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27화 (27/200)

4장 발견 : 걱정한 망나니

소드마스터 카리나와의 내기에서 승리했다.

엄밀히 따지면 이겼다고 말하기도 창피한 수준이었다.

그녀는 살갗에 생채기 하나 안 났고 고작 견장이 조금 틑어졌을 뿐이다.

그래도 검끝이 그녀를 스쳤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카리나 또한 고수이니 내가 얼마나 극악의 확률을 뚫고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설마 했어. 내 공격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못 막는 척을 하다니. 게다가 순간적인 기습. 여기에 괴상한 속박 스킬을 더하고. 미리 준비한 함정으로 지반을 무너트리고. 마지막으로 공중에서 디딤발을 만들어서 끝낸다라···”

카리나는 심유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감탄이 들어가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말 취소할게.”

“무슨 말을 말입니까?”

“아저씨 닮았다는 말.”

“어째서입니까?”

“특정면에선 아저씨보다 더 집요하고 치밀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조금 더 성장하면 어떻게 될지 기대되네.”

그야말로 극찬 중의 극찬이다.

뭐라 반응하기 머쓱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후작님은 제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비교되는 것 자체가 영광이지요.”

“재수 없어. 앞으로 내 앞에서 그런 가식인 태도는 치우도록.”

“제가 잘나서 이겼습니다.”

“훨씬 낫네.”

내기가 종결되었다.

이제는 결과를 정산할 차례.

그녀는 패배할 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을 세븐 스타로 만들어 준 필살기를 내게 가르치기로 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어쩔 수 없지. 필살기라고 말하기엔 거창하지만 괜찮은 기술 하나 알려줄게. 이해하면 별것 아니야. 너와의 대련에서도 보여준 기술이지.”

카리나가 알려준 건 바로 함정에 빠졌을 때 허공을 박찬 기술이었다.

“나는 이 스킬을 에어점핑, 다른 말로 ‘순보’라고 불러. 소질 없는 사람은 평생을 배워도 못 익히는 기술이지.”

눈앞에서 그녀가 시범을 보였다.

공중에 뜬 채로 움직이니 가동범위가 말도 안 될 수준으로 늘어나는 건 물론이거니와 상대의 허를 찌르는 효과까지 있었다.

멋지게 시범을 보인 그녀가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사실 내기에서 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 아직 초보인 너한테 다소 어려운 기술이란 걸 알고 있어. 그래도 원리를 알려줄 테니 차근차근···”

“바람을 이용한 기술이군요. 단순히 허공을 디디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공기를 압축해서 극한의 질량을 만들어낸 후 이를 발판 삼아 도약한다. 참으로 기발합니다.”

카리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전투 시에는 급박해서 경황이 없었다.

차분하게 살펴보니 도약지점, 즉 발밑에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생겼고 카리나가 이를 발판처럼 사용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

그러나 드루이드인 내 눈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관찰되었다.

“북부의 바람이 사령관님을 좋아하나 봅니다.”

바람은 아무에게나 힘을 빌려주지 않으니 그녀 말대로 재능 없는 사람을 쓸 수 없는 기술이다.

하지만 나는 어떨까.

오히려 누구보다도 이 기술을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기술을 개발한 장본인인 카리나보다도 말이다.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내 눈을 본 붉은머리 사령관은 허탈한 표정으로 툴툴댔다.

“이거야 원. 기술을 전수한 게 아니라 도둑맞은 기분이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원리만 파악했을 뿐, 실제로 사용하려면 피나는 연습이 필요할 겁니다.”

‘완성만 된다면 카리나님처럼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도약도 가능하겠지요.’ -라고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뭐 내기는 내기니까. 그동안 고생 많았어.”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내기라는 명제가 걸렸다 해도 블랙캐슬의 사령관씩이나 되는 양반이다.

주기적으로 대련해주고 비전기술까지 전수한 행동 자체가 로이드 후작을 의식해서임이 분명했다.

고개 숙인 내게서 진심을 느낀 듯 카리나가 옅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복무일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길 바란다. 제대할 때 웃으면서 가야지. 최근 블랙캐슬 분위기도 흉흉하니 항상 조심하고.”

이세계에 온 뒤로 시온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속마음이 따뜻해지고 괜스레 가슴 쪽이 간질간질했다.

동시에 분위기가 흉흉하다는 말을 듣고 다른 생각도 떠올랐다.

시온과 함께 순찰을 나갔을 때 목격한 동족 포식 아울베어를 냉큼 보고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령관의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처음 듣는데? 빅터가 보고를 빠뜨렸나?”

“사령관님과의 내기에 신경 쓰느라 빅터에게는 미처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사실은 빅터가 못 미덥고 꺼림칙해서 보고하지 않았지만 일단 이렇게 둘러댔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지. 그래도 다음부터는 단장에게 꼭 보고하도록.”

“예.”

말투에서 카리나가 빅터를 상당히 신뢰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의혹만으로 벌집을 들쑤실 순 없으니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전에 또 순찰이 있어서요.”

“그래. 수고하렴.”

* * *

이후로도 카리나는 몇 번 새벽에 나와서 순보 시범을 보여줬고 나는 동영상을 찍듯이 고스란히 모든 장면을 머릿속에 담았다.

비록 소규모지만 바람을 조종했으니 그녀 또한 크게 보면 드루이드인 셈이다.

이는 결국 어느 분야나 최후로 가면 자연과 합일한다는 천마의 말과도 어느 정도는 일맥상통했다.

‘맞아. 그동안 주로 쓰던 액티브 스킬 우드 컨트롤은 나무줄기 혹은 나무뿌리를 이용한 속박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나무만 자연은 아니지. 지면에 굴러다니는 돌과 그 위를 흐르는 바람 또한 내가 조종할 수 있는 자연이다.’

우선 바람을 느끼려고 노력해보았다.

느끼는 것 자체는 쉬웠다.

북부는 언제나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곳이었으니까.

문제는 이 바람을 묶어두고 조종하는 게 영 아리송했다.

‘황금가지를 찾는 일도 그렇고 모든 일이 하루 이틀만에 뚝딱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보자.’

결심하고 명상에 잠겨 있던 찰나.

뒤에서 미묘하게 공기가 일그러졌다.

“시온이냐?”

바람을 가지고 훈련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대의 기척을 더 잘 감지하게 되었다.

시온은 날이 갈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있다.

내가 드루이드니까 잡아냈지, 이제는 캠벨도 시온이 마음만 먹으면 완벽히 뒤를 잡힐지도 모르겠다.

“네, 도련님.”

“무슨 일이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게 빠를 듯합니다.”

새벽 늦은 시각.

시온이 안내한 곳은 블랙허니였다.

야밤에 단둘이 술이라도 마시자는 걸까.

끼이익!

녹슨 경칩이 비명을 지르며 손님의 등장을 알렸다.

의외로 안에는 양초가 실내를 밝히고 있었고 테이블에는 종업원 에리카가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에리카는 시온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벌떡 일어나기도 잠시, 그 옆에 있는 나를 보고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오늘 약속은 시온과 에리카 둘만의 만남으로 되어있었고 나는 불청객인 듯했다.

시온이 그런 에리카를 달랬다.

“괜찮아. 믿을만한 분이니까.”

“너 설마···”

“맞아. 미안해. 도련님도 알고 있어. 너와 빅터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잠깐만 들어봐. 도련님은 처음부터 빅터를 의심하셨어. 네가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도.”

두 소녀의 대화를 듣자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됐다.

그동안 나는 에리카와 친분이 있는 시온을 통해 간접적으로 빅터에 대한 정보를 캐냈고 접촉했고 드디어 오늘 그녀가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정말이야?”

“맞아. 그러니까 안심해. 오히려 나보다 더 네 말을 믿어주실 분이니까.”

에리카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와 시온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괜찮다. 천천히 말해보거라. 우린 들을 준비가 되어있으니.”

나까지 이렇게 말해주자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꿀차를 한모금 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와 빅터가 사귄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가요. 처음에는 마냥 행복했죠. 그는 잘 생기고 자상하고 성실한 남자였으니까요.”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제일 큰 단점은 그가 레인저라는 점이었어요. 매일 순찰을 나갈 때마다 저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가 무사히 생존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죠.”

“그랬군.”

“네. 그래도 빅터는 한 번도 절 실망시키지 않았어요. 항상 웃으면서 돌아왔고 그 긴 시간 동안 잔부상 하나 없었죠.”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녀가 얼마나 빅터를 사랑했고 빅터가 얼마나 자신에게 잘해줬는지에 대해서였다.

솔직히 영양가는 하나도 없었으나 괜히 압박했다가 겁을 먹고 입을 닫아버리면 곤란했기에 묵묵히 경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드디어 본론인가.

“저는 블랙허니의 종업원이잖아요. 여기는 별의별 얘기가 다 돌아요. 그러다가 북문의 문지기 리온이 제 남자친구 욕을 한 걸 들었어요.”

“뭐라고 욕을 했지?”

“빅터가 밤마다 홀로 순찰을 나갈 때마다 탈영병이나 사상자가 발생하는데 마왕 바알에게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니냐고요.”

내가 빅터의 여자친구였어도 충분히 화가 났을 것 같았다.

“화를 냈겠군.”

“당연하죠. 심지어 리온은 레인저도 아니잖아요. 블랙캐슬에도 레인저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고생을 인정해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런 몰상식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비난했죠.”

“그래서?”

“빅터에게 말했어요. 빅터는 괜찮다며 쿨하게 넘겼죠. 저도 그렇게 넘겼고요. 그리고 그날 밤 술집을 평소보다 일찍 끝내고 빅터의 숙소를 몰래 찾아갔어요.”

“무슨 일로?”

“그···위로해주려고요. 많이 속상했을 것 같아서.”

부끄러웠는지 에리카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런 식으로 깜짝 방문한 적이 처음이었나?”

“맞아요. 빅터는 시간 약속을 중시하는 남자거든요. 갔더니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안으로는 촛불 빛이 은은하게 새어나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부터 에리카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에 섞여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분명 들었어요. 사람의 비명을요.”

“확실한가?”

“네. 비명은 빅터의 숙소에서 나왔죠. 얼마 후에 빅터가 어깨에 커다란 보따리를 든 채로 나왔어요. 밤 순찰을 나가려는 건지 북문 방향으로 갔죠. 저는 빅터가 나가자마자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의 숙소로 들어갔어요.”

결과적으로 에리카가 빅터의 숙소에서 본 것은 없었단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술병과 흐트러진 침대보, 먹다 남은 빵. 촛농이 흘러내리는 양초.

겉보기엔 별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유일하게 그녀의 신경을 거스른 건···

“피 냄새. 지독한 피 냄새가 나는 거예요. 아무리 레인저가 몬스터 피를 묻히고 다닌다 해도 이건 말이 안 될 정도였어요.”

그리고 다음날 들려온 리온의 탈영 소식.

너무나 공교롭기에 에리카가 시온을 불렀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글썽이는 눈빛으로 우리에게 애타게 답을 청했다.

“아니겠죠? 아닐 거예요. 리온은 제 고향 친구예요. 절대 탈영 같을 걸 할 친구가 아니라고요. 그런데 어째서···흐흐흑···”

시온이 에리카를 꼭 안아줬다.

“에리카, 일단은 이 얘기는 우리 말고는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빅터에게도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

“알겠어요.”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빅터는 우수한 레인저다. 조만간 내가 빅터를 따로 찾아가서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보겠다.”

이후로도 에리카는 시온의 품에 안겨서 한참을 울었다.

그녀를 진정시켜 준 다음 블랙허니를 나왔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뒤따라 나온 시온에게 말했다.

“시온.”

“예.”

“오늘부터 밤마다 빅터의 집을 감시해라. 이상한 일이 있거나 특히 야간 순찰을 나간 날에는 무조건 나에게 보고해.”

“알겠습니다.”

시온은 기척을 감추는데 탁월하니 충분히 빅터의 눈을 피할 수 있을 터.

내 걱정이 기우이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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