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음모 : 치사한 망나니
“목표는 바로 너야. 헤논 트리스.”
누더기 용병단의 목적은 영지의 세금 수레 따위를 터는 게 아니라 나를 암살하는 거였다.
“누구에게 의뢰를 받았지?”
“그건 알려줄 수 없지.”
“후작 부인인가? 아니면 필립?”
“나는 모른다.”
용병단장 게빈은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솔직히 누가 의뢰했는지 너무 티가 났다.
현시점에서 나를 죽일 사람이 로잘린과 필립 외에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쉽게 넘어가긴 글렀다.
곧 전투가 벌어질 터.
나는 천마에게 물었다.
“천마님, 저 중에서 유저급 전사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천마가 말했다.
-왼쪽에 푸른옷 입은 놈, 오른쪽에 얼굴에 흉터 있는 놈, 맨 앞에 덩치 큰 놈, 맨 끝에 후드로 얼굴 가린 놈, 마지막으로 저 대장이란 놈이 유저다.
“역시 천마님, 과연 천하제일인이십니다.”
-크흠흠! 뭘 또 그런 당연한 말을···
칭찬에 약한 천마가 쑥스러워할 때쯤, 나는 시온에게 명령했다.
“시온, 싸울 준비 되었느냐?”
“물론입니다.”
“좋아. 그러면 빠르게 말해주마. 저들 중에 유저급 무인이 다섯이 있다.”
“···네?”
시온은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야 당연하겠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경지를 짐작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떻게 아신 겁니까?”
“질문 금지. 대답만 해. 시간 없으니까.”
그녀에게 유저급 무인이 누군지 빠르게 알려주었다.
“확인했나?”
“그렇습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저들부터 묶어둬라. 네 능력이면 충분하겠지.”
시온은 나날이 성장 중이었다.
원래도 기술적으로 우수했었는데 나와의 대련, 최근 사령술사와의 전투로 한층 더 영글었다는 게 느껴졌다.
비록 저 용병들이 마나를 쓴다지만 기사처럼 제대로 배운 놈들이 아니니 이기지는 못해도 버티는 것 정도는 가능하리라.
“도련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나는 대장을 잡는다.”
시온과 얘기를 마친 나는 큰소리로 병사들에게 일렀다.
“모두 들어라! 저들은 우리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 죽고 싶지 않으면 칼과 방패를 들어라!”
병사들은 겁 먹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살기 위해서 내 말을 따랐다.
30대 50이면 수적으로 불리하지만 아예 절망적인 수준은 아니다.
마나 유저가 없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들은 오로지 나와 시온의 몫이었다.
“잘 들어라! 너희에게 승리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죽지 말고 버텨라! 그러면 내가 놈들의 대장을 죽이겠다.”
이런 심리가 있다.
상황이 불리한데 역전하라고 하면 사기가 더 꺾인다. 내가 뭔가를 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반면에 이길 때까지 버티라면 훨씬 부담이 덜해진다.
마치 시간이 내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애쓰는군.”
“그래 봐야 모두 죽을 텐데 말이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누더기 용병단원들이 우리를 보고 킬킬댔다.
단장 게빈이 명령을 내린다.
“가라! 가서 모조리 죽이고 가죽을 벗겨라!”
“와아아아!!!!”
쉰 명의 병사가 광기에 휩싸여 돌진하는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병사들의 동요가 느껴졌다.
이럴 때 방법은 두 가지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다독이거나,
“으아아아아!!!!”
“하앗!”
우리 쪽에서도 돌진해서 무언가를 보여주는 거다.
가장 뒤쪽에 있던 나와 시온이 아군 병사의 어깨를 밟고 뛰어올랐다.
역으로 나와 시온이 덤벼들자 용병들이 놀랐지만 달려오던 발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보여줘야 한다. 우리편의 사기를 올려줄 압도적인 무력을!’
아랫배에서 용솟음치는 마나를 몸에 두르고 첫 번째 오는 녀석을 어깨로 힘껏 들이받았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나에게 들이받힌 녀석이 공중에 3m는 떠올랐다가 풀썩 쓰러졌다.
흡사 교통사고 급의 충격이었다.
땅에 떨어진 녀석은 온몸이 뒤틀린 채 꿈틀대더니 이내 움직임이 멈췄다.
마나 유저가 아니라면 보일 수 없는 움직임이다.
칼밥 좀 먹은 용병들이라 바로 알아차렸다.
“뭐야? 마나유저였어?”
“망나니 사생아가 유저였다고?”
맨 뒤에서 팔짱을 끼고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게빈도 슬며시 자세를 고쳤다.
“호오라, 과연 사생아라도 한 수를 숨기고 있었다는 건가? 의뢰인에게 듣지 못한 부분인데. 단가를 다시 잡아야겠군.”
아직까지는 여유로운 듯하다.
옆을 보니 시온은 내가 미리 찍어줬던 마나 유저에게 가서 냅다 칼을 휘둘렀다.
“흐흐흐, 잘 빠졌구나. 네년은 특별히 살려둔 다음 두고두고...”
“닥쳐. 입 냄새나니까.”
뎅겅!
체구 작은 여자가 들이대자 얕보면서 히죽대던 마나 유저 한 명이 그대로 목이 잘렸다.
시온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빠르고 간결한 검격에서 평상시에 그녀가 얼마나 혹독한 수련을 하는지 짐작케 했다.
졸지에 다섯에서 넷이 된 마나유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이들이 시온을 주목했다.
이미 그녀는 다른 마나 유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여자가 고수다! 그냥 쩌리들로는 안 돼! 유저놈들이 모여서 처리해라!”
게빈이 황급히 명령을 내렸다.
나와 시온이 발휘한 용맹무쌍에 자극을 받은 탓일까?
후작성 병사들의 눈빛에 독심이 서렸다.
“그래, 이래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여. 한 번 해보자.”
“하녀도 저리 싸우는데 우리가 뒤에서 손가락만 빨 순 없지.”
“으아아! 간드아아아!!!”
한놈이 눈깔 뒤집혀서 스타트를 끊자 나머지도 이에 뒤따랐다.
서른 명의 병사가 도망치는 사람 한 명 없이 짐승처럼 덮치자 용병들도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이내 적과 아군이 뒤섞였다.
피 냄새와 땀 냄새, 쇠 냄새.
비명, 고함, 절규.
잘린 팔, 다리, 목.
삶과 죽음이 넘나들었다.
그리고 나는···
까아앙!!
처음부터 찜해두었던 목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신이 얇은 세검으로 어렵지 않게 공격을 막은 게빈이 누런 이를 보여주며 웃었다.
“흐흐흐, 시시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잠시 후에도 웃을 수 있을까?”
나는 성난 들짐승처럼 게빈을 몰아붙였다.
겉으로 보이는 체격만 따지면 그는 내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금세 승부가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천마님이 만만찮은 고수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군.’
녀석은 여태까지 만난 상대처럼 강한 힘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부드러울 유(柔).
능구렁이 같은 놈이 내 공격을 모조리 흘려서 유효타가 없었다.
신체 밸런스도 좋아서 관절 가동성이 놀랍도록 넓었다.
그간 온갖 변태 싸이코 짓을 다해도 여태껏 목숨을 부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만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큭큭!”
휙!
세검으로 막던 놈이 돌연 찌르기 반격을 시도했다.
그 모습은 마치 몸을 웅크리고 있던 뱀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움직여 먹잇감을 낚아채는 듯했다.
깜짝 놀라서 허리를 뒤로 젖혀 치명타를 피했다.
카운터 일격이 빗나가자 게빈이 아깝다는 듯이 혀를 날름댔다.
“아쉽군. 아니야. 안 아쉬워. 좀 더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나만 해라. 미친놈아.”
하여간 골치 아픈 놈이다.
수비 일변도로 막다가 빈틈만 보이면 역습하는 놈이라니.
게임할 때도 째플(째는 플레이, 도망치면서 공격자의 손발을 어지럽히는 플레이)하는 놈들이 제일 성가셨는데.
내가 신중해지자 녀석은 피식거리며 빈정댔다.
“한가하네? 네 부하들이 얼마나 버텨줄 것 같아?”
저게 문제다.
이대로 가면 게빈과의 일대일이 일대 다수로 변할 수 있다.
시온이 언제까지 버텨줄지도 미지수고.
결국 리스크를 감수하고 먼저 공격해야 한다.
‘도토리를 쓸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벌써 도토리를 2개나 썼다.
지금은 내 본신의 능력으로 결착을 내야 한다.
어떻게든.
“하아앗!!”
다시 달려들었다.
천마에게 배웠던 검술.
시온과의 대련에서 얻은 깨달음.
모든 것이 절절히 녹아있는 검격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시종일관 여유 있던 게빈도 이때만큼은 집중해서 내 공격을 막았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내 빈틈을 찾았다.
깡! 까앙! 까아앙!
철과 철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카운터만 노리는 게빈을 잡고자 일부러 허술한 빈틈을 보여줬다.
함정을 판 뒤에 녀석이 얼씨구나 걸려들면 바로 잡아버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눈치 빠른 뱀 녀석은 대놓고 보이는 빈틈은 절대 파고들지 않았다.
감이 좋은 놈이었다.
“그걸 지금 함정이라고 파는 거냐? 어린애도 거기엔 안 걸리겠다.”
부아를 치밀게 하는 아가리질은 덤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치열하게 노리고 있을 때, 갑자기 변수가 끼어들었다.
번쩍!!
게빈 녀석의 손목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며 내 눈을 부시게 했다.
깜짝 놀란 나는 순간 멈칫했다.
“걸렸구나!”
게빈은 이 순간만을 기다린 듯 벼락처럼 일검을 찔러왔다.
황급히 몸을 뒤틀었지만 옆구리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서둘러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떠오르는 메시지.
[적의 ‘마비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스킬 자정작용이 발동합니다.]
[상태 이상에 면역입니다.]
[스킬 끈질긴 생명력이 발동합니다.]
[생명력과 회복력이 증가합니다.]
[부상이 빠르게 치유됩니다.]
마비독이라고?
아주 가지가지 하는 놈이었다.
게빈은 승기를 잡았다고 여겼는지 낮췄던 자세를 바로 하고 발을 까딱거리며 웃었다.
“끝났군.”
“대체 뭐였지? 뭔가가 내 눈을 부시게 했는데.”
“이걸 말하는 건가?”
소매를 걷은 게빈의 손목에는 팔찌가 하나 있었는데, 유리 조각이 붙어있었다.
설마하니 유리로 이런 잡수를 쓸 줄이야.
용병놈의 치졸함은 내 예상을 한참 넘어섰다.
“별의별 잡기술을 다 쓰는군.”
“너희 귀족들은 항상 고상하게만 싸우는 줄 알지.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이기면 장땡이거든.”
“치사한 놈.”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때? 슬슬 약발이 돌 때가 됐는데?”
마비독을 말하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옆구리에 스친 상처도 피가 옷을 적셔서 심해보이지만 실상은 거의 아물었다.
녀석에게 내가 쌩쌩하다는 걸 보여줄 수도 있지만···
‘독에 당한 척하자.’
여태까지는 함정을 파도 녀석이 하도 신중해서 걸려들지를 않았다.
그러나 이건 당할 수밖에 없을 거다.
놈은 내가 드루이드란 사실을 모르니까.
“크윽! 무슨 수를 쓴 거냐.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움직이지 않는군.”
일부러 좀 휘청였더니 녀석이 광소를 터트리며 좋아 죽는다.
“크핫하하! 그건 내 검에 발라둔 마비독이다. 그 잘난 기사 놈들도 이 독에는 꼼짝 못했지.”
천천히 놈이 다가온다.
숨죽이고 대기한다.
계속 어지러운 척.
아직 간격이 남아있다.
“꽤 즐거운 싸움이었다. 덕분에 누나에게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겠어.”
“누나? 무슨 소리지.”
“말 안 해줬나? 내 친누나가 로이드 후작 부인을 측근에서 모시는 하녀장이거든.”
간격은 세 발자국.
조금만 더 들어와라.
“역시 후작 부인이 의뢰한 게 맞았군.”
“불쌍한 놈. 아들을 죽이려는 어머니라니. 가만 보면 귀족들이 더해.”
“동정심이 든다면 살려주겠나?”
“그럴 순 없지. 네 가죽을 벗겨서 보내줘야 나도 먹고살거든.”
간격까지 마지막 한 걸음.
거의 다 왔다.
“그럼 잘 가라. 망나니 사생아 놈아.”
간격 안에 들어왔다.
녀석이 방심하고 내 심장에 칼을 꽂아넣는다.
때는 지금!
“하아아앗!!”
힘찬 함성과 함께 최대한 몸을 뒤틀어서 녀석의 일격을 피했다.
게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어떻게!”
대답할 여유조차 없다.
놈은 한쪽 팔을 쭉 내뻗은 상태.
완전히 무너진 자세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드디어 잡았구나! 이 뱀장어 같은 놈아!”
검을 놈에게 휘둘렀다.
이대로라면 내 승리가 아닐까 했으나,
“으아아아!!”
놈이 놀라운 유연성으로 내 회심의 일격을 피해냈다!
그리고는 나와 거리를 벌리려 했다.
마지막 기회가 이렇게 날아가는가.
이대로 거리가 벌어지면 끝이다.
무조건 붙어야 한다.
제발!!
[스킬 대자연의 힘이 발동됩니다.]
[주변환경이 당신의 편이 됩니다.]
절묘한 타이밍에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땅에서 치솟은 나무뿌리가 게빈의 발목을 그대로 묶어버렸다.
뒤로 물러나려던 게빈이 못 박힌 듯 속박되었다.
“뭐야! 이거 뭐냐고! 커어억!”
빠각!!
나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검손잡이 끝에 붙어있는 폼멜로 녀석의 뒷목을 쳤다.
정확하게 들어간 일격.
정신을 잃기 전 게빈이 중얼거렸다.
“이건 말도 안 돼···”
“말이 된다.”
“치사한 놈···이건 반칙이지 않느냐···”
드디어 놈에게서 치사하다는 말이 나왔다.
기분이 좋아져서 히죽 웃어줬다.
“칭찬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