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발견 : 뒤쫓는 망나니
헬스장에 가면 짐볼이라는 게 있다.
동그랗게 생긴 고무공인데 탄성이 좋아서 스트레칭이나 필라테스를 할 때 많이 쓰인다.
만약 당신이 맨몸으로 짐볼을 제작한 다음 그 위에 서서 뜀뛰기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게 가능한 일일까?
보통은 불가능하다.
일단 공장에서나 만들어 낼법한 짐볼을 맨손으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서커스단의 숙련된 광대가 아닌 이상 동글동글한 공 위에서 뜀뛰기는커녕 균형만 유지해도 엄청난 일이다.
“문제는 내가 해야하는 일이 이와 비슷하단 말이지.”
바람은 자꾸만 소용돌이를 그렸다.
원형으로 뭉치려는 성질이다.
내가 발판 모양으로 바꾸라고 말해도 교감력이 부족한 탓인지 말을 들어 처먹질 않는다.
아직까지 바람에 관련한 스킬을 얻었다는 알람도 뜨지 않았다.
나무의 경우에는 우드 컨트롤, 일명 우컨이란 스킬이 생겨서 어느 수준까지는 목(木)성을 띠는 유기물을 조종할 수 있었으나 바람은 다르다.
일정 경지에 오르면 윈컨(윈드 컨트롤의 줄임말)이란 액티브 스킬이 생기지 않을까 싶은데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도 붉은머리 여자가 너에게 가장 적합한 스킬을 가르쳐 주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가 추운 북부에서 왜 개고생을 하고 있느냐.
“황금가지를 찾기 위해서지요.”
-그렇지. 헌데 찾았느냐?
세계수 가지에 대한 수색도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순찰을 나갈 때마다 시온을 이끌고 정말 온갖 군데를 이 잡듯이 뒤졌다.
그녀에게는 찾고 있는 물건이 있다고만 일러두었다.
시온도 예전부터 내가 워낙에 이상한 일을 많이 벌인 터라 이번에도 그려러니 하면서 얌전히 따라와줬다.
하지만 장기간 거듭된 수색에도 별다른 수확이 건지지 못했다.
천마도 느낌 오는 지점이 없단다.
결론이 나버린 셈이다.
블랙캐슬이 개척한 영역에는 황금가지가 없었다.
-결국 황금가지를 찾으려면 영역 밖으로 나가야 한다. 최근 네놈이 대단한 성장을 했다 할지라도 영역 바깥은 여전히 위험하지.
“순보라는 이동기이자 회피기가 이를 해결해준다는 말씀이군요.”
-당연하다. 잘만 익히면 공중을 날수도 있는 스킬이다. 한마디로 지상 몬스터의 위협에서 완전히 자유롭단 말이지.
천마는 내가 하루빨리 순보를 마스터해서 영역 바깥쪽까지 수색하기를 권했다.
나 또한 그의 말이 합리적이라 판단하여 용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나에게 폭풍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운명의 수레바퀴는 항상 몇 발자국 빠르게, 갑작스러운 시기에 훅 다가왔다.
나는 거센 풍랑를 마주한 조각배의 선장이 되어 열심히 노를 저었고.
이 역경의 끝이 침몰이 될지, 신대륙의 발견일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드디어 꼬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순찰을 돌 때 뒤에서 들려온 시온의 말이었다.
“꼬리라니?”
“빅터 말입니다.”
“아아, 그랬지.”
최근 나는 빅터의 내연녀인 에리카에게서 남자친구 빅터가 수상하다는 말을 들었다.
따라서 시온을 시켜서 그의 숙소를 지키게 하였다.
“수고했다. 많이 피곤했을 텐데.”
“아닙니다.”
시온이 보고한 사항은 이랬다.
빅터가 밤순찰을 자주 나가는 것 같았지만 사실 거기엔 규칙이 있었단다.
무조건 보름달이 뜨는 밝은 밤에만 밤순찰을 나갔다고.
그리고 오늘이 바로 보름날이었다.
“에리카의 말에 따르면 빅터는 오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병 앤소니와 숙소에서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했답니다. 그리고 오늘은 보름날이니···”
“또 밤순찰을 나가겠군. 우리의 가설이 맞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충분히 일어날만한 날이야.”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평소보다 순찰을 빠르게 돌았다.
체력을 비축해두기 위해서였다.
어김없이 박수를 받으며 북문으로 복귀하는 길.
옆에 동행한 캠벨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어깨동무를 걸었다.
“부단장! 요새 얼굴 보기가 힘들어? 블랙허니에서 술 한 잔 어때?”
“미안하군. 오늘은 일이 있어서.”
“쳇! 그럼 내일 마시자고.”
“그러지.”
캠벨을 떼어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밤을 기다렸다.
겨울의 밤은 빨랐다.
해는 금세 졌고 부엉이 우는 소리가 매서운 칼바람을 잠시나마 잠재우는 듯했다.
나와 시온은 신병이었을 당시 배정받았던 레인저 숙소 근처에 숨어있었다.
시온이야 원래 이런 쪽에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나도 감각이 예민해서인지 곧잘 기척을 숨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우, 추워. 개같은 북부.”
욕설을 걸쭉하게 뱉은 곰보 사내가 투덜거리며 나왔다.
바로 이번에 들어온 신병 앤소니다.
듣자하니 농사일에 싫증을 느끼고 장원을 탈주했다가 잡혀서 사형 대신에 북부로 끌려왔다나.
뭐, 그리 중요한 사연은 아니다.
“어, 시원하다.”
길바닥에서 아무렇지 않게 노상방뇨를 갈긴 앤소니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빅터의 숙소로 향했다.
레인저들 사이에서 단장 빅터가 맛있는 술을 따로 쟁여둔다는 소문이 돌아서인지 그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똑똑
노크하자 나무문이 바로 열렸고 앤소니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시온은 숙소를 기점으로 약 20m가량 떨어진 곳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일단은 대기하다가 뭔가 이상이 생긴 것 같으면 바로 돌입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차가운 겨울바람만 얼굴을 때리며 사위를 을씨년스럽게 가라앉혔다.
어깨 위로 눈이 층층이 쌓여올려질 동안 빅터의 숙소에서는 비명 하나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중간중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련님, 저희가 잘못 짚은 걸까요?”
“글쎄.”
조금 부자연스럽더라도 핑계라도 대며 돌입해야 하나 생각할 시점에,
덜컹!
문이 열리며 빅터가 나왔다.
어깨에는 에리카가 언급했던 예의 그 가죽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주머니의 크기는 상당히 컸지만 또 엄청 큰 건 아니었다.
소형 여행용 캐리어 정도 사이즈랄까?
빅터는 나오자마자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나와 시온은 숨을 죽였고 빅터는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내 자리를 떠났다.
북문 방향으로 향했으니 밤순찰을 나갈 것이 확실해 보였다.
“들어가 보자.”
“예.”
시온과 함께 빅터의 숙소에 들어갔다.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식탁 위에 빈술병과 먹다 남은 토끼 고기. 흐트러진 침구류. 옅은 연기를 내며 타오르는 양초.
에리카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피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서···앤소니까지 없었다.
그 점 빼고는 모든 게 정상이었다.
“시온, 앤소니가 나간 걸 봤나?”
“아뇨.”
“그러면 앤소니는 여기에 있어야 할 텐데.”
“맞습니다.”
마치 증발한 듯했다.
어디로 갔을까.
시온이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건도 아니고 무려 사람이다.
그리고 빅터의 숙소는 침실만 분리된 투룸 형태로 그닥 크지도 않았다.
“우선은 빅터를 쫓아볼까요?”
“잠시만.”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사고회로를 빠르게 돌려보았다.
발상의 전환을 해보자.
빅터가 신이 아닌 이상 앤소니를 증발시킬 순 없다.
과거 에리카는 이곳에서 질식할 수준의 피 냄새를 맡았다고 했다.
반면에 오늘은 피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 어딘가에 숨겨진 공간이 있을 확률이 높다. 3분 동안 찾아본다.”
책장의 몇 권 없는 책을 건드려보고 식탁을 옮겨보고 바닥에 깔린 카펫을 들춰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빙고!”
침대 밑 바닥에 끌린 흔적이 역력했다.
그 흔적대로 침대를 시계방향으로 돌려버리니 바닥에 손잡이 달린 문이 보였다.
덜컥!
누가 발견할 거라곤 예상 못했는지 문에 따로 잠금장치가 되어있진 않았다.
그렇게 문을 열자 아래로 향하는 공간이 보였는데···
“지독하군요.”
시온이 코를 감싸 쥐었다.
아래에서 역한 피냄새가 훅 끼쳐 올라왔다.
에리카가 맡았다는 혈향은 바로 여기서 풍겨온 냄새가 틀림없었다.
그때는 문이 열려있었고 우리가 왔을 때는 문이 닫혀있었을 것이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니 4평 정도 되는 자그마한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사람 하나가 누울만한 시술대가 놓여있었는데, 그 위가 온통 피에 젖어있었다.
양동이에는 굳은 피가 담겨있었고 벽에는 인간의 가죽과 말려놓은 내장이 녹슨 쇠갈고리에 걸려서 끼익대고 있었다.
이곳에서 빅터가 무엇을 했을지, 그리고 앤소니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빅터 이 미친놈은 앤소니를 해체해버린 것이다.
앤소니 뿐만이 아니겠지.
에리카의 고향 친구인 리온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탈영했다거나 실종된 사람 중 상당수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도련님, 저길 보십시오.”
시온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고개를 위로 올렸더니 천장에는 불길한 상징이 박혀있었다.
피로 칠해진 7망성과 한가운데 새겨진 붉은 눈.
바로 황혼의 표식이었다.
세븐스타이자 현역 소드마스터인 카리나가 있는 블랙캐슬에서 대놓고 황혼교도가 활동하다니.
그것도 무려 7년 동안이나.
등잔 밑이 어두워도 너무 어두웠다.
“시온.”
“예.”
“너는 카리나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도련님은요?”
“지금이라도 빅터를 따라간다.”
시온이 반대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나와 시온은 이곳에 들어오면서 발자국을 비롯해서 온갖 흔적을 남겨버렸다.
빅터는 신중한 성격이니 돌아오자마자 지하실의 존재를 들켰다는 걸 바로 알아챌 터.
그렇게 되면 설사 사로잡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무런 정보도 뱉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돈과 탐욕에 따라 움직이는 용병이 아닌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종교인이니 충분히 그럴 법했다.
그러니까 빅터가 정확히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보려면 오늘밤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시온도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따로 반론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같이 가겠다고 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아냐. 둘 다 갔다가 잘못되면 이 일은 영원히 묻혀버린다.”
“그러면 제가 빅터를 쫓을 테니 도련님께서는 사령관님께 보고하시지요.”
시온이 나 대신 위험을 무릅쓰겠단다.
망나니로 이곳에 빙의했을 때 날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녀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새삼스럽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게 실감 났다.
“시온, 건방지다.”
그래서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나를 따라 여태까지 고생이란 고생을 다한 여자다.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빅터를 쫓는 위험한 임무를 맡기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황혼의 암약은 아르니아 대륙에 닥쳐오는 위기를 알리는 메인 스트림이다.
대륙을 구하고 스토리를 끝내기 위해서는 나는 필연적으로 황혼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오늘은 그저 그 첫번째 순간이 닥쳐왔을 뿐이다.
“네 주제를 알아라. 넌 하녀다. 내가 명령한대로 따라.”
“하지만!”
“언제부터 네가 후작가의 개망나니였던 날 이렇게 신경 썼지? 솔직히 말해봐. 너 날 죽이고 싶어했잖아?”
“그건···”
“하나만 해.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시온의 입이 합죽이가 되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해지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중얼거렸다.
“도련님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 말대로 따라. 난 빅터를 쫓고. 너는 카리나님을 만난다. 이야기는 끝이다.”
대답을 따로 듣지는 않았다.
지하실을 박차고 나왔다.
너무 시간이 끌리면 빅터를 추적하기 힘들어진다.
쏟아지는 함박눈이 모든 흔적을 지우기 전에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북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