게 어디 있어! 흐윽… 으아아아앙!”

티나세르 라르지엔, 이제는 ‘티나세르 이켈라인’이 된 소녀는 목 놓아 울었다. 나미아가 남긴 편지, 그것은 유레인의 말대로 유언 같았다.

[귀여운 동생 티나에게.

아무런 말없이 이렇게 무거운 짐을 남기는 날 용서해.

워낙 일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너도 혼란스럽겠지. 나 역시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어 너무나 안타까워. 조금이라도 네게 많은 걸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널 진짜 가족으로 여기고 있었어. 그래서 이런 무거운 짐을 맡기는 거야. 믿을 수 있는 나의 동생에게.

나는 어쩌면 되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것일지도 몰라.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나의 말에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잡지. 미연의 사태에 대비하지 못하고 떠나는 건 처녀를 울리고 떠나는 방랑자나 같은 거야. 그 사람이 떠난 다음에 벌어질 일을 처리할 책임감도 없는 거지.

네가 아는 내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만들어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켈라인 상회가 바로 그거야. 내가 없어진 이후, 상회가 어떻게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믿는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걸 다행을 생각해.

너에게 내 모든걸 맡길게. 이켈라인 상회에서 시작해 여관 WISH까지.

유레인이 널 많이 도와줄 거야. 상회 내에서 내가 제일 믿고 있는 사람이니까, 너도 역시 믿어도 돼. 기왕이면 회장직을 그에게 넘기고 싶었지만, 유레인은 전면에 들어나는 걸 꺼려하거든.

너에게 내 인맥을 남길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지금같이 혼란스러운 때에 각 나라의 수장들과 만나는 건 추천할 일이 되지 않지만, 아이리펜 통합 마법사 길드를 이끄는 콰이헤른 투플레인 씨를 만나는 건 적극 추천해. 그 아저씨는 허락되는 한도 내에서의 부탁을 들어줄 거야.

툰드라의 라스킨 아저씨도 많은 도움을 줄 거야. 하지만 그쪽은 많이 바쁘니까 너무 많은 걸 요구하지는 말았으면 해. 물론 너라면 그걸 충분히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정식으로 네가 실권을 잡는 건 네가 성인이 되고서 대학을 나온 이후의 일이 될 거야. 그때까지는 네가 회장이라는 걸 밝히지 않도록 해. 아니, 평소에 그냥 네가 회장이라는 걸 밝히지 않는다면 시끄러운 일이나 위험한 유혹은 없을 거야.

내가 돌아오는 건 어쩌면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몰라. 네가 죽고, 그 후손의 앞에 내가 나타날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 세계의 황혼이 지고 차갑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 오더라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이제부터 넌 ‘티나세르 이켈라인’이야. 내 말을 부디 내 유언이라 생각하고 이행해 주었으면 싶어.

기왕이면 날 기다리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야. 그렇다고 해서 돌아왔을 때 너무 박대하진 말았으면 해.

미래란 언제나 불명확하지. 그래서 재미있는 것일지도 몰라.

설령 그것이 목숨을 걸고 나아가야 할 미래일 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네게도 올 거야.

그럴 때가 되면, 평소보다 더 당당하게 나가도록 해. 여유를 가지고 몸가짐은 쿨 하게, 가슴은 뜨겁게. 잊지 마, 가슴은 언제나 뜨겁게.

다음에 다시 만날 때가 되면, 이걸 가지고 몇 번 놀리는 건 허락해 줄게. 많이 하면 화낼 테니까 그 점에 유의하고.

이 메시지는 다 읽은 후 30초 뒤에 자동 폭파되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 적당한 곳에 보관하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아.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눴더라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나의 일이 너무 바빴구나.

부디 네게 많은 행운과 축복이 따르길 기원할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부디 몸 건강해.

안녕.

-언니 나미아가]

“언니… 언니라면… 동생을 이렇게 두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 흐윽! 그냥, 그냥 그때 죽여 버리는 게 차라리 더 나았어! 으흑! 으흐흑!”

티나세르는 악에 받쳐 고함지르며 울었다. 유레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가 우는 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울음에 답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티나세르는 더 크게 울었다.

가슴을 후벼낼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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