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음모 : 보여준 망나니
20년 전.
아르카니아 대륙에 마왕 바알이 현현했다.
누가 소환했는지, 어디서 소환되었는지는 모른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마왕은 대륙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방대한 군세를 이끌고 진격했다.
그렇게 세상은 종말을 고하는 듯했으나.
용사 카일과 그를 도와 대륙을 수호했던 7명의 수호자는 마왕에 맞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저항군은 대륙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마왕 바알은 북부산맥 어딘가에 봉인되었고 용사 카일은 행방불명 됐다.
남은 7명의 수호자는 세븐 스타라 불리며 전 대륙인에게 추앙받았다.
하지만 모두가 마왕 바알의 봉인을 반긴 건 아니었다.
최후의 전투 당시 마왕군에 소속되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의 파멸을 원하는 자들은 어디에나 있었으니.
이들은 악마추종자라 불리며 <황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황혼>의 흑마법사들은 대륙 곳곳에 퍼져있었다.
음지에서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짓들을 행했다.
그들에게 도덕관념이란 없었다.
최소한의 윤리마저도 사치였다.
마왕의 부활을 원하느냐?
수뇌부야 원하겠지.
평범한 쩌리들은 그저 자신의 삐뚤어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 황혼에 소속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눈앞에 라울이라는 사령술사는 누가 봐도 전형적인 황혼의 말단 흑마법사였다.
“넌 누구냐?”
“헤논 트리스. 고든 로이드 후작의 아들이다.”
“아, 들어본 적 있다. 망나니 사생아.”
이 정도면 연예인 해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것도 죄다 나쁜 쪽으로 유명하다.
“클클클, 아무리 사생아라고 해도 후작 아들이면 조금 부담스러운데. 너까지만 잡고 여기도 떠야겠다.”
라울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혹시라도 자기가 당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는 태도였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거라. 비록 반쪽이라고는 하나 처음으로 귀족을 구울로 만들어보는군. 나름 운치가 있겠어.”
“글쎄, 내가 색다른 경험을 좋아한다지만 굳이 구울이 되고 싶지는 않은걸.”
“클클클, 원치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내 공간에 들어온 이상, 넌 내 먹잇감일 뿐이니까.”
해리슨 촌장은 아직도 목 없는 아들의 시체를 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로 뺨을 세게 때렸다.
철썩!
“정신 차려. 여기서 멍하니 있으면 다 죽어. 네가 촌장이면 사람들 수습해서 여길 빠져나가라.”
“클클클, 누가 보내준다더냐?”
라울이 손짓을 하자 또 다른 구울 한 마리가 내 등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몸을 돌려 처리할 수도 있겠다만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시온이 움직인 것을 봤기 때문이다.
촤아아악!!
어느새 거리를 좁힌 시온의 단도가 구울의 목을 찢어버렸다.
아버지 세바스찬에게 배운 물도마뱀 발걸음.
시온의 밥줄 스킬을 눈앞에서 감상했다.
과연 우수한 이동기였다.
목이 없어져서 몸만 남은 구울의 시체가 털썩 쓰러졌다.
“시온, 늦었다. 설마 내가 구울에 당하기를 기다렸던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답이 미묘하게 느렸던 것 같은데.
“해리슨! 아직도 멍 때리고 있냐?”
“아, 아닙니다.”
“더 얘기 안 한다. 동굴 안에 사람들 다 데리고 나가. 걸리적거리면 너부터 베어버리겠다.”
“흐흑, 제이콥···”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기도 잠시, 해리슨은 사람들을 이끌고 동굴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수면제에 잠든 병사들도 같이 데리고 나갔다.
“가서 죽여라. 살점을 뜯고 피를 마셔라. 너희의 허기, 갈증, 굶주림을 적들의 공포로 치환하라.”
사령술사 라울이 본격적으로 구울에게 명령을 내렸다.
스무 마리에 달하는 구울들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시온, 나보다 적게 잡으면 벌을 내리겠다!”
나와 시온의 역할은 분명했다.
구울의 진격을 저지해서 사람들이 동굴에서 나갈 시간을 벌어야 한다.
아랫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본격적으로 마나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번쩍!
몸놀림이 달라졌다.
천마에게서 배운 검을 활용하여 거침없이 구울들 사이를 휘젓자 이를 지켜본 라울의 눈이 커졌다.
“유저? 망나니 사생아가 소드 유저였다고?”
구울이 된 시체들은 일반인을 상회하는 신체 능력을 가졌지만 마나 유저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구울의 신체 부위가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이 귀찮은 언데드들은 팔 하나 떨어지거나 심장이 파열된다고 죽지 않는다.
확실하게 머리를 쳐서 하나둘씩 침묵시켰다.
옆을 슬쩍 보니 시온도 곧잘 싸우고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무난하게 구울을 처리하고 라울까지 마무리할 것 같은···
-조심해라! 왼쪽으로 굴러!
천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바로 바닥을 굴렀다.
내가 있던 자리에 흑색의 마력탄이 스치더니 바닥에 작은 구멍을 냈다.
아마 천마검 아니었으면 복부에 구멍이 뚫렸을 테다.
“네놈은 등 뒤에도 눈이 달린 게냐? 아깝군.”
방금의 일격이 나름 회심의 기습이었는지 라울이 아쉬워하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보여줄 건 그게 다야? 더 없으면 다음에 떨어질 건 구울이 아니라 네 목이 될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구울도 얼추 정리됐다.
애초에 하급 언데드 몬스터가 나와 시온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아직 내 마나량도 꽤 많이 남았고 시온도 여력이 있어 보였다.
물론 라울이 쏘는 흑색마력탄이 조금 거슬리긴 했으나 녀석에게 저런 무기가 있다는 걸 인지한 이상 피하면 그만이다.
헌데 어째서 라울은 여유로운 걸까?
“네놈, 뭔가 수를 숨기고 있군.”
“숨길 것도 없다. 곧 너희에게 보낼 테니 말이다.”
따악!!
라울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구울들이 나왔던 어둠 속에서 이질적인 기세가 뿜어졌다.
우워어어어!!!
깊고 웅혼한 울음소리.
이어서 들리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
소리만 들어도 뭔가 심상찮은 게 오고 있었다.
라울의 두 눈이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클클클, 차라리 잘 됐다. 너희 같은 유저급 고수를 구울로 만들면 강한 구울이 생기겠지.”
쿵!쿵!쿵!
지축이 울렸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겉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의 키메라였다.
“어우야···”
“우욱!”
비위가 좋은 시온이 드물게 헛구역질을 했다.
몇 명의 사람이 들어갔을까?
족히 서른 명은 사용됐을 거다.
사람의 신체를 죄다 분해한 다음에 얼기설기 이어붙였다.
밑으로는 크기와 굵기가 다른 인간의 다리가 거미 다리처럼 몇 개씩 달려서 거대한 몸체를 지탱했다.
위로는 머리카락 대신 사람의 팔 여러 개가 쇠사슬처럼 길게 연결돼서 땅바닥에 질질 끌렸다.
굳이 표현하자면 레게머리 같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괴상한 팔의 개수만 열 개가 넘었다.
복부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사람 얼굴 세 개가 박혀 있었는데, 보는 사람이 더 아플 정도로 비탄과 고통에 잠긴 표정이었다.
“어떠냐? 내 필생의 역작, <자유의 발걸음>이다. 죽음에서 해방된 녀석들의 찬양가가 들리는가.”
“네놈이 똥 싸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클클클, 걱정하지 말거라. 너희도 곧 내 역작의 부속품이 될 수 있는 영광을 줄 테니 말이다.”
저 끔찍한 것의 일부가 되는 건 사양이다.
옆에 있던 시온이 드물게 감정을 표현했다.
“세상 천지에 도련님보다 더 나쁜 놈이 있었다니. 죽여버릴 거야.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 도련님보다 더 나쁜 놈.”
“쿨럭!”
시은의 광역딜에 의도치 않은 내상을 입었다.
어쨌든 나도 그녀와 의견이 일치했다.
저놈은 살 가치가 없는 놈이다.
“시온, 저 키메라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일단은 간을 본다.”
“알겠습니다.”
“흑마법사의 마력탄도 조심해.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서 저격하니까.”
시온에게 지시를 내리고 그대로 키메라에게 뛰어들었다.
‘어쨌든 인간의 피륙으로 이루어졌으니 마나를 사용하는 내 상대는 안 되겠지.’
계산을 마친 나는 키메라의 오른쪽 얼굴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어디가 약점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다리나 팔보다는 얼굴 쪽이 핵일 것 같아서였다.
-이런 얼뜨기 놈아! 녀석의 팔을 조심해라! 왼쪽이다!
천마의 경고에 공격을 멈추고 바로 왼쪽 옆구리를 방어했다.
사람의 팔로 이루어진 기다란 머리카락이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져서 나를 덮쳤다.
팔에 마나를 담아서 버티면···
쩌엉!!
“크으으윽!!!”
엄청난 힘에 떠밀려서 바닥을 무려 다섯 바퀴를 굴렀다.
그런 나를 보고 라온이 광소했다.
“클하하하! 내 키메라는 온갖 금지된 약물로 강화한 놈이다. 비록 네놈이 마나를 쓴다 해도 어찌 감당한단 말이냐?”
확실히 웬만한 몬스터 뺨치는 괴력이다.
“힘 싸움은 안된다. 시온! 시간을 끌어라.”
“알겠습니다.”
시온이나 나나 싸움 센스가 넘치는 인간들이라(시온은 주인공이고 나는 수많은 보스 레이드 경험으로) 곧바로 대응 방법을 떠올렸다.
“하아앗!”
시온이 기합과 함께 키메라의 간격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키메라의 촉수 같은 팔이 시온을 후려치거나 잡으려고 징그럽게 움직였다.
시온은 물도마뱀 발걸음을 극한으로 발휘하여 요리조리 잘 피해냈다.
쿠워어어어!!!
화가 난 키메라의 울음소리가 동굴을 진동시켰고.
뱀처럼 도사리면서 틈을 노리고 있던 나는 키메라의 모든 팔이 시온을 향하고 있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타앗!
허벅지에 마나를 가득 불어넣고 터트렸다.
근육에서 느껴지는 뻐근함과 함께 어느새 나는 키메라 녀석의 왼쪽 얼굴과 눈을 마주쳤다.
놈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만 보내주마. 편히 쉬어라.’
콰지지직!!!
왼쪽 얼굴에 칼을 깊게 박아넣었다.
그러자 키메라가 한쪽으로 휘청였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감히! 내 역작에 상처를 내!”
드디어 라온이 열이 받았는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으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다크 애로우!!”
흑색마력탄이 나를 덮치려고 했다.
공중에 떠 있는 상태라 피할 각이 안 나와서 천마검으로 막았다.
쩌어엉!!
-에구 허리야! 애송이놈 나중에 두고 보자!
역시나 천마검은 단단했다.
마력탄을 정통으로 막고도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이후로 같은 방법으로 키메라의 오른쪽 얼굴도 터트렸다.
유일하게 남은 건 가운데 얼굴뿐이었다.
“크아아아!!”
흑마법사가 발광하며 마력탄을 쏟아냈지만 애초에 집중하고 피하면 충분히 피할만한 수준이었다.
쿠륵! 쿠르륵!
키메라는 위기의식을 느낀 듯했다.
이제는 시온을 공격하기보다는 촉수 같은 팔을 모두 거둬들여 가운데 얼굴을 방어하는데 힘썼다.
체구도 거대한 놈이 수비로 일관하자 시온과 내가 마땅히 노릴만한 곳이 없었다.
“난감하군요.”
시온이 혀를 찼다.
“뭐가?”
“빈틈이 안 보입니다.”
“그래? 난 보이는데?”
어느 한곳을 막으면 필연적으로 다른 한곳은 빈틈이 난다.
이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약점은 괴물이 아니었다.
바로 괴물 뒤에 있는 흑마법사 라울이었다.
타앗!!
키메라를 지나치고 그대로 흑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이건 예상 못했겠지.
마력탄이 성가시긴 해도 피하면 그만.
그대로 목을 베어서 끝내주마.
전력을 다해 라울에게 쇄도했다.
가는 와중에 그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분명 당황해서 허둥지둥할 텐데···
‘웃어?’
놀랍게도 라울은 웃고 있었다.
곧 있으면 내가 지척에 도착해서 목을 날릴 게 분명한데도 여유만만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일단은 뒤로 빼려고 했다.
-바닥을 조심해라!
천마가 경고했다.
하지만 달려드는 힘에 관성이 붙은 나는 방향 전환이 불가능했다.
콰콰콱!!
흙바닥에 갑자기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는 아래에서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솟아오르더니 나를 꽁꽁 묶어버리는 게 아닌가!
전신을 쥐어짜는 고통이 찾아왔고 이어서 의식이 뒤흔들렸다.
답답했다.
누군가 내 허리춤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쯧쯧. 끝났군. 이번 애송이는 좀 오래가나 했더니···
회의적인 천마의 목소리.
정신을 차려보니 날 공격한 무언가를 파악했다.
놀랍게도 그건 나무뿌리였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 바닥을 뚫고 나온 두꺼운 나무뿌리가 나를 꽁꽁 묶고 있었다.
표면의 썩은 나무껍질 사이에서는 마기가 포함된 끈적한 진액과 시커먼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크핫하하하!! 설마 내가 키메라만 믿고 방어를 게을리할 거로 생각했나? 너처럼 생각하고 기습했다가 당한 놈이 한 수레가 넘는다!”
라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도련님!”
시온이 황급히 다가오려 했으나 한결 여유가 생긴 키메라가 날뛰었다.
그러자 그녀도 내 쪽으로 오기는커녕 피하기에 급급했다.
양팔에 마나를 가득 돌린 다음 천마검으로 뿌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나무뿌리의 조이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꿈쩍도 않았다.
이를 본 라울이 키득댔다.
“클클클, 네놈을 묶고 있는 그것은 내가 황혼교에서 도망칠 때 훔쳤던 마목의 씨앗이다. 귀중한 보물이지. 단순히 힘만으로 자를 수 있을 것 같더냐?”
어째서 황혼교에 마목의 씨앗이 있을까.
의문점은 일단 뒤로 미루고.
가장 먼저 머리에 들어오는 정보는 나를 속박한 녀석이 식물 계열의 나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드루이드.
자연환경과 소통하는 게 내 일이었다.
특히나 최근에는 헤논의 어머니였던 상수리나무와도 소통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미 다 잡아둔 물고기라고 여겼는지 신경을 끈 라울은 이제 키메라에게 명령해 시온을 잡는데 집중했다.
그 사이에 나는 눈을 감은 채 집중했다.
후작성에서 상수리나무와 교감했던 것처럼 저주받은 마목과 같이 호흡하고 공감하려 노력했다.
그러자,
-그만하고 싶구나···누가 날 말려줘···
들렸다.
마기에 침식된 광기 사이에 숨겨진 나무의 진정한 목소리가.
어떻게든 이 나무가 마기를 극복하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
간절히 염원하니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고! 현재 대상은 마기에 침식된 상태입니다.]
[스킬 자정작용이 발동합니다.]
[파마의 힘으로 마기를 극복합니다.]
[마기 극복 불가.]
[교감력이 부족합니다.]
드루이드로서의 내 소양이 부족하단다.
그렇다면 이 방법을 쓸 수밖에.
가슴팍에 넣어두었던 도토리를 하나 더 꺼냈다.
이번에 먹으면 벌써 두 개 째지만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가릴 처지가 아니다.
까득!!
[도토리를 섭취하셨습니다.]
[드루이드의 교감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원기와 활력이 회복됩니다.]
확실히 유저에 오르고 나서 도토리를 섭취하니 비기너였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승 폭이 컸다.
어찌나 몸에 힘이 넘치던지 나를 움켜쥐고 있던 나무줄기도 움찔거렸다.
-애송이놈, 뭘 먹었길래 갑자기 강해진 게냐?
내 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본 천마검이 경악했다.
지금 당장 파마의 힘이 담긴 천마검으로 나무줄기를 찢어버릴 수도 있겠으나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오염된 마목을 내 편으로 만든다.’
결심하고 나무에 손을 갖다 댔다.
마기에 내 손이 닿자마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스킬 자정작용이 발동합니다.]
[경고! 현재 대상은 마기에 침식된 상태입니다.]
[파마의 힘으로 마기를 극복합니다.]
[마기 극복 성공.]
[스킬 대자연의 힘이 발동합니다.]
[주변환경을 아군으로 삼습니다.]
[오염된 마목이 드루이드에게 응답합니다!]
파아앗!!!
내 손과 나무뿌리가 닿은 지점으로부터 녹생 정광이 뿜어져 나왔다.
동굴을 가득 메우는 불빛.
도망치던 시온과 이를 잡으려던 사령술사 라울, 키메라와 천마검 모두 이 광경을 제대로 목도했다.
“뭐, 뭐냐?”
“!!”
-······
순간 모두가 넋을 잃고 아름다운 반딧불이의 춤사위를 구경했다.
저주받은 마목에서 뿜어지던 시커먼 기운이 한결 줄어들었고 악취가 나던 진액은 투명한 수액으로 바뀌었다.
-아아···정신이 드는구나.
흑마법사의 통제에서 벗어났는지 이성을 되찾은 마목, 이제는 영목이 된 나무가 기쁨을 만끽했다.
그런 영목에게 말해줬다.
“잠깐입니다. 오래는 못 버팁니다.”
이는 마기를 완전히 정화한 게 아니라 잠시 억눌렀을 뿐이다.
내 능력은 아직 거기까지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무뿌리가 스스로 나를 풀어줬다.
이를 목격한 라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게 무슨!”
아직 끝이 아니다.
그다음 목표는 키메라였다.
땅에서 솟은 영목은 키메라를 꽁꽁 묶었다.
“끼에에에!!!”
키메라가 있는 힘껏 몸부림쳤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만큼 영목의 힘은 엄청났다.
완전히 속박된 키메라.
이건 잘 차려진 밥상이었다.
“하앗!”
검을 들고 뛰어올라 키메라의 마지막 남은 머리를 찍어버렸다.
그렇게 모든 머리가 사라진 키메라는 천천히 허물어졌다.
“편히 쉬십시오.”
사아아아
키메라가 죽자 안에 있던 수많은 영혼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성불하는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 명은 고마워하며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라울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미 그의 몸도 나무줄기에 속박된 상태였다.
나는 검을 들고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사령술사 라울.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되었나?”
라울은 내가 벌인 일이 워낙 반전이었는지 패닉에 잠긴 채 혼자 중얼거렸다.
“황혼교에서 비롯된 마목을 손만 대서 해방한다고? 이건 말이 안 돼.”
“원래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지. 그러면 잘 가라.”
녀석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녀석이 눈을 부릅뜬다.
“드루이드! 네놈이 바로 우리가 찾던 드루이드구나!”
라울의 말에 내 검이 멈췄다.
“우리가 찾던? 무슨 의미지?”
“클클클, 네놈이 그놈이었어.”
“똑바로 말해라.”
“드루이드 놈아. 네놈은 운도 없구나. 괴물 교주가 너를 찾고 있다. 황혼 전체가 널 찾고 있어.”
처음 듣는 정보였다.
악마추종자의 집단 황혼.
그중에서도 교주가 날 찾는다니.
“지금이라도 날 살려주면 황혼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마. 아니다! 내 손을 잡거라. 나는 황혼 출신이다. 어느 놈이 강하고 녀석이 어떤 식인지 다 알려줄 수 있···”
“응, 싫어.”
서걱.
검을 횡으로 그었다.
라울은 목을 따라서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목을 움켜잡고 꺽꺽댔다.
그러더니 결국 몸과 목이 분리되어 쓰러졌다.
악인다운 최후였다.
“끝났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흑마법사가 죽자 조종하던 마목도 완전히 해방되었는지 미미하게 풍기던 마기까지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
-고맙다···드루이드···자네에게 자연의 축복과 안식을···
“편히 가십시오.”
마기가 사라지자 진작부터 생명이 다했던 영목도 천천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한바탕 난리였던 전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본의 아니게 내 진짜 정체를 이곳에 있는 자들에게 공개해버렸다.
그래 봐야 시온과 천마뿐이지만.
“도련님, 대체···”
“아무것도 묻지 마라. 일단 나가자.”
“···알겠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가자 푸른 하늘과 화창한 햇살이 우리를 반겼다.
시커먼 어둠 속에만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오니 방금 있었던 사투가 마치 꿈만 같았다.
입구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케이브 장원 사람들과 해리슨 촌장은 우리가 살아서 나오자 황급히 다가왔다.
“아아, 헤논님! 무사하셨군요.”
“흑마법사는! 흑마법사는 어찌 되었습니까?”
말 없이 라울의 잘린 목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안도한 마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엎드렸다.
“어흐흐흑···다행입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대성통곡하는 사람들.
가장 앞에 있는 해리슨 촌장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나야말로 미안하군. 귀족으로서 너희를 지키지 못하고 흑마법사에게 가족이 희생되도록 놔두었으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원수를 처치해주시고 그 끔찍한 것으로부터 목숨을 구해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해야 좋을지···흐흐흑.”
한동안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는 한 명도 빠짐없이 마을 사람 전원을 위로하고 다독여줬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나갈 때.
종일 퍼질러 자던 쓸모없는 식충이들이 일어났다.
“으음···머리가 깨질 것 같아.”
“너무 과음했네. 근데 여기가 어디지?”
“뭐야? 분명 마을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헤롱대는 병사를 보니 괜히 심통이 나서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겼다.
따악!
“악! 왜 이러십니까?”
“정신 차려. 벌레 같은 놈들아.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밥값 해라.”
“아무리 헤논님이라도 이건 너무 심하십···으악!”
개소리를 시전하길래 뒤통수 한 대를 더 추가했다.
녀석들에게 사령술사 라울의 목을 보여주며 사정을 설명했다.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병사들도 마을 사람들의 증언과 라울의 목, 그리고 동굴에 들어가서 목격한 처참한 구울과 키메라 사체를 보고 대경했다.
“오오···신이시여.”
“말도 안 돼.”
“세상에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우웩! 우웨에엑!”
절반 이상이 구토했고 신을 부르짖으며 그 끔찍한 참상에 애도를 표했다.
이후 뒤처리는 온전히 병사들의 담당이었다.
수레에 가득 실린 구울과 키메라.
이로써 나는 엘든 왕국 최초로 세금을 걷어오랬더니 언데드를 들고 온 망나니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수면제를 먹였던 사실은 불문에 부쳤다.
병사들에게는 흑마법사가 습격해서 직접 동굴까지 끌고갔다 둘러댔다.
과음해서 기억이 없던 병사들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모든 정리를 끝내고 케이브 장원을 떠나는 날.
마을 사람 전부가 나와서 나를 배웅했다.
“공자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후작님의 아들로서 휘하 장원을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네. 굳이 그럴 필요 없네.”
“누가 뭐라 해도 저희 케이브 장원은 앞으로 헤논 공자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저희에게 진정한 귀족은 헤논님 뿐입니다.”
“고마운 말이군. 희생자들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주게. 복귀하면 아버지께 보고 드리고 도와줄 인력을 요청하겠네.”
“참으로 감사합니다.”
마차를 타고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배웅이었다.
출발하는 나를 보던 병사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멍청하고 생각 없는 망나니를 보는 눈빛에서 ‘망나니가 이런 면도 있었다고?’라는 놀라는 눈빛이 섞여들었다.
뭐, 병사들이 날 어떻게 여기는지는 그다지 상관없었다.
평판을 신경 썼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그보다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시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덜그럭거리는 마차 안에 앉아서 창밖으로 비치는 가라앉는 석양을 구경했다.
태양의 붉은빛이 광활한 평야를 삼키고 내 얼굴까지 비추었다.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시온이 내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
시온은 자기가 말을 꺼내놓고 입술을 달싹이며 한참 동안 뜸을 들인다.
“상대를 불러놓고 침묵하는 건 요새 유행하는 새로운 대화법인가?”
“아닙니다.”
“빨리 말해라. 이러다 해 떨어지겠다.”
창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반쯤 삐딱하게 앉아있는 나에게 시온이 눈을 질끈 감더니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련님이 조금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석양 때문일까?
태양 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붉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건방지군. 하녀. 주제를 알아라.”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