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북부 : 길찾은 망나니
원래 내 이름은 헤논 트리스였다.
엘든 왕국에서 사생아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못한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서출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보통 사생아에게는 태어난 영지의 특징을 뜻하는 성을 붙이는 게 대부분이다.
스노우(snow)라든지 리버(river)라든지 레이크(lake)라든지.
후작령의 경우는 가문의 문양이 상수리나무였으므로 내 성은 트리스(trees)로 정해졌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물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패밀리 네임(Family name)에는 정통성이 담겨있기 때문.
그런 내가 헤논 로이드가 되었다.
달리 말하면 이제부터 나는 정식 후계자가 될 형식적인 조건을 갖추었단 의미였다.
“당신! 지금 제정신이에요?”
예상대로 극대노한 로잘린이 포크를 탁 내려놓고 소리를 빽 질렀다.
화를 참지 못한 그녀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반면에 로이드 후작은 침착했다.
“부인? 무슨 문제라도 있소?”
“그럼 문제가 없나요? 어느 가문도 적장자가 뻔히 있는데 사생아에게 성을 물려주진 않아요.”
“그러면 우리 로이드 가문이 처음이 되겠군.”
“굳이 특이사례를 남길 필요가 있을까요? 다른 가문에서 곱게 보지 않을 거예요.”
“마왕을 막은 가문도 왕국에서 우리 가문이 처음이지.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누가 불만을 가지겠소?”
로잘린은 후작이 완강한 태도를 보이자 이번에는 화살을 나에게 돌렸다.
“헤논, 설마 후작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겠지? 어서 거절하거라.”
윽박지르는데 나도 모르게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
“어···제가 왜요?”
“뭐?”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오늘부터 난 헤논 로이드가 되었다.
그리고는 둘러댔다.
“얼마 전 누더기 용병단이 절 습격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과연 헤논 트리스가 아니라 헤논 로이드였어도 절 공격했을까 싶더군요. 제 목숨을 위해서라도 후작님의 과분한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유도 적당하다.
로잘린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본인이 저지른 짓이니 할 말 없겠지.
그저 분을 삭히기만 한다.
“식사 맛있게 했습니다. 이만 일어나보지요.”
일어나서 식사장을 빠져나왔다.
다시 수련할 시간이었다.
* * *
로이드 후작이 대영주라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신의 무력이 강력해서?
마왕에게서 대륙을 지킨 세븐 스타 중 하나라서?
지배하고 있는 땅의 면적이 넓어서?
전부 맞는 말이지만, 대영주로 불리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바로 산하 세력 때문이다.
단순히 후작가뿐만 아니라 후작을 지지하고 충성을 바치는 영주들이 거대한 연맹체를 형성해야 로이드 후작이 대영주 소리를 듣는 것이다.
몰티 가문은 그런 로이드 가문의 산하세력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크고 으뜸가는 가문에 속했다.
특히 가주 몰티 자작은 자신의 딸 로잘린 몰티를 시집 보내서 후작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
장미꽃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가문의 문양도 장미꽃인 몰티 가문.
로잘린 로이드는 오늘 오랜만에 처가에 발을 디뎠다.
“아빠!”
“오오! 이게 누구냐! 우리 딸 아니냐.”
“아빠아아아!! 으흐흐흑!!”
후작성에서는 체통을 지켜야 하는 어머니지만 여기서는 영락없는 떼쟁이 딸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몰티 자작은 품에 안겨 엉엉 우는 로잘린을 보고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들어가자꾸나.”
진한 장미향이 그윽이 맴도는 정원 한가운데에서 몰티 자작과 로잘린은 마주 보며 차를 마셨다.
“사생아 새끼가 대체 무슨 바람이 든 건지···”
로잘린은 격렬하게 울분을 성토했다.
대화의 절반 이상이 헤논에 대한 욕이었다.
“고든도 문제예요! 대체 왜 그 사생아를 밀어주는 거죠? 그래도 자기 새끼라는 건가요?”
남편에 대한 불만까지.
몰티 자작은 묵묵히 딸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로잘린이 한바탕 감정을 다 쏟아내자, 처음으로 자작이 입을 뗐다.
“힘들었겠구나.”
“힘든 건 상관없어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나 사생아 놈이 필립의 자리를 차지할까봐 그게 걱정이죠.”
“내가 이렇게 건재하고 든든하게 버티는데 무엇을 그리 걱정하느냐?
“아빠가 뭘 몰라서 그래요. 예전의 구제불능 망나니가 아니에요. 후작성에서도 하나둘씩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요.”
이어서 로잘린은 자신이 용병단을 고용해서 헤논을 죽이려다 실패했다는 말까지 이실직고했다.
몰티 자작은 모든 사정을 전해 듣고 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음···헤논 로이드라···재밌구나.”
“아빠,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할 때가 아니에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데요.”
“오히려 난 잘됐다고 본다.”
“도대체 무슨 소리세요?”
눈을 휘둥그레 뜨는 그녀에게 자작이 말했다.
“로잘린, 엘든 왕국의 귀족가문이라면 누구나 병역의무를 져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엘든 왕국은 서쪽으로는 칼론 제국과 맞닿아있고 남부로는 바다를 접하고 있는 지형이다.
특히 북부에는 거대한 산맥이 있는데, 이곳은 20년 전에 아르니아 대륙을 위기에 빠트렸던 마왕 바알의 봉인지였다.
그래서인지 북부는 일년 내내 혹독한 추위와 각종 몬스터가 창궐하는 사지가 되었다.
엘든 왕국은 북부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전초기지인 블랙캐슬을 지었다.
그리고 모든 귀족 가문이 세대가 바뀔 때마다 블랙캐슬에서 적어도 2년간 군복무를 하도록 정해놓았다.
“알죠. 하지만 그건 돈을 내서 대체하면 되잖아요. 필립도 금전으로 군역을 대체하기로 이미 얘기 끝났어요.”
하지만 북부는 거친 땅이다.
생존률 20% 미만의 희박한 땅.
귀족마저 그곳에 가면 두 명 중의 한 명은 못 돌아온다는 그런 험지였다.
그러다 보니 귀족들은 군복무를 기피했고 이를 돈으로 대체해왔다.
국왕으로서도 괜히 귀족 자제 북부에 보내놔서 골머리 썩히는 것보다야 국고를 채울 좋은 기회 쯤으로 여기고 관례처럼 돈을 받아왔다.
헌데 어째서 몰티 자작은 이 얘기를 꺼내는 걸까.
“그래. 맞다. 본래 금전으로 대체하기로 했었지. 그런데 말이다···헤논이 정식으로 로이드 가문에 편입되었다면 굳이 필립이 군복무를 질 필요가 있느냔 말이다.”
“!!!”
로잘린의 머릿속이 번쩍였다.
그랬다.
모든 귀족 자제가 군역의 무게를 견딜 필요는 없다.
보통은 가문당 한 명만 간다.
그동안 로이드 가문에는 필립 한 명뿐이었기에 당연히 필립이 가는 걸로 되어있었다.
만약 여기서 헤논이 새로운 로이드가 된다면?
“필립 대신 헤논이 군복무를 지게 해라. 고든도 그것까진 어떻게 하지 못할 게다.”
“하지만 돈으로 대체할지도 몰라요.”
“하하, 그게 말이 되느냐? 고든은 제 영지를 끔찍이 아끼는 녀석이다. 우리와 사돈 관계를 맺은 이유도, 사생아를 밀어주는 이유도 모두 자기 영지를 위해서야.”
“확실히 그렇긴 해요.”
“필립의 병역의무를 돈으로 대체하려는 이유는 무엇이더냐? 그동안 필립이 유력한 후계자였고 잘못될 경우 가문을 이을 자가 없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헤논은 다르다. 망나니가 북부에서 죽어봐야 그저 고귀한 희생으로 잘 포장되겠지. 게다가 군역 대신 내야할 막대한 세금까지 굳으니 일석이조 아니겠느냐?”
로잘린이 기쁨을 주체 못하며 몰티 자작을 꽉 껴안았다.
“역시 아빠는 천재에요!”
“허허허, 내가 천재가 아니라 고든이 천재가 아닐까 싶구나. 이 그림까지 보고 헤논을 로이드로 삼은 게 아닐지.”
“돌아가자마자 고든에게 말해서 헤논을 북부로 보내야겠어요. 그러면 저는 가볼게요!”
로잘린은 몰티 자작의 뺨에 가볍게 뽀뽀하고 서둘러 마차로 뛰었다.
몰티 자작은 웃는 얼굴로 딸자식이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줬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후.
아까의 미소는 가식이었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헤논이라···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그저 사생아로 태어나서 분수에 맞지 않은 자리를 탐한 행동이 네 죄이니라.”
* * *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무려 오전 훈련을 생략했다.
대신에 찻잔을 기울이며 오랜만에 아침 속 고요를 즐겼다.
얼마 전 초심 드루이드로 승급하면서 얻은 우드 컨트롤 스킬을 몇 번 연습해봤는데 제법 쏠쏠했다.
상대의 진로를 막을 수도 있었고 나보다 강한 자의 공격을 미리 차단할 수도 있었다.
정말이지 쓰기 나름이었고 가능성도 무궁무진했다.
‘그건 그렇고. 천마님과의 내기를 정산해야지.’
현재 탁자 위에는 천마검이 올려져 있었다.
천마는 나와 내기를 했었고 만약 질 경우 화를 풀고 저번에 언급했던 좋은 정보를 알려주기로 했다.
“그래서, 제가 내기를 이겼는데 화는 끝까지 안 푸실 겁니까?”
-······
“천하제일인이 이렇게 약조를 안 지키는 사람인 줄 몰랐군요.”
한참 있다가 천마가 대답했다.
-화가 난 게 아니다. 그저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그랬지.
“옛날 생각이라뇨?”
-네 녀석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예전에 날 봉인시켰던 놈이 떠오르거든.
그러고 보니 천마를 봉인했던 사람도 드루이드라 했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혹시 일전에 알려주신다던 좋은 정보도 드루이드와 관련된 이야기입니까?”
-그렇다.
“궁금합니다. 알려주십쇼.”
-늙은이의 넋두리일 뿐이다. 그래도 듣겠나?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를 봉인한 자는 드루이드였다. 멀린이란 놈이었지.
천년 전 드루이드 멀린.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완성된 드루이드는 어떤 식으로 싸우던가요?”
-자연재해와 싸우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본좌를 상대하긴 부족했다. 어쨌든 난 경지에 오른 몸이었으니 말이다.
이어지는 천마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멀린이 발휘하는 힘의 근원은 고향에서도 본 적 없는 거대한 나무였다. 놈은 그걸 세계수라 부르더군. 그 세계수를 이용해서 온갖 기묘한 천지조화를 부렸다.
“그렇군요. 그러면 천마님은 세계수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하긴. 당연히 베어 넘겼지.
세계수를 처단한 천마는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단다.
-교활한 드루이드 놈은 자신의 영혼과 연결된 세계수를 봉인의 매개체로 삼았다. 나무를 베어넘긴 자의 육신과 영혼을 자신이 들고 있던 검에 가두어버렸지.
“현재 천마님은 다른 공간에 계시다는 거군요.”
-그건 문제가 안 된다. 공간 따위야 검으로 헤집고 나가면 되니까. 문제는 멀린이 세계수를 7조각으로 나누었다는 점이다.
어려운 얘기라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공간을 찢으셔도 빠져나오지 못하십니까?”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7조각으로 나뉜 그 나뭇가지들이 동시에 연동하여 공간을 뒤죽박죽 만들어버렸다. 한마디로 출구를 가린 셈이지. 세계수의 나뭇가지, 즉 황금가지 7개를 전부 모으지 않고서는 나는 제대로 된 출구를 찾을 수 없다.
세계수의 나뭇가지.
황금가지 일곱 개.
이것이 천마의 봉인을 풀 열쇠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저에게 좋은 정보인지는 모르겠군요. 그냥 천마님이 봉인을 풀고 싶으니까 저한테 심부름을 시키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내 말을 들은 천마가 왈칵 성을 냈다.
-멍청한 놈! 여태껏 뭘 들은 게냐! 날 상대했던 놈이 누구라고 했어?
“멀린이라는 드루이드···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구나. 천년 전에 대성했던 드루이드의 분신이었던 세계수다. 그 가지를 얻으면 똑같은 드루이드인 너도 뭔가 성취가 있지 않겠느냐?
얼마 전 초심 드루이드가 되고 나서부터 승급하라는 시스템창이 떴었다.
나는 승급이 열심히 경험치를 쌓아서 교감력을 늘리라는 말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옛 세계수의 가지, 즉 황금가지를 모으는 일이 승급으로 향하는 길일지도.
-이제 보이느냐? 딱 말해주마. 내 봉인을 푸는 길이 네가 드루이드로서 성장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