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44화 (44/200)

6장 탈환 : 배려한 망나니

“결국 그렇게 됐군.”

시온에게서 피터의 배신을 전해 들은 나는 씁쓸한 감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딱히 비난할 마음은 없었다.

피터 또한 나름의 생존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고 그게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다.

반면에 캠벨은 화가 나서 콧김을 씩씩 뿜어댔다.

“육시럴 놈이! 목숨을 구해졌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북부에는 없는 파렴치한 놈이다. 부단장, 당장 가서 머리통을 날려버리자.”

“당신은 정녕 바보입니까? 대놓고 피터를 처리해버리면 저희가 피터의 배신을 알아챘다는 사실을 필립 공자 쪽에 홍보하는 꼴입니다.”

그나마 둘 중 하나는 머리가 돌아가서 다행이다. 시온까지 캠벨과 비슷한 지능이었으면 상당히 피곤했을지도.

“시온의 말이 맞아. 피터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건 시기상조다.”

“하지만 도련님, 캠벨의 말도 틀린 건 아닙니다. 피터는 우리와 함께 알버스 성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습니다. 등 뒤에 배신자를 두고 움직이긴 힘듭니다.”

그녀의 걱정이 일리가 있었다.

“그에 관해선 따로 계획이 있다.”

“알겠습니다.”

여태껏 잘해왔기에 캠벨과 시온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해결책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피터에게 돌아올 기회를 한 번 줄 생각이었다.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그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 * *

북부에서 제대한 이후.

내성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하인들은 알버스 성 탈환을 걸고 벌어진 임시 후계자 경쟁에 대해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러다 보니 몇몇 이들은 나와 대화를 나누다 찍힐까봐 필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주변에 얼씬도 안 했다.

나로서는 편했다.

누구의 간섭과 방해도 받지 않고 내성에서 자유롭게 생활했으니 말이다.

현재 나는 텅 빈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영지전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벌써 6시간째 고련중.

몸의 근육은 선명하게 갈라져 있었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바닥을 적셨다.

동시에 의식으로는 천마검과 대화를 나누었다. 천마는 한 시간 정도 내 부족한 점을 짚어주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넋두리로 알뜰하게 채웠다.

“북부에서 제대해서 아쉽군요.”

-어떤 부분에서 말이냐?

“아침마다 카리나님과 검을 맞댈 기회가 얼마나 귀중했는지 느껴집니다.

-서방 대륙은 고수에게 지도 대련을 받을 일이 많지 않더구나. 본좌가 있던 곳은 사부에게 매일 같이 두들겨 맞았다.

“가끔씩이라도 그런 고수와 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캠벨로는 부족한 감이 있어서요.”

-네놈은 생각하는 방식이 딱 우리 쪽이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펼쳐놓은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귀를 쫑긋 세우니 두 개의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시온의 익숙한 발소리인데 다른 하나는 가늠이 안 된다. 발소리 자체도 워낙 가볍고 미세했고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더 애매했다.

“도련님, 저 왔습니다.”

분명 두 명이 온 걸로 느꼈는데 막상 보이는 건 시온 혼자다. 왠지 모르게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클클클···

천마가 웃고 있다.

왜인지 불길하다.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휘익! 챙!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칼을 갖다 대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불과 1초 전까지 내 뒤통수가 있었던 곳이다.

누가 이런 비겁한 기습을 했는지 쳐다보니 놀랍게도 정갈한 집사복을 입은 노집사 세바스찬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용서해주십시오. 딸자식에게 도련님이 익스퍼트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서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시온의 아버지이자 후작성의 집사장인 세바스찬.

그는 수십 년 간 아버지 로이드 후작을 곁에서 지켜온 충복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집사지만 제국에서 이름 좀 날리는 어쌔신이었다는 건 알 사람은 다 안다.

실제로도 로이드 가문의 숨겨진 비밀 병기이자 은퇴한 소드마스터인 후작과 함께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작정하고 숨긴 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니, 정말로 경지에 오르셨군요.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세바스찬은 그동안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가문 내에서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직접 업어 키운 친딸 시온이 나와 한배를 탔으므로 사람인 이상 어느 선까지는 우호적이라 봐야 했다.

“고맙군요.”

“늙은이는 주접을 모두 떨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참고로 오늘 후작님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아침을 거르신답니다. 이 얘기를 전달하고자 왔습니다.”

몸을 돌려 걸어가는 세바스찬.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집사장.”

“무슨 일이시죠?”

“부탁이 있습니다.”

“하명하시지요.”

세바스찬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지만 드루이드의 직감만은 그 속에 숨겨진 칼날 같은 예리함을 잡아냈다.

“집사장과 대련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겨뤄보고 싶었다.

호승심이랄까.

최근 익스퍼트에 오르고 초급 드루이드가 되면서 나보다 고수인 사람과 일대일로 제대로 겨뤄본 적이 없다.

제국 최고의 어쌔씬이었다는 세바스찬에게 후회 없이 부딪쳐보고 현재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저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혹시 바쁘십니까?”

“아닙니다. 허나 제가 쓰는 기술들은 대부분이 살인기라 대련에는 적합지 못합니다. 도련님에게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군요.”

세바스찬이 당혹한 기색으로 간접적인 거절 의사를 내뱉었다.

노집사가 대련을 거부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싶어서겠지.

그렇기에 그가 나와 대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꺼냈다.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습니다. 저희의 대련을 시온이 지켜보게 하고 싶습니다.”

“!!!”

친딸의 이름이 거론되자 세바스찬의 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시온도 놀란 표정이다.

“시온, 많이 배워라.”

짧은 한마디였으나 안에 내포된 뜻을 바로 짐작한 시온이 고개를 숙였다.

최근 시온은 벽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벽을 넘었고 캠벨 또한 니플헤임과의 전투 때 영감을 얻어 벽을 넘었으니 다음 차례는 그녀였다.

그녀 또한 북부에서 오랜 근무로 탄탄한 경험치를 쌓았고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비수를 휘둘렀으며 평상시에도 수련에 상당한 시간을 쏟았다.

문제는 벽을 마주한 이후로는 성취가 정체되었단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잠을 쪼개가며 수련시간을 늘린 것을 눈치채고는 있었다.

하녀로서 직업의식이 투철한 그녀가 내 앞에서 피곤한 기색을 티 내진 않았으나 매일을 같이 붙어있는데 어찌 힘듦을 모를까.

그런 시온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의 상위호환이자 선배격인 세바스찬이 나 같은 드루이드와 어떻게 싸우는지 말이다.

‘대련을 관전하며 앞으로 어떻게 강해질지 실마리라도 얻으면 좋을 일이다. 겸사겸사 나도 경험치를 쌓고 말이지.’

눈치가 귀신인 세바스찬이 내 배려를 모를 리가 없다. 친딸이 걸린 문제에 결국 노집사가 헛웃음을 짓고 만다.

“이것참. 도련님에게는 못 당해내겠군요. 오랜만에 옷을 좀 벗어야겠습니다.”

세바스찬이 시커먼 집사복을 벗자 시온이 자연스레 이를 받아주었다. 암묵적인 승낙에 나도 땀을 한차례 털어내고 검을 들려고 했는데···

피잇!!

비수가 내 뺨을 스친다.

스친 곳에서 옅게 상처가 나며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대련이 끝났군요. 독을 발라놨으면 이미 도련님은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치사하게 이 영감탱이가 시온에게 옷을 건네는 척하면서 그 속에 있던 비수를 날렸다.

일말의 방심을 유도한 치명적인 일격.

이제야 살수의 싸움이 검사와 어떤 식으로 다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1:0입니다. 5판 3선으로 가시죠.”

“도련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참고로 조금 전과 같은 공격은 안 통할 겁니다.”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죠.”

그와 함께 세바스찬이 주위 환경에 녹아들었다. 보고도 믿겨지지 않을 광경이었다.

“물도마뱀 발걸음?”

“아닙니다. 보호색이라는 스킬이죠. 여기에 물도마뱀 발걸음을 섞으면 이렇게 됩니다.”

스팟!

옆구리에 섬뜩한 감각.

어느새 옷깃이 뜯어져 있다.

만약 내가 독이 통하지 않는 드루이드가 아니었고 단검에 맹독이 발라져 있었다면?

“···2:0.”

“한 점 남았군요.”

“시온에게는 왜 이런 좋은 스킬을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세바스찬이 시온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이 느껴졌다.

“가르친다고 되는 스킬이 아닙니다. 많이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해야 하지요.”

내가 봐도 범상찮은 기술이다.

그래도 시온은 그동안 놀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다.

오늘의 대련을 양분 삼아 보호색 스킬의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실소가 나왔다.

이대로 허무하게 질 순 없다.

전력을 다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기대하지요.”

다시 녹아든 세바스찬.

오감을 넘어선 육감을 곤두세웠다.

천마 또한 나를 도왔다.

-오른쪽 뺨

휙!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자마자 귓가에 살벌한 바람 소리가 들린다.

“호오? 이걸 피하셨군요.”

“제대로 간다 말했잖습니까!”

[우드 컨트롤을 발휘합니다.]

[상대를 속박합니다.]

세바스찬은 내가 드루이드임을 알고 있으니 거리낌 없이 땅에서 나무를 피워올렸다.

보호색으로 위장해도 천마검은 기가 막히게 위치를 찾아주었다. 해당 위치에 바인드를 쓰자,

“!!”

나무뿌리에 발목이 묶인 세바스찬의 보호색이 풀렸다. 놀란 표정의 그를 향해 검을 힘껏 휘둘렀다.

파앙!

과연 노집사의 움직임은 기민했다.

빠르게 뿌리를 제거하고 날렵하게 내 일격을 피했다.

그야말로 회피의 정석.

그러나 그런 세바스찬조차도 이어지는 연쇄공격을 예상하진 못했다.

스팟

정갈한 집사복의 한쪽이 뜯어졌다.

내가 던진 천마검이 그의 옷을 스친 것이다.

검 던지기는 북부에서 익힌 기술이었다.

명예를 부르짖는 기사들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만 북부에서는 살기 위해서는 검이 아니라 고블린 똥도 던졌다.

게다가 나는 드루이드였기 때문에 검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치명적인 스킬을 구사할 수 있었다.

반면에 드루이드와의 전투가 처음인 세바스찬은 검사가 주무기를 버릴 줄은 몰랐는지 제대로 일격을 먹어버렸다.

크게 놀란 집사가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늙은 아저씨가 취향은 아니어서 어깨를 으쓱해주었다.

“검 던지는 사람 처음 봅니까?”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전투라니. 늙은이의 바람보다 훨씬 더 성장하셨습니다.”

“2:1입니다. 다시 시작하죠.”

대처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아울베어를 처치했던 스킬을 시전하여 몰아치기 시작했다.

[스톤 컨트롤을 사용합니다.]

[상대롤 저격합니다.]

땅에서 뾰족하게 솟아오른 돌이 세바스찬의 진로를 방해했다.

상상을 뛰어넘은 드루이드 스킬 활용을 목격한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엄청나군요.”

당황하면서도 뾰족하게 솟아오른 스톤 랜스를 발판 삼아 노련하게 후퇴한다. 그런 세바스찬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이다. 사정없이 몰아쳐서 위협적인 스킬인 물도마뱀 발걸음을 공격용이 아닌 회피용으로 쓰게 해야 해.’

결국 전투는 소모전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연무장 바닥을 죄다 헤집어놓으며 세바스찬을 묶으려 노력했고 빈틈을 보일 때마다 스톤 랜스를 찔러넣었다.

세바스찬은 30분 넘게 도망다녔다.

나중에는 다시 천마검을 잡고 휘둘렀다.

그렇게 진행되던 치열한 대련은 내 교감력이 모두 떨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띠이잉

교감력이 떨어지자 현기증이 나며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좁아졌다.

순간적으로 휘청한 틈을 포착하고 번개같이 쇄도한 세바스찬의 단검이 내 앞머리를 살짝 잘랐다.

나풀대며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끝으로 대련이 끝났다.

스코어는 3:1이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내 대답을 듣고도 세바스찬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입고 있던 집사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호흡도 살짝 흐트러진 채였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쫓는 나뿐만 아니라 도망치던 세바스찬 또한 편한 상태는 아니었음을.

비록 지긴 했으나 가문의 장로급에 해당하는 상대를 무려 반시간 동안 곤란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서 귀한 1점을 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저도 많이 늙었군요. 참으로 괄목상대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도련님과의 대련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또 상대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럼 물러가 보지요.”

고개를 숙인 세바스찬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소드마스터를 목전에 둔 노집사다.

그런 그에게 일방적인 가르침을 받는 하수가 아니라 적어도 상호 피드백이 될 수준이란 말을 들었다.

“아버지가 호흡이 흐트러진 모습은 난생처음 봅니다...”

시온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나친 관찰의 여파로 그녀의 눈은 아직까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마치 시험을 앞두고 삼일밤을 샌 수험생 같았다.

“시온, 들어가 쉬어라.”

“괜찮습니다. 연무장을 치워야지요.”

“내가 치우겠다. 당장 이틀 후에 알버스 성에 가야 하니 체력을 비축해두거라. 이건 명령이다.”

쉬면서 오늘 대련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라는 배려였고 이해력 빠른 시온도 알아듣고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푸른매 용병단장과 약속한 사흘이 성큼 다가왔다.

* * *

알버스 성.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가 삼면을 물샐틈없이 둘러쌓고 있다. 심지어 뒷면은 깎아지른 절벽.

가히 철옹성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성벽에서 형을 처내고 피터를 죽이려다 실패한 새로운 알버스 영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결국 와버렸군.”

말로만 들었을 때보다 직접 눈으로 본 3천 병력은 체감상 훨씬 많아보였다. 옆에 있던 책사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저희 요새는 절대 정면으로는 못 뚫습니다. 게다가 힐튼 가에서 원군도 오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원래는 긁어모은 5백의 군사로 푸른매 용병단+로이드 가문 연합군 3천을 막아냈어야 했으나 바로 어제 힐튼 가에서 3백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노들이 대부분인 자신의 병사에 비해 힐튼 가의 병사들은 장비도 우수했고 무기에도 피를 많이 묻혀본 티가 났다.

5백으로도 막을만한데 정예병 3백이 추가되었으니 겨울이 지날 때까지 요새 함락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영주님! 큰일났습니다!!”

집사장이 숨이 넘어갈 듯 달려오고 있다. 알버스 영주는 듣지 않고도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또냐?”

“그렇습니다.”

“그쪽으로 가마.”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황급히 내성으로 들어온 영주는 안에서 벌어진 참상을 보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짜악! 짝!

고통을 못 이기고 기절한 하녀는 얼마나 뺨을 맞았는지 얼굴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저 정도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서도 평생 흉터로 남으리라.

“호르만 경.”

하녀에게 무참한 손찌껌을 한 사람은 힐튼 가에서 3백의 군사를 이끌고 온 기사 호르만이었다.

익스퍼트도 그냥 익스퍼트가 아니라 완숙에 오른 기사로 실력 하나만큼은 검증된 인재였다.

물론 상당한 실력에 반비례하는 인성도 유명했다.

“오! 영주! 오셨소이까? 그렇지 않아도 불만이 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랫사람 교육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하녀가 차를 따르는 간단한 일조차 못해서 제 옷이 젖어버렸습니다.”

그게 아니겠지.

하녀의 신체 부위를 만지려다가 그녀의 거부하자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했을 게 분명했다.

한두번도 아니고 고작 온 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도 그 행패가 눈 뜨고 못 봐줄 수준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아쉬운 쪽은 이쪽인걸.

영주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좋아요. 내 영주를 봐서 이만 넘어가리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관리 좀 잘해주세요.”

“명심하지요.”

알버스 영주가 분을 삼키며 하녀를 데리고 나가고.

혼자 남은 호르만 경은 식탁 위에 술병을 집어들고 벌컥벌컥 마신다.

“시팔! 이런 촌구석 영지에 겨울 동안 붙어있어야 한다니. 하여간 새로 온 그 책사 놈이 문제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갑작스레 힐튼 가로 영입된 책사의 강력한 주장으로 백작가에서도 큰소리 내는 자신이 시골로 쫓겨났다.

웃기지도 않은 중절모에 가면을 쓴 것도 수상해 죽겠는데 하는 짓까지 마음에 안 든다.

그는 호르만을 이곳으로 보내면서 뜬금없는 당부를 했다.

‘듣기로는 로이드 가문의 헤논이 절벽을 올라 영주성을 공략한다고 합니다. 혹시 모르니 그쪽을 예의주시해주시지요. 그래도 황혼의 대간부를 척결한 영웅이 아닙니까? 숨겨진 비책이 있을지도요.’

“비책은 개뿔! 실제로 와서 여길 봤으면 그따위 개소리는 못 지껄이지.”

여기 오자마자 호르만은 절벽부터 확인했다. 그리고는 실소했다. 90도가 넘어가는 경사의 절벽은 자신조차 등반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래. 극악의 확률을 뚫고 올라왔다고 치자. 혼자서 뭘 어쩌겠는가? 이러니 호르만으로서는 새로운 책사가 자신을 물 먹인다고 볼 수밖에.

“헤논이라고 했던가? 황혼의 대간부를 처치했다는 허풍을 치고 다니는 놈. 그럴 리가 없지. 차라리 절벽을 올라왔으면 좋겠군. 눈에 보이자마자 창으로 꿰매주마.”

중얼거리던 호르만이 거칠게 술병을 잡아들고 더는 알코올이 안 나올 때까지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의 지루함을 달래줄 녀석은 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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