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달성 : 조우한 망나니
아르니아 대륙에는 항상 강자들이 존재해왔다.
그 강자는 인간일 때도 있었고, 드워프일 때도 있었으며, 엘프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최강자를 뽑으라면 대륙인들 백이면 백 모두 드래곤을 뽑는다.
드래곤.
평균 수명이 수천 년에 달하는 이 지성체는 작은 동산만한 거체를 지니고 있으며 덩치만으로 타 종족을 압도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렇게 덩치가 크면 타격부위가 늘어나서 고수들 간의 싸움에는 약점이 될 수 있다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진짜배기 고수를 만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온몸을 뒤덮은 드래곤스케일(비늘)은 공격자의 철검을 장난감 검으로 만든다.
심지어 인간 중에서는 강자로 여겨지는 익스퍼트의 마나소드조차 비늘에는 흠집조차 못 내니.
가히 그 경도는 전설 속의 금속인 아다만티움에 버금간다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방어력만 높으냐.
드래곤은 덩치에 어울리는 거대한 날개까지 달고 있다.
공중을 움직이며 입에서 내리뿜는 강력한 브래스는 도시 하나 정도는 우습게 초토화시킨다.
한마디로 성체 드래곤이 나쁜 마음만 먹으면 아르니아 대륙은 전 종족이 연합하여 상대해야 한다는 견적이 나온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드래곤은 자부심이 뛰어나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종족이랄까.
귀찮음도 많은 종족이라 자신의 레어만 침입하지 않으면 밖에서 뭘 하든 내버려두는 편이다.
아무튼 드래곤의 특징은 이렇다.
그리고 이런 경이로운 생명체가 지금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하라. 인간. 너는 마검을 가지고 내 레어에 무단으로 침입했다. 내가 당장 너를 브레스로 태워죽이지 않을만한 이유를 대야할 거다.
육합전성.
드래곤은 특별한 생명체답게 성대를 쓰지 않고 소리를 냈다.
머릿속을 울리는 그 느낌은 천마검이 목소리를 전달하는 방식과 흡사했다.
-······
천마는 레어에 들어온 뒤로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드래곤이 모종의 수를 써서 천마와의 의사소통을 막은 듯했다.
그리고 드래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천마검이 에고소드이며 안에 들어있는 천마의 정체도 어렴풋이 짐작한 듯했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드래곤에게 경의를 표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는 용을 마주한 아르니아 대륙의 지성체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예였다.
그리고 입에서 내뿜는 불덩이에 통구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이래야만 했다. 사실 이 이유가 더 컸다.
“위대하신 존재여, 제가 가지고 있는 검은 에고 소드이며 안에는 봉인된 자는 천하제일인입니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홀로 수련하여 반인반마의 존재가 되었으니, 태생부터 악마인 자와는 다릅니다.”
파충류 특유의 노란 눈이 나를 샅샅이 훑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내게 드루이드의 능력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시선만으로 압도당해서 졸도했거나 그가 내뿜는 피어에 심장박동이 멈추었을지도 몰랐다.
드래곤은 약 1분가량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동안 나 또한 드래곤을 관찰했다.
용의 덩치는 종족을 고려하고서도 어마무시하게 컸다.
저 정도면 다 자란 성체임은 당연하고 이를 넘어선 에인션트 드래곤 급은 된다고 봐야 했다.
한참을 보던 드래곤.
그는 이내 피곤한 눈빛을 뿌리며 몸을 웅크렸다.
-진실이구나. 검에서 느껴지는 마기가 마계 특유의 끈적한 마기가 아니라 순수한 갈망에 의한 정순한 마기다.
여기에 드래곤이 말을 덧붙인다.
-설사 거짓이라 해도 어찌할 방도가 없군. 나는 이미 움직일 힘조차 없이 영면만을 바라는 늙은 존재다.
어쩐지 드래곤에게서 연륜이 느껴지긴 했다.
수천년에 달하는 수명이 끝나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드래곤.
시온라이크에 드래곤을 사냥하는 스토리는 당연히 없었고 여기서부터는 내 감에 의지해야 했다.
치솟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위대하신 존재의 진명을 알고 싶습니다.”
우선은 이름부터.
-내 진명이라···알파리스 헤이든 루나론 엘드리고 코카리어스다.
그게 뭔데???
살면서 들은 이름 중에 가장 긴 이름이다.
다행히 드래곤은 내가 곤란해한다는 걸 깨달은 듯 다른 이름을 내놓았다.
-인간들은 나를 카일이라고 부르지.
그 이름조차 또다른 의미로 나를 놀라게 했지만 말이다.
“익숙한 이름이군요. 저희 인간 중에서도 카일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마왕 바알의 침입으로부터 대륙을 지켜낸 영웅이지요.”
-그 카일이 바로 나다.
“···예?”
-인간으로 폴리모프, 즉 변신하여 마왕 바알을 내 손으로 직접 봉인했다.
가끔 이런 게임이 있다.
난이도 조절 실패해서 망겜됐는데 스토리 하나만큼은 대박인 게임.
시온라이크는 아무래도 이쪽 유형으로 분류해야겠다.
파도 파도 새로운 스토리가 나온다.
“아르니아 대륙을 구한 용사님이 바로 위대하신 존재셨군요. 관대하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럴 것 없다. 바알이 대륙을 먹는 순간 곤란해지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드래곤 카일은 같은 자세로 오래 있는 게 불편했는지 연신 몸을 뒤척였다.
숨소리도 점차 가늘어지는 게 정말로 최후가 얼마 안 남은 듯했다.
-나도 하나를 말했으니 너도 하나를 말해줬으면 좋겠구나. 이곳에는 무슨 일로 들어왔으며 한낱 인간이 내 피어에는 어떻게 이리 자유로운가. 특별한 인간이여.
그건 질문 하나가 아닙니다만.
드래곤의 셈법이 조금 이상했지만 대륙을 구한 용사라니 특별히 할인해주기로 했다.
“저는 드루이드입니다.”
말과 함께 스킬을 시전했다.
내 손짓에 따라 유적지의 돌바닥을 뚫고 작은 묘목이 올라왔다.
드래곤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서인지 내 말 한마디에 거의 모든 전모를 파악했다.
-세계수의 사랑을 받는 아이. 하프엘프로구나. 어쩐지 너에게서 짙은 신록의 냄새가 났다.
“그렇습니다.”
-내 피어에 견딜 수 있던 이유가 이해되는구나. 여기에 찾아온 이유는···
드래곤의 시선이 제단에 놓여있는 세계수의 가지를 향했다.
-세계수의 가지를 가져가기 위해서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립니다. 황금가지를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원래는 훔쳐서라도 황금가지를 가져갈 생각이었으나 드래곤 카일이 대화가 통하는 상대 같길래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불가하다.
속으로 당황했다.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째서입니까?”
-정확히는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한다. 제단에 가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게다.
드래곤의 말대로 제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찬란한 황금빛을 뿌리며 제단 위에 둥둥 떠 있는 세계수 가지.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갖다대려 하자,
파지직!!
불꽃이 튀며 나를 밀어냈다.
그리고는 눈앞에 창이 하나 떠올랐다.
[황금가지를 발견하셨습니다.]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뤄야 합니다.]
[세계수의 시험을 치르시겠습니까?]
[Y/N]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더니.
역시나 황금가지는 순순히 내게 소유권을 맡기지 않았다.
어쨌든 저걸 얻는 순간 드루이드로서 크게 성장할 테니 나름의 시험을 쳐야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 시험은 오직 드루이드인 나만이 칠 수 있는 시험이었다.
-무형의 결계는 내가 친 것이 아니다. 황금가지는 내가 이곳에 자리를 잡기 전부터 있었지. 마왕 바알을 북부 산맥에 봉인한 후 레어를 펼칠만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잠들어있던 황금가지를 발견했다.
드래곤 카일의 목소리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니 돌아가거라. 저 황금가지는 나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특수한 인과율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니···
등 뒤에서 들려오는 카일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홀린 듯이 황금가지를 향해 재차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YES.”
[세계수의 시험에 응답하셨습니다.]
[시험을 돌입합니다.]
파아아앗!!!!
황금빛과 녹색빛이 뒤섞인 영롱한 정광이 눈부시게 발광하며 유적지를 뒤덮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 비단처럼 출렁거리며 내 몸을 감쌌고 드래곤 카일이 있는 곳까지 구불거리며 나아갔다.
반짝거리는 금색과 녹색의 반딧불이가 ∞자를 그리며 즐거운 춤을 췄다.
일련의 현상을 목격한 드래곤 카일이 경악하며 눈이 크게 떠졌다.
-참으로 신비하구나! 인과율의 법칙을 초월할 줄이야. 특별한 인간이로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카일의 육합전성을 마지막으로 눈부신 빛에 휩싸인 나는 어디론가 이동했다.
과연 어떤 시험이 기다릴까.
기대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파앗!
싱그러운 빛이 사그라들자 살포시 눈을 떴다.
그런 내 앞에 보인 장면은···
‘숲?’
어디 숲인지는 모르겠다.
매일 북부 산맥에서 눈 덮인 침엽수만 보던 나에게 오랜만에 본 활엽수로 가득 찬 울창한 숲은 색다른 기분을 안겨주었다.
‘여긴 어디지.’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보였다.
자연스레 느껴지는 갈증에 시냇물로 다가가서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수면에 반사되는 모습을 보았다.
“!”
놀랍게도 나는 헤논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였다.
그리고 이 사람은 특정하기 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엘프.’
조각 같은 외모를 차치하고서라도 양쪽으로 뾰족하게 솟은 두 귀가 이 사람의 종족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려줬다.
풍기는 분위기는 헤논과 비슷했다.
작은 키와 앳된 외모만 아니었어도 헤논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외모 언급은 여기까지 하고.
일단 여기는 시험이다.
내가 예상한 시험과는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어떻게든 여기를 빠져나가는 게 시험의 통과조건일 것이다.
“여기 있었냐?”
누군가 갑자기 다가와서 거칠게 어깨동무를 했다.
주근깨가 가득한 아이였는데 녀석의 귀는 나보다 훨씬 길고 뾰족했다.
그 뒤를 따라오는 다른 엘프 아이들.
같이 노는 무리인가.
“난 또 어디 도망간 줄 알았잖아.”
“반푼이 새끼가 도망가 봤자지.”
“크크큭, 맞지.”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다.
같이 놀긴 노는데 나는 무리에서 떨어진 낙오자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헤논의 성깔대로면 바로 들이박겠지만 그게 시험의 통과목적 같진 않아서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이들은 나를 끌고 어디론가 갔다.
가는 와중에도 뒤통수를 쳐대질 않나, 발을 걸어 넘어트리질 않나.
빙의된 사람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확실히 느껴졌다.
저렇게 악독하게 구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뜻은 평상시에 몸속 주인이 괴롭힘을 받는데도 가만히 있었단 이야기다.
“반푼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뭐야? 웬일로 이렇게 말을 똑바로 해?”
“무슨 뜻인지 물어봤다.”
비록 몸은 아이라지만 몸 속 존재는 수많은 역경을 헤쳐온 성인이다.
눈빛이 달라지자 엘프 아이들이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푼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반푼이가 반푼이지.”
“오늘따라 눈깔이 마음에 안 드네? 인간인 네 아빠 닮아서 눈깔이 그 모양이냐?”
“역시 잡종은 별수 없는 건가.”
비록 짧은 대화였으나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느낌이 왔다.
아무래도 내가 들어가 있는 몸의 주인은 순혈 엘프가 아니고 헤논과 마찬가지로 하프엘프인 모양이다.
그래서 현재 엘프 친구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중이고.
지금 이 상황은 가상일까.
아니면 과거에 이미 벌어졌던 누군가의 기억일까.
여러 가능성을 머릿속에 둔 채 잠자코 장단을 맞춰주었다.
녀석들의 인도에 따라 도착한 장소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나를 뒤쪽에 세워두고 여태까지 신나서 떠들던 소악마들이 이곳에 도착하니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낮추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쉿!”
누군가 강제로 내 뒷목을 잡고 몸을 낮추게 했다. 모두가 언덕 위쪽까지 살금살금 걸었다.
나 또한 이들을 따라 했다.
언덕 끝까지 도달한 후 바깥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시야가 트이자 그제야 엘프 악동들이 몸이 바짝 얼어버린 이유를 이해했다.
‘트롤!’
언덕 아래에는 거대한 트롤이 몸을 웅크리고 잠에 빠져있었다.
4m에 달하는 거구와 두꺼운 팔다리로 미루어 짐작할 때 성체는 확실하고 그중에서도 신체가 건장한 놈이었다.
방금까지 드래곤을 보다 와서 감각이 이상해진 나에게도 상당히 크게 느껴질 정도.
헤논이라면 호승심을 불태웠겠으나 지금 빙의한 이 몸은 고작 10살이나 됐을 법한 어린아이다.
트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포한 오오라가 저도 모르게 오금을 저리게 했다.
“와, 정말 있을 줄이야.”
“완전 신기해.”
“트롤은 엄청 힘이 세겠지?”
호기심 넘치는 아이들은 트롤을 보며 속닥대며 입방아를 찧어댔다.
나는 그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트롤을 관찰했다.
긴 시간 북부에서 근무하면서도 경험한 적 없던 몬스터였으니 이 기회에 데이터를 좀 얻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툭!
누군가 내 등을 밀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제대로 당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언덕 아래까지 떼굴떼굴 굴러버렸다.
“아고고···”
절로 신음이 나왔다.
빠르게 몸을 훑어봤더니 떨어지면서 나무에 몇 번 부딪혀서인지 옷은 흙투성이가 되었고 몸에는 까진 상처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작은 내 몸을 거대한 그림자가 뒤덮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소란에 일어난 트롤의 붉은 눈이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쿠워어어어어!!!!”
보금자리를 침범당했다고 느낀 몬스터가 방망이를 들며 거칠게 포효했다.
괴롭힌 것도 모자라서 사실상 살인이나 다름없는 짓을 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언덕 위쪽을 바라봤더니 엘프 아이들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뭐야. 쟤 왜 떨어졌어.”
“몰라. 자기 혼자 떨어지던데?”
“난 모르는 일이야.”
“나도야. 쟤 혼자 발 헛디뎠어.”
난 분명 누군가에게 밀쳐졌는데 저들은 서로 오리발을 내밀기 바빴다.
녀석들이 위에서 외쳤다.
“잠깐만 있어! 어른을 불러올게!”
아이들이 우르르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마을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거대한 트롤이 사는 곳에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진 않을 것이다.
그동안 괴수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까.
평범한 아이라면 절대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평범하면 말이다.
그리고 내 눈에는 지금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첫번째 시험을 시작합니다.]
[클리어 조건을 공개합니다.]
[트롤로부터 30분 간 생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