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빙의 : 각성한 망나니
야밤에 내성을 걸었다.
나를 본 고용인들은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싶어 냉큼 자리를 피했다.
“이 늦은 시각에 어딜 가는 거래?”
“보나마나 외성 구역으로 가서 술이나 퍼먹겠지. 한두 번도 아니잖아.”
“저런 놈이 다시 돌아오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사람들이 쑥덕대는 소리는 무시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목소리는 나를 정원으로 인도하려 했고, 거기에 응해야 한다.
[이쪽이야!]
명확한 언어는 아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원 입구에 도착했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향긋한 꽃내음이 멀리서부터 풍겨왔다.
발걸음을 내디디려 했는데 어디선가 스르륵 나타난 중년 사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모습을 보인 자는 후작성의 집사장 세바스찬이다.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기척을 감지하지도 못했다.
만약 저 사람이 살의를 품고 접근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겠지.
‘과연 시온의 아버지.’
<시온 라이크>의 주인공 시온은 처음부터 뛰어난 신체 능력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저 어쌔신 출신 집사 세바스찬 덕분이었다.
저렇게 유능한 살수가 집사나 맡고 있다니 인력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시간이 늦고 속이 답답하여 정원에서 바람이나 쐬고자 했습니다.”
“이곳 정원은 주인님만의 사적인 공간입니다. 심지어 후작 부인께서도 함부로 들어오시지 못하지요. 이해하셨으면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후작가의 집사는 사무적인 태도로 딱딱하게 말했다.
이러면 어쩔 수 없지.
미리 준비해 온 대답을 꺼냈다.
“집사장의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군요.”
내 말을 들은 세바스찬의 흰눈썹이 꿈틀했다.
“제가 틀린 말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전 후작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어떤 부분에 어폐가 있다는 건지 궁금하군요.”
“방금 정원을 후작님의 개인 공간이라 하셨는데, 정확히 말하면 후작님의 개인 공간은 아닙니다. 제 어머니의 개인 공간이지요.”
모두가 알다시피 헤논은 드루이드다.
그리고 아르니아 대륙에서는 오직 하프엘프만이 드루이드가 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헤논의 어머니는 엘프였다는 말이다.
‘그것도 그냥 엘프가 아니라 하이엘프지.’
원래 게임 스토리에서도 악마추종자에 의해 부활한 헤논은 후작성 정원에 있는 상수리나무의 힘을 빌려 드루이드로 각성한다.
그 나무에는 엘프였던 어머니의 영혼이 담겨 있었다.
세바스찬은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심복이니 어렴풋이라도 이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내 말을 들은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그러니 어머니와 결혼하신 아버지께서는 드나들 수 있지만, 후작 부인께서 함부로 들어오시는 건 실례 아니겠습니까?”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저는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오히려 지금 집사장이 제 앞길을 막는 게 이해가 안 되는군요. 솔직히 조금 화가 나려고 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비키세요.”
좀 무섭긴 했는데 세게 나가야 할 타이밍이라서 눈을 좀 부라려줬다.
설마 기분 상해서 칼을 휘두르거나 모종의 참교육(?)을 시전하진 않겠지.
비록 내가 후작가의 소생이긴 하지만 세바스찬 정도면 나 하나 쥐어패고 무마시킬만한 영향력은 가지고 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다행히 세바스찬은 한쪽으로 물러서서 길을 내줬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크흠흠,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허세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정원으로 입장했다.
일단 정원으로 들어오니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향기 또한 짙어졌다.
그러나 나는 다른 곳에 시선 둘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들어오자마자 정가운데에 떡하니 보이는 상수리나무에 모든 오감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답다.’
나무가 이렇게 예뻐 보이긴 처음이다.
심장이 미칠 듯이 쿵쿵 뛰었다.
등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다.
헤논의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거다.
새삼스럽게 망나니였던 헤논이 불쌍해졌다.
기억도 안 날 시기에 어머니를 여의고.
후작 부인과 필립의 견제 속에 살면서.
아버지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한다.
‘어머니는 헤논을 드루이드로 각성시키고자 끊임없이 이곳으로 불렀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헤논은 계속해서 환청이 들려온다며 괴로워했지.’
그러다 결국 죽어버리고 악마추종자에 의해 사령체로 되살아나 시온에게 토벌당하니.
셰익스피어의 비극도 한 수 접어줄 만큼 기구한 이야기다.
“아아!”
감탄사와 함께 상수리나무에 한 손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앗!!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환한 빛이 비치며 의식이 이동되었다.
“이곳은?”
광활한 초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버들가지가 고개를 흔든다.
아무도 없어 보이는 휑한 공간인 것 같지만 이제는 보인다.
이곳은 도심 한복판보다 활기차다.
수많은 정령이 반딧불이처럼 붕붕 날아다니며 자유를 만끽한다.
그리고.
저 멀리서 한 여인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미인이었다.
하얀 피부와 시원한 큰 키. 가녀린 몸매. 무엇보다 양옆으로 보이는 뾰족한 귀.
신비로운 연녹빛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왜인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어머니 쪽에서 먼저 내 양손을 잡았다.
싱긋 미소를 짓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옅은 물기가 맺혀 있었다.
‘많이 힘들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맑은 목소리.
잔잔한 가슴 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미안하구나.’
심장이 고장 난 게 아닐까.
이렇게 빨리 뛸 리가 없는데.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건 내가 슬퍼서 우는 눈물이 아니다.
헤논이 몸이 알아서 반응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저 애잔한 미소와 함께 울고 있는 헤논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헤논은 죽었음에도 이 몸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에게 몸을 양보하고 있었을 뿐.
이 자리에서 나는 제삼자다.
헤논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한발짝 물러서서 모자간의 상봉을 지켜보았다.
두 모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두 손을 잡고 오랜 시간 애틋한 눈 맞춤을 이어나갔다.
제발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염원한다.
‘잘 지내렴.’
두 모자는 서로를 품에 안았다.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따뜻하고도 절절한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달되어 영혼을 뒤흔들었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 시선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고마워요. 우리 헤논을 잘 부탁해요.’
분명히 나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계가 뒤흔들렸다.
광활한 대초원이 그 끝단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갔다.
이 공간에 더 머물고 싶어하는 헤논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졌지만 어머니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들을 보낼 때가 됐음을 아는 거다.
‘사랑해. 아들.’
그 말을 끝으로 모든 공간이 사라졌다.
환한 빛이 사라지고 무한한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치 이불처럼 포근했다.
물고기처럼 그 속을 유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눈앞에 은은한 빛이 점멸했다.
정체불명의 불빛은 저들끼리 허공을 노닐더니 일정한 형상을 갖추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글자였다.
[드루이드로 각성하셨습니다.]
[스킬 목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Y/N?]
누가 게임 속 세상 아니랄까 봐.
시스템 창이 떠올라 있었다.
나에게 주어지는 스킬이라니 주저하지 않고 열람을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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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스킬을 열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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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생명력]
드루이드는 자연과 함께 호흡합니다.
높은 체력과 회복력을 지닙니다.
사막과 심해에서도 생명은 자랍니다.
인내력과 강인함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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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작용]
광활한 자연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깨끗해도, 아무리 더러워도.
결국은 공평하게 걸러져 순환합니다.
저주를 비롯한 상태 이상에 면역입니다.
파마(波魔)의 힘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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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의 힘]
주변 환경이 당신의 편입니다.
탐색과 추적이 가능합니다.
전투 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장할수록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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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읽을 때마다 시스템창의 글자들이 빛무리가 되어 흩어지더니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친숙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전신을 감싸면서 활력이 치솟았다.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여 몸이 한층 성장한 것이다.
[각성이 끝났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파아앗!!!
눈이 번쩍 떠졌다.
어느새 나는 바닥에 누워있었다.
몸을 일으켜보니 주머니가 불룩하다.
뭔가 싶어서 손을 넣어서 안에 있는 걸 꺼내보았다.
“도토리?”
정확히는 상수리나무 열매였다.
외관은 도토리와 흡사했다.
총 10개가 있었는데 이를 만지작거렸더니 다시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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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의 유산]
[도토리x10]
섭취할 시 짧은 시간 동안 자연과의 교감력이 대폭 상승합니다.(스킬 강화)
경미한 부상을 치료해주고 몸의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마나 친화력이 상승합니다. 소모성 마나를 획득합니다.
이 효과는 드루이드에게만 적용됩니다.(귀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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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 같은 거구나.”
순간 스퍼트를 내기 위한 강장제로 보면 될듯했다.
헤논의 어머니는 가는 순간까지도 아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주었다.
상수리나무는 그 목적을 다했는지 벌써 잎이 시들고 나무뿌리가 썩어가고 있었다.
아마 진작 수명이 다한 나무였을 텐데 하이엘프의 영혼이 이를 붙잡아두고 있었으리라.
비록 떠나간 자리지만 예를 갖추고자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그리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헤논을 제가 꼭 지켜내겠습니다.’
아르니아 대륙의 전망은 밝지 않다.
밝았으면 애초에 힐링 게임으로 분류되었겠지.
파멸과 종말로 향해가는 대륙의 운명.
급류처럼 소용돌이치는 메인 스트림 속에서 망나니로 취급받던 헤논을 살려야만 한다.
그것도 주인공 시온의 혐오를 극복하면서 말이다.
‘어렵더라도 해야만 한다. 그것이 곧 내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으니. 어쩌면 게임 클리어가 곧 이 세계를 탈출할 열쇠일지도 모르지.’
굳은 다짐을 하고 돌아섰더니···
언제부터 왔는지 한쪽 다리가 없는 외다리 후작이 지팡이를 짚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것이 화가 잔뜩 난 기색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아버지가 내뿜는 살기에 몸이 따끔거리고 의식이 흐릿해지던 찰나,
[스킬 자정작용이 발동합니다.]
[상태 이상에 면역됩니다.]
패시브 스킬이 자동발동 되며 가출하려던 정신줄이 제자리를 찾았다.
로이드 후작은 내가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 눈빛에 이채를 띠더니 노기를 살짝 누그려트렸다.
“설명해라.”
“무엇을 말입니까?”
“나무에 무슨 짓을 한 거냐?”
“받아야 할 것을 받았습니다.”
“그건 대답이 되지 못한다.”
후작은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이번에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너를 성에서 내쫓겠다. 대체 어떤 짓을 했길래 나무가 시들고 있느냐?”
“어머니와 만났습니다.”
담담한 대답이지만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분명히 보았다.
“무슨 소리! 네 어미는 죽었다. 네가 태어나고 나서 일주일도 안 돼서 죽었어.”
“맞죠. 돌아가셨지요. 그럼에도 영혼은 나무에 머물렀다는 걸 후작님도 아셨을 텐데요?”
“······”
“그래서 이곳을 정원으로 꾸미고 매일 찾아오셨던 게 아닙니까?”
후작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자 왠지 모를 쾌감이 느껴졌다.
“어머니와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럴 리 없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안 궁금하십니까?”
궁금하겠지.
미칠 듯이 궁금할 거다.
로이드 후작은 평생 헤논의 어머니를 그리워했으니까.
다만 자식 앞에서조차 위신과 체통을 지켜야 하는 후작이기에 티를 못 내는 거다.
그래서 굳이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내가 먼저 말해주었다.
“저와 어머니 간에 사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다만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한 말씀 전해달라는군요.”
“무엇이더냐?”
“그동안 고마웠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달라더군요.”
물론 헤논의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후작이 듣고 싶어할 만한 말을 대충 지어내 줬다.
그리고 내 발언은 로이드 후작의 마음속을 뒤흔들었다.
땡그랑!
후작이 지팡이를 놓치고 휘청거렸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세바스찬이 튀어나와 후작을 부축했다.
“주인님!”
“헤, 헤나가···”
어머니 이름이 헤나였구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후작에게 다가서서 말했다.
“아마 후작님도 느끼고 계시겠지만, 오늘을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떠나셨습니다. 그간 제 어머니를 보살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이고 정원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꽂히는 아버지의 시선에 뒤통수가 간지러웠지만 끝까지 태연하게 걸어갔다.
드루이드로 각성도 했고 능력도 크게 성장했다.
후작과의 관계가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라는 공통분모로 인해 심적으로는 가까워진 기분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비록 망나니로 시작했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마음 속으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