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73화 (73/200)

10장 부화 : 내려친 망나니

판타지 액션 RPG 게임 <시온 라이크>에 들어온 지도 제법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의문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흑마법사가 시체를 일으키고, 엘프와 드래곤 같은 전설 속 이종족이 실제로 존재하며, 마나를 다루는 인간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세계.

이런 세계에서 견뎌왔던 시간이 결국 꿈은 아니었을까.

꿈속에서 10년을 지냈든 100년을 지냈든 결국 깨어나면 일장춘몽이요, 한순간의 유희였을 뿐이니.

삐리리! 삐리리리!

“김 과장? 오늘 뭐 잘못 먹었나? 전화 받아야지, 허허허허.”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이 연신 진동하며 전화를 받아달라고 아우성이다.

액정에는 [혜선♥]이라고 떠있다.

낯선 이름이다.

내 개인 휴대폰 같은데, 혜선이는 대체 누구일까?

-자기? 지금 바쁘지? 회산데 전화해서 미안해.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누구세요?”

-···이제는 와이프 목소리도 못 알아듣는 거야? 오늘 자기 생일이라고 별의별 장난을 다 치네.

내가 결혼을 했었나?

게다가 오늘 생일이라고?

혼란스러운 동시에 마음 속 한켠에서는 기이한 안정감이 퍼진다.

‘맞아. 그럴 수 있지.’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이 상황이 묘하게 납득되었다.

-하여튼 집에 생일 저녁상 차려놨으니까 어서 와요. 우리 자기 내가 늘 사랑하는 거 알지? 공주님도 오랜만에 아빠랑 논다고 잔뜩 기대 중이야.

내가 애아빠에 유부남이었구나.

맞아. 그랬던 것 같아.

오늘 생일이라고 했으니 정시 퇴근해야겠다.

나에게 커피를 갖다 준 상사를 쳐다보자 그가 활짝 웃으며 말한다.

“우리 부서 에이스 김 과장! 무슨 일인가? 말만 하게. 내가 알아서 다 프리패스로 해결해줄 테니!”

과도한 친절.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사무실 한쪽을 봤더니 벽면에 달린 커다란 모니터에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국보험

이달의 최우수 사원

김철수 과장

“보험회사···최우수 사원?”

“하하핫! 갑자기 자화자찬이라고 하고 싶었나? 그래! 김 과장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최고 실적을 냈고 이번 달에도 최우수 사원 타이틀을 따내지 않았나!”

“그랬군요.”

“덕분에 우리 부서에 금일봉 떨어져서 지난주에 단체회식도 했는데 벌써 까먹었나 보네.”

회사에서 이렇게 잘 나갔었나.

그러고 보니까 부서에서 날 대하는 사원들의 표정이 전부 호의적이다.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거나 임원급 이상으로 보이는 상사가 괜히 어깨를 두드리고 가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김 과장 오늘 생일이라고 했지? 옜다, 기분이다! 김 과장 오늘 일은 다 나한테 넘기고 짐 챙겨.”

아무리 사양해도 소용없었다.

윗사람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들까지 부서 전체가 합심해서 내 일을 맡아주고 날 억지로 퇴근시켰다.

회사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도 축하인사는 계속되었다.

“김 과장님! 소식 들었어요. 축하해요.”

부하직원의 인사부터.

“하하핫! 내가 그랬지? 김 과장 결국 크게 될 상이라고. 임원급까지는 따놓은 당상이구먼.”

상사의 격려까지.

“최근에 주식 대박 났다는 소문 들었다. 부럽더라. 안사람은 미스코리아 출신이지, 주식 대박 났지, 올해의 사원 탔지, 부럽다 부러워.”

동기의 질투 어린 말까지.

여러 유형의 대사였지만 공통점은 나를 칭찬하고 응원하려는 의도였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해서 가방을 뒤졌다.

자연스럽게 손에 쥐어진 차키를 누르자,

삐빅!!

삐까번쩍한 고급 세단에 불이 들어왔다.

꿈인가 싶어서 자동차 키를 여러 번 눌렀더니 역시나 동일한 차에서 불이 깜빡인다.

억소리나는 외제차였다.

회사에 이런 차를 타고 온다고?

보험회사 에이스라서 가능한 건가.

운전석에 탑승하고 시동을 거니 시동음도 거의 안 들리고 엔진에서부터 퍼지는 부드러운 진동이 엉덩이를 감쌌다.

엑셀을 밟지도 않고 슬쩍 앞발로 만지기만 했는데 자동차는 알아서 굴러갔다.

어찌나 승차감이 좋은지 공중에 붕 뜬 채 도로를 미끄러져 가는 느낌이다.

네비게이션에 저장된 집 주소를 터치하자 길 안내까지 일사천리였다.

오늘따라 차도 안 막힌다.

도심 속 레이서가 되어 짜릿한 주행을 하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아파트 최고층에 서서 벨을 눌렀다.

언제부터 여기가 내 집인가 싶었으나 주식 대박 나고 보험왕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딩동! 딩동!

안쪽에는 반응이 없다.

문고리를 돌려봤더니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는지 쉽게 문이 열렸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암막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서 아직 저녁때임에도 실내가 어두컴컴하다.

“자기? 혜선아?”

어색하게 아내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반응이 없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점등 스위치를 찾으려는데,

펑! 퍼펑!

“““서프라이즈!!”””

100평짜리 넓은 거실에 현수막이 대문짝하게 걸려있었다.

경) 김철수 과장 탄신일 (축

헬륨 먹인 풍선이 천장에도 붙어있고 바닥에도 굴러다녔다.

미리 설치해놓은 스피커에는 경쾌한 생일 축하 노래를 연신 내보냈고.

양옆에서 친구로 보이는 남녀 여럿이 고깔모자를 쓴 채 폭죽을 터트리며 해맑게 웃었다.

“귀빠진 날 축하한다. 짜샤!”

“이불에 오줌 지렸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대?”

“오늘은 우리가 쏠 테니까 너는 즐기기만 해라.”

정면에는 아내로 보이는 혜선이가 무려 3단 케이크를 앞에 두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짜잔! 놀랐지? 회사에 연락해서 자기 일찍 퇴근시켜달라고 졸랐어.”

아내가 미스코리아라고 하더니 내가 봐도 엄청난 미인이다.

그녀가 나에게 가벼운 허그를 했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코를 간질이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자기 주려고 다들 이렇게 준비했어!”

곧이어 선물 공세가 시작됐다.

평소에 취미로 수집하던 온갖 최신 프라모델이 수북이 쌓였고 한정판 게임 CD를 가져다준 친구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직접 외국까지 가서 내가 좋아하는 해외파 운동선수의 싸인볼까지 가져왔다.

“고맙다.”

“에이! 그게 끝이야?”

“인심 좀 써라.”

“이 집 리액션 너무하네.”

“미안하다. 원래 이런 성격이라.”

친구들이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한다.

“말만 이렇게 하는 거지.”

“그래, 네가 우리한테 해준 게 얼만데.”

“진짜로 축하한다. 쨔샤.”

날 축하해주는 무리에게 둘러싸여서 생일상을 대접받았다.

친구 한 놈은 면세점에서 사온 비싼 양주를 내 생일이라고 특별히 개봉했다.

생일상에 올라온 반찬을 봤더니 육해공이 빠짐없이 들어와 구첩반상을 이루고 있다.

제주에서 직접 공수해왔다는 다금바리, 횡성에서 가져온 특A++한우, 영양만점으로 소문난 오골계까지.

매우 호화로운 밥상이지만 내 시선을 잡아끄는 건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흰쌀밥과 미역국이었다.

후르릅

뜨끈한 미역국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고향의 맛이다.

자연스레 눈가가 흐려진다.

“아···”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구나.

모두가 나를 사랑해주는 곳으로.

잠시 나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근데 그게 무슨 꿈이었더라?

뭐···기억 못해도 상관없겠지.

“어머 내 정신 좀 봐. 선물이 또 있었는데 까먹고 있었네?”

유심히 내 반응을 지켜보던 아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일어나더니 구석에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우리 공주님! 나오세요!”

맞다.

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아이가 있었다.

아가를 부르는 혜선이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글쎄 말이야, 원래는 밥 먹고 얘기하려 했는데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어. 우리 공주님이 울 자기 닮아서 그런지 엄청 똑똑해. 오늘 학교에서 받아쓰기 100점을 맞아온 거 있지?”

딸아이도 공부를 잘하는구나.

특별히 시간 내준 적도 없는데.

뿌듯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끼이익

방문이 열리고 딸이 나오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의외의 외모를 가진 소녀가 나를 맞이한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은색 머리카락.

밤하늘 은하수가 펼쳐진 눈동자.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신비로운 분위기.

특히나 양쪽 귀는 뾰족하다.

“어···혜선아?”

“왜?”

“우리 딸 맞아?”

나도 그렇고 혜선이도 그렇고 토종 한국인인데 딸의 외모는 너무나 이국적이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그러자 여태껏 계속 웃고 있던 아내의 포커페이스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앗하하!! 우리 공주님이 오늘 아빠 생일이라고 특수분장까지 하셨네? 아유, 요 귀여운 것!”

가서 볼을 꼬집는데 내가 봐도 아플 정도로 심하게 꼬집는다. 그러자 딸아이가 무표정을 유지한 채 손등으로 아내의 손을 탁 쳤다.

“손대지 마.”

“우리 공주님이 오늘 왜 이러실까? 좋은 날인데 말이야.”

이쯤 되자 뭔가 이상함이 느껴진다.

아내가 서둘러 딸의 손에 들린 시험지를 낚아채서 나에게 보여줬다.

“자기야! 이것 봐봐. 받아쓰기 백저···”

탁!

이번에는 딸이 아내의 손에서 시험지를 낚아채더니 내 앞에서 북북 찢어버렸다.

그러자 아내가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아이에게 소리를 빽 지른다.

“김유리! 너 오늘 대체 왜 이래?”

딸아이는 아내를 무시했다.

오로지 시선을 나에게만 고정했다.

왠지 모르게 풍기는 신비로움 때문인지 나 또한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김유리라고 불린 아이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저씨, 저 사샤에요.”

사샤?

분명히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그만하고 이제 나오세요. 더 늦으면 바깥에 있는 아저씨랑 아저씨 친구들이 모두 위험해요.”

“야! 김유리!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아내가 스스로 사샤라고 칭한 여자아이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고 방 안에 집어넣은 다음에 방문을 걸어 잠갔다.

“유리가 오늘따라 많이 예민하네? 내가 제대로 혼낼 테니까 자기는 신경 쓰지 말고 파티 즐겨요.”

뭔지 모르게 어색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사샤라는 아이를 만나고 나서부터 무언가가 어긋났다는 느낌이 사라지질 않는다.

“자! 입 벌려요. 방금 갓 구운 소고기에요.”

상추쌈에 마늘에 쌈장 살치살까지 야무지게 넣어서 건네는 아내.

하지만 한 번 내 가슴 속에 심어진 의심의 씨앗은 점차 들불처럼 퍼지고 있었다.

하나를 이상하다고 여기자 다른 것도 전부 이상해 보인다.

언제부터 내가 결혼했었지?

내가 정말로 보험 회사에 다녔나?

친구들이 이렇게 나한테 지극정성이라고?

쩌적—! 쩌저적—!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약한 진동이 오면서 집 전체가 뒤흔들렸다.

“꺄악! 지진인가 봐.”

“괜찮아. 이 아파트 비싼 아파트야.”

“맞아. 내진 설계 제대로라고 뉴스에서도 봤다고.”

친구들과 아내가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사태를 수습한다.

지진이 멈추자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데 이제는 다정한 눈빛 너머에 도사리는 음산함이 느껴졌다.

마침 의식 속에서 걸걸한 노인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애송아! 추태 그만 보이고 인제 그만 나오너라. 시온이라고 했던가? 하녀가 위험하다!

“···시온?”

무심코 내뱉은 이름에 날 지켜보던 일동 전부가 움찔한다.

“하하하, 시온이 뭘까?”

“새로운 프라모델 이름인가?”

“그렇겠다. 자기 장난감 좋아하니까.”

아냐.

시온은 프라모델 따위가 아냐.

다른 중요한 무언가였는데.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만취한 다음날 끊어진 필름을 이어붙이는 듯했다.

아내와 친구들이 본격적으로 즐기자며 건네는 술잔과 음식을 모두 거절했다.

그러던 차에 문득 떠오르는 한 장면.

마차에서 석양빛을 마주하던 여인.

보라색 머리카락이 유독 빛나는 그녀.

얼마 전 인어의 눈물을 받고 속으론 방방 뛰면서 겉으로는 좋은 내색조차 안 하려던 내 충실한 하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련님이 조금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떠올랐다.

시온라이크의 주인공.

이제는 나와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

그녀와 북부에서의 동지 캠벨을 구하러 가야 했다.

“뭘 그리 생각해요? 이제 그만 밥 먹어요.”

아내의 달콤한 속삭임.

하지만 모든 걸 깨닫고 나니 그저 탐욕이 꾸며놓은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식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해야할 일이 있다. 식사는 즐거웠어.”

대문을 통해 집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태까지 날 축하해주기 위해 여념이 없던 아내와 친구들이 우르르 나와 내 앞길을 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냐니. 자기 오늘 생일이잖아. 주인공이 나가면 어떡해? 다시 앉아. 밥 먹자.”

“필요 없다. 나는 가야해.”

“아냐. 갈 필요 없어.”

아내와 내 의견이 대립한다.

건장한 친구 두 명이 내 양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억지로 앉히려 한다.

그들의 미소에는 이미 귀기가 깃들어 있었다.

“자···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이제 앉자? 그게 서로 편하고 좋잖아?”

이곳에서 나는 어떠한 능력도 쓰지 못하고 여러 사람이 달려들면 무력해지는 평범한 일반인이다.

그러나 이곳은 환상 속.

오감을 속이는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걸 간파하고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오로지 육감만을 사용하여 내가 원하던 것을 찾는다.

스르르릉

그러자 어느새 내 손에는 시퍼런 예기를 발하는 천마검이 들려있었다.

“자기야? 그거 내려놔.”

“그 칼은 어디서 났어?”

“어색한 연기는 그만하지. 어차피 나는 이곳을 빠져나갈 테니까.”

차분한 눈빛으로 말하자 친구들과 아내가 순간 입을 닫았다.

싸늘한 적막이 실내에 감돈다.

아내와 친구들에게 풍기던 불온한 기운이 점점 짙어진다.

어느새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진 그들은 징그러운 이빨을 드러내며 본색을 내보였다.

“그흐흐흐···환상 정원을 간파해낸 인재라니. 최후의 전투 이후로 20년 만에 처음인가.”

“그 하이엘프만 아니었어도 충분히 더 즐겼을 텐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네놈은 여기서 우리와 영원히 있어야 한다. 선택권 따위는 없다.”

차라리 이게 편했다.

악귀로 변한 이들이 내게 덤벼들었고 이에 맞서 천마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악귀를 처치할 의도가 아니었다.

어차피 눈앞의 악귀 또한 환상 속 존재기에 칼로 벤다고 물리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내가 벤 것은 그저 미련이었다.

현실 세계에 대한 그리움.

성공에 대한 갈망.

이상적인 가장이 되고 싶단 열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심마를 정확히 베어냈다.

쩌저저적—!

세계가 무너진다.

고층 아파트.

값비싼 자동자.

푸른 하늘.

펼쳐진 도로.

모든 것이 한순간 꿈이었다는 듯 잿가루로 화했다. 욱신거리는 통증과 지하 공기의 텁텁함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드디어 환상에서 탈출한 것이다.

얼마나 빠져있던 걸까.

당장 눈앞에 시온이 보인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환상에 빠졌는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앞에는 단검을 쥔 탐욕이 그녀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크크큭, 역시나 내 환상 스킬에는 모두가 무력하군. 당연한 일이지. 세븐 스타마저도 환상안 때문에 나와의 대결을 꺼릴 정도였으니 말이야.”

그렇게 시온의 심장에 칼이 박히려는 찰나,

[윈드컨트롤]

[순보 발동]

신검합일이 되어 공기를 박찬 내가 탐욕의 옆구리를 제대로 찔렀다.

푸우욱!!!

“끄어어억!!!”

이번엔 절대방어막 같은 유물도 없었는지 제대로 손맛이 느껴졌다. 환상안을 철저하게 믿고 있던 탐욕은 내 기습에 제대로 당해버렸다.

“제기랄!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것이냐?”

경악한 탐욕의 눈이 크게 떠진다.

다시 한번 황갈색 눈동자와 마주했지만 이미 한 번 환상안을 극복한 상황에서 다시 현혹되는 일은 없었다.

탐욕은 피가 줄줄 새는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나와 거리를 벌렸다.

그 틈을 이용해서 시온과 캠벨의 상태를 살폈다.

둘은 여전히 멍한 눈빛이다.

계속 내버려뒀다간 영원히 환상 속에 갇힐 것 같길래 충격요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충격요법이란 외부의 충격으로 환상 세계를 깨트리는 방식. 천마검으로 시온과 캠벨의 왼손을 찍었다.

어설프게 했다간 괜히 상처만 내고 도움도 못 줄 것 같길래 확실한 일격을 날렸다.

[파마의 힘이 작용합니다.]

역시 탐욕의 환상안 속에 들어있던 건 몽마의 일종이었던 모양이다.

저주와는 달라서 완전 면역 스킬에는 걸리지 않았고 대신에 파마의 힘에는 약점을 보였다.

파마의 힘이 담긴 천마검이 통증을 유발하자 몽롱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시온과 캠벨이 닥쳐오는 고통에 초점이 또렷해졌다.

“어라?”

“···아?”

“정신 차려라. 둘 다.”

휘몰아치는 고통에 왼손을 감싸 쥔 둘은 단숨에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탐욕의 환상안에 혀를 내둘렀다.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습니다.”

“정말 귀찮은 녀석이군. 차라리 대놓고 검을 쓰는 소드마스터가 편할 지경이야.”

나야말로 사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녀의 능력 확인과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은 이곳을 빠져나간 뒤에 해결하기로 했다.

한편, 옆구리에 깊은 내상을 입어서 피를 철철 흘리는 탐욕은 굳이 더 공격하지 않아도 알아서 과다출혈로 죽을 상황이었다.

그만큼 내 일격이 내장 깊은 곳까지 제대로 베어낸 탓이다.

그래도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천마검을 들고 다가갔다.

“네가 그럴 놈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다만,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든다면 죽고 나서는 네가 저지른 죄의 백분지 일이라도 회개하거라.”

쿨럭거리며 입으로 각혈까지 하는 탐욕은 내 말을 듣고 한껏 웃어댔다.

“큭! 쿨럭! 크하하하! 쿨럭!”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광인처럼 웃는 탐욕이 화상 번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뭐? 회개? 시답잖은 단어다. 세상은 흉측한 얼굴을 가진 나에게 한없이 차가웠고 나는 그저 세상이 내게 보인 적의 그대로 돌려줬을 뿐이야.”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대간부 자리까지 오르려면 보통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닐 테니까. 분명 북부에서 만났던 니플헤임처럼 어딘가에 얽힌 사연이 있으리라.

하지만 억울한 사정에 공감해주기에는 그가 여태껏 제물로 사용한 수많은 노예와 추악한 권모술수에 당한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

“죽어서 네 업보를 감당하여라.”

푸욱!!

탐욕의 심장에 검이 내리꽂혔고.

질투에 이어서 황혼의 두 번째 간부도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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