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92화 (92/200)

12장 잠식 : 직면한 망나니

성역에 나 혼자 들어간다고 하자 주변에서 전부 깜짝 놀랐다.

“부단장도 들었잖아? 하이엘프만 들어갈 수 있다는 곳을 어떻게 들어간다는 말이야?”

동료들에게 내 혈통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사샤가 입을 연다.

“아냐. 아저씨라면 숲도 허락할 거야.”

“방금 하이엘프만 된다고 했잖아?”

“아저씨는 좋은 냄새가 나. 그러니까 숲도 반겨줄 거야.”

역시 사샤는 주술사라서인지 나에게 흐르는 하이엘프의 유전자를 감지해낸 모양이었다.

사샤가 저렇게 말하자 다른 이들도 내가 자주 쓰는 특수한 힘과 관련이 있다고 믿은 듯 더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련님, 성역에 혼자 들어가는 행위는 명백히 위험합니다. 리처드 대장로라는 자가 무슨 짓을 꾸몄을지 모릅니다.”

“시온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일단은 성역까지 함께 이동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에이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서 다 함께 성역으로 움직였다.

성역 근처에 도착했다.

길 안내를 위해 앞장섰던 사샤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빙글 돌렸다.

“여기서부터가 성역이야.”

허리를 굽혀 나뭇가지를 주운 그녀가 땅바닥에 반듯한 선을 그었다.

호기심이 들었는지 라칸이 성큼 선 너머로 발을 디뎌보았다.

그러자···

쿵!!

“으음···”

허공에 존재하는 투명한 막이 라칸의 진입을 가로막았다.

오기가 생겼는지 몇 번이나 시도하던 그가 이번에는 칼을 뽑아 마나소드를 휘둘렀으나 소용 없었다.

무형의 막은 마나소드로는 잘리지 않았다.

“용병대장 아저씨는 숲이 허락하지 않았어.”

곧이어 시온과 캠벨, 에이든이 차례로 진입해보았지만 라칸처럼 차단막에 막혀 실패했다.

“적어도 오러블레이드 정도는 되어야 저 방어막을 뚫을 수 있나 봅니다.”

에이든이 합리적인 추론을 내놓았다.

시온을 위시한 다른 동료들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 차례가 돌아왔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선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쑤우욱

어떠한 저항도 없다.

숲은 내 몸에 흐르는 하이엘프의 피를 정확히 감지하고 통과시켜 주었다.

너무나도 쉽게 지나가자 이를 지켜보던 일행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악했다.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도대체 어떻게 지나간 거야?”

“과연 주군은 범상찮은 분이군요.”

그리고 사샤를 제외하고 성역을 넘어갈 수 있는 존재가 또 하나 있었다.

“뀨우!!”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던 아기용 코코가 숲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자유롭게 날아 내 어깨에 안착했다.

과연 드래곤이라는 건가.

비록 하이엘프는 아니더라도 드래곤의 격은 하이엘프에 준하거나 그 윗줄에 해당하기에 손쉽게 통과한 듯했다.

“그럼 다녀오지요. 여기에서 기다려주십시오.”

“도련님, 조심하십시오.”

“염려 말거라.”

시온을 안심시키고 성역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사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하이엘프라 숲의 저항은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나를 지그시 쳐다본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까치발을 들어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쪽!

“꼭 이기고 살아서 돌아와.”

그녀만의 응원 방식인가.

하얀 건치와 함께 엄지 손가락을 내보였다.

“걱정하지 마라. 금방 끝내고 돌아올 테니.”

눈망울을 글썽이는 사샤의 은빛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돌려 성역으로 향했다.

성역은 산꼭대기에 있었다.

헤이스트를 써서 발바닥이 반쯤 지면에서 떨어진 채로 부드럽게 올라갔다.

“코코야, 호리병으로 들어와라.”

“뀨우?”

“혹시 모르니까 일단 들어와 있어.”

“뀨!”

대장로와의 전투가 급박해질 것을 대비하여 코코를 아공간 내로 불러들였다.

결국 산 정상에 도착했다.

성역의 바닥은 이끼가 내려앉은 돌바닥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돌바닥 위로는 석조 구조물이 있었다.

반원형으로 휘어진 덮개돌과 이를 지탱하는 여러 개의 돌기둥이 마치 석기시대 고인돌 같은 모양새를 갖추었다.

정중앙에는 은빛 연못이 찰랑이며 눈부신 빛을 발했는데, 아마도 저것이 이번 사태를 유발한 생명수인 듯했다.

리처드 대장로는 성역 앞에 꼿꼿이 서 있었다.

산 정상이라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내 머리카락과 그의 흰수염이 계속해서 펄럭였다.

나 혼자 왔음에도 리처드 대장로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물론이다. 드루이드 능력을 쓰지 않았더냐.”

짐작대로 대장로는 내가 드루이드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지긋이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짧게 읊조렸다.

“더러운 잡종 놈. 반은 인간, 반은 하이엘프의 피가 섞였구나.”

“하프엘프만이 드루이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군.”

“물론이지.”

“어떻게 내 어머니가 하이엘프인지 알았지?”

리처드 대장로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첫번째는 내가 하프엘프라는 것.

두번째는 어머니가 하이엘프라는 것.

그랬기에 그는 성역에서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만약 헤논의 친모가 하이엘프가 아닌 평범한 엘프였다면 내가 드루이드였어도 성역에는 입장하지 못했겠지.

무엇이 그를 이렇게 확신하게 만들었는지 의문이었다.

이어지는 그의 대답으로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당연한 이치지. 네 나이를 보면 스무살 정도로 보이는데, 그즈음에 숲에서 쫓겨난 엘프는 딱 한 명이니까.”

“설마···”

“그래. 헤나는 내가 내쫓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헤논의 친모였던 헤나와의 만남은 상수리나무에서의 짧은 순간이 유일했기에 정보가 많지 않았다.

특히 로이드 후작과 결혼하고 헤논을 출산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헤나는 엘프의 숲에서 대장로 리처드에게 추방당한 게 정황상 확실해 보였다.

“하여간 주술사들은 하나같이 귀찮구나. 한 년은 내쫓았더니 새끼를 까서 복수하러 보내지를 않나. 다른 한 년은 노예시장에 팔았더니 아득바득 돌아와서 세례식을 훼방 놓질 않나.”

“그만큼 주변에서 너를 막고자 노력하는 거겠지. 어쨌든 너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여러모로 늘어만 가는구나.”

이제는 싸울 차례.

천마검을 뽑아 리처드 대장로를 겨누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상대를 가늠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거 없었다.

대장로는 노쇠했고 배가 불뚝 나와서 전투와는 동떨어진 체형이었다.

“리처드, 세례식 때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을 텐데? 무엇을 믿고 뻗대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크크큭, 잡종 놈의 근시안적 사고로 날 이해하려 들지 마라.”

품속에서 황금가지를 꺼낸 대장로가 생명수가 담긴 연못으로 가더니 난데없이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한참을 꿀덕대던 그는 1L가량을 마신 뒤에야 만족한 듯이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일어났다.

“붕어가 따로 없군. 믿고 있던 패가 생명수라면 조금 실망인데.”

“흐흐흐···마음껏 얕보거라. 생명의 샘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절대적인 강함이 깃들어 있으니.”

“그 강함을 나도 한 번 견식하고 싶군.”

[윈드컨트롤]

[헤이스트]

바람의 힘을 받으며 단숨에 쇄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싸움을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에 싸웠던 상대들을 되새겨보자.

황혼교 칠대사도 질투 니플헤임.

중급 악마 단탈레온.

황혼교 칠대사도 탐욕 마일로.

이 셋과 비교해봤을 때 엘프 대장로는 별다른 무력도 없고 이름값도 없다.

생명의 샘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 봐야 내 천마검으로 목을 날려버리면 끝이었다.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예리한 돌 송곳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런.”

급하게 몸을 뒤틀어서 검날로 스톤 랜스를 튕겨냈다.

그 충격으로 옆으로 튕겨져나가 바닥을 몇 바퀴 구르다가 벌떡 일어났다.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온다.

이런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리처드 대장로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띄웠다.

“크하하하!! 너만 드루이드인 줄 아느냐? 신비한 나뭇가지만 있다면 나 또한 드루이드다!”

“드루이드는 하프엘프만 될 수 있다.”

“원래라면 그렇지. 그러나 나는 생명의 샘을 마셨으니 충분히 가능하다.”

생명의 샘에 그런 기능도 있었나.

자연과의 교감력을 대폭 늘려주는 효과가 있나 보다.

아무튼 매번 드루이드 스킬을 사용하던 내가 똑같은 드루이드 스킬에 공격받다니, 생소하고도 신기한 경험이다.

그래도 달라질 건 없다.

녀석을 처치하면 그만이다.

“재롱 잘 봤다.”

“계속 그렇게 방심하거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바인드!!”

땅에서 올라온 나무줄기가 나를 속박하려 들었다.

바인드는 드루이드로 전직하고 나서 가장 먼저 생기는 스킬. 여기에 당해주기엔 드루이드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심지어 바인드 레벨도 낮아서 단단한 나무뿌리도 아니고 내구성이 부족한 나무줄기였다.

점프해서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달려들었다.

“스톤 실드!!”

돌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가 솟아올라 진행로를 막아섰다.

어림도 없는 짓이다.

넓적한 비석에 에메랄드 빛 실선이 그어지더니 이내 좌우로 쩍 갈라지면서 일도양단 되었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아까 나를 노렸던 돌 송곳이 재차 급소를 노리고 들어왔지만 천마검을 휘둘러 가볍게 부숴버렸다.

“이익!!”

상황이 뜻대로 안 풀리자 얼굴이 벌게진 리처드가 새로운 스킬을 선보였다.

“우드 골렘 소환!!”

“귀엽구나.”

내가 중급 드루이드로 승급하고 나서 맨 처음 소환한 골렘이 딱 저랬다.

맥아리도 없고 몸도 영 부실해 보인다.

바로 팔다리를 잘라 무너트리고 리처드 대장로 앞에 도달했다.

“네놈···”

“잘 가라.”

푹!

심장에 칼을 꽂아넣었다.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마지막 호흡으로 그가 중얼거린다.

“아아···어째서···내가 엘프족을···”

고개를 툭 떨군 리처드.

엘프 대장로 리처드의 최후였다.

놈의 가슴에서 천마검을 뽑았다.

피를 털어내서 납검한 후 뒤돌아섰다.

예상대로 손쉬운 상대였다.

“찜찜하군.”

그의 유언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했다는 듯한 태도.

하지만 원래 독재자의 마지막은 다들 비슷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보다는 전쟁이 길었다.

어서 후작성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뻐근한 어깨를 풀어주며 하산하려는 찰나,

-애송아! 조심해라!

천마가 여느 때보다 훨씬 다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직감이 움직이는 대로 바닥을 구르려고 했으나 잘못된 판단임을 깨달았다.

공격은 바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콰콰콰쾅!!!

[윈드컨트롤]

[순보]

단숨에 공기를 박차고 하늘로 떴다.

1초라도 판단이 늦었으면 즉사였다.

하늘에서 아래를 바라봤더니 지면이 온통 뒤집어지고 문어 다리처럼 굵은 나무뿌리가 꿈틀대며 도사리고 있었다.

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곳곳에 달려서 스치기만 했어도 중상을 입을 뻔했다.

-아직 안 끝났다.

하늘이라고 안전하지 않다.

지반에서 비롯된 나무뿌리는 잭과 콩나물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들었다.

표적은 명확히 나였다.

“제기랄!!”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공중에서 상하좌우로 움직였다. 촉수처럼 조여오는 나무뿌리가 집요하게 나를 노렸다.

가끔씩 사각에서 공격해오는 뿌리는 천마검으로 모조리 잘라냈다. 나무뿌리가 어찌나 질긴지 마나소드를 활성화했는데도 절단하기 어려웠다. 인제 보니 나무뿌리에도 미약한 마나가 실려있었다.

“대체 뭐지?”

나조차도 이런 무지막지한 수준의 바인드 스킬을 구사할 수 없다. 한참 나무뿌리를 피하던 나는 공세가 뜸해진 틈을 타서 바닥에 착지했다.

생명의 샘에 쓰러졌던 리처드 대장로는 어느새 다시 일어나 있었다. 심장에 구멍이 휑하니 난 노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괴기스러웠다.

“언데드?”

[흐흐흐···]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기이한 소리가 울린다.

천마검에 의해 뚫린 몸의 구멍이 나무뿌리로 조금씩 덮여지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누가 봐도 리처드 대장로와는 명백히 다른 존재였다.

“너는 누구냐?”

[대단해. 아주 대단해.]

질문을 했는데 혼잣말로 읊조린다.

[정말 신기하단 말이지. 그 레벨에 벌써 바람을 그렇게까지 자유자재로 이용하다니. 게다가 검을 상당한 수준까지 연마했더구나. 나도 그놈과 싸울 때 검을 다뤘다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친다.

왠지 저놈이 누군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이 순간,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존재가 또 하나 있었다.

-틀림없다. 말투가 딱 그놈이야.

천마가 공인했으니 분명하다.

내 짐작을 입 밖으로 꺼냈다.

“혹시 멀린님이십니까?”

[날 알고 있구나. 반갑다. 후손님.]

그랬다.

나와 직면한 존재는 리처드 대장로 따위가 아니었다.

진정한 정체는 일천 년 전 등장했던 최초의 전설적인 드루이드.

바로 멀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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