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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91화 (91/200)

12장 잠식 : 흐르는 망나니

세례식 도중에 대놓고 난입했다.

심지어 침입자는 인간이다.

이 두 개의 사실만으로도 날 바라보는 엘프족의 눈초리는 곱지 않았다.

“뻔뻔한 놈이군.”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지?”

강화전사들이 붉어진 얼굴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를 들었다.

“잠시만.”

리처드 대장로가 손을 들어 무력을 행사하려는 전사들을 말렸다.

대장로가 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표정에 여유로운 기색이 물씬 풍겼는데, 현재 돌아가는 상황이 상당히 괜찮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그렇게 생각할 듯했다.

이곳은 엘프의 본거지고 주변에 거느린 강화전사만 삼백에 달한다.

그야말로 복마전이나 마찬가지.

이런 장소에 단신으로 뛰어들었으니 대장로에게 나는 불꽃에 한 몸 던지는 불나방처럼 보이겠지.

“인간, 자네의 이름은?”

“헤논 로이드 자작.”

“!!!”

내 이름을 들은 리처드 대장로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인간족의 수장이 직접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나 보다.

“인간은 늘 거짓말을 일삼곤 하지.”

“아무렴 너희만 할까.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된 엘프족이여.”

“감히 우리 종족을 모욕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아무튼 나는 헤논 로이드 자작이 맞다. 너희가 잡아야 할 인간족의 우두머리지.”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천마검을 뽑아 마나를 불어넣었다.

용혈+녹색마나+푸른마나.

삼색 마나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천마검으로 모여들었고 이내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검기로 현현했다.

마나소드는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

비로소 엘프들은 낯선 침입자가 처치대상 일순위에 올려놓은 헤논 로이드임을 제대로 확인했다.

엘프족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수장인 리처드 대장로를 쳐다보았다.

그의 결정을 바라는 것이다.

“진짜 헤논 로이드 자작인가?”

“그렇다.”

“여긴 무슨 일로 왔지?”

“적의 본거지를 공격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너는 겨우 혼자다. 단신으로 우리를 감당하겠다 말하는 건가?”

“물론이다.”

중앙광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장작 타는 소리만 침묵을 깨트렸다.

제단 위에서 우묵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리처드 대장로가 배를 붙잡고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핫! 크하하하!!!”

한참을 웃어젖히던 대장로는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고 언제 그랬냐는 듯 광기 어린 표정으로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위대한 엘프군 상대로 몇 번 승리를 거두었길래 뭔가 있는 놈인 줄 알았건만. 인제 보니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한 쓰레기였군.”

“글쎄, 쓰레기는 내가 아니라 같은 종족원을 죽음으로 내몰며 인간과의 전쟁을 종용하는 네가 아닐까?”

리처드 대장로의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까발려서 명치를 후벼 팠다.

하지만 내가 말해봐야 이종족이 홧김에 내뱉는 아무말 대잔치쯤으로 치부하겠지.

이쯤 해서 내 쪽에서도 상대를 뒤흔들만한 패를 까기로 했다.

눈짓해서 사샤에게 신호를 보냈다.

풀숲에 몸을 숨긴 채 이때만을 기다리던 그녀가 냉큼 나와서 오랜만에 엘프족 앞에 섰다.

“여러부운!!!”

뱃심으로 내지른 그녀의 목소리가 중앙광장 구석까지 골고루 퍼졌다.

나는 몰라도 사샤는 모를 수가 없지.

엘프들은 신비로운 은빛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는 사샤를 보고 깜짝 놀라서 웅성거렸다.

“주술사님 맞지?”

“사샤님이 어째서 여기에 계시지?”

“분명 대장로님이 쫓아내셨는데.”

“어려서 그런가. 낄 자리와 빠질 자리를 구분하지 못하는군.”

세례자를 포함한 친 대장로 엘프들은 그녀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반면에 세례를 받지 않은 일반 엘프들은 그녀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어째서 사샤님은 퇴출되어야만 했을까?”

“맞아. 사샤님은 주술사야. 종족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지금이라도 돌아와 주셨으니 다행이야.”

사샤의 등장만으로 엘프 부족이 두 편으로 나뉜다.

이래서 리처드 대장로는 사샤를 가장 경계했고 세상 물정 모르던 소녀를 리앙의 노예시장에 팔아버리는 비정한 결단까지 내렸겠지.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나는 그런 사샤를 데리고 다시 엘프족 앞에 세웠고 대장로가 숨기고 싶어하는 추악한 진실을 일깨워주려 시도했다.

“여러분! 세례식이라는 허명에 속지 마세요. 저건 세례식 따위가 아니에요. 우리 엘프족을 파멸로 이끌기 위한 단초입니다.”

사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집단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철썩 같이 믿었던 대장로가 사실은 종족의 배신자였다고 들으면 내가 저기에 서 있는 엘프였어도 충격 먹었을 거다.

“세례식을 받은 자들은 잠깐 동안 힘이 세질지 모르지만 결국 인간족에 대한 무한한 적개심에 삼켜져서 전쟁만 일삼다 죽어갈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세뇌당하는 거예요!!”

여기서 더 가버리면 상황을 수습하기 힘들겠다 판단했는지 리처드 대장로가 고함을 버럭 지르며 맞받아쳤다.

“쫓겨났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훼방을 놓느냐!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용서할 수가 없구나. 당장 인간 놈과 사샤를 잡아라!”

강화전사들이 칼을 뽑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세례를 해댔는지 그 숫자만 해도 삼백이다.

마나소드 삼백 자루가 일제히 치솟자 아무리 나라도 등골이 서늘했다.

만약 오늘 집단 세례식을 받은 엘프족 전원이 인간 영지를 향해 진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산하 가문의 영지를 포함한 로이드 후작령의 팔할 이상이 폐허 또는 황무지로 변했을 것이다.

쇠약해진 가문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아 몰락하고 마침 옆에서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던 힐튼 백작가에게 저절로 흡수 합병되었을 터.

상상만 해도 오싹한 미래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 리처드 대장로의 음모를 정면으로 깨부수고 세례식을 막아야만 한다.

“군대도 안 거느리고 여기까지 온 행동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똑똑히 알려주마!”

기세 좋게 달려드는 엘프 검사의 일격을 가볍게 피하고 허리춤을 횡으로 그었다.

허공에 붉은 선혈이 튀었다.

몸이 반으로 잘려버린 엘프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원래는 일전에 만났던 엘프 추격조처럼 목숨줄을 붙인 채 제압한 후, 사샤에게 검은 실선을 제거하도록 조치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나라도 저만한 숫자는 버거웠다.

어차피 세례자라서 죽은 목숨이니 깔끔한 안식을 선물해주기로 했다.

[우드 컨트롤]

[바인드]

[스톤 컨트로]

[스톤 실드]

[스톤 랜스]

단신으로 쓸 수 있는 드루이드 스킬을 총동원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나무줄기에 여러 명이 뒤엉켜 넘어졌고 그런 전사들에게 날카로운 돌 송곳이 날아들었다.

스톤 랜스에 꼬챙이가 되거나 바인드에 목이 졸려 질식한 전사들이 비명을 내지른다.

“크헉!!”

“이게 뭐야?”

“갑자기 웬 나무랑 돌덩이가···”

강화전사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보호했던 숲이 역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생소한 상황에 좀처럼 대처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리처드 대장로는 사샤를 보았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나를 가리켰다.

“드루이드! 과연 그랬던 건가!”

역시 대장로는 내 정체를 알고 있다.

비록 최초의 드루이드 멀린의 등장 시기가 일천 년 전이었어도 엘프족의 수명은 워낙 길고 폐쇄적인 종족이었기 때문에 나이 많은 엘프들은 드루이드에 대해 알 가능성이 높았다.

“놈부터 죽여라!”

리처드 대장로의 우선순위가 사샤에서 나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강화전사들은 대장로의 명을 수행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있는 엘프들은 오늘 드루이드를 처음 만났고 예상외로 뛰어난 내 무력에 적잖이 당황했기 때문이다.

서걱!! 서걱!!

“끄아아악!!”

원거리에서 나무와 돌이 쏟아지는데 이를 뚫고 간신히 접근하면 정교한 천마검법으로 도륙을 낸다.

접근전과 원거리전이 모두 강하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이만한 고역이 없었다.

그래도 숫자에는 장사가 없는지 가끔 구멍을 뚫고 사각을 노리는 적이 생겼다.

[윈드 컨트롤]

[순보 발동]

그럴 때는 S급 도주기를 이용해 하늘로 날아올라 빈틈을 완벽하게 메워버렸다.

이쯤 되자 적들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멍청한 놈들! 화살을 쏴! 제아무리 날뛰어도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에는 방도 없다.”

드디어 궁수들이 진형을 갖추고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쐐액! 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뒤덮은 화살비가 내 쪽으로 쏟아졌다.

“됐다!”

“되긴 뭐가 돼.”

[우드 콜렘 소환]

[스톤 골렘 소환]

거대한 석상 골렘과 나무 골렘이 마치 보디가드처럼 삼면으로 나를 감싸고 화살비를 막아냈다.

그들의 면적 넓은 몸통과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진 몸은 일반적인 화살을 막기엔 최적이었다.

오히려 역으로 골렘들이 손등으로 엘프 전사들을 튕기거나 내가 전사들 사이로 뛰어들어 에메랄드 빛 검기를 종횡무진 휘둘렀다.

“이게 한 인간이 내는 힘이라고?”

“인간이 아닌 듯해.”

“마치 숲의 주인 같아.”

공포가 깃들고 사기가 떨어진 적들은 이제 나를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여기기 시작한다.

나로서는 좋은 상황이고 리처드 대장로에게는 위급한 상황.

그러자 결국 리처드 대장로가 나를 포기하고 사샤를 가리켰다.

“사샤를 잡아라! 사샤를 확보해!”

장로의 명을 받은 친위대가 일제히 사샤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건 좀 곤란하다.

나한테 집중되는 공격은 얼마든지 흘릴 수 있지만 동료를 지키는 일은 난이도가 다르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샤에게도 호위무사가 있었다는 점일까.

검날이 반달처럼 휜 쿠크리를 들고 있던 아멜리아가 짓쳐들어오는 친위대 한 명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부족의 주술사를 해치려고 해? 종족의 자긍심이고 뭐고 모조리 잊었구나! 부끄러운 줄 알아라!”

“배신자와 말 섞을 이유는 없다. 얌전히 사샤님을 내놓거라.”

세례를 받은 친위대 전사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컸지만 세례조차 받지 않은 아멜리아는 기술만으로 힘을 감당하며 영리하게 싸움을 이끌어나갔다.

그런 그녀와 사샤에게 버프 스킬을 걸어준다.

[윈드 컨트롤]

[헤이스트]

발목이 바람에 휘감긴다.

숫적인 열세에 버거워하던 아멜리아는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며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가 증가하자 깜짝 놀랐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그녀는 버프를 걸어준 사람이 나라는 걸 확인했다.

감사 인사를 나누기엔 뻘쭘한 사이라서인지 그녀는 눈만 한 번 깜빡이고 재차 싸움에 집중했다.

나 또한 사샤한테 달려드는 전사를 떨쳐내느라 정신없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쓰러진 강화전사들은 무려 쉰 명이 넘어갔다.

삼백 명 중에 쉰 명을 거진 단독으로 쓰러트린 것이다.

“괴물이 따로 없군.”

오죽하면 적장인 리처드 대장로가 나를 괴물이라 지칭했을까.

그러나 슬슬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패시브 스킬]

[끈질긴 생명력]

[자정 작용]

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체력이 실시간으로 회복되고 있었고 마나도 꽤 여유가 남았다.

문제는 아멜리아 쪽이었다.

아멜리아는 탈진한 지 오래였는데 숨을 헐떡거리며 정신력으로 사샤를 지켜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사샤가 강화전사들에게 잡힐 것 같다.

승리를 낙관한 리처드 대장로가 다시금 여유를 되찾았다.

“제법 놀라웠다만 여기까지다. 주술사를 잡고 네놈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요리해주마.”

의기양양한 리처드 대장로에게 미소로 화답해줬다.

대장로는 절체절명에 순간에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심기가 불편한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즐겁나? 곧 네가 데려온 주술사와 배신자는 죽고 너 또한 산채로 불에 타죽을 것이다.”

“아니, 그럴 일은 없다. 이미 시간을 충분히 벌었거든.”

이 정도면 시온이 웜홀 생성기를 돌리고도 남을 시간이다.

내 계산은 정확했다.

언덕 너머 수풀이 크게 흔들리면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으니 말이다.

“와아아아아!!!!”

대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봐도 기천에 해당하는 수였다.

아마 웜홀을 통해 추가로 넘어오는 중이겠지.

선두에는 라칸과 에이든이 서서 나에게 경례를 취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주군!”

“자작님, 여기서부터는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시온과 캠벨, 코코도 곧이어 나타났다.

임무를 성공해서인지 한결 밝은 표정이었다.

반면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대군을 마주한 리처드 대장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감히! 나를 속여?”

“딱히 속인 적은 없었다만.”

“저 인간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명을 받은 친위대가 인간의 군대를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인간의 군대는 이제 막 넘어와서 최상의 컨디션이었고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달려오는 적을 본 푸른매 용병단과 리앙 수호군은 얼씨구나 싶어서 언덕에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내려왔다.

위쪽에는 인간족.

아래쪽에는 엘프족.

격한 충돌이 일어났고 피와 살이 튀었다.

처음에는 세례식을 받은 엘프 전사들이 맹렬하게 밀어붙이는 듯했다.

아무리 반푼이라고 해도 강화전사들은 익스퍼트였고 이들이 내뿜는 마나소드는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익스퍼트는 푸른매 용병단과 리앙 수호군 쪽에도 있었다.

라칸과 에이든을 위시한 익스퍼트들이 상대 익스퍼트들을 전담했고, 시온과 캠벨도 마나소드를 사정없이 뿜으며 강화전사 위주로 처리했다.

나 또한 드루이드 스킬과 천마검을 번갈아 쓰며 강화전사 처리에 앞장섰다.

그러자 여유를 찾은 나머지 인간 군대가 상대 엘프군을 쓰나미처럼 휩쓸었다.

“와아아아아!!!”

본거지에 있던 엘프군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반면에 웜홀에서 빠져나온 인간군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일천이 이천이 되고 이천이 삼천이 되고, 이내 육천 군대가 엘프의 안식처에 바글댔다.

“여러분! 아이와 노인, 여인들은 저를 따라와 주세요! 여기 있으면 위험합니다!”

강화전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사샤는 전쟁에 휘말린 엘프족 민간인들을 적극적으로 인도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난리통에 겁에 질렸던 민간인들은 주술사를 발견하고는 양치기를 발견한 양처럼 우르르 그녀를 따랐다.

가끔 날아오는 눈먼 화살은 아멜리아가 검을 휘둘러 쳐냈다.

샤사의 활약은 지대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두 종족 간의 격렬한 전투에 휘말린 엘프가 상당수 죽었을 터.

이들의 목숨을 살린 건 다름 아닌 사샤의 기지였다.

민간인이 빠져나간 전장에서 인간군은 더욱 세례자들을 몰아붙였다.

불안정한 마나소드를 휘두르던 세례자들은 결국 못 버티고 하나둘씩 몸을 눕혔다.

어느새 하늘 너머로 태양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붉은 여명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동부 대산림 깊은 심처에서 밤새 진행된 처절한 사투는 결국 인간 측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지독하네.”

캠벨의 말이다.

세례자들은 삼백 명이 삼십 명으로 줄어들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나머지 포로도 죽기 살기로 싸우려는 녀석들을 전투 말미에 여유가 생겨서 바인드 스킬로 생포했다.

생존자를 남기는 건 중요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이종족의 보금자리를 짓밟은 침입자다.

사샤를 통해 강화전사들을 잠식하던 검은 실선을 제거해서 엘프족이 리처드 대장로에게 속았다는 걸 증명해야만 했다.

사샤에게 이 점을 설명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저씨 말대로 할게. 우리 부족 사람들에게 리처드 대장로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줄 거야.”

사샤의 굳은 표정을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이제 남은 건 적장 리처드 대장로.

그는 정신없던 새에 전세가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도망쳤다.

“시온, 대장로가 어디로 도망쳤는지 봤나?”

“방향은 파악했으나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알아.”

사샤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대장로라면 분명 거기로 갔을 거야.”

“거기가 어디지?”

“생명의 샘이 있는 곳. 성역.”

사실 이 모든 건 황금가지와 생명의 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리처드 대장로는 시작된 곳에서 끝맺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라칸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적이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니 차라리 잘 됐습니다. 이대로 몰아쳐서 끝장을 내시죠.”

“안 돼.”

사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칸 옆에 있던 에이든이 물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게냐? 엘프 소녀.”

“성역에는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거든.”

“허락? 무슨 허락을 말하는 거지?”

그의 물음에 사샤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오직 하이엘프의 피를 가진 자만 성역에 들어갈 수 있어. 리처드 대장로도 이를 알아서 생명의 샘으로 도망친 거야.”

“그런 미신 따위에 속지 않는다.”

“미신이 아니다. 정말로 들어가지 못해. 나도 어렸을 적 호기심에 가봤는데 숲의 힘이 나를 밀어냈다. 그곳은 정말로 사샤님과 대장로님만 들어갈 수 있어.”

옆에 있던 아멜리아가 사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숙련된 전사인 그녀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로 무언가 장치가 되어있긴 한가 보다.

“이것 참 난감하군.”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혔네.”

라칸과 캠벨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내가 앞으로 나섰다.

“걱정하지 마라.”

그러나 나는 상관없었다.

비록 반쪽이지만 내 몸에는 분명히 하이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이참에 리처드 대장로와 성역에서 제대로 마무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성역에는 나 혼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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