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6화 (6/200)

1장 빙의 : 증명한 망나니

“이반, 너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연무장의 모두는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런 반응도 못했다.

여태껏 헤논은 후작가의 망나니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건 평민에게나 망나니였지, 상위계층인 기사와 귀족에게는 매번 빌빌 기어왔다.

마치 강약약강의 표본이었달까.

최근에 달라졌다 해도 단체로 모여서 꼽주면 결국 꼬리를 내리고 알아서 찌그러지리라.

이런 생각을 하며 도발했다.

그런데 역으로 헤논이 장갑을 던져 결투를 신청하다니.

이런 전개는 상상조차 못한 듯, 이반이란 기사는 얼굴을 때린 장갑이 바닥에 떨어지고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벌컥 화를 냈다.

“이 망나니 사생아 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오냐! 그 결투 받아주마! 대신에 팔 한짝 없어져도 원망 말거라!”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반.

혼란스러워하던 기사들은 은근슬쩍 필립의 눈치를 보았다.

어차피 이 모든 상황이 필립의 주도 하에 벌어진 연극이니 의중을 넌지시 묻는 것이다.

필립 또한 의외의 상황에 눈을 치켜떴다.

그동안 알고 있던 헤논은 자신에게 반항할 깜냥조차 안 되는 놈이었다.

환청에 시달리는 미치광이가 무슨 후작령에 위협이 되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놔두고 어머니가 못마땅히 여겨도 가끔씩 감싸주면서 평판도 챙겨왔다.

‘죽다 살아나더니 조금은 철이 들었나. 그래 봐야 망나니인 건 여전하다. 조금 밟아주면 알아서 사그라지겠지.’

가볍게 여기며 왔는데 헤논은 무모할 정도로 막 나갔다.

팔짱을 끼며 어떻게 할까 고심하던 그가 이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차리리 잘 됐어. 이참에 현실의 높은 벽을 느끼게 해줘서 절망감을 심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반이 후작령 자유기사 중에 가장 어리고 미숙하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하지만 상대는 최근에 검술을 입문한 망나니였다. 그것도 스승 없이 독학으로 검술을 연마한.

그런 놈 하나 요리하는 건 이반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계산을 마친 필립이 입을 열었다.

“하는 수 없지. 내 동생이 모욕을 당했다는데 어쩌겠나. 명예는 중요한 법이니 결투를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하게.”

필립이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들이 헤논과 이반을 둥글게 둘러싸고 결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제일 재밌는 구경은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고.

비록 승부가 뻔한 경기였지만 천성이 싸움꾼인 기사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결투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 * *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한다.’

이반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

검을 굳게 부여잡았다.

그동안 시온과의 대련을 복기했다.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반이란 놈은 겉보기에도 비리비리했고 키도 작았다.

아직 어려서 근육도 제대로 안 만들어졌고 얼굴에는 앳된 기운이 가득했다.

자유기사가 된 지 1년이나 되었을까?

길게 잡아봐야 2년?

영지전 한 번 안 겪어본 애송이일 테니 수습이나 다름없는 놈이다.

그에 반해 나는 헤논의 축복받은 유전자 덕분에 키가 180대 후반.

몸무게도 각고의 노력으로 근육 위주로 90kg까지 만들었다.

이반이 시온에 비해 기술적으로 뛰어나 보이지도 않으니 자신이 있었다.

“쓸데없이 덩치만 크군.”

이반도 아무래도 내 덩치가 거슬렸는지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렇다고 억눌린 기색은 아니었다.

이 세계는 아무리 체급이 좋아도 기술과 마나량이 부족하다면 어린아이에게도 질 수 있는 곳이다.

“혹시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무슨 말이지?”

”뽀얀 얼굴을 보니 여기서 나와 검을 겨룰 게 아니라 집에 가서 젖이나 더 빨아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푸흡!”

망나니표 드립에 구경하던 기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당연히 이반은 대로하여 마구 달려들었다.

“이 미치광이 새끼가! 죽여주마!”

상대를 도발해서 평정심을 흐트러트린다는 일차 작전은 성공했다.

분노한 녀석의 공격은 단순하고 직선적이 되었다.

문제는 녀석의 마나 사용 여부였는데···

‘아쉽게도 마나 유저군. 하긴 애초에 마나조차 쓰지 못하는데 기사 하겠다고 나서는 게 웃긴 일이긴 하지.’

마나를 쓰는 순간 아예 일반인과는 움직임이 달라진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이반의 신형에 전신에 힘을 불어넣고 녀석의 일격을 막았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충격이 몸을 휩쓸었다.

어느새 나는 세 걸음이나 물러서 있었다.

정면 대결에서 밀린 것이다.

그것도 이반 녀석이 마나 사용이 미숙하고 근력도 약한 편이라 그렇다.

만약 제대로 된 녀석이었으면 벌써 칼을 놓치고 넘어졌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버틸 만은 했다.

그게 중요했다.

버틸 수만 있으면 기회를 엿볼 수 있으니까.

나머지는 그때까지 이반이 기술을 쓰지 않고 단조로운 공격만 하게 만들어야 했다.

“뭐지? 너 기사 맞냐? 어떻게 몇 달 배운 나랑 엇비슷한 거지?”

“사실대로 말해봐. 너 여기 있는 기사 중에 가장 약하지?”

“혹시 형님한테 돈이라도 대주고 기사 자리 꿰찼냐? 이 정도면 의심해볼 만한데?”

“으아아아아!!!!”

이성을 잃은 이반이 충혈된 눈으로 정신없이 몰아쳤다.

나는 철저하게 웅크린 채 공격은 꿈도 안 꾸고 녀석의 일격을 막고 피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쉰 합쯤 지났을까?

이반의 공격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느려졌다.

호흡도 거칠어졌다.

게다가 마나는 무한이 아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마나를 물 쓰듯 써버린 이반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감을 직감한 필립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반! 침착해라! 도발에 넘어가지 마. 녀석은 네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이반이 자세를 바로 고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마나가 고갈된 시점에서 이제는 유저가 아닌 비기너끼리의 싸움이었고.

이때부터는 체급 좋은 놈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스킬 끈질긴 생명력이 발동합니다.]

[회복력과 체력, 인내력과 강인함이 증가합니다.]

여기에 더해 드루이드 각성으로 얻은 패시브 스킬 때문인지 땀으로 젖은 겉모습과는 달리 속은 쌩쌩했다.

“이제 내 차례인가.”

발을 박차고 놈에게 쇄도했다.

여태까지 방어만 하던 내가 갑자기 달려들자 이반이 성급히 검을 휘둘렀다.

당황했는지 전혀 예리하지 못한 방어였다.

손쉽게 칼을 쳐내자 무방비한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그대로 어깨를 내밀어 녀석의 가슴에 차징을 가했다.

콰직!!

제대로 먹혔다.

이반이 붕 떠서 바닥에 풀썩 떨어졌다.

한 번 누운 그는 그대로 기절했다.

누구의 승리인지는 명확했다.

“마, 말도 안 돼!”

“이반이 졌다고?”

“운이 좋았네.”

“저게 운으로 가능한 일이야?”

뜻밖의 결과를 놓고 웅성대는 기사들.

필립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필립에게 가서 보란듯이 말해줬다.

“형님, 보시다시피 제 검술은 가문의 기사를 이길 수준입니다. 소꿉장난 따위가 아니지요. 그러니 소연무장을 쓰고 싶으면 후작님께 허락을 받고 오시든가 형님 혼자 오십시오.”

내 말을 들은 필립의 얼굴은 붉은색과 푸른색을 넘나들며 사람의 얼굴색이 어떤 색깔로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헤논, 방심한 애새끼 하나 이기고는 기고만장해졌구나.”

“그 애새끼가 후작가의 자유기사 아닙니까?”

“오늘부로 아닐 예정이다.”

세상에.

결투에서 졌다고 기사를 영지에서 내쫓으려 하다니.

아무래도 이복형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나 보다.

“아무튼 제 할 말은 다했습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약을 올릴 대로 올려놓고 시온과 함께 짐을 챙겨 침실로 향했다.

땀을 많이 흘렸으니 목욕이나 시원하게 하고 꿀잠 때려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던 찰나,

“앗! 도련님! 조심하십시오!”

뭔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분을 참지 못한 필립이 검을 뽑아 기습을 가하는 게 아닌가!

치사함과 찌질함의 끝판왕이다.

아무리 동생을 싫어해도 그렇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뒤통수를 치다니.

필립이 이 정도로 막 나갈지 몰랐던 나는 당황했다.

서둘러 검을 뽑아 응수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검은 내 심장을 향해 정확히 찔러지고 있었다.

“안 돼!!”

옆에 있던 시온이 황급하게 반응하려 했으나 그녀 또한 필립의 급발진을 예상하지 못한 듯 한발짝 늦어버렸다.

다가오는 칼날이 순간 느려지면서 인생의 필름이 촤르륵 펼쳐졌다.

이게 주마등이란 거구나.

최후를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는데 예상했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눈앞에는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세바스찬?”

그랬다.

집사 세바스찬이 어디 있었는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필립의 검을 잡고 있었다.

오로지 검지와 중지 손가락만으로.

필립은 온 힘을 다해 찔러넣은 일격을 두 손가락만으로 가볍게 해결한 세바스찬의 경지가 어느 수준인지 감도 안 잡혔다.

“아주 집안 꼴이 잘 돌아가고 있구나.”

그리고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소연무장에 울렸다.

한쪽 손에 지팡이를 든 채 절뚝거리는 후작령의 주인은 침중한 눈빛으로 나와 필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아버지!”

“후작님!”

고든 로이드 후작을 본 장내의 모두가 분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내성에서 소란이 벌어졌단 얘기를 듣고 찾아왔다. 그런데 지금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느냐? 형님이란 놈이 동생의 뒤를 잡아 진검을 찔러넣는 이 장면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그것이 정말로 죽일 생각은 아니었고 요새 하도 짓궂게 굴기에 약간 겁 좀 주고자···”

“입 다물어라!”

진땀을 흘리며 횡설수설하는 필립의 변명을 원천차단한 후작이 지팡이로 그의 어깨를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필립, 얘기는 대충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네가 로이드 후작인가?”

“아, 아닙니다.”

“난 아직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어. 네가 후계자에 가장 가까운 것뿐이지, 후계자는 아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후계자처럼 행동하면 되겠나?”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한차례 필립에게 쓴소리를 늘어놓은 후작이 이번에는 지팡이로 내 어깨를 눌렀다.

큭!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어깨로부터 찌릿한 고통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너, 헤논.”

“네, 후작님.”

“그동안 처신을 얼마나 개판으로 하고 다녔으면 네 형이 뒤에서 칼을 꽂게 만든 거냐?”

“죄송합니다.”

“네 평판은 스스로 잘 알겠지. 똑바로 행동해라. 이번엔 봐줬지만 다음은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어깨를 짓누르던 지팡이가 치워지자 한결 호흡이 편해졌다.

부복한 우리 사이를 걸어 다니던 로이드 후작이 공지사항 전하듯 말했다.

“내 자식들 포함해서 여기 있는 모두 똑바로 들어. 내가 꼭 핏줄에게 후작령을 물려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자격 미달이라 판단되면 외부인이라도 후계자로 삼을 거니까.”

“예! 후작님!”

대답을 들은 후작은 절뚝거리며 연무장을 떠나려 했다.

암묵적인 해산령이었다.

그럼에도 기사들과 나와 필립은 후작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계속해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랜만에 후작이 직접 모습을 보였다.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잘하면 가능할 듯도 했다.

“후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필립처럼 해보기로 했다.

급발진이라는 것을.

“무엇이더냐?

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춘 후작의 뒤통수에 대고 폭탄선언을 했다.

“정식으로 후작령의 후계자가 되고 싶습니다. 제게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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