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리앙 : 내려본 망나니
쏴아아아
아래로는 시원한 파도 소리가 가슴을 틔우고 위로는 흰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하늘을 넘나든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코로 스며들자 비로소 리앙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 났다.
입구를 지키던 문지기가 우리를 힐끗 보고 이내 딴청을 부렸다.
자유도시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평범한 영지였다면 후드를 쓴 수상한 남녀가 온 순간 길을 가로막고 신원확인부터 했을 거다.
반면에 여기는 그런 게 없다.
하루에도 외지인만 수백수천 명이 들락날락하니 혹시 모를 돌발상황만 대비할 뿐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
성 내로 들어왔다.
안쪽의 풍경도 다른 도시와는 사뭇 달랐다.
말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마찻길이 잘 닦여있을 뿐만 아니라 도시 중간에 물길을 터놔서 바닷물이 잔잔하게 흘렀다.
그 위로는 자그마한 카누를 탄 사람들이 빠르게 도시 전역을 가로지르며 이동하고 있었다.
“엘비뉴 산 귀걸이 팝니다! 오늘 내로 품절 예상!”
“호든 지방에서 직접 구한 벌꿀입니다. 귀족 나으리는 물론이고 돈 많은 상인분들 와서 맛보고 가세요.”
“동부 대산림에서 가져온 강장초다. 자신 없는 사내는 와서 구매해라. 아내에게 사랑받는다.”
활기찬 분위기를 느낀 캠벨이 아이처럼 들뜬다.
“길거리 음식을 파는군! 저거 맛있어 보인다.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먹어보는 게 어때?”
“놀러 왔습니까? 그만 둘러보고 정보를 얻을 곳부터 찾아보죠.”
시온이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캠벨이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삐죽인다.
“하여간 하녀는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저러니까 남자친구가 없는···커헉!”
“뭐라고 했습니까?”
“아니, 열심히 파이팅해보자구!”
옆구리를 부여잡은 캠벨.
둘이 요새 대련하면서 자주 붙어있다보니 주먹을 나누는 친근한 사이가 된 모양이다.
보통은 캠벨의 장단에 맞춰주지만 오늘은 시온을 편들어주기로 했다.
“라칸에게 듣기로 도시 광장에 제법 큰 주점이 있다는군. 굵직한 소문은 전부 그곳을 거친다고 하니 그쪽으로 가보지.”
광장에 도착했다.
하얀 돌바닥이 원형으로 정갈하게 깔려있었고 가운데에는 뾰족한 탑이 솟아있었다.
듣기로는 자유를 상징하는 비석이라나.
광장 바깥쪽에는 각종 가게가 잔뜩 늘어서 있었는데, 라칸이 말해준 주점은 워낙 위치가 좋고 사람이 우글거리다 보니 한눈에 보였다.
“어서오십시오!”
주점은 주점인데 뷔페와 주점과 식당을 한데 모아놓은 느낌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2층에는 발코니가 있어서 밥을 먹으면서도 광장을 한눈에 구경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발코니가 있는 식당은 처음 봅니다.”
시온도 발코니가 신기한지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눈을 반짝였다.
“저기서 먹고 싶나?”
시온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정보를 모으러 오지 않았습니까? 군중 속에 섞여들어도 모자랄 판에 저런 데서 사치를 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나 고지식한 답변.
속으로는 사람 구경하고 시원한 바닷바람 맞으며 음식 먹고 싶으면서.
시온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종업원. 발코니석으로 안내해주게.”
내 말을 들은 떡대 좋은 종업원이 멈칫하더니 이내 요상한 질문을 한다.
“혹시 후드를 벗고 얼굴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발코니에 앉는 것과 후드를 벗는 게 무슨 상관이지?”
“그저 간단한 확인 절차입니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종업원이 얼굴을 확인할 정도로만 후드를 살짝 벗어주었다.
시온의 아름다운 외모와 내 매혹적인 얼굴을 본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락부락한 캠벨을 보고는 질린 표정을 짓는다.
“불만 있나? 없게 만들어줘?”
“아,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안내해주게.”
“죄송합니다만, 추가적인 확인사항이 있습니다.”
“또 뭔데?”
“혹시 귀족이거나 상인이십니까? 아니면 왕족?”
자꾸 귀찮게 굴자 참지 못한 캠벨이 종업원의 멱살을 쥐었다. 종업원도 제법 덩어리였지만 캠벨 앞에선 왜소해 보였다.
“지금 장난치나? 발코니석 하나 앉는데 뭘 그리 복잡하게 굴어? 차라리 싫으면 싫다고 해.”
“저런. 쯧쯧.”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똥배가 심하게 많이 나온 사내 하나가 혀를 차고 있다.
코와 귀에는 어울리지 않는 피어싱을 줄줄이 걸고 있었고 몸에 걸친 옷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값비싸 보였다.
하지만 난 뚱뚱보 사내의 초고도비만 몸과 사치스러운 의상보다는 그가 손에 쥔 목줄에 더 눈이 갔다.
왜냐하면 목줄의 끝에는 놀랍게도 노예 셋이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누더기로 중요 부위만 대충 가린 노예들은 생기가 사라진 눈빛으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그들의 발목은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리앙이 처음인가 보군. 이곳에서 특별한 혜택을 누리고 싶다면 이렇게 하면 된다네.”
뚱뚱보 사내는 품속에서 은화가 든 주머니를 꺼내더니 종업원에게 던져주었다.
이를 받아든 종업원의 허리가 즉시 직각으로 접히더니 귀족은 발코니석으로 안내되었다.
구속된 노예들도 주인을 따라 올라갔다.
그들이 올라갈 때마다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며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주의를 끌었다.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는 파악했다.
나도 귀족과 똑같이 은화 주머니를 던져주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인제 보니 후드를 벗으라느니, 귀족이니 평민이니 묻는 것도 전부 네가 돈을 지불할 능력이 되냐는 우회적인 질문이었다.
발코니석에 앉자 겉보기에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다.
“에피타이저인 래빗 스튜입니다. 어울리는 와인으로는 오렌 산 레드 와인. 식사를 마치시면 다음 코스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밖에 필요한 게 있으면 종을 울려주십시오.”
고대하던 식사시간이 찾아왔음에도 나와 시온은 포크를 들지 않았다. 옆에서 캠벨만 우적우적 잘만 먹어댔다.
발코니석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그나마 앉아있는 소수는 돈깨나 있는 부르주아 같았다.
과시하는 듯한 언행이 몸에 배어있고 지나친 겉치장 때문인지 태생적인 부자보다는 졸부 느낌이 강했다.
개중 몇몇은 아까의 뚱뚱보 사내처럼 노예들을 세워놓고 먹었다.
하도 말라서 갈비뼈가 툭 튀어나온 노예들은 음식이 풍기는 냄새에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등짝에 시뻘건 채찍 자국도 꽤 많이 보였다.
“도시 분위기가···이상하군요.”
보다못한 시온이 한마디를 건넸다.
“확실히 그렇군.”
발코니에서 내려본 행인 중에서도 노예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꽤 많았다.
이런 분위기가 낯설었다.
물론 로이드 영지도 농노나 하녀라는 최하급 계층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일종의 계약 관계로 집과 안전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일해주는 느낌인데 여기는 흡사 물건 취급을 당하지 않는가.
자유도시 리앙.
분명 자유란 단어가 붙었는데 자유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때였다.
발코니 아래 위치한 1층 입구가 벌컥 열리면서 소년 하나가 길거리에 나동그라졌다.
“아구구···”
소년의 어디서 오랜 여행이라도 하다 왔는지 먼지투성이에 꾀죄죄했다.
곱슬기 심한 갈색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심하게 나 있어서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이었다.
“이놈이 실성했나? 엉? 밥을 먹었는데 돈이 없어서 외상을 해달라고? 여기가 거지새끼 밥주는 곳인 줄 알아?”
아까 전 1층에서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돈을 달라 요구하던 떡대 종업원은 팔목을 걷어붙이며 소년의 멱살을 잡았다.
저 모습을 보니 그나마 우리는 성인이고 심상찮은 기운을 풍기니 혹시 몰라서 예의 있게 대우해준 거였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소년한테는 그야말로 가차 없었다.
“갚는다니까요? 지금은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돈이 없는데 금방 구할 수 있어요!”
“너 같은 놈이 무슨 수로? 딱 봐도 동냥질 말고는 할 게 없어보이는구만!”
“여기서 잡일이라도 할게요. 청소라도 할 테니 돈 갚게 해주세요.”
“너 말고도 여기서 일할 놈들 많다.”
종업원에게 뒷목이 잡힌 소년이 허공에서 팔다리를 휘저으며 버둥거렸다.
이를 천천히 보던 종업원이 이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흐흐흐, 괜찮아. 돈이 없을 수도 있지. 차라리 잘 됐어. 너 같은 소년도 좋아해주는 어르신들이 있지. 네놈을 노예로 팔아서···커헉!”
따악!
썩은 미소를 짓던 종업원의 얼굴에 금색 동전이 제대로 명중했다.
“누구···”
눈썹 사이에 새빨간 자국이 난 종업원이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얼굴로 고함을 치려다가 자신을 때린 물건이 금화라는 걸 깨닫고 입이 떡 벌어졌다.
“그, 금화?”
위쪽을 쳐다보는 종업원에게 내가 손을 흔들어보였다.
“소년이 식사를 제대로 못 먹고 다니는 것 같군. 밥이나 좀 먹이고 싶으니 여기로 올려보내게.”
금화를 던진 건 나였다.
빠르게 부어오르는 이마 때문에 화가 난 종업원은 금화를 보자 분노 조절이 치료됐는지 대놓고 뭐라고는 못하고 삐딱한 자세로 툴툴댔다.
“이 정도면 외상값은 충분하지만 거지새끼를 사람들 다 보는 발코니에 보내는 건 조금 애매합니다.”
“지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종업원이 영 맹탕이길래 기세를 뿜어서 녀석에게 집중시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익스퍼트 중급에 올랐고 그동안 수많은 생사를 넘겼다.
경험에서 묻어나오는 숨 막히는 압박감을 돈이나 밝히는 일반 종업원이 견디기엔 무리였다.
얼굴이 새하얘진 종업원이 백팔십도 달라진 태도로 고개를 숙인다.
“아닙니다! 올려보내겠습니다.”
“어? 어? 밀지마요!”
소년을 거의 밀치다시피 해서 발코니로 올려보낸 종업원이 쌩하니 사라진다.
뻘쭘하게 서 있는 소년에게 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와서 밥 좀 먹으렴.”
소년은 계속 우두커니 있었다. 그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시온이 음식을 조금 덜어서 소년의 앞에 놓아주었다.
“먹어도 돼. 우리는 나쁜 사람 아니란다.”
볼을 긁적이며 고민하던 소년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알았어요.”
그리고는 음식을 깨작깨작 먹는다.
캠벨은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 이 상황이 뭔가 싶어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난데없이 거지를 구하고 적선까지 하니까 이상하게 보였겠지.
하지만 내가 금화까지 던져가며 이 소년을 구한 이유가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확실하군. 이 소년, 날 로이드 후작에게 팔아넘긴 그 녀석이다.
천마의 말 때문이다.
로이드 후작에게 천마검을 넘긴 게 이 소년이었다니,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소년을 그냥 보낼 수 있겠는가.
특히나 내가 알기로 로이드 후작은 자신에게 검을 넘긴 사람이 재밌는 동료라고 했다.
로이드 후작이 동료라는 표현을 쓸 정도의 인물이라면 이 소년이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진짜 정체는 아마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을 때, 나와 일행들이 앉아있는 식탁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 전 입구에서 노예들을 끌고 다니던 뚱뚱보 사내였다.
“실례하겠네.”
“무슨 일이지?”
한눈에 봐도 한참 어린 내가 자연스럽게 반말로 응대하자 뚱뚱보 사내의 미간에 핏줄이 꿈틀했다.
한쪽 손으로 뒷짐을 진 채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크흠흠, 자네는 이곳 발코니가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이해하고 있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식사를 방해할 생각이면 이만 물러가도록.”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에 뚱뚱보 사내의 얼굴이 끓는 주전자처럼 시뻘게졌다.
“왜 거지새끼를 발코니에 들였냐 이 말을 하고 있잖나! 이곳은 우리 같은 특권층을 위한 장소네. 근본 없는 잡놈을 들였다간 우리 격이 떨어진단 말일세. 그러니 당장 저 거지를 여기서 쫓아내게.”
시온과 캠벨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특히 시온은 품속에서 암기를 꺼내려는 동작을 취하길래 손을 내저어서 만류했다.
뚱뚱보 사내를 위아래로 훑었다.
선민의식이라 봐도 무방한 신분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남들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과도한 포장.
지구에서도 뚱뚱보 사내 같은 인간이 꽤 있었다.
저런 사람들의 특징은 막상 까보면 실제로는 별 볼 일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왜냐하면 정말로 잘난 사람들은 저런 식으로 나대지 않아도 주변에서 인정해주고 본인도 주목받는 걸 귀찮아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드르륵.
의자를 끌고 일어났다.
내 키가 아르니아 대륙에서도 상당히 큰 편이라 자연스럽게 뚱뚱보 사내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우리? 지금 우리라고 했나?”
“그래! 우리 같은 특권층을 위해 저 거지새끼를 당장 내보내게.”
“네가 대체 뭔데?”
뚱뚱보 사내는 이 질문만을 기다린 듯했다. 갑자기 어깨를 쫙 펴고 가슴을 열더니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나는 리앙에서도 알아주는 퍼그 상단의 상단주 퍼그라고 하네. 딱봐도 이 도시가 처음인 듯한데, 이곳에는 나름의 원칙과 철칙이라는 게···”
“작위는 있나?”
“작위는 없지만 우리 상단으로 말할 것 같으면···”
“평민 나부랭이라는 말이군.”
퍼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모욕당할 줄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가 불같이 화를 낸다.
“감히 그런 말을!”
“캠벨.”
짧게 이름만 말했지만 캠벨은 찰떡같이 내 생각을 알아채고 뚱뚱보 퍼그를 양손을 제압한 뒤 무릎 꿇렸다.
난데없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식당에서 무릎이 꿇려버린 그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물들었다.
그런 퍼그의 앞에 쪼그려 앉은 내가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사실을 읊어주었다.
“난 너 같은 놈과 ‘우리’로 엮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너야말로 이곳에서 꺼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