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탈환 : 작심한 망나니
후견인이라니.
카리나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제 뒤를 봐주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물론 네 후계자 경쟁에 개입하진 못해. 북부를 지켜야 하니까. 블랙캐슬의 병력을 가문의 내전에 사용한다면 제법 논란이 될 테고.”
사회에는 이름값이라는 게 존재한다.
카리나는 직접적인 지원은 못 해준다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북방의 별이 내 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크나큰 압박감을 느낄 거다.
“다만···혹여라도 네가 후계자 싸움에서 패배하거나 후작 자리를 원하지 않을 땐 이곳으로 돌아오라는 말이야. 북부는 언제나 헤논 너에게 열려있다.”
보험이 되어주겠다는 그녀의 말.
너무나 고맙고 든든하다.
“감사드립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싫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주려고 했어. 그만큼 너는 북부에 크나큰 공을 세웠으니까.”
피식 웃던 카리나가 내 가슴팍에 무언가를 달아줬다. 금빛이 반짝이는 브로치였는데 검이 화염에 둘러싸인 모양새였다.
“이 브로치는 나를 상징하는 문양이야. 엘든 왕국에서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 이것조차 모르는 녀석들은 신경 쓸 놈도 아니고.”
이 밖에도 카리나는 편지를 하나 건네줬다.
편지에는 내 아버지인 고든 로이드에게 보내는 사적인 메시지와 내가 카리나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친필 사인이 적혀있는 서약서가 동봉되어 있었다.
“편지는 아저씨 주고 서약서는 네가 보관하고 있어. 똑같이 2부 만들어서 나도 가지고 있으니까.”
“의외로 형식적이시군요.”
“그러게. 나도 원래는 검만 휘두르는 바보였는데 오랫동안 책상에 앉아있다 보니까 겉멋만 늘었다.”
“아닙니다. 멋있으십니다.”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 보니 갈 때가 됐나 보네. 어서 가라.”
카리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해줄 수 있는 최대를 해주었다.
이제는 정말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나와 시온의 제대날이 다가왔다.
사령관 카리나를 포함한 모두가 나와 우리를 배웅해줬다.
“크하하!! 부단장 북부에 또 오라고!”
“다수결 해보자! 부단장이 북부에 재입대 해야 한다 손!”
“찬성이오!”
“찬성!”
“재입대! 재입대!”
짖궂은 장난을 치는 녀석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저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깊은 신뢰와 호감이 가득했다.
처음에 철부지 귀족이라고 혐오하던 시선을 생각하면 정말 크게 변하긴 했다.
그리고 카리나의 배웅.
“기억해라. 북부는 너의 편이다.”
“나중에 시간 나면 후작령으로 놀러 오십시오. 편히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흐흐, 그거 좋네. 기대하마.”
내가 카리나와 레인저단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시온은 에리카와 따로 깊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리카도 우리가 떠나고 바로 다음날 떠난단다. 그녀에게도 가서 가벼운 인사를 해주었다.
“진짜 가보겠습니다.”
손을 흔들고 마차의 문을 열었더니 실내에 웬 오크가 한 마리 있다.
“여! 왔나. 부단장.”
자세히 보니까 캠벨이다.
하도 닮아서 가끔 헷갈린다.
“···네가 왜 여기 있지?”
“나도 오늘 제대일이거든. 가는 길에 마차나 얻어탈까 싶어서.”
나와 동시에 제대였다는 말이 무척이나 수상하고 공교롭다.
카리나를 슬쩍 봤는데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는 걸 보니 그녀도 알고 있는 사항인가 보다.
“설마 정없게 먼저 가진 않겠지.”
다른 녀석도 아니고 캠벨이다.
태우고 가기로 했다.
애초에 왜 이 녀석이 오늘 제대하고 마차에 미리 탑승하고 있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랴!”
히이잉거리는 말 울음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블랙캐슬이 점점 멀어졌다.
이제야 제대를 했다는 게 실감 났다.
시온도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다.
“시온, 조금 있으면 아버지를 뵙겠군.”
“맞습니다.”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데?”
“북부는 몸은 힘들었어도 마음은 편했습니다. 그러나 후작성은 몸은 편한데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해한다.
시온은 늘 내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있었으니까.
알게 모르게 내성 식구들의 따가운 시선과 눈총을 많이 받았으리라.
“부단장! 후작령에는 맛있는 음식이 많겠지? 북부식 딱딱한 빵은 인제 그만 먹고 싶은데. 고블린 똥도 말이야.”
옆에서 캠벨이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인다.
말 여섯 마리가 끄는 마차라 실내가 그리 작지 않은데도 캠벨이 맞은편에 않으니 안이 꽉 차는 느낌이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군.”
“하핫! 그야 당연하지. 갈 곳도 없고 앞으로 뭘 할지도 막막한걸?”
캠벨의 옛날이야기는 블랙허니에서 질리게 들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린 시절부터 용병판에서 구르다가 북부에서 종군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에 북부에 왔다고.
얼굴만 보면 불혹이 가까워 보이는데 저래 봬도 뽀송한 20대라는 게 봐도 봐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부단장이 날 좀 받아줘. 참! 이제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편한 대로 불러라.”
“그럼 그냥 부단장이라 부를게.”
“마음대로.”
저렇게 태평한 척해도 캠벨이 날 도와주기 위해서 따라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카리나도 캠벨 하나 정도는 보낼만하다 생각해서 전역을 허락했을 테고.
캠벨은 레인저단 중에서도 빅터를 제외하면 가장 우수한 무인이었으니 꽤 도움이 될 것이다.
소드 유저 상위인 데다가 북부의 전사들은 하나같이 경지대비 실력이 월등한 편이니 말이다.
···그랬었는데.
“익스퍼트라고?”
“맞아. 어찌된 일인지 그날 구덩이에서 살아나온 뒤로 경지 하나가 올랐어. 마나 소드라도 보여줄까.”
본래 깨달음이라는 건 부지불식 간에 찾아온다.
특히나 목숨이 오가는 급박한 위기를 넘길 때 뇌가 무의식에 접속하면서 오는 경우가 많다.
캠벨은 원래도 벽을 앞에 둔 소드 유저 최상위 유저였고 언제든 익스퍼트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번 기회를 양분 삼아 한 단계 위로 도약한 거겠지.
“축하한다.”
“부단장 옆에 있으려면 더 열심히 해야지.”
“맞는 말이다. 후작령에서도 북부에서처럼 매일 술 퍼마시면 쫓아낼 테니 알아서 잘 처신해.”
“술은 봐줘야지! 너무하네!”
시온은 얌전한 데 비해 캠벨은 시끄러워서 티격태격하는 맛이 있다. 아무래도 로이드 후작령까지 가는 길이 지루하진 않을 듯했다.
돌아가는 길에 케이브 장원에 들렀다.
촌장 해리슨은 내가 왔다는 소식에 모든 마을 사람들을 다 끌고 나와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이렇게 거창하게 맞이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다들 일하느라 바쁘지 않나?”
“추수도 끝났고 곧 농한기입니다. 설령 바쁜 시기라 해도 도련님이 오면 발 벗고 나서야겠지요. 여기 있는 모두의 은인이신데요.”
해리슨은 전에 봤을 때보다 턱이 조금 더 두꺼워졌다. 아무래도 아들을 잃은 슬픔을 술로 치유하는 거겠지.
저 촌장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케이브 장원 사람들 때문이리라.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수고가 많다.”
“북부에서 고생하신 도련님만 하겠습니까? 게다가 무려 황혼교의 대간부를 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조금 놀랐다.
이런 깡촌의 촌장도 알 정도로 소문이 빨랐단 말인가.
옆에 있던 캠벨이 설명했다.
“사령관님이 그날 전투가 끝나자마자 니플헤임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왕도와 후작령에 전했거든.”
“원래도 비범하신 분이라는 걸 알았으니 저희는 오히려 소식을 듣고도 태연했습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놀랐겠지만요.”
캠벨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해리슨 촌장을 보았다.
“단순히 후작가의 자제라고 해서 예를 차리는 느낌은 아닌 듯한데. 여기 마을 사람들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혹시 그쪽은···”
“나는 캠벨이라는 용병 나부랭이라네. 북부 출신이지.”
“북부라니! 역전의 용사시군요. 어쩐지 범상찮아 보였습니다.”
“하핫! 그렇게 띄워 주면 부끄러운데. 그럼 술이나 같이하며 우리의 잘난 도련님이 뭘 했는지나 들어볼까?”
“좋습니다.”
난 마신다고 한 적 없었는데.
자기들끼리 좋다고 북 치고 장구 친다.
옆을 슬쩍 봐서 시온의 의견을 물었더니 그녀도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말은 안 했어도 오랫동안 마차에서 생활해서인지 그녀도 몸이 찌뿌둥했나 보다.
술판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으핫하하! 그래서 그때 도련님이 말이야. 기묘한 기술로 아울베어를 한 번에 처치하는데, 난 대륙의 용사 카일이 살아 돌아온 줄 알았지 뭐야?”
“사령술사 라울이었습니다. 구울이 오는 걸 도련님이 단칼에 써셨죠. 마지막으로 흑마법사가 사악한 마법을 준비했지만 도련님의 무위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더는 못 들어주겠다.
일찍 일어나려 하니 캠벨과 해리슨이 붙잡는다.
“왜 벌써 가십니까? 조금 더 계십쇼.”
“맞아. 하녀도 얌전히 앉아서 꿀떡꿀떡 술 잘 마시는데 주인공이 먼저 가서야 쓰나.”
“시온이라고 오천오백번 말했습니다만.”
“아, 맞다. 미안.”
“어차피 기대도 안 했습니다.”
저들과 달리 나는 술에 취하지 않는다.
멀쩡한 상태로 내 칭찬만 계속 듣고 있으니 이건 이거대로 죽을 맛이었다.
“검 좀 수련하고 있을 테니 너희끼리 즐겨라.”
“역시! 영웅은 달라도 뭐가 달라.”
“도련님은 반드시 로이드 후작님이 되실 겁니다. 그때를 위하여 건배!”
“건배!!”
고주망태지만 밉지 않은 녀석들의 술주정을 뒤로하고 공터에 나섰다.
주변이 고요해지자 이제야 좀 숨통이 트였다.
검을 빼 들고 가만히 있으니 머릿속에 천마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왜 가만히 있느냐?
“니플헤임을 베었을 때의 느낌을 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제 절정,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제법 검사다운 말을 하는구나.
“익스퍼트도 급이 나뉘겠지요?”
-당연한 소리다. 오히려 경지가 올라갈수록 같은 경지 간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하수들이 보기에는 모두가 괴물 같겠지만 같은 괴물들이 보기에 그 간극은 천지차이지.
천마의 말에 공감했다.
빅터를 상대할 때도 그랬다.
시온이 도와주지 않고 천마가 그의 공격을 미리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빅터를 잡을 수 있었을까.
드루이드 스킬 없이 검만으로 니플헤임의 목을 날릴 수 있었을까.
‘궁극적으로는 드루이드 능력과 검사 능력의 조화를 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오히려 두 능력을 별개로 보고 따로 수련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드루이드 시험 때는 오로지 드루이드의 능력만 썼고 천마와 수련할 때는 검술로만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맞았다.
양쪽의 능력을 더 잘 파악할수록 두 능력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가장 극적으로 융화될 테니.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더 검을 휘두르거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익스퍼트가 되고 초급 드루이드가 되면서 훨씬 예리해진 내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누구냐! 나오거라.”
살기를 뿜는 상대가 아니어서 검부터 나가지는 않았다. 한 지점을 노려보고 있으니 그곳의 수풀이 흔들리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민들이 입기엔 다소 화려한 옷을 입은 사내는 온통 흙투성이었고 얼굴에는 때가 꼬질꼬질했다. 팔 한쪽에 피가 흘렀는지 소매를 찢어 꽁꽁 싸매고 있던 남자는 나를 보더니 털썩 무릎을 꿇는다.
“도와주십시오. 쫓기고 있습니다.”
사내의 말이 언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여기는 케이브 장원이고 로이드 후작령의 관할이다. 어떤 미친놈이 여기서 무력을 과시한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 울음소리와 함께 복면을 찬 기마병 여럿이 칼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흙투성이 사내를 둘러싼 기마병들.
사내는 다친 와중에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칼을 뽑아서 마지막 저항을 할 준비를 했다.
형형한 눈빛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잘도 여기까지 도망쳤습니다. 덕분에 꽤 애먹었으니 후딱 끝내 드리죠.”
“비겁한 놈들. 내 죽어서도 너희를 저주하리라.”
“클클클, 그렇게 말하고 간 사람이 한수레인데도 저희는 여전히 잘 먹고 잘살고 있군요.”
웃긴 놈들이다.
분명 내가 있는데도 병풍 취급하면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 따위는 위협조차 안 되리라 여기면서.
내가 누군지 모른다 해도 어이가 가출한 처사길래 한바탕 호통을 갈겨줬다.
“네이놈들!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바로 세븐 스타이자 대륙의 수호자이신 로이드 후작님의 영지다. 어디서 왔는진 모르나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시끄럽네. 처리해.”
귓구멍을 후비던 기사가 말하자 그 옆의 기사가 말을 박차고 나에게 쇄도했다.
기마 돌격에 힘을 빌려 일격에 내 목을 날리려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그런데···너무 느렸다.
이미 익스퍼트에 오른 내 시야에 말의 움직임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으니.
횡으로 휘둘러지는 일격을 가볍게 피한 후 옆으로 뛰어서 녀석의 왼쪽 겨드랑이에 천마검을 쑤셔 넣어줬다.
푹!!
심장을 부수는 촉감과 함께 복면 기사가 그대로 말에 떨어져 절명했다.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제야 나는 이들이 꾸며놓은 무대에 참가자가 됐음을 실감했다.
“난 분명히 봐주려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괜히 도망치지 마라. 잡기 귀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