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빙의 : 승리한 망나니
과거로 돌아가서.
소연무장 사건이 벌어지기 며칠 전.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온과 대련하고 있었다.
서로의 약점을 탐하며 치열하게 검격을 나누다가 승부가 나지 않자 잠시 떨어져서 휴식을 취했다.
가죽 주머니에 담긴 시원한 물을 한모금 마시고 시온에게 넘기자 그녀도 꿀떡꿀떡 잘 마셨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나에게 물었다.
“도련님,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뭐가?”
“저는 후작성의 하녀입니다. 여인의 몸으로 도련님과 검을 나누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군요.”
당연하게도 나는 세바스찬이 제국에서 알아주는 어쌔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시온이 아버지에게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러나 시온 입장에서는 내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니 의문을 가진 것이다.
“천한 하녀 따위의 사정을 왜 궁금해 해야 하지?”
무적의 논리 ‘내가 왜?’를 시전하자 시온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 내려갈 평판이 없다는 건 이럴 때 써먹기 편하다. 미친놈처럼 굴어도 사람들이 그냥 넘어가거든.
맨날 잘하던 놈이 한 번 실수하면 구박받지만 맨날 못하던 놈이 한 번 잘하면 칭찬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조금 달라지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 평판이 조금 올라가려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련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저는 확실히 체감하고 있습니다. 도련님은 몇 달 새 정말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나이스!
시온이가 드디어 알아봐줬구나.
이 세계의 주인공인 시온에게 꾸준히 호감작한 보람이 있었다.
죽이려고 칼을 휘두른 것도 호감작에 포함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시하군.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전 지금의 도련님이 좋습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안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간땡이가 부었어. 방금은 아주 건방졌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시온이 나에게 조금 마음을 연 것 같길래 이참에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시온.”
“예.”
“내가 후작가를 물려받을 수 있을 것 같나?”
내 질문에 깜짝 놀란 시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일부러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현실적으로···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질문을 바꿔보지. 지금 당장 필립 형님과 일대일로 겨루면 이길 수 있겠나?”
시온은 이 질문에는 조금 신중히 대답했다.
“도련님은 최근에 검을 잡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발전을 이루셨습니다.”
“나도 알아.”
“아마 후작성의 기사분들과 붙어도 연차수가 낮거나 경험이 일천한 분들에 한해서는 잘만 싸우면 이기실 수도 있겠지요.”
“내가 궁금한 건 필립 형님이야. 형님이랑 싸우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기사분들께 빵을 가져다 드리면서 필립 공자님의 수련 장면을 본 적 있습니다. 그걸 토대로 말씀드리면···애매합니다.”
안 된단 얘기구나.
“너무 낙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의 성장 속도라면 나중에는 충분히 이기실 테니까요.”
“지금은 아예 상대조차 안 될 정도야?”
“마나를 쓰지 않는다면 비슷하실 수도 있겠죠. 제가 본 필립님은 체급은 저보다 좋으시지만 기술적인 정교함은 다소 부족하셨으니까요.”
“하지만 마나를 쓰면 얄짤 없다?”
“그렇습니다. 도련님께서 이를 해결하지 못하신다면 승부는 일방적일 겁니다.”
시온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패배 확정.
허나 마나 문제를 극복한다면 이길 수도 있다.
새삼스레 주머니에 넣어놨던 도토리의 감촉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좋군. 쉬는 시간은 끝났다. 오늘 너는 상당히 무례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열심히 막아보도록.”
* * *
다시 현재.
“정식 후계자가 되고 싶습니다.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입 밖으로 내뱉은 발언에 연무장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여태껏 헤논이 저질러 온 만행은 처참한 수준이었으나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아랫사람에게만 횡포를 부렸고 윗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으니까.
그런 헤논이 처음으로 위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정해놓은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이건 오히려 평생 행했던 망나니짓보다 더 위험한 일이었다.
꼴깍
사방에서 마른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도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아무리 망나니라 할지라도 방금의 발언은 농담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기에.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이군.”
“제대로 들으신 거 맞습니다.”
후작님이 ‘나 안 들려~’를 시전하셔서 구해주려고 하셨지만 어림도 없지.
짚을 짊어지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미친놈.”
옆에서 필립이 작게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필립처럼 귀족의 소생도 아니다.
세력도 하나 없다.
그렇다고 재산이 많느냐?
아버지 성에 얹혀사는 백수.
한마디로 무일푼이다.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로이드 후작이 넌지시 물었다.
“술 마셨냐?”
“쌩쌩합니다.”
“저주에 걸린 건 아니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진심이란 얘기인데···”
“맞습니다. 진심입니다.”
“멍청한 놈.”
욕설을 시원하게 내뱉은 후작이 지팡이로 땅을 쿡쿡 찍다가 말했다.
“증명할 기회라. 솔직히 영지를 다스리느라 바쁜 나로서는 네 재롱을 일일이 봐줄 여유가 없구나. 그러니 너야말로 당장 증명하거라.”
“무엇을 말입니까?”
“네놈이 내 귀중한 시간을 투자해서 가능성을 봐도 될만한 재목인지 말이다.”
이 자리에서 당장 증명하라.
내 예상대로였다.
들고 있던 검을 뽑아 필립을 겨누었다.
“형님과 대련을 해서 이기면 저를 봐주시겠습니까?”
“뭐?”
모두가 경악했다.
필립은 어렸을 적부터 검을 잡고 수련을 해온 참귀족이다.
그의 실력은 후작성의 모두가 인정한다.
후작의 아들이라는 이름값에서 비롯된 거품이 아니라 진짜 실력이라는 것을.
필립은 너무 얼토당토않은 도전을 받자 오히려 실소가 나오는지 피식거리며 어깨를 으쓱댔다.
“동생아, 아까 운 좋게 이겼다고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구나. 난 이반 같은 애송이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빌면 없었던 일로 해주마.”
“왜요? 두렵습니까? 그래서 아까 비겁하게 뒤통수를 노렸던 겁니까? 정면으로는 상대할 자신이 없어서요?”
“뭐라? 이 미친놈이 드디어 실성했구나!”
화가 잔뜩 난 필립이 로이드 후작을 보고 말했다.
“아버님! 저도 간청드립니다. 제발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동생을 형으로서 교육할 기회를 주십시오.”
후작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판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이건 이미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일차 경합이었다.
물론 차이점은 있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필립은 지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다.
그러나 헤논은 무조건, 그리고 항상 이겨야만 하는 불리한 경합이다.
모두가 스스로 자초한 일.
로이드 후작도 결심했는지 입을 뗐다.
“좋다. 다만 무기는 목검으로 통일한다. 당연히 상대를 죽여선 안 되겠지?
“옙!”
드디어 대결이 성사되었다.
기사들은 구경꾼이 되어 나와 필립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둘러쌌다.
어느새 세바스찬이 의자를 가져왔고 로이드 후작이 거기에 앉아서 편하게 관전했다.
둘은 워낙 무표정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시온도 연무장 구석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발을 동동 구르고 주먹을 꼭 쥔 채로.
근데 쟤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알 수 없는 일이다.
목검을 들고 대치하는 나와 필립 사이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필립은 나보다는 신장이 작았지만 이반과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탄탄한 몸을 갖추고 있었다.
균형이 좋아 보이고 유연성도 괜찮아 보였다.
저 몸에 마나 사용까지 능숙하다면?
시온이 고평가한 이유가 있었다.
“이거 한 번에 끝내도 되려나? 아니다. 너는 좀 맞아야 해. 제대로 처맞아야 잠시 허황된 꿈을 꿨구나 싶겠지.”
미리 후들겨 패겠다고 예고하는 필립을 보며 히죽 웃었다.
“뭐가 웃기지?”
“아까부터 계속 싸웠더니 좀 출출해서 말이야. 간식을 좀 먹어야겠어.”
“가지가지 하는군.”
주머니에서 도토리 하나를 꺼냈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도토리.
나에게는 특별한 물건이다.
도토리를 까득! 깨물었다.
[도토리를 섭취하셨습니다]
[패시브 스킬이 강화됩니다]
[스태미나가 대폭 상승합니다]
[소모성 마나를 얻습니다]
[드루이드에게만 적용되는 효과입니다]
[제한시간 5분]
“후우우···”
깊은 날숨을 내뱉었더니 흰 연기가 흘러나왔다.
마나를 가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몸이 깃털처럼 가볍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늘 몸을 짓눌렀던 중력에서 잠시 동안 해방된 느낌이었다.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집중해서 보면 연무장 구석에 있는 나뭇잎 위를 기어 다니는 달팽이까지 보였다.
소곤대는 기사들의 목소리, 살결을 따끔거리게 하는 상대의 적의, 연무장 바닥에서 올라오는 미약한 흙과 나무 냄새.
[제한시간 4:50, 4:49, 4:48···]
시간이 없었다.
이반과의 경기는 상대의 마나가 고갈될 때까지 버티는 싸움이었다면.
필립과의 경기는 제한 시간 내에 상대를 끝장내야 하는 싸움이었다.
“움? 분위기가 달라졌군.”
필립도 내가 뭔가 변화가 생겼다는 걸 눈치채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태껏 보여준 게 있으니 이반 때처럼 방심을 노리는 건 힘들다.
그저 전력으로 부딪힐 뿐.
온 힘을 다해서 땅을 박찼다.
파아앙!!!
파공성과 함께 내 신형이 흐릿해졌다.
마나를 쓰지 않고선 보일 수 없는 움직임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로이드 후작은 어찌나 놀랐는지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럴 수가!”
“마나를 쓸 수 있었단 말인가?”
“힘을 숨기고 있었군.”
“이반이 당한 이유가 있었어.”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며 필립을 향해 쏘아졌다.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내 속력에 당황한 듯했지만 긴장하고 있었던 필립이 침착하게 내 일격을 막았다.
콰직!!!
“큭!”
신음을 흘린 필립이 뒤로 무려 세 걸음을 물러났다.
역시 똑같이 마나를 쓴다는 조건 하에 기본적인 근력은 내가 필립을 앞섰다.
손끝에서 올라오는 저릿함에 열받은 필립이 악다구니를 썼다.
“네놈! 대체 무슨 사술을 쓴 거냐?”
대답할 시간조차 아깝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한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벌써 시간은 3분 대로 접어들었다.
평생 이만큼 집중한 적이 있었을까.
눈에 핏발을 세우며 정신없이 몰아쳤다.
딱! 따악! 따아악!
연무장은 나와 필립의 숨소리와 목검 부딪치는 소리만 제외하면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모두가 필립이 헤논을 일방적으로 때리는 구도를 예상했다.
하물며 매일 같이 헤논과 같이 훈련했던 시온마저도 말이다.
“으아아아!!”
그러나 펼쳐진 광경은 완전히 달랐다.
미친 야수처럼 검을 휘두르는 헤논.
그가 뿜어내는 광기에 사람들은 절로 몸을 움츠렸다.
이에 맞서는 필립은 식은땀을 흘리며 막기에만 급급했다.
그것도 잠시.
공격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검술에 재능 있던 필립도 어느 순간 여유를 되찾았다.
그러자 아까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너···뭔가 이상하군.”
몇 번 더 공격을 막더니 의혹은 확신이 된다.
“네놈 뭔가 급해. 그렇지? 이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계속 유지할 순 없는 거겠지. 그렇다면 대처방법은 간단하군.”
결론을 내린 필립은 굳이 맞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아까 내가 이반을 상대할 때처럼 얄밉게 피하면서 도망 다녔다.
급소를 노리는 일격만 능수능란하게 받아쳐서 넘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제한시간은 무섭게 줄어들었다.
남은 제한시간은 1분.
60초가 지나고 마나 사용이 불가능해지면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농락이다.
여기서 패배한다면?
아마 죽겠지.
죽을 게 분명하다.
필립이 살려주더라도 계모인 로잘린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건 아버지인 로이드 후작도 막아줄 수 없다.
경합에서 진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조금 성급했나. 아니야, 후회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아직 1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무언가를 바꾸기 충분한 시간이다.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심정으로.
“하아앗!!”
힘찬 기합과 함께 힘을 불어넣었다.
계속해서 공격했다.
약점이 드러나길 기다렸다.
‘제발, 조금만 빈틈을 드러내 준다면!’
필립의 실수만 바라는 상황이었다.
서로에게 초집중하느라 좀처럼 균형이 깨지지 않았다.
변수 따위는 없는 듯했다.
[제한시간 10, 9, 8···]
카운트다운 10초.
이제 거의 끝이었다.
필립도 은연중에 직감한 모양이다.
“하하하, 별거 없군!”
승리의 미소를 짓는 필립.
남은 10초마저 발악하며 덤비는 나.
양측의 희비가 갈리는 순간,
허공에 문자가 떠오른다.
[스킬 대자연의 힘이 발동합니다.]
[주변 환경의 도움을 받습니다.]
패시브 스킬이 발동했다.
처음엔 뭔가 싶었다.
인제 와서 발동하면 어쩌란 말인가.
내 공격은 이미 끝물인걸.
[제한시간 5, 4···]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난 분명히 보았다.
평평한 연무장 바닥에 느닷없이 돌부리 하나가 툭 튀어나오는 모습을.
돌부리는 필립의 회피 경로를 차단하는 절묘한 위치였다.
내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없던 필립은 하인들이 매일 관리하는 연무장에 돌부리가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돌부리가 그의 뒷발을 정확히 쳤다.
덜컥!!
“어?”
당황한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으며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거면 충분했다.
사소한 변수가 끼어들었고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남은 시간에 모든 마나를 쥐어짜서 몸에 두르고 맹수처럼 뛰어들었다.
“제길!”
필립은 황급히 중심을 잡으려 했으나 이미 내 간격 안이었다.
“으아아아아!!!!”
힘찬 기합과 함께 목검을 크게 횡으로 그었고.
퍼어억!!
정확하게 그의 왼쪽 뺨에 적중했다.
눈이 회까닥 뒤집힌 필립이 쓰러졌다.
내 승리였다.
[제한시간 3, 2, 1···0]
[제한시간 종료]
[원상태로 복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