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78화 (78/200)

11장 엘프 : 등밟은 망나니

로이드 후작령으로 복귀하는 길.

실질적으로 리앙에 온 지는 얼마 안 되었는데 하도 극적인 사건을 연속해서 겪어서인지 체감은 벌써 몇 년 흐른 것 같다.

원래 내가 로이드 후작에게 받은 명령은 리앙에 숨은 탐욕의 꼬리를 잡고 그 단서를 캐내는 정도였다.

그가 어디에 숨었는지 알아낸 후 로이드 후작이 리앙 시장과 협력해서 황혼의 대간부를 도시에서 몰아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리앙 시장부터가 탐욕인 데다가 그다음 권력자 하만 또한 황혼교였으니, 이 고생을 한 게 얼추 이해가 됐다.

그래도 큰 수확을 얻은 여정이었다.

운 좋게도 세븐스타 톰을 만나서 탐욕을 직접 잡아냈고 고대의 저주라는 엄청난 음모도 파훼했다.

또한 보름달 암시장에서 얻은 경매품과 유론 시장이 준 보상금만 해도 산정가치 백이십만 골드에 준하는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리앙 명예상인조합장과 수호군 총사령관이 되어 평생 연금을 받으며 군단급 전력 즉시 동원이 가능한 인재가 되었다.

엘든 왕국에 나만큼 단기간에 많은 병력을 휘두를 귀족은 손꼽을 정도니까 이로써 내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은 셈이다.

겸사겸사 친위대나 마찬가지인 푸른매 용병단도 알버스 영지에서 무럭무럭 성장해서 든든함을 더해줬다.

여기에 더해서.

순례자 모임이라는 폐쇄적이지만 영향력 강한 집단의 일원이 되었고 그들로부터 오러블렛과 웜홀 생성기, 브로치까지 받아서 대만족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리앙행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지금 눈앞에 붕붕 날아다니는 귀여운 코코.

그리고 마차에서도 내 옆구리에 찰싹 붙어앉은 채 멍한 시선으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하이엘프 사샤였다.

“사샤.”

“응?”

“잠시 이야기 좀 할까?”

사샤에게 궁금한 게 있었는데 탐욕과의 사투 이후 정신이 없어서 미처 시간을 못 냈었다.

이제는 로이드 영지로 돌아가는 길이고 마침 코코를 제외하면 사샤와 단둘이 마차에 타고 있는 상황이길래 이참에 물어보기로 했다.

“그날 시청사 지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기억하지?”

“응.”

“그때 혹시 어떻게 한 거니?”

구체적으로 지칭하진 않았으나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사샤도 알아들었다.

탐욕이 가면을 벗고 환상안을 시전했을 때,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영원히 환상 속을 헤매다가 패배할 뻔했다.

그만큼 탐욕의 환술은 이쪽 방면에 저항력이 없다면 소드마스터라도 당할 만큼 강력한 스킬이었다.

당시에 사샤는 본신의 무력은 제로임에도 불구하고 환상 속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내가 꿈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아저씨의 영혼이 기분 나쁜 끈에 속박되었어.”

사샤가 말한 기분 나쁜 끈은 탐욕의 환상안으로부터 뻗어나왔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끈을 끊어버렸어.”

“어떻게?”

“나는 할 수 있어. 잘 봐.”

눈을 감은 사샤에게서 기이한 기운이 피어오르며 은빛 머리카락이 한올 한올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마나도 기력도 내공도 뭣도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영기(靈氣)에 가깝달까.

비로소 깨달았다.

하이엘프 사샤는 샤먼, 즉 주술사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샤는 첫만남부터 주술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단숨에 황금가지를 삼킨 내 세계수의 냄새를 맡고 찰떡같이 붙어서 좋은 냄새가 난다질 않나, 아직 약관이나 됐을 법한 헤논이 아니라 그 속에 빙의된 김철수의 영혼을 정확히 인지하질 않나.

그녀의 은빛 눈동자는 몽환적일 뿐만 아니라 뒤집힌 세계 이면을 볼 수 있는 영안인 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부족의 주술사라면 가장 보호받아야 할 존재인데 어째서 노예시장에 잡혀 왔을까.

이에 대해서 묻자 사샤의 얼굴이 급격히 흐려졌다.

“그건···”

사샤가 대답하려는 찰나.

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가 급히 멈춰 섰다.

“뀨!”

공중에 날고 있던 코코가 빙글거리다가 균형을 잡았고 나는 반사적으로 사샤의 허리를 감아서 앞좌석에 부딪히려는 걸 막아줬다.

“고마워. 아저씨.”

“안에서 꼼짝 않고 있어라.”

“뀨!”

코코와 사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마차 문을 열고 나왔다. 밖에선 이미 시온과 캠벨이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무슨 일이지?”

“도련님, 전방에 산적 무리가 등장했습니다. 숫자가 꽤 많습니다.”

“산적?”

“믿기 어렵지만 그렇습니다.”

“머릿수는 어떻게 되지?”

“약 백여 명입니다.”

아르니아 대륙에서 여행하다가 산적을 만난다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곳이 장차 내가 관리할 로이드 후작령이라는 점일까.

특히나 최근에 힐튼 백작가와의 영지전에 승리하고 분위기 좋은 상황에서 세자릿수 산적이 난데없이 나타난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리앙에서 하도 잘 먹어서 제법 푸짐해진 캠벨이 두 주먹을 쾅쾅 부딪치며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요 며칠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잘됐군. 부단장, 명령만 내려주면 당장 달려가서 모조리 목을 분질러줄게.”

캠벨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 둘은 여기서 마차를 지켜라. 혹시 모를 뒤에서의 습격을 대비하고 사샤와 코코를 지켜. 저 녀석들은 내가 맡으마.”

“알았수. 이것 참 아쉽게 됐군.”

로이드 영지에서 발생한 산적이기도 했고 일백이 넘는 숫자니까 되도록이면 살려서 이것저것 물어봐야 했다.

“이곳은 대(大)엘든 왕국의 기둥이자 위대한 세븐 스타이신 고든 로이드 후작께서 정당한 지배자로 군림하는 땅이다. 너희는 어떤 권리로 우리 앞길을 막느냐!”

의례적인 호통을 들은 산적들이 킬킬대며 비웃었다.

“흐흐흐, 샌님 같이 생긴 귀족 나으리로군.”

“털면 얼마나 나올까?”

“마차를 봐라. 저기에 붙은 금 쪼가리만 떼서 팔아도 한 달 내내 술을 진탕 마실 수 있다.”

“기왕이면 저 귀족도 잡아서 몸값을 받아내야겠어. 지갑이 두꺼운 가문 자제였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나를 보는 눈초리가 마치 움직이는 금광을 보는 듯하다.

원래도 산적들이란 욕심에 눈먼 자이니 그러려니 하는데, 여기서 의문은 로이드 후작령에서 떡하니 영업하려는 저 배짱이다.

혹시 몰라서 로이드 가문의 상징인 상수리나무가 새겨진 깃발을 좌우로 힘차게 흔들며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지금이라도 물러간다면 쫓지 않겠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줄 때 해산하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당연히 거짓말이다.

어차피 나를 만난 시점부터 저놈들은 이미 잡힌 몸이다.

뒤쫓아서 한 놈도 빠짐없이 족칠 계획인데 말만 이렇게 하는 거다.

“흐하하핫!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온실 속 화초답게 아직도 상황파악이 덜 됐군.”

“저놈 나한테 맡겨. 제대로 패줄 테니까.”

고맙게도(?) 산적 집단의 행동은 내 예상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덩치가 삿대질하며 명령했다.

“어차피 셋밖에 없는데, 화살도 아깝다. 전부 달려서 붙잡아라.”

“와아아아아!!!!”

함성 하나만큼은 봐줄 만하다.

눈 뒤집혀서 사방에서 에워싸는 놈들을 보며 천마검을 뽑는 대신 뒤에 있던 시온과 캠벨에게 나지막히 일러두었다.

“절대 죽이지 마. 모두 살려라. 수련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한 놈이라도 실수로 죽이는 사람은 저녁 수련 연장이다.”

“쳇! 내가 제일 불리한데.”

“명을 받듭니다.”

솔직히 떨거지 상대로 이기고 지는 걸 가늠하는 자체가 창피하다.

오히려 실수로 누굴 죽이냐 마냐로 내기하는 게 편했다.

“으핫하하! 내가 제일 먼저 잡아주마!”

뒤에 친구 많다고 기세등등해서 달려드는 꼬라지가 가관이다.

충치가 있는 것 같길래 천마검을 검집째로 휘둘러 오른쪽 치아를 발치해주었다.

퍼억!

“꾸웨엑!!”

첫번째 놈이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첫 놈이 당한 건 우연이라고 여긴 녀석들이 뒤이어 들이치다가 공평하게 생니 발치 수술을 받았다.

참고로 마취약은 비싸서 안 썼다.

퍽! 퍼퍽! 퍽!

이것들은 양치도 안 하나.

더러운 누런니가 튀긴 팝콘처럼 허공을 날아다녔고, 그때마다 입가에 피를 줄줄 흘리는 놈들이 턱을 감싸 안으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검집에 맞고 눕는 녀석이 열 명을 넘어가자 팔짱을 낀 채 뒤에서 사태를 구경하던 대장 녀석이 심기가 불편한지 부하들을 닦달한다.

“겨우 세 명이라고! 나한테 죽기 싫으면 당장 잡아와라!”

“으아아아!!!”

아직도 감을 못 잡았네.

대장이 돌격하랍시고 진짜로 눈 까뒤집고 오는 놈의 뒷목을 잡고 마주 오는 놈에게 던져서 일타이피로 기절시킨다.

다음에 오는 녀석의 뒤통수를 피 묻은 검집으로 세게 후려버리고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다른 놈에게 주먹을 날린다.

턱주가리에 스트레이트 훅이 정확히 꽂힌 산적 놈은 눈에 흰자위를 보이며 털썩 무너졌다.

“어···어?”

먼저 간 놈들이 지나치리만큼 허무하게 당하자 상대가 주춤댄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쇄도한다.

무리지은 하이에나 떼를 덮치는 숫사자처럼 놈들 사이를 휘저으며 유린했다.

슬쩍 발을 걸어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넘어트림과 동시에 오른쪽 어깨를 짓밟아 다시는 수저를 못 들게 만들었고.

후방에서 도끼를 내리치려는 놈을 뒤돌려차기로 복부를 까버리고 쿨럭대며 벌레처럼 웅크린 놈의 머리를 내리쳐 침묵시켰다.

이쯤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놈들도 대충 느꼈다.

내가 숫자로 밀어붙인다고 해결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던 머릿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자 집단의 결속력이 와르르 무너지고 오합지졸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저놈들이라도 잡아!”

“설마 저 연놈들까지 강하진 않겠지.”

다음 목표는 전투 내내 튀어나가고 싶어서 안달 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시온과 캠벨이었다.

욕구불만으로 몸을 배배 꼬던 두 남녀는 산적이 다가오자 신장개업한 음식점에 입장한 첫 손님을 본 사장님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한다.”

손님들은 캠벨의 우락부락한 덩치를 보고 고민한다.

그러자 자신에게 산적이 안 몰릴까 걱정한 캠벨이 서둘러 무기를 땅에 내동댕이치고 최대한 호의적인 미소와 함께 손바닥을 내보였다.

하지만 빌어먹을 외모지상주의.

인기투표는 단연코 시온의 압승이었다.

“젠장할!!”

겨우 두세 명을 다운시킨 캠벨이 옆에서 열댓 명의 사내를 쥐어패는 시온을 부럽게 바라본다.

그때쯤에 나는 이미 산적 두목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나름 친위대랍시고 두목과 나 사이를 막던 놈들은 한 대씩 공평하게 때려줬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굴러다녔다.

“하···겨우 셋한테 당하다니. 쓸모없는 녀석들.”

오! 두목이 나름 패기가 있다.

부하들 다 없어지면 당연히 겁먹을 줄 알았건만.

그러고 보니 몸이 제법 단단하다.

오른손에도 검을 자주 잡은 사람 특유의 굳은살이 박여있다.

저 녀석 검을 전문적으로 잡은 놈이다.

“산적 두목 할 놈은 아닌데?”

“당연하지. 나라고 이따위 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느냐?”

“근데 이걸 어쩌지. 굳이 그쪽의 개인사를 알고 싶진 않아.”

“나도 마찬가지다. 대충 때려눕히고 끌고 가주마.”

검을 뽑은 녀셕의 어깨로 기운이 일렁인다.

제대로 완숙에 이른 소드 유저다.

웬만한 영지에서 밥 벌어먹고 살만한 기사 수준은 된다.

그래서 저렇게 자신감을 가졌겠지.

“죽어라!”

하지만 놈의 앞에 있는 건 마스터급의 강자와 숱한 생사투를 벌여온 잔뼈 굵은 익스퍼트 고수다.

솔직히 움직임이 너무 뻔해서 하품이 나올 수준.

대충 몇 번 피해줬더니 분개한 녀석이 고함을 친다.

“감히 어디서 같잖은 회피술을 쓰느냐? 어서 칼을 뽑아라. 안 그러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숨에 썰어주겠다.”

난 끝까지 천마검을 뽑지 않았고 검집만으로 녀석의 검을 대강 쳐냈다.

합을 나누면 나눌수록 서로에 대한 정보가 쌓인다.

내가 심상찮은 고수라는 걸 깨달은 산적 두목의 낯빛이 점차 하얘졌다.

반면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옷이 후즐근해서 밑바닥 출신 칼잡인가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구사하는 검술은 지나치게 정석이었다.

보통 그런 용병들은 형식 없는 독특하고 자유로운 검술을 추구하면서 자신만의 주관만으로 경지를 돌파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뭐랄까.

움직임도 그렇고 검 휘두르는 폼새도 그렇고, 어디 검술 아카데미 교관이라 해도 믿겠다.

아르니아 대륙에 들어온지도 꽤 시간이 지났고 수많은 기사와 용병들과 전투를 벌이다 보니 데이터도 꽤 쌓여있다.

그런 내 촉이 말해줬다.

이 녀석은 용병이 아니라 정식 기사가 분명하다고.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제길!”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산적 두목이 검을 크게 횡으로 그어서 거리를 벌리더니 몸을 홱 돌리고 줄행랑을 쳤다.

물론 내 예상 범위 안이었다.

[우드 컨트롤]

[바인드]

나무 뿌리가 발목을 속박했고.

나를 피하느라 아래를 못 본 녀석이 꽈당 넘어졌다.

엎어진 녀석의 등을 밟은 내가 전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천마검을 뽑아 검날을 목에 갖다 대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라. 너 어디 쪽 기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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