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소환 : 사냥할 망나니
힌즈 호수로 가는 길.
오랜만에 외성 구역을 가로지르니 사람들이 와서 인사한다.
“아이고! 헤논님 아니십니까!”
“이것 좀 드셔보세요. 저희 가게에 오늘 들어온 과일입니다요!”
“영지전을 이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아들이 몸 성히 돌아올 수 있었어요.”
연신 고맙다는 어른부터 시작해서.
“우리 영웅놀이하자! 난 헤논!”
“뭐야! 왜 네가 헤논이야! 내가 헤논할래!”
“가위바위보 해. 지는 사람이 알버스 영주다!”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웅놀이를 행한다.
그리고 골목길에서는.
“공자님! 시간 되시면 잠깐 차라도 마시겠어요?”
여인들은 호감 어린 눈빛으로 나와 함께할 시간을 청하고 그럴 용기조차 없는 젊은 처녀들은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나를 쳐다보지조차 못한다.
“지금은 근무 중이니 나중에 같이 마시지.”
예의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만 부드럽게 밀어내고 곧바로 힌즈 호수로 향했다.
내 인기를 실감한 캠벨이 옆에서 투덜거린다.
“흥! 다들 부단장만 좋아하는군. 그 옆에 화려한 활약을 펼친 이 캠벨님이 있음에도 말이지.”
지극히 캠벨다운 반응이다.
옆에 있는 시온은 웬일로 조용하다.
걸어가면서 어딘가에 정신 팔린 듯 혼자 중얼거리길래 귀를 기울여봤다.
“베일리, 티나, 모니카, 비앙카···도련님의 안전에 위해가 되는 존재들···배제할 필요 있음.”
맙소사.
설마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여자애들 이름은 언제 다 알아놨대?
역시 시온은 정보를 다루는 데 특출나다.
잠깐의 작은 소동이 있었으나 무사히 힌즈 호수에 도착했다. 여전히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뽐내는 호수. 그러나 예전과 달리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오두막이 불탔군.”
나름 명소라 불리는 곳이었다.
인위적인 방화 같으니 여기서부터 조사를 하기로 했다.
우선 이 근처를 자주 배회하는 낚시꾼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요. 공자님.”
“오두막이 원래 이랬나?”
“아뇨! 그럴 리가요!”
펄쩍 뛴 아저씨가 입에 침을 튀기며 흥분한다.
“보나마나 여기 자주 놀러 오는 애들이 불장난하다가 홀라당 태워 먹었겠지요. 이제는 호수 근처에서 낚시하고 쉬지도 못하게 됐습니다. 에잉! 쯔쯧!”
“불이 난 건 언제였지?”
“저번 하현달 즈음이었습니다.”
하현달이면 대강 4일 전.
얼마 되지 않았다.
“알려줘서 고맙네.”
낚시꾼에게 정보 전달을 대가로 은화를 던져주자 황송하다는 듯이 두 손으로 받고 빠르게 사라진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시온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후작 부인께서 출타하신 날과 오두막이 전소한 날이 일치합니다.”
우연이라기엔 절묘하다.
평생 야밤 외출이라고는 안 했던 사람이 갑자기 밤바람을 쐬러 전혀 안 어울리는 장소에 갔는데 하필 그곳에서 방화가 일어났다?
정황만 따졌을 때는 오두막 전소에는 로잘린이 관여했다고 보는 게 합당했다.
“이곳을 수색한다.”
잿더미가 된 곳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시온과 캠벨도 조사에 동참했다.
시온은 정보전에 능한 만큼 나름 면밀히 조사하는 것 같았지만 너무 깔끔하게 불타서 건질 만한 게 없었다.
“이건 단순히 불탄 게 아닙니다. 방화를 먼저 시행하고 연장을 이용해서 산산이 부쉈습니다.”
시온의 결론이었다.
나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판자를 들추자 그 아래 있는 계단을.
“이건 뭐지?”
“오두막에 지하실이 있었군요.”
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실도 마찬가지로 개판이었다.
죄다 어질러져 있었다.
인위적으로 깨부순 흔적이 역력했다.
“여기도 뭐가 없군.”
캠벨의 읊조림.
그러나 나는 동상마냥 우두커니 멈춰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극미량의 마기가 침투합니다.]
[자정 작용이 발동합니다.]
[상태 이상에 면역됩니다.]
마기.
마이너스의 성질을 띄는 마나로 아르니아 대륙의 양의 마나와 반대되는 음의 마나라 할 수 있다.
보통의 전사들이 양의 마나를 이용해 신체를 단련한다면 흑마법사들은 음의 마나를 사용해서 마법을 사용한다.
무엇보다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인 악마족이 마기를 다뤘기에 대륙에서 마기 이용자들은 언제나 배척되어 왔다.
그런 마기가 오두막 지하에 머물고 있었다.
로잘린이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존재의 힘을 빌리려 했는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여기는 좀 으스스하군요.”
“왠지 모르게 몸이 무거운데?”
“기분 나쁩니다.”
시온과 캠벨이 몸을 부르르 떨며 불쾌한 기분을 드러냈다.
이들도 익스퍼트에 오른 고수다보니 몸속에 스며든 마기를 느낀 것이다.
다만 마기의 양이 아주 극미량이었고 나처럼 상태창으로 명확히 파악한 건 아니기에 그저 기분이 나쁜 정도로 치부했다.
그런 녀석들에게 진실을 알려줬다.
“이곳에 마기가 잔류해있다.”
“그게 정말입니까?”
“어쩐지. 몸이 무겁더라니.”
크게 놀라던 시온과 캠벨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실에 들어온 다음부터 쭉 느껴지는 이 불쾌감이 마기라고 한다면 납득이 되어서다.
시온이 분개하며 입을 열었다.
“후작 부인께서 선을 넘으셨습니다. 당장 로이드 후작님께 이 사실을 고해야 합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건 증거 불충분이다.
로잘린이 발뺌하면 거기서 끝.
오두막에 들른 적 없고 실종된 하녀도 도망갔다며 누가 봐도 어불성설인 변명으로 둘러칠 게 뻔했다.
문제는 로잘린은 그래도 된다는 점이다.
엄연한 후작가의 정실 부인이니까.
아무리 정황이 수상하고 두루뭉술한 변론을 해도 옴짝달싹 못할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오히려 모함했다는 역풍을 맞게 된다.
“일단 나가자.”
복잡한 고민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니 조사가 오래 걸렸는지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하필 또 그믐이라서 더럽게 어두웠다.
준비성 철저한 시온이 능숙하게 기름 먹인 횃불에 불을 붙여서 주변을 밝혔다.
“후작님을 뵙겠습니까?”
“생각을 좀 더 해보고···”
시온의 말에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드루이드의 직감이 움직였고.
누군가의 미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주 잠깐이라 헷갈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천마의 목소리.
-남서쪽 수풀에 누군가 숨어있다. 너를 보고 있군. 수상한 녀석이다.
천마까지 말한다면 확실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작은 목소리로 시온과 캠벨에게 속삭였다.
“꼬리가 붙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
시온과 캠벨이 살짝 움찔했다가 이내 태연한 움직임을 고수했다. 그들에게 북부에서 써먹던 수신호를 전달했다. 신호하면 동시에 움직이자는 메시지였다.
후작성으로 걸음을 옮기자 수풀도 조금씩 움직였다. 아무래도 내가 후작성까지 들어가는 걸 보고 물러날 계획인 듯하다.
그렇게 둘 순 없지.
타이밍은 지금이다.
“움직여!”
방향을 홱 틀어서 수풀을 향해 쇄도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캠벨도 멧돼지처럼 돌격했고 시온의 한층 더 발전된 물도마뱀 발걸음이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미행자가 깜짝 놀랐는지 수풀이 격하게 흔들렸다.
이어서 시커먼 마력탄이 날라왔다.
“흑마법사다!”
시온이 여유롭게 피했고.
캠벨이 검으로 마력탄을 쳐냈다.
나는···이미 도착해서 뒷덜미를 붙잡았다.
“무슨 놈의 스피드가!”
깜짝 놀란 후드남이 격렬하게 저항하며 지근거리에서 매직 미사일을 캐스팅하길래 손가락을 꺾어버렸다.
우드득-!
“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
이어서 시온과 캠벨이 녀석을 완전히 제압했다.
엎드린 채 사지가 결박된 녀석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째서 우리 뒤를 쫓았지?”
“어떻게 내 은신을 간파한 거냐? 상급 마도구를 썼는데.”
“질문은 내가 해.”
손등을 살포시 즈려밟아준다.
“끄아아악!!”
“다시 묻는다. 우리를 왜 따라붙었나?”
“크크큭, 내가 그걸 말해줄 것 같나?”
뭘 믿고 저리 의기양양한지.
나와 캠벨, 그리고 시온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이 녀석에게는 북부식 찜질이 좀 필요해 보인다.
“좋아. 최대한 늦게 대답해라. 그게 내가 바라는 바이니.”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시온이 익숙하게 헝겊으로 녀석의 입을 막아서 자결을 방지하고 소리가 새나가는 걸 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포를 뜨기 시작했다.
“읍! 으으읍! 으읍!”
“괜찮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돼. 밤은 기니까 천천히 하자고.”
새삼스럽게 가죽 수집가 게빈을 포획했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도 이렇게 천천히 포를 떴었다.
녀석은 한 시간을 못 버티고 오줌을 싸고 자비를 구걸했었지.
이와 비교하면 흑마법사는 무려 두 시간을 버텼으니 깡다구만큼은 게빈보다 좋았다.
어쨌든 상관없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결국 백기를 든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다 말할 테니···그만 죽여주십쇼.”
“진작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이렇게 말하니까 왠지 내가 악당 같지만 분명한 건 저놈들이 악당이다. 모든 걸 실토하겠다는 놈의 발목을 꺾었다.
“끄아악! 어째서!”
“자백하겠다는 놈치고 처음에 제대로 된 정보를 뱉는 녀석이 없었거든. 조금 더 놀다가 다시 얘기해보자고.”
“아닙니다! 진짜 얘기하겠습니다. 으아아악!!”
한 시간 정도 더 놀았더니 녀석의 눈빛에 진정성이 스며든다.
지금이 자백을 들을 때라는 감이 왔다.
칼질을 멈추자 녀석이 두서없이 마구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니까···그게···”
황혼. 탐욕. 악마소환. 로잘린.
나오는 단어마다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지어낸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고문을 받고 혼비백산한 상황에서 말한 이야기라기엔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로잘린이 날 죽일 저주를 의뢰했는데, 사실 그건 힐튼 가의 책사로 위장한 탐욕이 준비한 악마소환진이다?”
“그렇습니다.”
“너희는 그걸 후작성 한가운데에서 터트릴 예정이고?”
“예.”
그동안 황혼이 불안하게 잠잠하다 했더니 뒷구멍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악마 소환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잘못 건드리면 대륙적 차원으로 개입이 들어올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무리수를 두었다는 말은 탐욕이 나를 그만큼 거슬리는 존재로 보았다는 의미겠지.
“이놈 말대로면 하녀가 사라진 이유도 설명되는군. 불쌍한 케이트. 저주의 희생자가 되다니.”
캠벨이 심기가 불편한지 짝다리를 짚었고 시온 또한 흑마법사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로잘린은 이용만 당하는군.”
“······”
“그래서, 악마 소환 시기는 언제지?”
내 질문을 들은 흑마법사가 여태껏 찌그러져 있던 건 까먹은 듯 갑자기 킬킬대며 웃는다.
“크크큭, 바로 오늘이다. 너희는 이미 늦었어...컥!”
“이놈이 왜 이래?”
복부에 주먹 한 대를 먹여주고 재갈을 물렸다.
어쨌든 흑막이 누군지도 알아냈고 어떤 계획을 짰는지도 파악했으니 남은 건 돌아가서 후작에게 보고하고 로잘린을 잡으면 된다.
모든 사태를 말해줄 증인도 있다.
흑마법사 놈이 품고 있는 마기 자체가 생생한 증거니까 로잘린도 이번엔 빼도 박도 못하겠지.
“빠르게 돌아간다.”
그렇게 내성으로 복귀했는데.
문제가 발생해버렸다.
오후만 해도 있었던 후작이 없다.
심지어 세바스찬까지.
게빈 사건 이후로 교체된 하녀장에게 물었다.
“후작님은 어디 계시지?”
“인근 장원에서 거대 오우거가 나와서 급하게 가셨습니다. 집사장님 또한 호위를 위해 동행하셨고요.”
두 강자가 하필이면 지금 없다.
그말인 즉슨, 현재 로이드 후작성은 무주공산이 되었다는 뜻.
맨날 후작성에 붙어있던 주인이 하필 제일 위급할 때에 없다니, 그 시기가 너무 절묘하다.
아마도 탐욕의 설계가 확실해 보였다.
‘북부에서 만났던 질투와는 다른 식으로 성가시군.’
후작과 세바스찬이 출장을 나갔고 헤논만 남은 상황에서 후작성 한가운데에 악마가 소환된다.
여기서 내가 도망치면 악마가 후작성을 파괴하고 민간인을 학살할 테고, 그렇다고 맞서 싸우면 악마에게 죽는다.
진퇴양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라고 탐욕은 생각했겠지.
[끈질긴 생명력이 발동합니다.]
[자정 작용이 발동합니다.]
[음의 마나에 면역입니다.]
[파마의 힘을 지닙니다.]
하지만 내게는 드루이드의 힘이 있고 그는 이 변수를 계산하지 못했다.
적어도 악마에 한해선 난 신성기사급으로 상성이 좋다.
쿠구구구구!!!!
천장에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아무래도 소환을 막긴 늦은 듯했다.
그렇다면 퇴치할 수밖에.
“이게 무슨 일이죠? 지진이라도 났을까요?”
땅을 울리는 진동에 불안한 표정을 짓는 하녀장에게 명령한다.
“하녀장, 지금 즉시 내성의 모든 인원을 데리고 외성으로 빠져나가라. 그리고 기사와 병사에게 일러서 외성 구역을 지켜. 이건 로이드의 후계자로서의 정식 ‘명령’이다.”
하녀장도 눈치가 빠른지라 무슨 사달이 났다 예상하고는 호다닥 움직였다.
진동이 발생하는 방향은 로잘린의 숙소가 있는 동쪽으로, 그쪽에선 이미 불길한 어둠이 점차 퍼져가고 있었다.
양옆을 보았더니 시온과 캠벨이 병장기를 뽑아들고 이미 만전에 태세를 기하고 있다.
저 정도면 마음의 준비는 된 것 같다.
“가자. 사냥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