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3화 (3/200)

1장 빙의 : 달라진 망나니

‘망나니가 달라졌다!’

요새 내성 하녀들 사이에 도는 소문이다.

눈만 마주쳐도 욕설을 날리던 그 망나니가 흔한 손찌검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요새는 연무장에서 신체단련을 한다더라.

물론 시온은 헤논의 변화를 불신했다.

저러다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심지어 이것조차 나중에 더 큰 변태 짓을 위한 포석일지도 모른다.

미치광이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아버지의 명만 아니었으면 저 녀석 따위 금세 목을 따버렸을 텐데.’

시온의 아버지는 이곳 후작령의 집사장이자 로이드 후작이 가장 믿는 오른팔인 세바스찬이었다.

겉보기에는 중후한 맛이 풍기는 멋진 중년 집사였지만, 시온은 아버지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어쌔신. 그것도 실력이 상당한.’

그렇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람 손에 피를 묻히는데 익숙한 살수였다.

특이 경력이 있는 아버지 덕택에 시온도 어렸을 적부터 사람 담그는 법을 배워야 했다.

평범한 하녀로서 지내고 싶었던 시온은 처음에는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지금 와서는 잘 배웠다 싶었다.

다만 코앞에 죽이고 싶은 목표가 있음에도 죽이지 못하는 게 답답할 뿐이다.

‘아버지, 저 돼지를 죽여버리고 싶어요.’

‘주인님께서 아직 헤논을 놓지 않으셨다. 조금만 더 참아보거라.’

시온이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숨이 턱 끝까지 닿도록 뛰던 헤논의 몸에서는 더러운 땀이 육수처럼 흘러내렸다.

“허억, 헉! 준비운동은 이 정도면 충분한 듯하군.”

혼자 중얼거리더니 이제는 연무장 구석에 비치되어있던 롱소드를 들고 어설프게 휘두른다.

훅! 후욱!

시온은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이제와서 뭘 하겠다는 건지.

검이라는 건 지금 와서 잡는다고 되는 종류의 무기가 아니다.

자신처럼 어렸을 적부터 칼을 품속에 넣고 자도 될까 말까 한데, 도저히 속내를 모르겠다.

그런 시온의 시선이 조금 노골적이었을까?

검을 휘두르던 헤논이 갑자기 시온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재빨리 시선을 피했으나 이미 그의 시야에 들어와 버렸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내 검술 실력이 하찮아 보이나?”

또 시작이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무 잘하셔서 감탄 중이었습니다.”

여기서 망나니의 루트는 두 가지로 갈린다.

기분 좋은 날은 ‘그렇지? 나 잘하지? 역시 나야.’ 이러면서 넘어가는 전개와.

기분 나쁜 날은 ‘너 지금 나 놀리냐? 풀어주니까 만만해 보이지?’ 이런 전개.

과연 오늘의 망나니는 어떤 선택을 할까.

“거짓말 마라. 네 눈에 안 찬다는 걸 알고 있다. 감히 나를 기만하다니.”

안타깝게도 두 번째 전개다.

또 어떤 욕설과 모욕을 들어야 할까.

시야가 살짝 흐려졌지만 꾹 참으며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으니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최근에 조금 변했다지만 망나니 근성은 여전하겠지.

손찌검을 할지도 몰라.

깎여나갈 자존감을 생각하니 절로 우울해졌다.

“흠···맞아.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시온은 질끈 눈을 감았다.

곧 닥쳐올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각오하면서.

그러나 이번에도 예상은 빗나갔다.

땡그렁.

금속성의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떠보니, 그녀의 눈앞에는 롱소드가 놓여있었다.

“이건 대체···”

“나를 기만하고도 살기를 바란 건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죄를 죽음으로 갚으란 말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언젠가는 저 망나니가 자신을 죽이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하긴 했다.

“대신 그냥 죽이는 건 재미없으니 한 가지 재미있는 규칙을 추가하도록 하지.”

이번엔 또 무슨 지랄 염병일까.

“난 오늘 해가 질 때까지 진심으로 널 죽이려고 할 거다. 그때까지 네가 저 롱소드로 내 칼을 막아내면 오늘 저지른 무례를 없던 일로 해주지.”

“···네?”

“대신에 막지 못하면 뭐···죽겠지?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그럼 간다?”

헤논은 무릎 꿇은 시온을 향해 롱소드를 수직으로 내려그었다.

처음에는 저 망나니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가오는 검에는 아버지의 것보다는 한참 못 미치지만 분명히 살기가 담겨있었다.

검이 코앞에 닥쳐올 때쯤 확신했다.

저 망나니는 정말로 날 죽이려는 것이다!

‘미친놈.’

속으로 쌍욕을 뱉은 시온은 본능적으로 땅을 굴러 헤논의 일격을 피해냈다.

새하얀 에이프런이 먼지투성이가 되었으나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결과보다는 나았다.

옆구르기와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롱소드를 능숙하게 주워든 시온이 헤논의 맞은편에 서서 검을 겨누었다.

공격이 빗나간 헤논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툴툴댔다.

“호오라, 내 공격을 피해? 제법 날렵하군.”

“정말입니까?”

“뭐가.”

“해가 질 때까지 도련님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으면 오늘의 죄를 없던 일로 해주시는 겁니까?”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나.”

‘네가 날 속인 적이 하도 많아서 안 속인 적을 세는 게 빠르다.’

혹여 저 말이 거짓이라도 시온은 저기에 기대보는 수밖에 없다.

“그럼 간다?”

헤논이 맹렬하게 시온에게 부딪쳤다.

시온도 이를 악물고 응수했다.

검과 검이 살벌하게 춤을 추었고.

연무장은 이내 거친 숨과 땀으로 채워졌다.

* * *

후작가 내성 정원.

색색의 꽃들이 활짝 만개하여 가지각색 아름다움을 뽐내고.

은은한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절로 편안하게 한다.

그중 압권은 역시나 정원 한가운데 꼿꼿이 서 있는 커다란 상수리나무였다.

햇빛이 강할 땐 다람쥐와 토끼가 쉬어갈 그늘을 제공하고, 어디선가 날아온 참새에게는 둥지를 틀 공간을 내준다.

나무는 마치 어머니처럼 모두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아낌없이 나누어줬다.

그런 상수리나무 앞에는 지팡이를 짚은 한 사내가 멍하니 서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선 연륜이 느껴졌으나 건장한 체격에 몸에 꽉 들어찬 근육이 보통 사내가 아님을 짐작하게 했다.

무엇보다···사내에게는 다리 한 짝이 없었다.

인간의 몸을 지탱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오른쪽 다리에는 근육과 피와 살 대신 나무로 된 의족이 대신하고 있었다.

상수리나무에 한 손을 댄 채 명상에 빠져있던 사내가 아무도 없는 공간인데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왔나.”

그러자 놀랄 일이 벌어졌다.

분명 빈 공간이었는데 수풀 한쪽이 흔들리면서 어느새 정갈한 집사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모습을 보인 것이다.

“언제쯤 주인님을 속일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내가 죽은 뒤엔 가능하겠지.”

“농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시지요.”

집사 세바스찬.

시온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제국에서 알아주는 어쌔신이었다.

그의 스킬 ‘물도마뱀 발걸음’은 웬만한 기사들조차 목에 칼이 들어올 때까지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이 모신 주인에게는 단 한 번도 통하지 않았다.

“역시 여기에 계셨군요.”

“늘 오는 곳이지 않나.”

후작성의 정원은 로이드 후작만의 특별한 개인 공간이었다.

그는 업무를 끝내고 나면 늘 이곳에서 상수리나무를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예전에 그의 정실부인 로잘린 로이드가 정원에 발을 들였다가 후작이 벌컥 화를 낸 이후로는 오로지 세바스찬만이 출입을 허락받았다.

“무슨 일인가? 급한 일이 아니고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헤논의 일입니다.”

“헤논?”

후작의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갔다.

세바스찬은 그런 후작에게서 약간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죽다 살아났다지. 또 사고라도 쳤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무슨 말인가.”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답니다.”

꿈틀.

후작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잠깐의 유희겠지. 그놈이 원래 여기저기 잘 쑤시고 다니잖나. 싫증 나면 다시 우리가 알던 그 모습으로 돌아올 걸세.”

“그러기에는 너무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외모적으로도, 능력적으로도 말입니다.”

“······”

“헤논을 한 번 만나보시지요. 전 헤논이 그 정도의 미남자인지 몰랐습니다. 인제 보니 외모만큼은 주인님을 꼭 닮으셨더군요.”

세바스찬의 말에 로이드 후작이 참지 못하고 피식 실소했다.

“이 사람아. 아무리 아부를 하고 싶어도 그렇지, 없는 말을 지어내면 쓰나. 내가 그 정도의 외모가 아닌 걸 알잖나? 혹여라도 그 아이의 외모가 출중하다면···그녀 때문이겠지.”

세바스찬도 이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 헤논의 친모를 본 사람으로서 솔직히 말하자면.

제국에서 별의별 미인을 다 만나본 그로서도 헤논의 어머니만한 미녀는 본 적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연신 상수리나무를 쓰다듬던 후작이 넌지시 세바스찬에게 말했다.

“세바스찬.”

“네, 주인님.”

“헤논을 예의주시해주게.”

“직접 만나지는 않으십니까?”

“괜히 복잡해져. 로잘린 신경 긁고 싶지도 않고.”

“알겠습니다.”

후작가의 집사장은 왔을 때처럼 사라질 때도 스리슬쩍 자취를 감추었다.

세바스찬이 사라진 후에도 후작은 계속해서 상수리나무를 쓰다듬었다.

* * *

시온의 징계를 빙자한 검술 수련은 그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무장을 돌았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도 손에 쥔 검을 놓지 않았다.

근력 운동과 식단조절도 적절히 병행했다.

다행히 헬스장을 많이 다녔어서 기본적인 몸 만드는 지식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히려 미개한 중세 배경의 시대에서 내 운동법은 상당히 상위에 속하는 신체 단련법이었다.

‘사생아라도 후작가에 태어나서 다행이군. 농노로 태어났으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농사일에 끌려다녔을 텐데 말이야.’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세 달이 되었다.

어느새 육수가 줄줄 흐르고 겹겹이 쌓여있던 든든한 지방층은 얼추 사라졌고 그 자리에 보기만 해도 든든한 근육이 자리 잡았다.

헤논 트리스의 몸을 단련하면서 느낀 점은 바로 이거였다.

‘조금만 운동해도 빠르게 근육이 붙는다. 이 정도면 정말 미친 유전자인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럴만도 했다.

헤논 트리스의 아버지 로이드 후작은 아르니아 대륙 7인의 수호자, <세븐 스타>의 일원이었으니까.

다친 다리만 아니었어도 왕국 최고 전력으로 평가받을 만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살도 금세 빠지고 근육도 빨리 붙고 무엇보다 검술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했다.

깡! 까강!

힘은 한참 전에 시온을 추월했다.

이제는 헤논이 몰아치면 시온이 기술을 써서 막아낼 지경에 이르렀다.

‘헤논도 이 세계에서 중간보스를 맡았던 인물이다. 소질이 없으면 아예 보스조차 되지 못했겠지. 나름 재능러였던 거야.’

“읏!”

검을 정면으로 부딪치자 검신을 타고 올라오는 저릿함에 시온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최근 내가 보인 극적인 변화에 시온도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물론 나에 대한 그녀의 불신은 여전했다.

그 부분은 내가 억지로 강요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니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기다렸다.

“여기까지 하지. 해가 질 때까지 내 검을 막아냈으니 네 무례를 용서하겠다.”

“···예.”

검을 거두자 예의 그 환청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히히히히히.’

‘속닥속닥속닥.’

처음에는 헤논을 그저 망나니라 치부했던 나도 속닥대는 소리에 잠을 몇 번 설치고 나서는 왜 이놈이 미쳐갔는지 조금은 공감했다.

하지만 이전의 헤논과 나와는 가장 큰 차이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드루이드에 대한 자각 여부였다.

‘불쌍하게도 헤논은 귓가의 속삭임이 악마의 소리라고 믿었지. 자신이 드루이드인 줄 몰랐으니까. 반면에 나는 내가 드루이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검술 수련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창문을 열고 공기를 느꼈다.

어둠 속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더욱 선명히 들려왔다.

예전 같았으면 술을 마시든 사람을 때리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소리를 막고자 별의별 짓을 다 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리에 집중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떻게든 그들과 하나가 되고자 애를 썼다.

매일 밤을 이래 왔다.

오늘은 보름달이 뜨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뭔가 느낌이 좋았다.

소곤거림이 더 크게 들려오는 날이다.

귀를 쫑긋 세우고 최대한 집중했다.

온몸의 솜털이 올올히 일어났다.

대지만물이 하나로 뭉쳐져서 품속에 다가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헤논은 분명히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저들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정원으로 와줄래?]

됐다.

이제 움직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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