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부화 : 융합한 망나니
의도치 않은 사생팬이 생겼다.
껌딱지라고 해야 하나.
사샤는 이후로도 한참 동안 내 품에서 몸을 비벼대며 냄새를 맡았다.
“숙녀가 아무에게나 달라붙으면 안 됩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지요.”
보다 못한 시온이 사샤를 끌어낸 후에야 떨어졌다.
거리가 멀어진 이후에도 그녀는 아쉬움이 뚝뚝 흐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저렇게 그녀가 나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지 짚이는 데가 있었다.
‘하이엘프는 자연과 강력히 소통하는 존재.’
죽은 이후에 상수리나무 그 자체가 되어버린 헤논의 친어머니만 보더라도 하이엘프의 자연교감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런 하이엘프에게 헤논 같은 드루이드는 그야말로 고향 친구보다 가깝게 느껴질 터.
무엇보다 현재 내 몸속에는 세계수의 파편인 황금가지 두 개와 용혈까지 있잖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헤논은 절반은 인간이지만 남은 절반은 하이엘프의 피를 받았으니 어떻게 보면 순혈 하이엘프인 사샤와는 먼 사촌뻘인 셈이다.
여기에 현재 부족에게 쫓겨나서 오갈데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 사샤의 불안한 심리까지 더해져서 나를 향한 일방적인 애정공세가 행해진 것이다.
그 증거로 톰이나 시온, 캠벨이 말할 때는 특유의 멍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도 안 하던 그녀가 나와 마주할 때면 유난히 눈을 반짝였다.
“아저씨, 나도 도울게.”
그런 사샤가 뜬금없이 날 돕는다고 했다.
“무엇을?”
“해치워야 할 적이 있잖아.”
“탐욕을 잡는 걸 돕겠다고?”
“응.”
“안 돼. 너무 위험해.”
다른 노예들은 탐욕을 죽이겠다는 확고한 목적의식이 있어서 데려가지만 단순히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지원한 어린 소녀를 전투지역으로 데려가기엔 마음이 불편했다.
“생각하고 말한 거야. 아저씨를 돕고 싶기도 하고 나도 스스로 이런 판단할 만큼 적당히 오래 살았어.”
살짝 갈등할 때 옆에서 지켜보던 톰이 말문을 열었다.
“헤논, 나도 이러길 원치 않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선 저 아이를 데려가는 게 최선일세.”
“맞아. 난 여기 혼자 남아있기 싫어. 아저씨가 가는 곳에 따라갈 거야.”
결국 사샤를 데려가기로 했다.
그녀는 나와 붙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는 듯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
“그런데 사샤.”
“응.”
“어째서 날 아저씨라 부르는 거지? 너랑 나의 나이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실제로 내가 빙의한 헤논의 나이는 대충 성인 그쯤이다.
사샤가 아예 어린애라면 모를까, 한국이었으면 그래봐야 서너 살 차이였다.
내 질문을 들은 천마가 의식 속으로 빈정댔다.
-그 질문을 한 시점부터 너는 아저씨가 되는 거다.
시온도 드물게 실망 가득한 눈으로 날 본다.
“그러면 저 아이에게 오빠 소리 듣길 원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변하기 전 옛날 도련님의 모습을 본 것 같군요.”
반면에 사샤는 고개를 갸웃한다.
“아냐. 아저씨 맞아. 나보다 나이 훨씬 많은데?”
“그래봐야 겨우 서너살이다.”
“아냐. 서너살 아니야.”
하이엘프는 특유의 은안으로 나를 유심히 훑었다.
뭔가 발가벗겨진 기분.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혹시 사샤는 겉으로 보이는 헤논의 모습이 아니라 속에 빙의한 내 본질을 주시하는 게 아닌가.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보던 그녀가 활짝 웃는다.
“응! 아저씨 맞아!”
“젠장. 알았다고. 그만 말해라.”
* * *
탐욕을 잡으러 출발하기 전.
경매장에서 가져온 물품들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워낙 귀하고 좋은 물건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어렵게 얻은 인어의 눈물과 하급 악마의 심장이었다.
하급 악마의 심장을 책상 위에 올려놨더니 벌써 허리춤에 찬 아공간 호리병이 흔들렸다.
“조금만 참아봐.”
마치 간식을 눈앞에 둔 강아지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자기 스스로 아공간 호리병에서 나온 드래곤 에그는 통통 튀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어? 부단장. 그게 뭐야?”
마침 캠벨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드래곤 에그를 처음 본 그는 신기한단 눈빛으로 에그를 보았다. 알이 무척이나 귀여웠는지 예상 외로 자상한 손길로 쓰다듬는다.
원래 저런 애들이 있긴 있다.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강아지나 고양이만 보면 어쩔 줄 모르는 남자들. 캠벨도 그런 스타일인가.
“츄릅! 이렇게 큰 계란도 있네. 이걸 삶으면 계란후라이가 몇 개가 나올까?”
신기해 한 게 아니라 군침을 흘린 거였나.
참고로 드래곤 에그 안에 담긴 요녀석은 똑똑한 편이다. 밖에서 우리가 하는 대화를 거진 다 알아듣는다.
자신을 먹잇감으로 삼는다는 걸 깨달은 드래곤 에그가 화들짝 놀랐는지 펄쩍 뛰어서 캠벨의 아래턱을 가격한다.
퍽!
“어이쿠! 요놈 힘 좋은 거 봐라. 삶으면 아주 영양가가 넘쳐나겠네.”
알이 어째서 움직이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기보다는 활발한 활동성에 기반한 섭취시 영양가를 계산하는 캠벨의 사고방식에 새삼 감탄이 나왔다.
“너도 참 대단하다. 그거 먹는 거 아니야.”
“부단장, 잘 생각해 봐. 우리가 살면서 이만한 크기의 달걀을 먹을 일이 언제 있겠어. 이거는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니까?”
분명 얻어맞아서 아래턱이 벌게졌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래곤 에그를 양손으로 덥석 잡으려 한다.
이러다가 진짜 안에 들어있는 헤츨링이 경기라도 일으킬 것 같아 만류하려는 찰나,
파지지지직!!!
알에서 번쩍이는 전류가 흘러나오며 캠벨을 덮쳤다.
“아으아으아으아아아!!!”
감전당한 캠벨이 벼락맞은 쥐처럼 온몸을 덜덜덜 떨었다. 전류는 캠벨의 안쪽부터 타격을 해서 맷집 하나는 알아주는 그도 제대로 한 방 먹었다.
반면에 나는 놀랐다.
알에서 전기가 뿜어져 나오다니.
알껍질에 따로 새겨진 수식이 없었으니 이건 안쪽에 있는 헤츨링이 발현한 능력이라 보는 게 옳았다.
뇌전을 뿜어내는 생명체는 아르니아 대륙에서도 찾기 쉽지 않다.
아직 부화가 안 돼서 그렇지, 저 녀석이 세상 바깥으로 나오면 제법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전정신이 들게하는 계란후라이군. 삶거나 튀기는 것도 좋지만 굽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아냐. 그냥 돌아가.”
이상한 데서 전투의식을 불태우는 캠벨을 억지로 밀어서 방 밖으로 밀어냈다.
캠벨이 나가고 나서도 드래곤 에그는 좌우로 연신 까딱였는데, 말은 못해도 화가 잔뜩 났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미안하다. 네가 참아라. 원래 저런 놈인 거 알고 있었잖아.”
파직! 파직! 파지직!!
알껍질 주변에 전기가 튀기는 걸로 기분이 상했음을 표현한다. 이 기분을 달래주고자 악마의 심장을 가까이에 놔주었다.
“이거 먹고 화풀어.”
역시 간식이 특효약이다.
하급 악마의 심장을 보자마자 드래곤 에그가 통통거리며 다가가 기운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악마의 심장은 점점 작아졌고 그럴 때마다 드래곤 에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점차 또렷해졌다.
[드래곤 에그 부화도 — 50%]
저번에 단탈레온을 흡수하고 30%였는데 거기서 20%가 올라서 50%가 되었다.
이제 절반 정도의 마기만 흡수하거면 알 안쪽에 들어있는 녀석을 볼 수 있다.
그래도 레어에서 만난 이후로 꽤나 오랜 시간을 같이 붙어있다 보니까 친밀감이 쌓여서 얼굴을 맞대는 순간이 기대되는 게 사실이다.
악마의 심장을 흡수한 알은 기분이 좋았는지 폴짝 뛰어서 내 품에 안겼다.
내 가슴팍에서 좌우로 까딱대는 폼이 간식을 먹고 졸려서 눈을 끔뻑대는 강아지와 똑같았다.
“졸리지? 안에 들어가서 자.”
취침을 권유해도 연신 밍기적대던 드래곤 에그는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그제야 아공간 호리병 안으로 들어갔다.
똑똑
“도련님, 바쁘십니까?”
캠벨이 아니라 시온이었구나.
“들어와.”
문이 열리고 들어온 시온이 두 손을 모은 다소곳한 자세로 보고했다.
“출동 준비가 끝났습니다. 보름달 시장에서 구출한 노예들에게도 상황 설명은 끝냈고요. 여차하면 도망치라고 일러두었는데 탐욕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따를지는 모르겠습니다.”
“작전 내내 사샤는 최우선 보호대상이야.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그 독특한 아이는 제가 계속 붙어서 호위하겠습니다.”
“좋아.”
손가락을 풀면서 나도 탐욕을 만나기 전에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 그런데 시온이 안 나가고 계속해서 쭈뼛댄다. 무슨 용건이라도 남은 걸까.
“왜? 무슨 일이야?”
“도련님···”
말꼬리를 흐리며 몸을 좌우로 배배 꼬는 모습이 똥이라도 마렵나 싶다.
“왜.”
“혹시···잊으신 것 없습니까?”
아공간 호리병 챙겼고.
악마의 심장 먹였고.
천마검 허리춤에 잘 있고.
일행들 상태 점검했고.
또 뭐가 남았을까.
“질문이 이상하군. 내가 생각하기에 까먹은 건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날 모시는 하녀인 네가 챙겼여야 하는 일 아닌가?”
내 말을 들은 시온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제 그녀와도 지낸 시간이 꽤 오래돼서 무표정 속에 숨겨진 심리가 대충 예상이 갔다.
지금 그녀는 대실망 중이다.
그런데 왜 실망을 했을까.
-멍청한 놈. 너만 보고 있으면 속에서 열불이 터진다. 여인네를 그리 몰라서야 쯔쯧!
의식 속에서 들리는 천마의 목소리.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가 하녀에게 했던 말이 기억이 안 나느냐?
“업무 관련된 지시 외에 사적인 말은 안 했습니다만.”
-단둘이서 대화 말고 경매장에서 네가 했던 언행을 곰곰이 곱씹어보거라.
천마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대충 짚이는 데가 있었다.
“인어의 눈물 말입니까?”
-그래. 너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녀를 약혼녀라고 공공연히 칭하고 귀물까지 준다 하지 않았더냐.
“단지 내공을 보충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둘러댄 거였습니다.”
-흐흐흐, 바보 같은 놈. 내가 검에 갇혀있는 몸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뒤통수를 때렸을 텐데.
천마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정말로 시온이 인어의 눈물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인어의 눈물에 담겨있는 내공을 흡수한 다음 하녀에게 주거라.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
“묘안입니다.”
천마의 말대로 따르기로 했다.
아공간 호리병을 슬쩍 만져서 경매장에서 꺼내온 인어의 눈물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보석이다.
때깔 좋은 광택이 방 안을 채우며 스스로를 뽐냈다.
과연 천마의 말대로 시온은 인어의 눈물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보석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몸을 움찔대며 어쩔 줄을 몰라한다.
리액션이 거의 없는 시온이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내면에선 거의 폭풍이 몰아친다 봐야 했다.
“시온, 호법을 서라.”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지금부터 인어의 눈물 안에 있는 마나를 흡수할 거다. 그동안 혹시 모를 외부의 개입을 막으라는 이야기다.”
시온은 머리가 좋은 여자다.
이 정도만 말해도 내가 왜 인어의 눈물을 샀는지 파악했겠지.
자신을 위해서 구매한 게 아니라 마나를 흡수하기 위한 목적임을 안 시온이 김칫국을 마셨다는 생각에 민망함과 아쉬움 섞인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제가 요새 본분을 자꾸 망각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도련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시온이 너무 자책하길래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네가 본분을 망각하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나.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는데 새삼스레 사과할 것 없다.”
깜짝 놀랐는지 시온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진다. 내가 언제 그랬지 싶은 표정.
“그리고 인어의 눈물은 너 주려고 산 거 맞아. 특별한 마나가 담겨있는지는 조금 전에 살펴보다가 알았다.”
선의의 거짓말이라 했던가.
기왕 인어의 눈물을 주기로 했으니 좋게좋게 포장하기로 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마음이 붕 떴는지 들뜬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호법을 서거라.”
“예!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뒤돌아 나가는 시온의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힘차다.
좋은 일이었다.
그녀가 나간 후 인어의 눈물에 손을 댔다.
혹시 고대의 유물인가 싶어서 시스템창이 떠오르나 봤는데 그러진 않았다.
정말로 대륙 어딘가에 사는 인어가 흘린 눈물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정말 인어가 있나?”
<시온라이크>의 배경인 아르니아 대륙에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고 그래서 원래 주인공 시온이 물리쳐야 할 보스 목록도 가지각색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악마나 엘프, 오크나 오우거 같은 존재는 기억나는데 인어는 솔직히 모르겠다.
“나중에 만날 일이 있었으면 좋겠군.”
그날을 기약하며.
인어의 눈물에 손을 대자 안에서 시원한 마나가 아랫배로 끝없이 쏟아졌다.
보통 호흡으로 얻는 마나와는 그 성질이 조금 달랐다.
현재 내 단전에는 두 개의 기운이 꽈배기 모양으로 서로를 감싸며 돌고 있었는데,
하나는 은색 용혈.
하나는 녹색 마나다.
용혈은 기운이 넘치고 전투적인 성질이라면 마나는 차분하면서도 포용적이었다.
그 가운데 들어온 인어의 눈물은 푸른 계통으로 청량감이 짙었으며 무엇보다도 시원시원했다.
기존의 두 집주인과는 명백히 다른 성질을 지닌 이 마나는 어찌 보면 반대적인 성향을 가진 은색 용혈과 녹색 마나 사이를 파고들며 조화를 꾀했다.
사아아아아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던 폭풍이 실내를 휩쓸었다.
그동안 용혈과 마나의 혼합으로 완벽히 섞이지 못하고 은녹색을 띠던 내 마나가 푸른 계열까지 혼합되자 자연스럽게 하나의 색으로 융합됐다.
신비하게 반짝이는 에메랄드 그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