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소환 : 감잡은 망나니
힐튼 가의 책사라 불리는 수상한 사내는 원래도 느낌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귀기가 넘쳐흘러서 더욱 거부감이 치솟았다.
“당신 말대로 여기까지 왔으니 빨리 알려주시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돌아갈 거예요.”
“흐흐흐, 그럴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걸 보시면 어떻게 헤논을 단번에 죽일지 이해가 가실 테니까요.”
중절모 신사는 로잘린을 데리고 오두막 아래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에 도착한 로잘린은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지르려던 걸 간신히 입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나 옆에 같이 따라온 하녀는 아니었나 보다.
“꺄아아악!!”
지하실 풍경.
시커먼 후드를 걸친 흑마법사 십수 명이 원형으로 서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피로 그려진 불길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는데, 딱 봐도 저주의 표식처럼 보였다.
피 냄새가 진동한다.
로잘린은 본능적으로 저 마법진을 그린 피가 동물이 아닌 사람의 피임을 확신했다.
“정말 역겹군요. 저 정도 마법진을 그리려면 도대체 몇 명을 죽여야 하죠?”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일날 밑바탕 작업은 제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요.”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그저 저주를 만드는 사전 준비의 일환으로만 치부한다.
보통 인간과는 명백히 다른 사고방식을 접한 로잘린의 등골이 차갑게 식었다.
“읏차! 실례.”
미미하게 붉은빛을 내는 마법진을 거의 다 완성한 중절모 신사는 로잘린이 데리고 온 하녀에게 다가갔다.
겁에 질린 하녀가 뒷걸음질 치기도 전에 빠르게 그녀의 귀밑에서 금발 머리카락을 몇 가닥 뽑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법진을 구성하는데 젊은 처녀의 머리카락이 필요해서요. 당신에게 해가 될 일은 없습니다.”
히죽 웃은 가면 신사가 마법진 정중앙에 놓여있는 피가 담긴 성배에 하녀의 머리카락을 동동 띄웠다. 하녀가 겁에 질린 채로 로잘린에게 물었다.
“마님, 괜찮겠죠?”
“내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느냐.”
마침내 마법진이 발동했다. 흑마법사들이 난생처음 들어보는 괴상한 주문을 외웠다. 하나같이 눈빛에 광기가 서려 있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섬뜩하다.
“마님, 지금이라도 돌아가요.”
겁을 잔뜩 집어먹은 하녀가 로잘린의 팔짱을 꼈다. 그런 와중에도 흑마법사의 주문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로잘린은 불안한 와중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email protected]!%%^”
드디어 마법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불길한 기운이 치솟더니 유령의 형상이 되었다.
모두가 숨죽이며 이를 지켜보았다.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던 유령이 갑자기 머리카락을 제공한 하녀 쪽에 시선을 고정한다.
“히끅!”
깜짝 놀란 하녀가 딸꾹질했다.
그런 하녀를 빤히 쳐다보던 유령은 이내 투명해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찾아온 고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슴 졸이던 로잘린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겨우 이게 끝이에요? 도대체 뭘 보여주겠다는 말인지···”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로잘린의 말은 옆에서 터진 비명에 묻혔다. 동행했던 하녀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한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절한지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게 뭐죠? 당장 멈추세요!”
“늦었습니다. 저주는 이미 발동됐거든요.”
중절모 신사는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대답한다. 그 와중에도 하녀는 허공을 보며 손을 허우적댔다.
“오지마! 오지말라고! 오지···커헉!”
목을 부여잡는다.
숨을 못 쉬는지 연신 꺽꺽댄다.
지렁이처럼 몸을 꿈틀댄다.
결국은 호흡이 멈춘다.
로잘린은 새파래진 입술로 데려온 하녀가 짧은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봤다. 축 늘어진 시체를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하던 그녀가 이내 정신이 조금 돌아왔는지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래서 젊은 소녀를 데리고 오라는 했나요? 당신 때문에 제 사람이 죽었잖아요!”
중절모 신사는 어깨를 으쓱한다.
“부인께 저주가 어떤 식으로 발동되는지 보여드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보다 어떻습니까? 아무리 헤논이 익스퍼트라도 저주엔 장사 없습니다.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불우한 사고로 처리되겠지요. 부인께서 의심 받을 일도 없을 겁니다.”
로잘린은 인정했다.
비록 자신을 따르던 하녀가 죽은 건 속이 쓰리지만 그만큼 헤논을 해치울 만한 강력한 저주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 다시 저주를 발동시켜서 헤논을 죽여요.”
“불가능합니다.”
“어째서죠?”
“거리 제한이 있습니다. 여기서 후작성까지는 저주가 발동하기에 너무 멉니다.”
로잘린은 중절모 사내가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했다.
“제가 내성에서 헤논을 저격할 공간을 만들어주길 바라는군요.”
“역시 명석하십니다. 아울러 헤논의 머리카락도 필요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헤논의 체모를 가져오는 건 쉽다.
시온이 방을 비울 때를 틈타 사람을 시켜 가져오면 되니까.
문제는 공간 마련이었다.
저 정도로 큰 마법진, 그것도 피로 이루어진 마법진을 남들 다 보는 데서 그렸다가는 곧바로 화형행이다.
이리저리 고민하던 로잘린은 결국 큰 결심을 했다.
“그믐날 제 방으로 오세요.”
“흐흐흐, 부인께서 직접 방을 내주시다니. 헤논을 얼마나 죽이고 싶은지 잘 알았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시고요. 그리고 저기 마법사들은 다 필요한가요?”
“사람이 많으면 눈에 띄니 당일날은 저 혼자 갈 겁니다.”
“다행이네요. 약속 꼭 지키시죠.”
이 말을 마지막으로 로잘린이 몸을 돌려 쌩하니 사라졌다.
정적이 도는 오두막.
흑마법사 하나가 와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사도님. 모든 게 계획대로 되었군요.”
중절모 신사.
황혼의 7대 간부 탐욕.
그는 끈적한 눈빛으로 죽은 하녀의 시체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로잘린이 순진해서 쉬웠다.”
“크크큭, 그녀로선 꿈에도 모를 일이겠지요. 오늘 보여준 저주는 속임수고 진짜는 따로 있다는 사실을요.”
사실 저주라는 건 결과가 파괴적인 만큼 메커니즘이 굉장히 복잡하고 발동 조건도 상당히 까다롭다.
수십 개의 변수를 모두 차단하고 어느 정도의 운까지 들어맞아야 그 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오늘 탐욕이 로잘린에게 보여준 저주는 처녀를 죽이는 하급 저주로 성공률이 다른 저주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문제는 이런 하급 저주를 발동하는데도 사람 일백 명의 피가 들어갔다.
가성비도 좋지 못하고 무엇보다 이런 저주로는 헤논을 절대 죽일 수 없다.
그는 처녀가 아닌 데다가 익스퍼트에 해당하는 강자였으니까.
익스퍼트만 되어도 일반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고강한 영혼이기에 실패율 99% 이상이라 봐야 했다.
그렇다면 탐욕은 어째서 이런 쇼까지 벌여가며 로잘린을 속였을까.
그런 그의 숨겨진 목적은···
“기대되는군. 후작가의 심처에서 악마가 소환되는 모습이 말이야.”
바로 악마 소환이었다.
애초에 탐욕이 자신의 본거지인 자유도시 리앙에서 여기까지 넘어온 이유는 로이드 가문의 붕괴 때문이다.
처음에는 라이벌 힐튼 가를 움직이고 엘든 왕국을 뒤흔들어 천천히 옥죄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사생아에 세력도 없길래 위협 인물에서 배제했던 헤논이 예상보다 훨씬 성가신 존재였다.
철두철미하게 짰던 계획을 보란 듯이 망치고 오히려 이를 양분 삼아 무섭게 성장한다.
이를 목격한 탐욕은 헤논을 방치해선 안 되겠다 판단하고 악마 소환으로 노선을 변경했던 것이다.
이런 과격한 방식은 많은 주목을 끌기 마련이고 음지에서 은밀하게 일을 꾸미는 탐욕의 일처리 방식과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위험을 감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내버려두기엔 헤논이 너무 커진다.
“리앙에 돌아가서 할 일이 많겠군.”
“일천 명의 영혼을 준비하겠습니다.”
“노예시장 좀 뒤져봐. 다음 그믐날까지 반드시 모아야 한다.”
“명을 받듭니다.”
탐욕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다음날.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쉼터가 되곤 했던 힌즈 호주의 오두막은 원인 불명의 화재로 전소해버렸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로이드 후작령의 임시 후계자가 된 이후로도 내 일과에 큰 변화는 없었다.
수련. 수련. 또 수련.
가끔 로이드 후작이 영지 업무에 관해서 물어봤는데, 내가 후작성의 살림을 책임지는 내총관보다 효율적이고 빠르게 일처리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예 이쪽으로는 걱정을 접으신 모습이다.
현재 나는 연무장에서 캠벨과 시온을 상대로 대련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캠벨과 일대일을 주로 했으나 내 성취가 급격히 높아지는 바람에 요새는 시온까지 합세에서 1대 2로 싸우곤 했다.
[우드 골렘을 소환합니다.]
[바인드를 발동합니다.]
[스톤 랜스를 사용합니다.]
나는 캠벨을 상대로 드루이드 스킬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하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이제는 대인전에서도 드루이드 스킬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대충은 감이 왔다.
-우워어어어
3m에 달하는 우드골렘이 전위에서 긴 사정거리고 팔을 휘젓고, 조금만 멈춰있으면 바닥에서 솟아오른 나무 덩굴이 상대를 속박한다.
게다가 속박당하는 순간 뾰족한 돌이 확정으로 관통상을 입히니, 당하는 캠벨 입장에서는 내게 접근도 못하고 쩔쩔 맬 수밖에.
“과연 부단장! 강하군.”
캠벨이 혀를 내두르며 내 무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시온이 기척을 숨긴 채 빈틈을 노리고 있다.
-하녀가 제법 강해졌구나.
천마가 짤막하게 시온에 대해서 평했고 나도 이에 동의했다.
만드라고라를 준 이후, 시온은 익스퍼트에 올랐고 새로운 스킬인 보호색을 터득했다.
아무래도 세바스찬이 그녀의 성취를 알아채고 약간의 도움을 준 듯했다.
스르륵
보호색으로 위장한 시온은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서는 어디서 공격해올지 짐작이 안 되었다.
물론 천마게이션을 사용하면 단숨에 알아채겠지만 기감 수련을 위해서 대련 중에는 일부러 천마의 도움을 배제했다.
“핫!”
재빠르게 뒷목을 노리는 시온.
대기하고 있었던 나는 그녀의 단검을 천마검을 쳐냈다.
확실히 암살자의 검법은 일반 기사들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공격이 실패하면 억지로 더 공격하지 않는다. 보호색을 사용하여 주변 환경에 녹아든 후 다음 기회를 노린다.
나로서는 정면으로 무식하게 들이받는 캠벨보다 더 성가신 상대였다.
그렇게 한참 진행되던 대련은 내 승리로 끝났다.
마나 소드로 우드 골렘을 처리한 캠벨이 방심하다가 나무 덩쿨에 속박당하고 연계기로 들어온 스톤 랜스에 당한 탓이다.
캠벨이 무너지자 온전히 시온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그녀는 금세 잡혀서 천마검이 목에 겨누어졌다.
“···졌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나군. 부단장은 자고 일어날 때마다 강해지는 것 같아.”
캠벨이 어깨를 으쓱이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나는 덤덤하게 반응했다.
사람들이 내 성장이 빠르다고 연신 칭찬하지만 오히려 나는 조급함을 느낀다.
북부에서 니플헤임이 당한 후로 황혼이 너무 잠잠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시온 라이크>의 스토리대로라면 황혼은 그렇게 얌전히 있을 단체가 아니었다.
벌써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을 터.
이에 대응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황금가지를 찾아서 드루이드로서도 성장해야 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천마에게 그다음 황금가지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천마의 대답은 이러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황금가지는 남쪽이다.
여기서 남쪽이면 자유도시 리앙.
리앙은 대륙에서도 손꼽는 상업도시다 보니 황금가지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는 암묵적으로 리앙으로 잡아놓고 있었는데 지금은 자리를 뜨기가 애매했다.
“시온, 그들의 동태는 어떻지?”
바로 필립과 로잘린 때문이다.
이들은 임시 후계자 자리가 정해진 만찬장에서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나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진 적이 등 뒤를 호시탐탐 노리는데 속 편하게 황금가지를 찾으러 리앙에 갈 수는 없다.
갈 때 가더라도 후방을 확실히 정리하고 가야지 마음도 편하고 온전히 황금가지 수색에 집중할 수 있다.
“필립 공자께서는 얼마 전에 몰티 자작령으로 가셨습니다. 겉으로는 할아버지를 만난다던데, 아무래도 외가에서 세력을 끌어모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로잘린은?”
“후작 부인께서는 온종일 방안에만 계십니다.”
로잘린이 잠잠하다니.
너무나 수상하다.
차라리 필립처럼 어떻게 움직일지 대놓고 보여주면 편할 텐데.
“그런데 얼마 전에 야밤에 하녀와 단둘이 외출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후로는 부인 혼자 돌아오셨고요.”
“목적지는 어딘데?”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온은 그때 마침 세바스찬이 가르침을 주려고 방문해서 미행을 접었다고 했다.
납득할만한 사정이다.
그래도 좀 아쉬웠다.
맨날 방안에만 있던 사람이 갑자기 야밤에 외출한 것도 이상하고, 둘이 나갔는데 혼자만 돌아온 것도 이상하다.
“최소한 로잘린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힌즈 호수로 갔어.”
“힌즈 호수라···응?”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
돌아보니 입안으로 빵을 우걱우걱 집어넣는 캠벨이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케이트가 알려줬는데?”
“케이트가 누군데?”
“후작성 하녀.”
너무 태연하게 말하니까 농담인지 진심인지 분간이 안 간다.
“요새 나 하녀들이랑 좀 친해졌거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
“예에에? 당신이?”
시온이 지나치게 놀란다.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하진 않다.
이어지는 캠벨의 설명을 정리했다.
“한마디로 로사라는 하녀가 후작부인과 함께 나갔는데 이후에 실종이 되었다? 그리고 로사는 가기 전에 케이트에게 힌즈 호수로 간다고 말해줬고?”
“맞아.”
“왜 그런 중요한 정보를 도련님께 안 알려 드린 겁니까?”
“중요한 정보인지 몰랐어.”
캠벨답다고 해야 할지.
대단한 무신경이다.
어쨌든 단서를 잡은 듯했다.
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검 챙겨. 힌즈 호수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