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탈환 : 다녀온 망나니
언제나 그렇듯 모든 전쟁은 싸울 때보다 끝난 이후가 훨씬 복잡한 법이다.
성에 들어갔더니 해결할 일이 산더미였다.
이런 상황에서 푸른매 용병단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필립의 영지 병력을 막아줬을 뿐만 아니라 적들이 물러난 후 알버스 성에 들어와서 불안정한 치안을 잡아주었다.
영지전을 자주 겪어봐서인지 쓸데없는 약탈이나 방화 따위도 없었고 뒷처리 또한 깔끔했다.
“신세를 졌군요.”
급한 일이 일단락되자 용병단장 라칸을 불러서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크핫하하!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네.”
호탕하게 웃는 라칸의 앞에는 금빛이 새어나오는 가죽 주머니가 있었다.
저번에 못 줬던 고대금화 주머니였다.
일전의 만남에서 보수를 거절했던 그는 이번에는 받을 만했다 생각했는지 슬쩍 금화를 챙겼다.
그러면서도 금화 하나를 꺼내서 요리조리 돌려보며 연신 신기함을 표했다.
“사실 이런 금화 쪼가리가 뭐 대수겠는가. 우리 사이가 굳건히 이어졌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하지.”
아무리 봐도 라칸은 장사꾼 기질이 다분하다.
익스퍼트에 달하는 실력만 아니었어도 당장 검을 내려놓고 어디 상단이라도 꾸려보라 권했을 거다.
“그래도 현재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 것 같네. 기존의 알버스 기사와 영주민들이 자네를 편하게 영주 대리라 부르던데.”
성을 점령하고 난 이후.
나는 모든 사람을 불러놓고 알버스 영주 대리에 올랐다.
형식적으로는 엘든 국왕으로부터 관할령 내 서임권을 위임받은 로이드 후작의 허가가 있어야 올바른 절차다.
그러나 당장 혼란스러운 성 내 민심과 통치권 단일화를 위한 명목으로 임시영주가 되겠다고 했다.
기존의 알버스 영주가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내게 양도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당연하게도 모든 이들이 순순히 내 질서에 녹아들진 않았다.
성문을 열 당시에도 알버스 성은 세 갈래로 의견이 나누어져 다투고 있었단다.
백기를 내걸고 다시 로이드 가문으로 돌아가자는 항복파.
힐튼 가의 추가 응원군을 기다리며 끝까지 싸워보자는 농성파.
영주가 납치당한 상황에서 모든 총력을 기울여 영주부터 구해야 한다는 구출파까지.
어지럽게 얽혀든 이권을 정리하기 위해 거의 일주일간을 잠도 안 자고 뛰어다녀야 했다.
그 결과.
현재 성 내 광장에는 농성파와 구출파 우두머리의 목이 효수되었다.
남은 이들은 뒤통수 칠 배짱도 없는 놈들이거나 그날 절벽에서 내가 펼친 압도적인 무위를 4DX로 감상한 녀석들이라 나를 따르는 게 이득이라 판단했다.
“내 도움도 도움이지만 무엇보다 공자의 출중한 능력 덕분일세. 이 바닥에 수십 년 구르면서 온갖 영지전은 다 경험해봤어. 그런데 이렇게 빨리, 게다가 큰 피해 없이 깔끔하게 영지 하나를 장악한 경우는 공자가 처음이네.”
라칸은 순수하게 감탄한 표정이다.
그런 그에게 추가적인 임무를 맡겼다.
“알버스 성에 계속 주둔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합당한 보수만 있으면 못할 것도 없지. 우리는 이미 이거 아닌가?”
금이빨이 보이도록 씩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꼴이 왠지 모르게 얄밉다.
그래도 저런 타입을 잘 안다.
자기 딴에는 사람을 구별 없이 대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엄청 사람 가리는 성격이다.
한 번 인정한 사람에 한해서는 제법 단단한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장기 계약을 이어나가는 타입.
보아하니 난 저 아저씨에게 꽤 괜찮은 인간으로 분류된 모양이니 한동안 안심하고 알버스 성을 맡겨도 될 듯했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무려 알버스의 영주 아닌가?”
“영주 대리입니다만.”
“곧 영주님이 되시겠지. 말 한마디로 성을 무너트린 소식이 일파만파 퍼질 테니 말이야.”
이후로도 라칸 아저씨의 수다는 쭉 이어졌다.
알버스 영지가 규모와 면적이 상당해서 밀 생산량도 준수한 편인데 지리적 요충지라 교역량도 많고 사람도 많은 편이라고.
로이드 산하 영지 중에 상위권에 드는 알짜배기 땅이라고.
이런 땅을 통째로 먹었으니 밥 안 먹어도 배부를 거라나.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픕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젊은 놈이 벌써부터 그렇게 고지식하면 여자들이 안 좋아한다?”
“이야기가 결국 그리로 새는군요.”
라칸의 말상대를 대충 해주다 그를 돌려보냈다.
계약을 맺어놨으니 이제 그는 내가 후작가 본성으로 돌아가도 알버스 영지에 남아서 딴생각하는 놈이 없도록 만들 것이다.
유사시에는 즉시 징발이 가능한 2천 병력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동안 돈은 넘쳐나는데 세력이 부족했던 나에게는 매우 든든한 존재였다.
그 날 저녁.
나는 조그마한 상선 하나를 도깨비 바다에 띄웠다.
맞은편에는 요 며칠 사이에 급속 다이어트를 했는지 뚱뚱한 뱃살이 한결 얇아진 전 알버스 영주가 있었다.
“정말로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군.”
그랬다.
오늘은 에브라 알버스를 풀어주는 날이다.
그는 내가 영주 대리가 된 이후로 쭉 방 안에 연금되어 있었다.
“당신이 빨리 사라져줘야 다시 힐튼 가로 붙으려는 어중이떠중이들도 입을 다물 테니까요.”
“날 놓쳤다고 보고하면 후작에게 자네의 이미지가 깎여나갈 수도 있네. 그래도 괜찮은가?”
“본인 걱정부터 하시죠.”
중년의 영주는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과욕을 부렸던 모양이야. 이복형제라도 형님을 죽이고 조카를 없애려고 했으니. 그 벌을 받는 거겠지.”
아저씨의 넋두리는 여기까지.
상선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배에는 사치만 안 부리면 평생 먹고 살만한 재산과 입 무거운 하인과 하녀 셋을 넣었습니다. 남부의 자유도시 리앙으로 가세요.”
리앙은 신분제의 구속이 희미한 곳이니 출신을 숨기기도 쉽다. 그곳이라면 이 아저씨의 도피처로 딱이겠지. 알버스 영지와도 가까우니 이동도 문제없다.
“자비를 베풀어줘서 고맙네.”
“뭘 고맙습니까? 난 당신의 영지를 빼앗은 사람입니다.”
“아닐세. 자네의 실력을 보고 느꼈네. 내가 힐튼과 로이드 사이에서 줄타기했던 짓이 얼마나 위험천만했는지 말이야.”
“아셨으니 다행이군요.”
“분명 힐튼에도 호르만 경을 이긴 자네와 엇비슷한 수준의 실력자가 있겠지. 영지전이 과열되면 그런 실력자가 또 찾아왔을 터. 계속해서 양쪽으로 휘둘리다 보면 내 최후가 좋았을 것 같진 않네.”
애초에 우리 가문이 담기에는 너무 큰 영지였어—이 말을 마지막으로 에브라 알버스, 이제는 에브라가 된 중년 사내는 수평선 너머로 멀어져갔다.
이제야 비로소 알버스 영지전이 끝났다는 게 실감났다.
옆을 돌아보니 야근에 지친 시온과 캠벨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호위하고 있다.
알버스 성을 진정시키느라 나만큼 동분서주 뛰어다니던 소중한 고급 인력들이다.
나야 드루이드의 패시브 스킬로 항상 체력이 만땅이었다지만 이들은 순수하게 나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피로를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이들에게 휴식을 부여할 때다.
“돌아가자. 로이드 성으로.”
녀석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 * *
사람들은 영웅에 열광한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
잘 먹고 살아도 언제 칼 맞아 죽을지 모르는 세상.
그런 험한 세상에서 모두의 추앙을 받으며 역경을 헤쳐나가는 영웅의 모습을 지켜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영웅은 아무나 될 수 없다.
가혹할 정도의 조건이 붙는다.
우선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
조금이라도 평범해지는 순간 이미 탈락이다.
말 한마디를 해도, 검을 휘둘러도, 하물며 평범한 인사마저도 차이점이 있어야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인식한다.
이렇게 되기 힘든 게 영웅이지만, 한 번 영웅이 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해준다.
뿜어내는 눈부신 후광을 반딧불이처럼 쫓으며 그가 이루어내는 모든 성취를 삶의 낙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심지어 여기에 과몰입하는 몇몇 극성팬이 영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건 의외로 흔한 일이다.
그동안 로이드 후작령에는 20년 전 마왕군을 토벌한 세븐 스타 이후로 딱히 영웅이라 일컫을만한 인재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주점을 가든 똑같았다.
음유시인들은 위대한 평원에서 펼쳐진 마왕군과 세븐 스타 간에 펼쳐진 최후의 전투에 대해서만 줄기차게 노래했다.
용사 카일과 로이드 후작, 홍염의 카리나, 그밖에 다른 세븐 스타들.
이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아이들에게 동요로 들려줄 만큼 불러댔다.
그들 외에는 딱히 영웅이라 칭할만한 사람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니 말이다.
분명 그랬었는데.
최근 로이드 후작령 주점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음유시인들이 점차 새로운 인물에 관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혜성 같이 떠오르는 한 젊은 사내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실하게 언급했다.
한 사내가 있었네
그는 사생아에 망나니였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네
그 또한 사랑을 원하지 않았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네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네
빈손으로 북부로 향했다네
몬스터를 잡고
추위를 물리치며
용감한 수호자가 되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네
황혼의 대간부도
난공불락의 요새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네
검을 뽑는 순간
여명이 시작되고
검이 넣는 순간
희망이 떠오른다
아아!
그의 이름은 헤논.
헤논 트리스.
헤논 로이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름일지니.
술을 마시자.
축배를 들자.
옛 영웅의 활약을 기억하며.
새 영웅의 탄생을 축하하며.
술을 마시자.
축배를 들자.
다른 곳도 다른 곳이지만, 로이드 후작성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어디에서나 헤논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사람들은 오랫동안 영웅에 굶주려 있었다.
물론 딴지거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나 헤논의 망나니짓을 눈앞에서 봐왔던 사람들은 소문이 허풍일 뿐이라고, 과장됐을 거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한두 번이면 몰라도 반복되는 소문에는 이유가 있는 법.
게다가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북부와 달리 후작령 내 알버스 성에서 펼쳐진 일은 직접 본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특히나 말한마디로 성을 함락시킨 장면은 옆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고서는 몸이 배길 수준으로 충격적인 일이었으니.
영지전에서 승리한 로이드 가문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귀환하면서 헤논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르고 연일 고공 행진을 찍어댔다.
그런 와중에 내가 복귀했다.
솔직히 나도 몰랐다.
이렇게 인기가 많아졌을 줄은.
“와아아아!!!”
“헤논! 헤논! 헤논!”
“대단하다!”
북부에서 제대했을 때보다 더한 환영인파였다. 길바닥은 이미 어린아이들이 뿌린 꽃잎 덕분에 분홍빛이었다. 마치 대형 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좋아해 주다니. 영지전에서 패배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옆에서 따라오던 시온이 설명했다.
“힐튼 가와 로이드 가문은 오랜 라이벌 관계였으니까요. 사실 힐튼 가는 떠오르는 해이고 로이드 가문은 지는 해라는 의견이 많았죠.”
“이빨 빠졌다고 생각한 사자에게 새로운 이빨이 났다는 걸 보여줘서 저리 신이 난 거였군.”
“그런 셈입니다.”
인파 때문에 경비병들이 나와서 방패로 바리케이드를 쳐야만 했다.
지구나 여기나 인기 연예인 한 번 뜨면 공무원들 힘들어지는 건 똑같다.
그만큼 내가 높이 올라왔다는 말이겠지.
이 정도 인지도라면 지금부터는 사생아라는 족쇄와 지지세력이 없다는 말은 편견이라 봐도 무방하다.
푸른매 용병단과의 관계도 굳건하고 비록 평민과 농노가 대부분이라지만 여론에서도 앞서고 있으니 필립과 체급이 엇비슷해졌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엇! 엇!”
“아가씨 그러면 안 돼!”
경비병들의 방패를 밀치고 평민 소녀 한 명이 내 앞길로 뛰어들었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귀여운 인상의 소녀였다.
열기 어린 눈빛에서 예전 지구에서 남자 아이돌을 덕질하는 여중, 여고생이 연상됐다.
“꺄아아악! 공자님! 사랑해요!”
미친듯이 뛰어드는데 번개같이 나와 소녀 사이를 막아서는 여인이 있었다.
바로 시온이었다.
그녀가 차가운 얼굴로 달려오던 소녀를 가볍게 툭 밀었다.
마나조차 쓰지 않은 일격이었으나 힘없는 소녀는 거의 반쯤 날았다가 뒤따라온 경비병들 손에 안착했다.
“경비 수준이 형편없군요. 만약 방금 들어온 사람이 평범한 소녀가 아니라 암살자였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시온의 일갈에 경비병들이 진땀을 뻘뻘 뺀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헤논 도련님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하녀입니다. 앞으로는 조심해주세요.”
“아···네.”
경비병에게 면박을 준 시온이 다시 말에 올라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시온.”
“네.”
“너 방금 저 소녀 밀치는데 물도마뱀 발걸음까지 쓴 거냐?”
“······.”
잠깐의 정적 후에 대답이 돌아온다.
“도련님의 경호에 만전을 기했을 뿐입니다.”
“와우! 여태까지 봤던 하녀의 움직임 중에 가장 기민하고 빨랐는걸? 익스퍼트라고 해도 믿겠어. 무엇이 하녀를 그리 다급하게 만들었을까?”
“닥쳐라. 돼지.”
“부단장, 하녀를 더 강하게 훈련시킬 방법이 떠올랐어. 그건 바로···”
“안 닥치면 밥 없습니다.”
“딸꾹.”
역시 밥 주는 사람은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니라더니, 고강한 북부의 전사도 저녁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기나긴 환영인파를 지났다.
마침내 도착한 내성.
로이드 후작이 마중을 나와있다.
그는 양팔 벌려 나를 환영했고, 뒷편에 있던 집사장 세바스찬 또한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준다.
물론 그 옆에 똥 씹은 표정을 한 로잘린과 필립도 보인다.
그렇게 나는 금의환향했고.
진정한 첫걸음을 떼었다.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