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탈환 : 방문한 망나니
다음날.
캠벨을 대동하고 피터를 만나러 갔다.
“꼴이 말이 아니군.”
어제 분명 제대로 대접받고 쉬었음에도 눈 밑이 퀭한 것이 잠을 설쳤음이 분명했다.
“괜찮습니다. 제 영지를 되찾고 부모님의 원수를 갚아야지요. 도와주시는 로이드 후작가에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오늘 피터를 만난 이유는 알버스 영지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귀족인 그는 최고의 정보원이자 길잡이다.
“알버스 영지가 서부에는 힐튼 백작가. 동부에는 로이드 후작가. 남부에는 자유도시 리앙. 세 거대세력과 경계를 맞댄 지역적 요충지란 사실은 잘 아시지요.”
“그렇다.”
“그러다 보니 저희는 항상 외침을 경계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문의 조상님들은 알버스 성을 아주 튼튼하고 함락하기 어려운 장소에 지어놨죠.”
천혜의 요새라.
조금 호기심이 들었다.
“어떤 식인지 궁금하군.”
“직접 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요새의 뒤편은 깎아지른 절벽입니다. 설령 익스퍼트의 고수라도 들키지 않고 등반이 불가능한 천장단애지요.”
“정면은?”
“5m가 넘는 성벽이 물샐틈없이 공간을 가로막고 있으며 아래에는 깊은 해자가 파여 있습니다.”
저 정도면 성이 아니라 요새인데.
단순히 머릿수로 들이받았다가는 큰 출혈이 예상된다.
“수비 병력은 어떻게 되지?”
“원래는 삼백 명 정도인데 최근 영주 자리를 빼앗은 숙부가 이곳저곳에서 병사를 긁어모아서 오백은 될 겁니다. 하지만 얕보시면 안 됩니다.”
“다크서클 귀족님의 말대로라면 오백으로 열 배의 병력인 오천도 능히 막을 수 있겠군.”
마지막은 캠벨의 말이다.
캠벨도 북부 블랙캐슬에서 근무해보고 성안에서 몬스터들의 공세도 버텨본 레인저다.
철옹성에서 지리적 이점을 깔고 싸우는 게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부단장, 조금 곤란해진 것 같은데? 오천을 어디서 땡겨와?”
섣불리 대답하진 않았다.
오천을 모아도 문제다.
요새에 그대로 들이받아서 병사가 상하면 그 또한 문제이기에.
고민하고 있던 차에 똑똑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북부의 레인저복 대신 오랜만에 하녀복을 정갈하게 갖춰 입은 시온이었다.
“도련님.”
“왔나.”
시온에게는 로잘린과 필립의 동향에 대해서 따로 알아보라 했었다. 이곳에 온 걸 보니 모종의 수확을 거둔 모양이다.
“어떻게 됐어?”
“그들이 고용한 용병단을 알아냈습니다. 블루호크, 즉 푸른매 용병단입니다.”
“푸른매 용병단!!”
캠벨의 놀란 목소리.
“알고 있나?”
“물론이지. 내가 한때 용병판에서 굴렀잖아? 왕국에서는 중형급 용병단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생각보다 탄탄한 조직이다.”
시온이 캠벨의 말을 보충했다.
“오랜만에 돼지가 올바른 소리를 하는군요. 푸른매 용병단원은 약 2천가량. 그쪽 단장이 엄해서 매일 같이 훈련을 시킨답니다. 영지전 경험도 많아서 웬만한 어중이떠중이 용병단보단 훨씬 강하고요.”
“꽤 자세히 알아왔군.”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님께서는 친정인 몰티 가문의 기사와 병사 1천도 동원했습니다.
총 3천명인가.
영지전에 동원되는 것치곤 상당한 대군이다.
“부단장, 지금이라도 영지에 공고문이라도 낼까? 황혼의 대간부를 척결한 영웅과 함께할 용감한 젊은이를 찾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무식하게 정면승부해서 될 일이 아니다. 상처뿐인 승리는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대신에 나는 알버스 성 한쪽이 깎아지른 절벽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피터, 영주가 거주하는 내성은 알버스 성 어디쯤 있지?”
“내성이니 당연히 가장 안쪽에 있지요. 성 자체가 경사진 비탈면에 지어진 터라 내성으로 갈수록 위치가 높고 그 뒤편은 바로 절벽입니다.”
저는 절벽 아래 바다를 보며 매일 같이 상념에 잠기곤 했지요. -라는 말까지 피터가 덧붙인다.
“좋아. 정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떠오른 겁니까?”
모두의 집중된 시선.
이를 느끼며 천천히 입을 뗐다.
“우리는 절벽을 오른다.”
“!!”
“네에!?”
알버스 성의 지형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절벽에 집중했다.
비록 피터는 깎아지른 절벽이라고 했으나 나는 그보다 더한 곳을 오르락내리락 한 경험이 있다.
바로 북부의 크레바스.
드래곤 레어와 황금가지가 잠들어있던 곳에서 나는 순보와 드루이드 스킬을 이용해서 절벽을 돌파했었다.
그랬기에 알버스 성의 지형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모르는 피터와 캠벨이 눈이 휘둥그레 커진 채 경악한다.
“불가능합니다. 절벽 아래는 바다입니다. 그것도 상시 파도가 높고 암초가 가득한 바다죠. 배가 정박할 곳 자체가 없습니다.”
“나도 부단장이 그동안 놀라운 짓을 벌였지만 이번엔 좀 무리 같아. 무리하게 절벽을 오르려 했다간 병사들만 상할 거야.”
손사래치는 두 남자와 달리 시온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시온, 오늘따라 얌전하군.”
나를 빤히 응시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저는···가능하다고 봅니다.”
“어째서?”
“도련님께서는 특별하시니까요. 북부에서 보여준 능력을 통해 절벽도 오르시지 않을까요?”
“!!!!”
과연 시온인가.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이제는 대충 견적이 나오나 보다.
“만약 절벽을 확정적으로 오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병사가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절벽만 오르면 내성이니까요. 영주만 잡으면 끝나는 시합입니다.”
머리가 비상한 시온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말해주었다.
결국 이건 체스다.
킹을 먼저 잡는 쪽이 이기는 게임.
로잘린과 필립이 가지고 있는 기물은 한 칸씩만 전진하는 폰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기물은 상하좌우대각이 모두 가능한 퀸이나 마찬가지.
적들이 거북이처럼 전진할 때, 우리는 매처럼 날아서 우두머리만 낚으면 상대팀은 바보가 된다.
“시온의 말이 맞아. 그런 의미에서 다들 준비해둬. 당장 이틀 후에 출발할 테니까.”
“부단장, 설마···아니지?”
“맞아. 갈 사람은 여기 있는 사람들. 시온과 캠벨, 나, 피터까지다. 우리 넷이서 알버스 성을 함락시킨다.
* * *
회의를 마친 나는 시온과 캠벨을 대동한 채 말을 달렸다.
목적지는 푸른매 용병단었다.
위치는 시온이 미리 알아놨다.
영지전 때문에 알버스 남작령 근처에 본진을 차리고 있단다.
달리던 와중에 내내 심각한 얼굴로 있던 시온이 내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왜.”
“피터를 믿으십니까? 우리와 했던 밀담을 마님과 필립 공자님에게 발설할 수도 있습니다.”
시온의 걱정이 이해 갔다.
피터로서는 둘 중 누구의 도움을 받든지 간에 영지만 탈환하면 그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넷이서 성을 점령하자는 전직 망나니의 헛소리보다는 확실한 3천 병력을 가진 로잘린 측이 더 신뢰가 갈 것이다.
“아무리 도련님께서 피터의 목숨을 구해주셨다지만 세상에 꼭 은원을 지키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맞는 말이다.”
“제가 따로 감시해볼까요?”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밑져야 본전이고 손해볼 일 없다.
무엇보다 북부에서 선량한 인상의 빅터에게 제대로 당한 뒤로는 돌다리는 두들겨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적당히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따라붙어.”
“알겠습니다.”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푸른매 용병단은 평원 한가운데에 막사를 치고 지내고 있었다.
인원이 2천이라더니.
직접 보니 생각보다 규모가 상당했다.
마침 식사시간인 듯 막사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입구로 가니 지키고 있던 문지기 둘이 창을 X자로 교차시키며 진로를 막았다.
“누구냐! 이곳은 푸른매 용병단의 본진! 신원을 밝혀라.”
“나는 로이드 영지의 정당한 후계자 고든 로이드 후작의 차남 헤논 로이드라고 한다. 단장과 미리 약속되어있으니 안쪽에 전하도록.”
정체를 드러내자마자 문지기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문지기 한 명이 들어갔다.
주위를 휘휘 둘러본 캠벨이 팔짱을 꼈다.
“뭔가 구린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북부에서 제대한 뒤로 남부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내 정체를 밝히면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황혼의 대간부를 처치하고 유명세를 떨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후작가의 망나니로 유명했던 자가 어떻게 그런 업적을 세울 수 있겠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따라왔다.
그러나 푸른배 용병단원들의 눈빛은 의심도, 놀람도 아니었다. 실실대는 꼬라지가 이미 우리가 올 줄 아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께서는 그런 약속을 하신 적 없으시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예상대로군.
“시온, 약속을 잡지 않았나?”
“맞습니다. 용병단장에게 서신을 보냈고 오늘 오후쯤에 보자는 답신까지 받았습니다.”
분명 약속을 했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한다라. 대놓고 우리를 물 먹이고 문전박대한 것이다.
“흐흐흐.”
“대충 알아들었으면 가시지요.”
“없던 약속을 만들어내시는 걸 보니 황혼의 대간부를 처치했다는 소문도 꾸며낸 거짓말이 아니실지?”
스윽.
시온이 외투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비수를 꺼내려는 그녀를 제지했다.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해주겠나? 우리는 분명히 약속을 잡았다네.”
“···확인해드리지요.”
병사가 재차 막사 안으로 들어가더니 10초도 안 지났는데 튀어나왔다. 누가 봐도 전달도 안 하고 다시 나온 모양새다.
“약속이 없답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주겠나?”
“아이씨···”
병사들의 인상이 험악해진다.
“누굴 똥개로 아나···우리가 없다면 없는 거지, 자꾸 확인을 처해달래. 아니면 우리 푸른매 용병단이 우스워 보이나?”
“그런 말은 안했다만.”
“귀족 나으리니 곱게 보내드리는 겁니다. 보아하니 거짓말을 상당히 좋아하시던데, 건실하게 사십쇼.”
목에서 우드득 소리를 내며 킬킬대는 병사들을 보던 캠벨이 고개를 갸웃한다.
“부단장, 왜 맞고 싶어서 용쓰는 놈들을 봐주는 거지?”
참고로 캠벨의 목소리는 상당히 큰 편이다. 애초에 딱히 조용히 말하지도 않았고. 캠벨의 말을 들은 문지기들이 건수를 잡았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넌 뭐냐?”
“나? 평범한 용병.”
“그으래?”
잘됐다는 듯 다가오는 문지기들.
캠벨이 나를 바라본다.
그저 어깨를 으쓱여줬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는 개뿔! 주인 잘못 만난 네 신세를 탓해···억!”
짜악!
경비병이 몸이 훨훨 난다.
캠벨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에 뺨을 맞은 녀석은 그대로 푸른매 용병단의 목책 문을 부수고 안으로 나뒹굴었다.
“누구냐!”
“습격이다!”
“적인가!”
우르르 나온 용병들.
대략 서른 명이다.
그들은 강제로 밀고 들어온 우리를 보고 고민 않고 병장기를 뽑았다.
“조져!”
“와아아!!”
힘찬 함성과 함께 덤벼든 경비병들은 역시나 힘찬 비명과 함께 날아갔다.
짜악! 짝! 짝!
원샷원킬.
북부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익스퍼트에까지 오른 캠벨은 검조차 뽑지 않았다.
불꽃 싸대기가 발휘될 때마다 모든 이가 예외 없이 개구리처럼 뻗어버렸다.
“웬 놈이냐! 어떤 놈이 감히 우리 푸른매 용병단 입구에서 소란을 피우는가!”
대충 상황이 정리될 때쯤 입에 빵가루를 묻힌 건장한 체격의 용병 하나가 인상을 잔뜩 쓰며 다가왔다.
“오, 저 녀석은 좀 세보이는군요.”
시온의 나지막한 한마디.
가늠해 보니 대충 소드 유저 상위.
예전에 죽였던 가죽수집가 게빈 정도는 하는 놈이다.
“경계조장! 조장이 왔다!”
“너흰 이제 뒤졌다.”
용병들이 기가 살아서 아무 말이나 지껄여댔고, 경계조장이라고 불리는 용병이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너희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잘못 들어왔다. 이렇게 일을 벌여놨으니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경계조장이 캠벨에게 뛰어들었다.
캠벨이 기계적으로 싸대기를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슬쩍 고개 숙여 피한 경계조장이 캠벨의 아래턱을 향해 검을 그었다.
채애앵!!
금속성의 소음.
캠벨의 검집에서 검이 뽑혀있다.
번개같이 발검한 그의 검이 사각에서 들어온 일격을 막은 것이다.
싸대기가 빚나가자 캠벨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린다.
“크크큭!! 크핫하하하!!!!”
캠벨의 우렁우렁한 광소가 평원을 울렸다. 이를 들은 나와 시온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화가 났군.”
“화가 났네요.”
“저런 하찮은 놈을 상대로 검을 뽑아들어서 자존심이 상했겠지.”
저 웃음은 폭풍전야의 웃음소리.
나도 처음 캠벨을 만났을 때 저 웃음과 함께 주먹을 맞고 숙소 밖으로 한참 밀려 나갔다.
과연 경계조장은 어떨까.
“아까부터 싸우다 말고 뭘 그렇게 처웃나! 아주 그냥 주둥이를 꿰메···으윽.”
드드드득!
맞부딪친 검이 후들거린다.
캠벨의 오우거식 괴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경계조장의 발걸음이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나중에는 아예 캠벨이 한손만으로 두손검을 잡은 경계조장을 힘으로 밀어붙이자 압도적인 힘 차이를 느낀 상대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건···말도 안 돼. 넌 오크냐?”
“저런.”
그 말을 했으면 안 됐는데.
콰아아아앙!!!
한손검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로 휘갈긴 캠벨의 주먹에 경계조장이 하늘을 훨훨 날다가 떨어졌다.
믿었던 조장이 힘도 못 써보고 패배하자 지켜보던 병사들이 대경했다.
“이럴 수가.”
“조장님이 상대조차 안 되다니···”
“저 녀석은 오크가 분명해.”
“후작가의 망나니가 사실은 몬스터를 부리는 흑마법사가 아닐까.”
캠벨의 얼굴이 시뻘게진다.
이러다가 오늘이 푸른매 용병단 간판 내리는 날이 아닐까 싶었으나,
“모두 멈춰라!”
주위를 내리누르는 무거운 기세에 캠벨을 포함한 모두의 움직임이 멎었다.
흉흉한 기운을 흩뿌리며 들어오는 자는 얼굴에 흉터가 있고 늑대가죽을 어깨에 걸친 중년 사내였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저 사내가 이곳의 우두머리라고.
나한테 다가온 남자는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미안하군. 부하들이 장난을 친 모양일세. 푸른매 용병단장 라칸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