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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3화 (13/200)

2장 음모 : 포위된 망나니

로이드 후작성 인근.

탁 트인 대로변에서 눈 뜨고 보기 힘든 참상이 펼쳐져 있다.

“살려···살려주십시오.”

길바닥은 이미 피로 흥건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행인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유일한 생존자는 창백한 피부의 뱀상 사내에게 멱살이 잡힌 채 애처롭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행인에게 뱀상 사내는 혀를 날름 거리며 웃어 보였다.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그게···그게···”

“잘못한 거 없잖아. 그치? 그런데 왜 잘못했다고 해.”

“죄송합니다.”

“괜찮아.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오히려 잘했지.”

히죽거리는 뱀상의 사내의 눈빛에는 광기가 일렁였다.

“덕분에 취미생활을 즐기게 되었잖아?”

그러면서 작은 나이프를 행인의 볼에 갖다 댄다.

칼이 점점 다가오자 공포에 질린 행인의 말이 빨라진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바아아아악!!!”

스걱스걱스걱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뱀상의 사내는 착실히 행인의 얼굴 가죽을 벗겨 냈다.

천천히, 상대가 충분히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잠시 후.

사내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가죽이 들려있다.

기어이 행인의 피부가죽을 산채로 벗겨낸 것이다.

작품이 제법 괜찮게 나왔는지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옆에서 이 끔찍한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부하 하나가 투덜거렸다.

“아무리 봐도 단장은 변태가 확실합니다. 이러니 우리 누더기 용병단에게 일을 맡기려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

이들은 바로 엘든 왕국에서 질 나쁘기로 유명한 누더기 용병단이었다.

구성원은 50명.

민간인 살인은 당연하고 약탈, 방화, 성범죄 등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먹는 놈들이다.

그야말로 길거리 하이에나 같은 놈들.

이들을 통솔하는 용병단장 게빈이란 놈부터 인간 가죽 모으는 게 취미니 말 다했지.

그런데도 이들이 여태껏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소위 높으신 분들이 정해놓은 ‘선’을 잘 지켰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나름대로 준수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단원은 50명이나 되었으며 그중에 유저급 싸움꾼만 무려 다섯 명이다.

그뿐이랴.

용병단장 게빈의 경우 엑스퍼트의 벽을 코앞에 둔 유저 최상위 전사였으니.

드넓은 칼론 제국이라면 모를까, 변방 소국 엘든의 구석진 영지에서는 목에 힘줄만도 했다.

“괜찮아. 너희 일거리 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 당장 이곳도 의뢰를 받아서 온 거다.”

“후작성에요? 혹시 귀족 나으리 임무입니까? 그건 좀 찜찜한데.”

“그만큼 보수도 세지. 얼른 한탕 하고 이 바닥도 떠야 하지 않나?”

“하긴 그것도 그렇죠.”

“단장! 단장!”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빈에게 다른 부하가 와서 보고했다.

“무슨 일이냐.”

“전방에 여자 등장! 피부가 하얀 것이 제법 미녀야. 흐흐흐···”

음욕을 숨길 생각조차 안 하는 부하에게 게빈이 물었다.

“혹시 붉은 머리에 이마가 넓은 여자더냐?”

“엥? 그걸 어떻게 알았어?”

“멍청한 놈! 의뢰인이니까 빨리 모셔라.”

“아, 손님이었어?”

부하는 실망한 티를 팍팍 내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이 게빈 앞에 섰다.

그녀는 피부가 다 벗겨진 시체를 보더니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우웩! 우웨엑!”

“이런 이런, 오랜만에 사랑하는 동생을 봤는데 구토부터 하는 거야?”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쓰레기 같은 놈.”

“누나가 대놓고 날 싫어하다니. 이건 좀 마음이 아픈걸, 키킥.”

게빈은 피식거리며 손깍지를 뒤통수에 댔다. 여유로운 티가 팍팍 났다.

“그래서, 무려 로이드 후작 부인을 모시는 고귀하신 하녀장님께서 무슨 일로 쓰레기 동생을 다 찾아오셨대?”

“네놈이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누나가 해달라는데 당연히 해줘야지. 그런데 우리 용병단이 단가가 좀 세서 말이야.”

“착수금이다.”

하녀장이 품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더니 게빈에게 던졌다.

능숙하게 받은 게빈이 그 속을 열어보았다.

번쩍이는 금빛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이래서 누님을 싫어할 수가 없다니까?”

“착수금일 뿐이다. 성공보수는 착수금의 두 배를 쳐주지.”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세게 주지? 누나도 알겠지만 우리도 능력 밖의 일은 거절이야. 예를 들어 귀족을 살해하라든지···”

“귀족이 아니야. 사생아다.”

하녀장의 말을 게빈이 바로 알아들었다.

“망나니 헤논?”

“그렇다. 놈이 지금 후작의 임무를 받고 성 밖으로 나가 있다. 복귀하는 길을 습격해서 놈을 죽여라.”

“음, 아무리 사생아라 해도 후작의 소생이면 조금 부담스러운데?”

하녀장이 품에서 또 다른 가죽주머니를 꺼내자 게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손을 내저었다.

“돈 문제가 아니야. 누나도 알잖아.”

하녀장은 관자놀이를 긁으며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쉬고 입을 열었다.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너는 이 임무를 맡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누나 아니야? 망나니가 하도 성에서 행패를 부리니까 치워달라는 거잖아.”

“멍청한 녀석. 내가 아무리 망나니를 싫어해도 굳이 후작님 눈 밖에 날 위험까지 감수할 것 같아? 나보다 더 윗선의 명령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게빈은 큭큭댔다.

“이거 재밌군. 후작 부인께서 후작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시다니. 가만 보면 귀족들이 우리보다 더한다니까?”

“입 닫아라. 어디 가서 함부로 떠벌렸다간 너나 나나 죽은 목숨이다.”

“잘 알지. 그러면 우리가 해치워도 부인께서 잘 덮어준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겠지?”

“물론이다.”

“좋아, 이 일을 맡지. 조만간 후작성에 망나니 녀석의 비보가 들려올 거야.”

하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게빈이 붙잡았다.

“누나.”

“무슨 용무가 남았나?”

“뭐 빠트린 거 없어?”

잠시 우두커니 서서 되짚어보던 하녀장은 이내 얼굴을 찌푸리더니 품에서 아까 보여주었던 다른 가죽주머니를 꺼내서 던졌다.

게빈이 이를 능숙하게 받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중량감에 절로 미소가 피어난다.

“내가 이래서 누나를 사랑한다니까.”

“징그러운 새끼. 다시는 보지 말자.”

* * *

케이브 장원에서 그 난리가 있었음에도 나는 착실히 남은 장원을 방문하여 세금을 걷었다.

대신에 구울의 사체는 위에 포대기를 씌워서 그 정체가 뭔지 가렸다.

안 그래도 평판이 별로인 망나니인데 언데드를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추가하고 싶진 않다.

복귀하는 길.

사령술사의 습격 이후로 내내 뜬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던 시온이 체력이 다했는지 맞은편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던 내 귓가에 천마의 음성이 들렸다.

-이봐, 애송이.

오랜만의 천마의 부름이었다.

그간 천마는 사령술사와의 전투 이후 줄곧 침묵을 지켰다.

말을 걸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겼나 궁금했는데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건넨 것이다.

“다행이군요. 전 천마님이 드디어 성불하신 줄 알고 검을 갖다버리려 했는데 말이죠.”

-고얀놈.

“아무튼 정정하셔서 다행입니다.”

-네놈, 드루이드란 사실을 왜 숨겼느냐?

천마는 뜬금없이 내 정체에 대해서 물었다.

“물어보질 않으셨잖습니까? 만약 물어보셨으면 대답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천마님에겐 딱히 숨길 일도 아니고요.”

-드루이드···짜증나는군. 이건 또 무슨 인연인지.

혼자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천마가 갑자기 엄청난 발언을 했다.

-날 봉인한 놈도 드루이드였다.

순간 깜짝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마는 넋두리하듯 말을 이었다.

-중원대륙을 일통하고 이곳에 온 나는 온 천지를 헤집었다. 그러다가 고깔모자를 쓴 웬 늙은이를 만났지.

“그 사람이 드루이드였습니까?”

-그랬다. 처음에는 무기도 안 든 놈이 내 앞길을 막길래 가볍게 생각했지. 그랬던 놈이 드루이드일 줄은 몰랐다.

천년 전에 존재했던 드루이드라.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뭘 어떻게 되긴. 드루이드는 그야말로 고약했다. 무릇 무도의 끝은 자연과의 합일이라 한다. 그런데 놈은 그 자연을 가지고 노는 놈이다.

“강했습니까?”

-강한 게 문제가 아니다. 분명 신체적 능력만 따지면 놈과 나는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놈을 잡지 못했다. 마치 온 세상이 나를 배척하는 느낌이 들더군.”

천마검이 말하는 드루이드는 지금 나처럼 새내기 수준이 아니라 완성형 드루이드였던 모양이다.

정말 신기했다.

드루이드도 따로 계보가 있는 걸까?

사실 아르카니아 대륙 어딘가에는 또 다른 드루이드가 있는 건 아닐까?

게임 시작 전에 읽었던 시온라이크의 게임 스토리에는 드루이드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당연했다.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시온이었고 헤논은 첫번째 보스였을 뿐이니까.

염색체가 다른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돌연변이로 어렵게 나온 하프 엘프만이 드루이드가 된다고만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최근 말을 걸어도 계속 씹었던 천마 노인네에게 소심한 복수를 먼저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졌다는 말씀이시죠?”

-진 게 아니라 싸움의 종류가 달랐다. 너는 자연을 앞에 두고 승패를 나누나? 그건 승패를 규정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니까 졌다는 말이네.”

-지지 않았다. 나는 놈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었고 놈은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다만 녀석이 부리는 술수가 조금 기묘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졌다는 말이잖아요?”

-그걸 딱 잘라 말하기는 애매하다. 놈과 나는 상성이···

“그러니까 졌다는 말은 맞네요?”

-야 이 씨빰바야!

결국 천마가 폭발했다.

장난이 조금 심했나?

-그래! 맞다! 졌다! 속이 시원하냐! 기껏 좋은 정보가 있어서 네놈에게 알려주려고 했더니 이런 태도로는 알려주고 싶어도 필요가 없겠구나.

“네? 좋은 정보요? 그게 뭔데요?”

-됐다! 다 필요 없다. 앞으로 입 닫고 있을 테니 너 혼자 잘해보거라!

검을 붙잡고 몇 번 더 채근해봤는데 이 속 좁은 노인네는 꽁해가지고 또 면벽 수련에 들어갔다.

그렇게 아기 다루듯이 검을 어르고 달래가며 우쭈쭈 띄워 주고 있었을 때,

덜컹! 하면서 마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졸고 있던 시온이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일이냐?”

“헤논님, 잠시 나와보셔야겠습니다. 웬 무장 집단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산적이냐?”

“그게···나와보셔야겠습니다.”

한 번 쯤은 이런 일이 터지지 않을까 예상하긴 했다.

우리는 무려 장원 아홉 곳의 세금을 걷었고 이는 상당한 양의 재물이었다.

무장 병사 서른 명을 해치울 능력, 그리고 로이드 후작의 뒷감당을 피해 도주할 능력만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였다.

문을 열고 나가니 과연 서른 명의 병사를 둘러싼 쉰 명의 장한이 보였다.

생각보다 많은 수였다.

녀석들의 면면을 살펴본 나는 침음을 흘렸다.

탈주 농노가 배고픔에 못 이겨서 벌이는 생계형 산적질이면 쉰 명이 몰려오든 백 명이 몰려오든 상관없다.

문제는 우릴 둘러싼 놈들은 딱 봐도 전투에 익숙한 용병이었다.

바람을 타고 전해져오는 녀석들의 체취에는 끈적한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너희는 누구냐! 누구인데 우리 로이드 가문의 행차를 막는다는 말이냐? 이곳은 후작령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길을 비켜라.”

일단 형식상 으름장을 놓았다.

예상대로 녀석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삐딱한 자세로 건들거리며 비웃었다.

“아무리 망나니라고 해도 대충 눈치가 영 없으신 것 아닌가? 그냥 물러갈 거였으면 이렇게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겠지.”

“너희는 누구냐? 질문에 대답하라.”

“우리는 누더기 용병단이다.”

“히이이익!!”

옆에 있던 병사가 잡고 있던 창을 떨어트리며 경기를 일으켰다.

“왜 그러냐?”

“공자님, 누더기 용병단 모르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엘든 왕국에서도 잔악하기로 유명한 용병단입니다. 누더기 용병단장은 사람을 붙잡으면 산 채로 가죽을 벗긴답니다.”

“뭐야? 완전 미친놈이잖아.”

어쩐지 용병단 놈들 눈빛이 맛탱이가 가 있더라니.

적들 사이에서 창백한 피부의 뱀상의 사내가 나왔다.

저놈의 눈빛이 가장 사이한 것을 보니 누가 봐도 우두머리였다.

“흐흐흐, 내가 이렇게 유명한지는 몰랐군. 맞아. 내가 바로 가죽수집가 게빈이다.”

빠르게 체구부터 훑어봤다.

여리여리해 보이는 것이 힘이 강해 보이진 않았다.

-하찮은 네놈과 비교하면 만만치 않은 자다.

삐졌던 천마가 말을 걸어왔다.

자존심을 굽히고 경고해줄 정도면 고수가 맞긴 맞나 보다.

-그 외에 마나를 쓰는 자가 네 명이 더 있다.

단장 포함해서 유저급 다섯이라.

녀석들의 여유만만한 태도가 이해갔다.

“좋아, 변태 게빈. 네놈에게 한 가지 물어도 되겠나?”

“편하신 대로.”

“네놈이 우리 가문을 습격하고 남는 게 뭐가 있지? 금세 꼬리가 잡힐 텐데.”

그랬다.

그냥 산적이면 몰라도 이 정도 용병단은 바로 들통 난다.

조사관이 파견되면 우리가 장원에 들른 시점을 확인하겠지.

그러면 대략의 습격 시기가 나온다.

이후 습격 시기에 알리바이가 불분명한 무장 집단 위주로 동선을 파악하고 추적에 나선다.

누더기 용병단은 무려 쉰 명에 달하는 대규모 집단이니 필연적으로 이들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후작가 기사들이 이들을 붙잡고 대충 족치다 보면 50명 중에 1명이 자백을 안 할까.

게다가 피해 현장에서 피부가 벗겨진 시체라든지 녀석들을 특정할만한 증거 하나라도 나오면 바로 끝이다.

녀석들은 전문가가 아니니 흔적을 체계적으로 지울 수도, 지울 생각도 못할 테니 말이다.

뱀 같은 혀로 칼날을 할짝거리던 게빈이 내 물음에 답했다.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이거 한 건만 하고 잠시 엘든 왕국을 뜰 계획이니까.”

“왕국을 뜨기 전에 하는 짓이 겨우 시골 영지 수레를 터는 일이라고?”

“흐핫! 흐하핫! 감이 없는 놈이구나? 흐하하하!!”

게빈은 배를 잡고 끅끅대며 웃었다.

여러모로 미친놈은 맞았다.

한참을 웃던 녀석은 돌연 정색했다.

그리고는 칼로 나를 겨누었다.

“이깟 수레는 보너스일 뿐이지. 진짜 목표는 바로 너야. 헤논 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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